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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고후1:14)

1. 성경 (1:12 ~ 24)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2)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3)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14)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5)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6)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7)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8)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19)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0)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1)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2)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3)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24)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2.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 그가 뜻하는 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는 덜 성실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린도에서 더 오래 머물렀던 것은 다른 이유들가운데 자신의 신의를 보다 충분하고 명백하게 그들에게 보여주려는 뜻에서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신들이 그가 말한 모든 것에 대한 최선의 증인들이었던 만큼 멀리서 증인을 부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뜻에서 일부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 


"하나님의 거록함과 진실함으로 ~~" ; 이 귀절은 로마서 3장 23절의 ‘하나님의 영광’과 요한복음 12장 43절의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인간의 영광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탄을 추구하며, 그들에게는 좋은 판단을 받는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성이 인간들이 목격한 그대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신실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내가 ‘순결' 또는 ‘성결'로 번역하는 '에일리크리네이아' 에는 신실성과 동일한 의미가 있다.  곧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공개적이고 솔직한 행동 방식이다. 이 두 용어는 모두 교활한 속임수 및 음흉한 계략과 반대된다.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 . 여기서 바울은 자기에 대해서 제기될 협의들을 예상하고 있다. 곧 그는 자신에게 어떤 바람직한 특성들이 부족하다는 점을 당장에 인정하면서, 아니 공공연하게 밝히면서 그는 그보다 훨씬 훌륭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부여되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물론 내게 육신적인 지혜가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허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제멋대로 나의 사도직에 대해 조소를 퍼붓고 있다. 그러나 육적인 지혜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내게는 정말 칭찬을 받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샘이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가 뜻하는 것은 육신적인 지혜라는 표현으로서 우리에게 지혜에 대한 평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모든 것이다. 더 상세한 설명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 2 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그가 육적인 지혜와 대조시키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능력을 능가하는 모든 것과 성령의 은사들, 곧 그것들이 있기에 연약한 우리의 육신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것들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  그는 왜 자신의 안녕이 모두에게 일반적인 관심거리가 되어야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들 모두를 상대로 단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처신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충분히 그들의 애정을 받아 마땅했으며, 그와 같은 주의 탁월한 종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오래도록 지켜지기를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정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 가운데서의 나의 행동온 모든 선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나에게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주게 할 정도였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바울은 그가 상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얘기 삼아 자신의 정직성을 변호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인준을 받는 것으로 충분치 않으며, 바울 자신이 타락하고 맹목적인 열성에 이끌린 몇 사람들이 편협되고 악의적인 판단의 희생이었던 만큼 자신의 양심을 중거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불러서 자신의 주장의 전실성을 그의 법정에 호소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자신의 정직성에 대한 이런 자랑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10 : 17) 는 자신의 말은 어떻게 일치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먼저 바울은 자기에게 자신의 무엇이 따로 있거나,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식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는 그의 구원을 주장하는, 또는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정직성에 의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자랑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들이요,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이 모든 것들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영화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오직 거짓되고 사악한 방법으로만 하나님을 두고 자랑하지만,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허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제멋대로 나의 사도직에 대해 조소를 퍼붓고 있다.  그러나 육적인 지혜가 아무 의
