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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2024년 사순절 이십일차 묵상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1. 성경 (요15:18 ~ 2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8)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9)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0)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1)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2)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3)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4)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5)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6)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27)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 -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전투 무장을  시킨  다음에 인내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복음이 전파될 경우 세상이 왈칵 뒤집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한 교사들이 세상의 증오를 피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은 전투가  발생했을 경우 그들이 풋나기 신병들처럼 원수를 보기도 전에 겁을 집어 먹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결코 새롭거나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본을 통해서 그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데 그의 인격을 대표하는 우리는  세상의 총애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기노스케테)를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편을 택하지만  명령법으로 보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나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단어가 더 어렵다. 곧 그가 제자들 보다 앞선다는 말은 시간에 대해서나  직위에 대해서 다 적용될 수 있다. 전자의 견해, 곧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보다 먼저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곧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증오를 면할 수 없었으니 그의 사역자들 역시  동일한 운명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는 견해를 택한다. 이것은 1장 27절과  30절에 있는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내 앞에 계심이라"하는 말과  동일한 내용이다.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  - 그들이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은 그들이 거기서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행복과 영광이요 이것을 위해서 그들은 파멸에서 구출을 받았다.
  '택하다'에는 '구별한다'는 뜻이 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 세상의 일부였는데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그들이 멸망 받은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나타나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세상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되지 않은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제 17장에 가서 더  자세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는 여기서 교회와 세상을 대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롬12:8)는 바울의 권고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덧붙이는 말씀의 내용은 우리에게 올바르고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는 가운데 아무도 세상을 기쁘게 하려 하거나 그것의 타락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보는대로 세상의 일부인 악인들이 증오를 받을 뿐 아니라 저주를 받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 사실 세상은 그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식의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육적인 관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상적인  사람들은 죄를 진정으로 증오할 수 없으며 오직 그들 자신에게 얼마나 편리한가, 아니면  손해를 끼치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처리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세상이 자체  내에서 서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오직 세상이 신자들에게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제시하고자 하셨을 뿐이다. 이 한 귀절에서 재세례파에서는 자기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른다. 세상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은 뭐든지 혼란스러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르침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인 질서가 그대로 건전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 내가......한 말을 기억하라" ;  - 이것도 "너희들은......기억하고  있다"하는  식의 직설법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의미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명령법이 더 나은 것 같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증오를 사는 것은 그가 그의  제자들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종들의 상태가 그의  주인의 상태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과 동시에 그의 가르침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가르침이 인간들의 멸시를 받는 것을 보는 것보다 경건한 자들에게 더 큰 슬픔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끔찍한 것이요 제 아무리 건장한 마음이라도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아들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오만의 저항을 받으셨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가르침이 인간들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별로 놀랄 필요가 없다. 그는 이 가르침을 가리켜 그의 것이며  동시에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역과 관계된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스승이지만 그는 그가 처음 교사가 되어 가르치신 그의 가르침이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전파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21. 그러나 사람들이......하리니" ;  - 세상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그 복음 자체에 대하여 그렇게도 맹렬한 분노로 대적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유를 사람들이 맹목적인 무지에 이끌려 파멸의 길을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고의적으로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려 하는  사람은 없다. 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며 무지하기 때문에, 이 무지와 어리석음이 세상에 가득차서 그리스도께 대적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행동의 이유를 항상 명심하는 가운데 선한 양심의 증거에서 위로를  받아야겠다. 세상은 눈먼 가운데 멸망하고 말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빛을  허용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는 우둔한 마음에서 생기며 그만큼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겠다. 내가 자주 말한대로 불신앙은 맹목적(blind)이다. 이것은  불경건한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지식이  혼잡하고 당장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이어  충분하게 설명한 바 있다.