미가 없는 것이라면 내게는 정말 칭찬을 받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셈이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가 뜻하는 것은 육신적인 지혜라는 표현으로서 우리에게 지혜에 대한 평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모든 것이다. 더 상세한 설명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 2 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그가 육적인 지혜와 대조시키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능력을 능가하는 모든 것과 성령의 온사들, 곧 그것들이 있기에 연약한 우리의 육신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것들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  그는 왜 자신의 안녕이 모두에게 일반적인 관심거리가 되어야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 .그것은그가 그들 모두를상대로 단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처신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충분히 그들의 애정을 받아 마땅했으며, 그와 갈은 주의 탁월한 종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오태도록. 지켜지기를 '. 영터하지 않는다면 ·- :그것은 매정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 '너희들 가운데서위 나의 행동온 모든 `선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나에게 그들의 - 촌경과/사랑을 주계 할 정도였다'타는 말이나 다름없다. 바울은그가 상대해서 클율· 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얘기 삼아 자신의정칙성을변호하고 있다. 그러나인간들의 인준을 받는 것으로 충분차 많으며, 바울 자신이 타락하고맹목적인 열성에 이끌린 몇 사람들이 편협되고 악의적인판단의 회생이었던만큼 자신의 향십울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더L 이것은 하나님을 블러사 자신의 주장의 전실성을 그의 법정에 호소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자신의 정칙성에 대한이런 자랑과"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타,,(고후10 : 17)는 자신의 말온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 것인가? 꾸리고 드갑히 하나님 앞에시 자랑할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깊처 바울은 자기에게 자신의 무엇이 따로 있거나,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식으로자신율 하나님과 대조하고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는 그의 구원을 주장하는' .J 또는 신의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정칙성에 의촌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가자랑하고 있는 것온 하나님의 선물들이l-A., 따라시그는 하나님을 이 모든 것들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영화롭게 하고 있는것이다 • . 불경건한사람들은오직 거짓되고 사악한 방법으로만 하나님 을 두고 자랑하지 만, j 모든경 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든 축복올 두고 올바르게 자랑하는 데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우리는 아무것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말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접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보장은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촌하고 있다는 이 기본 방침 을 확고하게 고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지 막으로 우리 논 하나님을 모든 선한 것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알고 그의 안에서 푹 쉬지 않으면 안된
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유익한 것에 있어서 갑사한 마음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13. 오직~~~~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  여기서 그는 아무런 알맹이도 없으면서 계속 자화자찬하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자신에 대한 그들의 중상모략을 공격하면서 아무도 자신이 팔요 이상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려는 생각을 못하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느 것도 자랑하지 않고 있으며, · 고린도인들이 여기에 대한 증인이라는 접을 이야기하고 있다.. 헬라어에 있어서 '아나기노-스케인'은 ‘읽다'논 뜻도 있고 ‘인식하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t1r,r,""'w"KElJ.1(에피기노-스케인)에는 ‘발견하다'논 뜻도 있고, 라탄어의 agnoscere, 곧 ‘자식임을 인지(認知)하다’는 법적 용어 에 서 처 럼 ‘인정 한다' 논 뜻도 있 다. ' 따라서 i1r,r,짜l<TKEllJ( 에 피 기 노-스케 인)온 avar따bflKElJJ( 아나기 노-스케 인)보다 더 강하다. 우리 는 어 떤 것 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곧 마음 ’ 속으로 1 그것을 확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 않을 수도 ' 있다. 곧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공공연하계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재 바울의 말을 겁토해 보도록 하자• 혹자는 이 대목을 ‘우리는 너희들이 읽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다’라는 식으로 번여하지만, 이것온 아주 부적당한 것이다. 암브로스는 이것을 ‘너희들은 읽을 분 아니라 인정하기까지 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바뀌서 읽지만, 이것도 볼가능한 해석이다. 내가 재시하는 해석이 간단하고 자연스럽지만, 그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접이 단 한 가지 있다 만그~온 단어상의 다른 의미 때문에 야기되는 혼란분이다; 간단히 말빼서나 바는바울의 의미를 · 고린도인들이 이미 그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발효 있ai '1;제르 중거할 수있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첫 단어 recognosc腐여fie"' 재협호르무엇t을 확산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으며,` 둘째 단어 agnos-포예열대일"뀜:게떠 :.!J로빈정한다는 의 미 가 있다•

 

"너희가 끌까지 알기틀 내가 바라는 것은" ;  고린도인들이 아칙 바울의 신의에 대해서 정당하고 공정한 견해를 품을 정도로 완전하게 건전한 판단을 아칙 되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품었던 사악하고 편협된 견해를 교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여기서의 바울의 의도는 자신이 장차 그들에 대해서 더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너희들은 나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으며, 내가 바타는 것은 내가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너희들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더욱더 인정하게 되는 것 이 다' 타고 그는 말하고 있 다. 여 기 서 그가 e1rtrt1JWUK£t1J(에 파 기 노-스케 인 )이라는 단어를 써서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더욱더 쉽게 드러난다. 이 귀철은 고린도인들이 다시 그들의 의식으로 되돌아올 때와 관련된다. 멘 처음에는 그들이 바울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인정했지만 후에 그들의 판단은 음흉한 주장 때문에 흐려졌으며, 이제 다시 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건전한 마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14. 너희가~~~~~우리 주 예수의 날에" ;  나는 이 날을 이 세상의 모든 순간적인 영광에 종지부를 찍을 최후의 날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바울의 의도는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영광이 사람들에게 그처 럼 인상을 주는 과장처럼 덧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날에 확고부동하게 서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그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태서 쟁취한 많은 승리에서 오는 개선을 축하할 것이요, 자신의 사역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멍에 아태 모여전 모든 백성들의 엄숙한 행렬 속에서 앞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올바르게 자랑할 수 있는가 하는 접은, 곧 그들이 다른 아무런 목적이 없이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때라는 점을 간략하계 살펴본 바 있냐 따라서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한 것은 바울 자신의 사역이라는 점을 자랑하는 것과 고린도인들이 그러한 사도를 통해서 그처럼 신실하고 영예롭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것온 모두에게 허용된 혜택이 아니었다)을 자랑하는 것온 당연했다. 사람들에 대한 이런 종류의 자랑은 하나님만을 두고 자랑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을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정하

는 것이 그들에게 큰 혜택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만약 그들이 자신과 철교할 경우 그들은 그들의 가장 큰 영광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로써 그가 그들의 변덕을 두고 비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악의적이요 시기적인 사람들의 말을 너무 귀담아 들었으며, 자발적으로 자신들에게서 그들의 으뜸 가는 영광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  바울은 그가 그들에게 올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놓은 다음에 그의 계획을 바꾸었다. 이제 그가 그렇게 한 데 대해서 자신을 변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온 이것이 그에 대한 거짓된 협의의 기초가 되어 왔다는 접을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들울 방문하기로 작정한 것온 그들에 대한 자신의 신되였다는 점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는 간접적으로 그비난을 고린도인들에게 들리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배은망덕으로 그의 신뢰를 재쳐놓아 그가 오는 것을 방해한 장본인은 고린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로 두번 은혜를(두번째 혜택을-여자주) 얻게 하기~~~~" ;  첫번째 혜택은 바울이 18 개월 동안이나 그둘을 주께 인도하면서 보냈던 점이요, 둘째 혜택은 그가 옴로 말미암아 그둘이 이미 받온 신앙을 굳히게 되고 그의 거룩한 권면을 통해서 거기에 더 발전을 보도록 자극을 받는 것이다. 고린도인들은 사도가  그들에게 오는 것을 허용치 않음으로써 이것을 스스로 박탈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스스로를 처벌하고 있었을 뿐이요, 그들에게는 바울을 비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혹 어떤 사람은 크리소스톰을 따라서 '카린'이 아니라, '카란'으로 읽는 편을 택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크게 반대하지 않겠지만 나의 설명이 더 간단하다.