 

"22. 내가 와서......아니하였더면" ;  - 유대인들이 복음을 미워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그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이것 때문에 그들의 죄책이 가벼워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들은 마치 빛을 볼 수 밖에 없게 되자 눈을 감아 버린 사람들처럼 악의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그들이 당신의 아버지를 모르고 있다면 왜 그들의 무지를 치료하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아예 순응할 수 없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가능한지를 왜 시험해 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리스도에게  제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그가 선하고 신실한 교사의  직무를 수행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성공하지 못한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악으로 인하여 올바른 마음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들에게 제공될 때 그것을 배척하거나 또  그것이  알려지게 될 때 거기에 자발적으로 반기를 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려 주고자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이 이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의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격려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불경건한 자들의 악의 앞에서 굴복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곧 우리에게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미 전투  도중에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죄가 없었으려니와" ;  -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들에게 불신앙 이외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을 비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어거스틴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곧  그는, 신앙은 모든 죄악을 용서하고 도말하는 만큼 정죄받는 유일한 죄는 불신앙이다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불신앙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의 정죄에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을 뿐 아니라 모든 악의 샘과 원인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말은 옳다. 그러나 이 모든 추리는 본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타나 있는  '죄'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결코  핑계로  내세울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악하게 배척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혐의 받아 오던 한가지 범죄를 용서할  경우 그를 가리켜 정직하고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가 한가지 죄악에만 국한되는 것은 그것 때문에  복음을  멸시하고 증오하는 유대인들의 무지에 대한 핑계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불신앙은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또 제기된다. 어떤 광신자들은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의 오심 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시기 전까지 신앙이 없었으며 의심 가운데  지내고 있었다는 잘못된 추리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양심만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데 충분하다는 성경 귀절이 수 없이 많은데도 이것을 무시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바울은  "사망이 모세 때까지 세상에서 왕노릇 하였다"(롬5:14)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롬2:12)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 분명히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제공된 생명을 알면서 고의적으로 배척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책을 더 이상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허용하는 핑계 때문에 그들의 죄가 완전히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범죄의 심각성을 완화할 뿐이다. 이것은  "주인이 뜻을 알면서 그것을 무시하는 자는 더 심한 매를 맞을 것이다"라는 말씀 그대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어떤 사람에게 용서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완고하게 배척한 그의 원수들을 정죄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사면이나 자비의 여지가 추호도 없다는 점을 뚜렷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는 그의 오심 자체만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그들의 죄책이 그의  육체적 임재에만 관련된 것이라면 그렇게 중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멸시는 핑계의 여지를 전혀 허락치 않았다.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  - 이 유명한 귀절에서 그는 누구든지 복음의 가르침을 증오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드러 내는 셈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에 대해서는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한 예배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속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자들인 만큼 쓸데 없는  짓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가르침의 빛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위선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한다"(요2:20)는 귀절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하는 귀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24. 내가...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  - 여기서 말하는 '일'속에는 그가 그의 거룩한 영광에 대해서 보여 주신 모든 실예가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곧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많은 기적, 성령의 능력, 그리고 다른 실예를  통해서 보여주셨으며 그 결과, 제 1장에서 취급했듯이, 독생자의 위엄이 그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간혹 그는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 더 많고 큰 기적을 베풀지 않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다들 아는 그대로이다. 곧  그리스도의 기적이 더 뛰어난 것은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봉사자가 아니라 그들의 주인(Author)이였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을 베푸시면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권위 및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일'의 범주에는 그의 신성을 드러내 보여 준 하늘의 영적인 능력에 대한 모든 증거가 포함된다.


"지금은......미워하였도다" ;  - 이것은 그의 원수들이 명백하게 신령한 것으로  드러난 그의 능력을 멸시하고 있는 만큼 그들이 여기서 발뺌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서 그의 신성을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유한한 인간을 상대하고 있었다는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귀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곰곰히 살피는 가운데 거기서 그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깨달아야 하며 그것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사를 모호하게 하거나 그것을 천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배은망덕한 자들이요 악의적인 자들이다.