 

"17. 어찌 경홑히 하였으리요 " ; 인간의 계획이 성꽁척으로 완수되지 않거나 그들의 약속이 신실하계 지켜지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거의 시간마다 바꾸는 것이요, 둘째는 그들이 시도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 4 성급한 것이다. 당장 후회할 계획이나 약속을 하는 것은 불안정의 상칭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에게 이런 실수가 없다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다. 그는 ‘내가 시도했던 것을 취소한 것온 나의 변덕 때문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성급함과 근거 없는 자만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 나는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타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앞에조1 내가:]적했듯이, 인간은 마치 하나님의 섭리에 의촌하지 않고 있우며 그의 뜻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식으로, 그들이 할 일에 대해서 성급하고나주제넘은 '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틀의 주제넘음을 처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획을 무로 돌려버리며, 종 종 .그들을 웃음거리로 드러내신다. '육체를 좇아'라는 말씀은 좋은 의도로 지향하자 않는-가령 ' 야십, 람십, 또돈 그밖에 다른 악한 동기의 지시를 받는.:_모든 악한계략을포함하는 일반적인 의미로 ’ 이해될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바울은 이 귀철에서 이런 내용들에 대해 관십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계획을 ‘ 세우는 면에 있어서 항상 너무도 명백하게 ,:_ 드러나는 성급함에대해서 다룬?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육체를 좇
아 경영하는 것'은 우리에 대한 · 하나님의 지배를 인정하지 3른하고 대신 하나님께서 정 당하게 처벌하고 멸시하는 성급한 주제넘음에 따라서 이끌리는것이다- ~ 바울은 이러한 찰못을 자신에게사제거하는 뜻에서 자신의 반대자들이질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이미 지적한 대로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는 접을 추축할 수 있다.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  혹자는 이것을 앞 발언과 관련시키며 ‘내가 의도하는 모든 것을 실천할 능력이 나의 능력에 달린것처럼' 하는 식으로 설명한다. 솔로몬의 말대로 인간들온 그들의 혀를 계어할수 없으면서 자신들의 머리에 며오르는 온갖 것을 실천하기로 결정하고 자신둘의 방식을 명령한다(참 16 : 1) • . 물론 여기서는 일단 확증된. 의도는 계속 고정되어 있어야 하며 , 1 일단 배척된것은 결코다시실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i 그러므로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하든 것은 아니라 하여 최 정함을면 하라"(약 5 : 12) 라는 말을 하고 있다; ; 이러한 해석이 앞에 나온 이야기와 아주 찰 어울리는 것은 우리의 결정에 예의없이 신탁의 힘이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육신에 따라 계획하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이어지는 내용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라는 귀절과 어울리지 않는 것온 바울이 자신의 전파에 있어 아무런 변덕 이 없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동일한 형태의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거의 동일한 귀철에서 자신의 예는 예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아니오는 아니오가 되어야 하는 것을 잘못으로 여기면서, 곧이어 그것을 자신의 가장 큰 덕으로 주장한다면 모순될 것이기때문이다. 물론 나는 보다더 교묘한 구벌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엇이 라고 대답할지 찰 알고 있지만 나로서는 확고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

 

물론 이 귀절에 다론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바울은 변덕을 꾸짖고 자신이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습관적으로 약속한다는 협의를 벗어버리려는 뜻에서 실제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는 접을 나는 의십치 않는다. 따라서 예와 · 아니오에 대한 반복은 마태복음 5 장 37철이나 야고보서의 말씀과 갈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예가 나에게 있어서 예일 수도 있으며 내게 좋아 보인다면 아니오 아니오란 말이냐' 하는 식이다. 그와 동시에이 반복은 기록상의 찰뭇일 수도 있는데, 그 까닭은 벌계이트가 이 말들을 반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의 의미만 파악한다면 여기에 나오는 표현에 대해서 너무 초조해 할 팔요가 없다. 바울의 의미는 다음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 . 자기에 의해서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변화가 없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 . 나오는 ‘말' (sermo) 은 교의를 뜻한다. 그는 자신의 개인저인 정칙성이 자신의 가르침의 완전한 일관성에 입각해서 판단되기를 바라고있으며, 따라서 자신에게 볼리하게 제기된 변덕이나 나쁜 신의에 대한 불리한 암시문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교의에 있어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가 말하는 모든 말에 진실 되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의 권위가 지속되고있는 한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벌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며, 바로 이 접을 그둘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물론 그는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보아오고 있듯이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동일하게 좋은 신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접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협의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자신의 교의를 변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까닭은 그가 자신의 사도 칙분이 간접적으로나마 훼손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의 개인적인 평판에 대해서 전혀 핀십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세밀하게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변호하고 있는가를 주목하도록 하자• 그는 하나님을 블러 자신의 전파가 얼마나 솔칙담백하고 진지한 것이었는가를 증거하계 하고 있다. 곧 그것이 조금도 애매모호하거나 변화있는 임시변동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 가르침이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참되다는 접을 맹세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가 전파하는 전리논 하나님 자산이 . 신실하고 전실하신 것 과 마찬가지 로 확실한 것 이 다’ 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한 것은 이사야 (40:8) 의 말대로 영원
히 지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역시 설명하는 대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아 세 상에 전파해 온 바로 그 말씀(벨전 1 : 8)과 동일하기 때 문이다. 바로_이 것 이 만약 천사들이 갑히 자신의 복음에 반대 되 는 다른 복음을 제시할 경우, 그들일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원천이다(갈 1 : 8). 복음의 주인공과 변호안이 하나님 이 아니 라면 누가 감히 하늘의 천사들까지 자신의 교의에 복종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말씀의 사여자들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이 의치려고 강단에 올라갈 때, 그들의 교
의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전복될 수 없다는 접을 알고서 마음에 동일한 확신을 품어 야 마땅하다.

 

"19. 우리 ~~~~~~ 하나님의 아들~~~~~" ; 여기에 그의 담대한 주장에 대한 뒷받침이 따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전파에 영원하고 불변한 하나님의 전리되시는 그리스도이외에 아무것도없기 때문이다. "우리로 말미암아 전과된"이라는 표현은 강조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상상력에 의해서 모습이 흐려지게 되고 그의 전리가 그들의 기만에 의해서 더럽혀지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요,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바울은 자신이나 자신의 동료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단언하면서 자기들이 신실하게, 그리고온전히 정직하게 그리스도를 순수하고 꾸밉없이 제시해 왔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디모데와 실루아노를 언급하면서 왜 아볼로를 제외하고 있는가 하는접은 명백하지 않지만, 아마도 이들이 더 추악하게 욕을 받고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을 변호하는 데 더 큰 관십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귀철에서 그가 자신의 모든 가르침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지식만 담겨 있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은 거기에 전체 복음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의에 다른 무엇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들이 제아무리 지혜 있는 척한다하더라도 금지된 지역으로 빠져들어가서 배회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만이 율법의 끝이요, 따라서 ' 모든 영적 교의의 머리, 종합,그리고 완성이라는 말이 다. 다음으로. 그는 그리 스도에 대 한 자신의 가르침이 뒤 바뀔 수 있 거 나 모호한 것 이 , 아니 며 , 따라서 프로테 우스 (Proteus) 처럼 시대에 따라서 다른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 그리스도를 이처럼 다루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손서 처 손으로 공을· 놀리면서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십십풀이로 삼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서로 다른 거짓된 가면을 통해서 제시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는 이것을 가르치고 다음날은 무서워서 그것을 철회하기도 한다.