 

"25. 그러나 이는......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 자연에 어긋나는 것은  믿어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보다 더 이치에 어긋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찌나 큰 악의에 젖어 있던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을 미워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시편 35장19절의 인용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똑같은 일이  다윗에게 일찌기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 민족의 오만한 악의를 질책하는 의미에서 인용되고 있다. 곧 이 악의는 그들의 조상 대대로 끊임없이 계속 전해 내려오고 있는 죄악이라는 뜻에서 이것이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너희들은  아무 까닭없이 다윗을 증오했던 조상들에 비해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하고  말슴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시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의 전체 가르침은 율법에 대한 일종의 보충이요 모세의 사역은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율법'이라는 말은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명칭을 들어서 그들을 보다 더 통렬하게 찌르는 뜻에서 사용된  말이다.  이것은 마치, "그들에게는 상속을 통해 전수되어 오는 율법이 있어서 그들의  행동이  거기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하는 말씀과 같다.

 

"26. 보혜사......오실 때에" ; -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아니 교회 자체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복음을 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당부하시고 나서 성령의 증거와 그런 사람들의 불경건한 광포를 대조시키고 있다. 그들의 양심이 이러한 사실의 지지를 받을  경우  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세상이 너희들에게 반기를 들면서 법석을 피울 것이다. 너희들의 가르침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저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들에게 허락되어 그의 증거를  통해서 너희들을 확고하게 할 경우에는 그 어떠한 공격도 너희들의 신앙의 확고성을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하는 식으로 새겨 들을 수도 있다. 사실 온 세상이 사방에서  미쳐 날뛸 때 우리에게 한가지 든든한 보호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이 진리가 인간의 판단에 굴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하루에도 수백번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숱한 요란 속에서 우리 자신 어디에 서야 하는가를  유위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것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하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고전2:12). 이  한가지 증거만 가지면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흐리게 하거나 파괴하려고 내세우는 장애물을 무엇이든지 분산시키고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누구든지 이 영을 부여 받은  사람은 결코 세상의 증오나 멸시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온 세상을 상대로 승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그럴듯한 의견에 매달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마치 자주 하나님의 성소를 떠나듯이 이리저리  방황한다면 비참하게 계속 배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신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하늘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내적이요 은밀한  증거(interius et arcanum Spiritus testimonium)와 항상 연관지어 생각되어져야 한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 유지 시키고 정착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의 어느  부분이라도 다른 곳에서 구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명칭을 사용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북돋워 주시는 가운데 그것이 시험에 굴복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를 가리켜 '진리의 영'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응용될 수 있는 것이다. 곧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 인간은 온 사방으로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지만, 그가 말씀하는  곳에서는 그는 인간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과 기만의 공포를 제거해 주신다.

 

"27. 너희도......증거하느니라" ;  - 그리스도의 의도는 성령의 증거란 사도들만 개별적으로 소유하거나 그들만 독자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그의 입노릇을 하면서 이것을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들음을 통해서 오지만 그 확실성은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에 의존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의 강퍅함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믿음이란 전도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외적인 전도를 무시하고 은밀한  계시와 (엔도우시아스무스;은혜의  선물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광신자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양자를  하나로 묶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지성을 깨우쳐 주고 리의  마음에 인을 치시기 전에는 믿음을 가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구름 저편에서  오는 환상이나 말씀을 찾아 헤멜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어서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는 말씀이 (신30:14,롬10:8) 우리의 온 의식을 하나로 묶어 사로잡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입에서 네 후손의......떠나지 니하리라"(사59:21)고 이사야 선지가 잘 표현한 그대로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라는 귀절이 덧붙여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들이 전파하는 내용에 대한 목격자로서의 사도들을 더욱 신임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이것은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하고 말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것을 다 구비시켜 주셔서 복음에 대한 완전한 확신으로 부족 사항이 전혀 없도록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