바울의 그리스도나 참된 사도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이처럼 다양한 색채로 그리스도를 색칠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종인 것처럽 주장하는데, . 이것은 순전히 거짓이다. 요컨대 오직 참된 그리스도는 바울이여기서 그의성격으로 밝히고 있는 이 보편적이요, 영구적인‘예'를 보여주는 것분이다.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  여기서 다시 그는 그리스도께서 찬히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기초가 되신다는 접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한 전파가 얻마나 확고부동해야겠는가 하는 접을 확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보증이 되시는 그 자신이 만약에 블안정하다면 그것처럼 모순된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 이 발언은 일반적이지만 그래도 바울의 가르침의 불변성을 확증하는 데 져용될 수도 있다. 여기서 그는 복음을 일반적인 용어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자신의 복음에 대
해서 이 특성을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확실하고 훌륭한 근거를 가전 것이라면 나의 전파 여시 확실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기에는 이 모든 약속들을 확고하게 만드는 그리스도 이의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의 유일한 의도는 자신이 선포한 복음이 · 야무런 생소한 것이 덧불여지지 않은 순수한 복음이라는 점을 보여·퓸 데 있으므로, 우리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의촌한다는일반저인 교의를 곰곰이 생각하도록 하자. 이것은 유리 신앙의 핵십 가운데 하나로서 주목을 요하는 발언이다. 그러나웁그것은'. .!E. -c.J--e- 원리, 죽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해서 은혜로우신것은 · 오칙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의 약속들은 우리에 대한 그의 아버지로서의 선의에 대한 증거이다• 따라서 이것들이 오칙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약속들이 신령한 은해에 대해 증거가 되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무사격한 자들에 대해서도 선을 행하시지만, 이러한 친철에 약속이 덧붙여질 경우 자신을 그들에게 아버지로서 보여주는 것이 . 그의 특벌한 의도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최에 대한사면을 얻기 전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할 수 없으며, 이 사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세째, 하나님의 모든 약속 기운데 으뜸되는 것은 그가 우리를 그의 아들로 입양하신다는 것으로서 우리의 입양의 . 근원과 뿌리는 . 그리스도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의 형제와 지체 된 자들에게만 ` 아버지이실 ·분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우리에 대한 그의 ,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그리스도를 떠날 경우 우리는 그에게 더없이 흉측하고 가증스러운 촌재가 프 되고 만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준되고 확립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온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기 이전에는 약속들이 불확실했으며 무가치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 까닭은 바울이 여기서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창세 이후로 신자들에게 주어전 모든 약속의 기원이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대답한다. 그러기에 모세와 선지자들은 하나님과의 화해, 구원에 대한 소망, 또는 어떤 종류의 은혜에 대해서든 이야기할 때마다 그리스도률 언급하며,. 그와 동시에 _'.그의 나라와 강림을 선포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구
약 시대의 약속들은 경건한 자에게 유익한 법위에서 그들에게 성취되었지만, ~ 그와 동시에 그것들온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어떤 의미에서 지연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 약속의 성취를 본 것은 ' 그리스도를 통해서였다;· 약속을 . 의지하는 신자들은 그것의 참된 성취를 중보자께서 나타나실 때 까지 미루었으며, 그들의 소망도 그때까지로 미루었다• 간단히 말해서 어느 누구든 그리 스도의 사망과 부활의 효과를 곰곱이 생 각한다면 다른 방법 으로는 : 결코확실하게 성취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날인되고 확증된다는 접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 여기서 헬라어 사본상의 차이가 드러난다. 어떤· 사본에는 :무소철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둘은 그를 통해서예요, : 그를통해서 아멘이니, 우리를통해사하나님께 , 영광이 된다'논 식으로 읽는다. 내가 따른 다른 독법이 더 간단하며 의미가 상세하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든 약속을 비준하셨다는 접을 지적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계속해서 이 비준에 우리의 . 동의를 표하는 것이 남은 일이타는 접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확실한 신앙 안에 그리스도에게서 안식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점을 날인할 때(요3 :33), 그리고 만물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렇게 할 때(엡 1 : 13,름 3 : 4) 우리 는 이 비 준에 우리 의 동의 를 표하는 것 이 다. 물론 나는 다른 득법이 보다더 일반적으로 채택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여지이므로, 나는 보다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문맥에 훨씬 더 일치하는 독법을 서슴치 않고 택하는 바이다 . 사실 바울도 고린도인들에게 일단 그들이 하나님의 단순한 전리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은 이상 거기에 아멘 하고 응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접을 지적해 주고있다. 혹통상적인 독법에서 이탈하기문주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독법에서도 :、교의와 신앙의 상호일치에 대한 권면을 언제나 이끌어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약속에 있어서 언재나 신실하시며 진실하실 분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 그에게는 언재나 그의 아멘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허영십은 참으로 지독하여 우리논 하나님께서 - 그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확고한 증거를 주실 때에만 그에게 아멘하고 응답할 정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그의 ' 말씀에 의한 확.lZ.한 중거를 주시는대, 이것이 여기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대용이다. :::z.는.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십에 . 대한 그의 신실성은 우리가 하 나님 께씨 욱리에게 재공하는 '은혜 로운 입 양을 의십치 않는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접 을 지져한 바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재공에 대빼B겔令겐실 하산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의 . 신앙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활하제섬占것은 여 우라의인간저인 . 능력 . 밖의 일이다• 그러나그는 ~MJ,Jl 타 위 뇨쉴야성, '·또늪소위 「말하는 ! .결 접'에대한 치료책이 있논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형을 통해 우리의 신실하지 못함을 바로잡고 우리의 힘을 ·: 북돋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우리는
확고부동한 신앙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호의를 사고 그들과 가깝게 되는 뜻에서 일부러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21.우리를~~~~~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 그는- 동일한대용을 다른 말로 실명하면서 ‘기름 ‘ 부음', ,인침'' 그리고 ‘견고케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그가 앞에서 아무런 비유 없이 말한 내용울여기서이 이중적인 비유를 써서 보다머 뚜렷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무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의 천상적인 은사를 부어주실 경우, 이것이 하나님께서 r 우리의 .:,_ 마음에 . 그의 말씀의 김 확실성을 ? 인치는 방법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또 다론 방법, 곧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증으로서 -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 있는데 , 7 이것은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아주 2 적절한 비교이다.-·- .성령께서 오우리의 ·: 담보이신 것은 그가: · 우리의 입양을 · 증거하기 때문이요, 우리의어part~(스프라기스; 인칭)와 날인하시는 것은 그가 약속들의 신의를확립하기대문이다; 1마라서 :· 하나님이 : 언약을 두 방면에서 비준하는 것이 .!그의 일이요;,' 하나님이 없이는 그것이 미결상태로 남아 있게 되고 말 것이라는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가리. 우리의 ' ,보증'으로 부르는 것은 찰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처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과 우리의 신앙 사이에 있어야 할 것으로 요구하고있는첫째 관계를 주목할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건적으로확실하므로 그는 우리들이 확고하고 혼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거기에 . 동의하며 마음에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다. 둘째로 우리가 1주목할 접은 이련 정도의 확실성온 인간의 지성의 능력을 벗어나는만콤, L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속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확중시카주는 것이 성령의 처분이라는 접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기릅
부음, /담보, 날인,} 힘을 주는가로블러지고 있는것이다.' 세째로우리가 주목할 접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에대한 확고한 소망으로' 부르실 때 성령의 층바를갖지않으면서 그제게 아멘 하는 자들은모두 그리스도인으르 블라어질자져이없는 ·자들이라는자실이다.

 

"23.  내가~~~~~~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 마침내 그는 자신의 계획을 변경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는 단지 자기 원수들의 증거 없는 거짓된 주장을 물리치고 있었지만 고린도인들을 아꼈다는 말로써 그는 암압리에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으며, 그들의 찰뭇 때문에 자신이 고통받는 것, 더우기 그들이 자기에게 고통을 받게 허용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요, 더 나아가서 그들이 그러한 증거 없는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무고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죄에 대한 고통을 받게 한다면 더없이 부당할 것이라는 점을 그들에게 지적해 주고 있다 .. 그가 그들에게 가자 않으므로 그들을 아꼈다는 것은 만약에 그가 갔을 경우 더욱더 십각하게 그들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그가 오기 전에 그들이 제 정신을 차림으로써 더욱더 과갑한 처방의 팔요성이 없게 되는 편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고린도인들에 대한 바울의 아버지로서의 온유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그가 얼마든지 그들을 상대로 화낸 수 있었는데도 그들을 꾸중하는 기회로 삼지 않는 것이 그의 큰 · 아량
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접을서원 형식으로 이야기합으로써 일부러 오지 않는 핑계를 꾸며덴 것이 아니라는 접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그 자체로서도 어느정도중요했을분 아니라, 그가 거짓에 대한모든협의와 구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어떤 맹세를 적합하고 경건한 것으로 만드는 요건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계기와 의도이다. 계기란 시시한문재가 아니라 실제로 중요한 문재와 관련해서 맹세할 때를 뜻한다. 의도란 개인져인 이익이 아니타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유익올 보살펴야 한다는듯이다· 우리는 항상 맹세의 목저이 정당한 명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우리의 이옷들을 돕는 데 있다는 접을 기여할 팔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그의 맹세의 형식에 주목할 팔요가 있는데, 먼저 그는 하나님을 불러 자신의중인이 되어 준실 것을 요청하고, 다음으로 "내 영혼을 두고"타는 말을덧붙이고있다.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의십스렵거나 모호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논 하나님께 향하며 오직 홀로전리이신 하나님께서 즈J 실성울 증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다. "내 영혼을 두고"라는 말에는 ‘내가 만약에 거짓말울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처벌할지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점이 비록명백하게 전술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것울 항상 · 맹세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실령 우리가 신실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요, 그 결과 그의 이름을 모독한 것은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치게 내버려 두시지 않을 ' 것이기1 때문이다·

 

"24. 우리가~~~~~~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  여기서 그는 ‘당신은 왜 - 당신위 모습만 보고도사람들이 부들부들 떨도록 격정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가? 이것은 . 기독교 묵사의 전지성이 아니라찬인한 횡포자의 분노이다’라고 하는 반론을 예상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함으로써 간접 적 으로 이 반론에 대 응하며 , 다음으로 자신으로 하여 금 그들을 그처럼 업하게 다루도록 한 것은 그들에 대한 자신의 아버지로서의 성향이라는 접을 주장함으로써 칙접적으로 이 반론에 대응하고 있다. 자신이 그들의 신앙의 주관자가 아니라는 말로써 그는 그러한 지배력이 부당하고 용납할 수 없으며, 교회에 대한 횡포나 다름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인간에 대한 그어떠한 예속으로부터든 완전히 자유로와야한다. 우리는또한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주목해야겠는데, 그 까닭은 도대체 어떤 유한한 인간에게 그러한 지배력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면, 바로 바울이야말로 그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논 신앙에는 하나님의 말씀 이 의에 전혀 다론 주인이 없어야 하며, 인간적인 롱재를 받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에라스무스는 여기에 SJJSKa(해내카)라는 헬라어가 덧붙여지게 되면 이 문장을 ‘우리가 너희들의 신양 문제에 있어서 너희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는 식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여시 의미가 거의 동일한 것은 그가 영처 지배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냐 복사들에게 인간의 양십에 대한 특별한 지배력이 없는 것은 그들이 사여자요, 조력자이지 주인 (lords) 은 아니기 때문이타는 사실온 언재나 확정된 원칙이다• 그렇다면그는 자신과 다른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로무엇을 남겨놓고 있는가? 그는 ‘너희 기쁨을 돕는 자' 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있는데, 나는이 기쁨을 행복으로 본다. 그는 이 기쁨을 에스겔의 말대로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 : 4) 라논 접에서 폭군처럼 행동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폭군의 찬인성에 의해서 일깨워지논 공포와 대조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인들과 자신의 관계가 이와 전혀 다른 것으로 재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그들에게 어떠한 지배도 주장하지 않고 오칙 평화 속에서 자유롭고 즐거움이 충만하게 그들을 세우려고 노력했을 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가 믿음에 셨음이라" ; · 그가 이것을 덧붙인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은 보통 그냥 지나쳐버리거나 불충분하게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여전히 역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곧 신앙의 성격과 결과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할 정도로 우리를 지지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간에계 종속된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전혀 법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부당한 지배는 여기서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