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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고후4:3)

1. 성경 (고후 4:1 ~ 6)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1)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2)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3)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5)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 그는 지금까지 복음의 탁월성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돌아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복음의 성격에 대해서 지금까지 다루어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고 진지한 복음의 사역자였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방금 무엇이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인가를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나 자신이 전파하는 것이 참된 복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그가 말하는 직분은 그가 지금까지 그 처럼 화려하게 극찬한 탁월성과 그처럼 자세하게 설명한 능력과 유용성을 지닌 직분이다.  따라서 자신을 너무 치켜 세우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는 뜻에서 그는 먼저 자신이 그와 같은 명예의 정상에 오른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거기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자신의 지도자직을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는 그의 긍휼하심의 덕분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더욱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 곧 우리는 우리의 임무에 있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충실하게 성취한다. _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 그는 자신의 충실성을 뒷받침함에 있어서 거짓 선지자들이 실리 추구를 통해서 복음에 속한 능력을 강탈하며 그들의 출세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으로 주장하는 결점을 암암리에 그들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는 말이다.  "숨겨진 일들''  또는 ‘부끄러움의 비밀들'이라는 표현을 모세 율법의 그림자들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크리소스톰은 그의 적대자들이 자신들을 치켜세우는 데 있어서 입고 나서는 허영으로 이해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이 표현이 그들의 복음의 순수하고 본질적인 소박성 (comeliness)을 더럽히는 데 사용하는 모든 위장과 관련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정숙하고 존귀한 여인들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서 오는 우아함으로 만족하고 인위적인 장식에 의존하지 않지만, 창녀들은 자연스러움(nature)을 타락시키기 전에는 도저히 자신이 잘 장식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부당한 꾸밈으로 장식되고 위장된 복음을 제시했지만 자신은 순수한 복음을 지금까지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자랑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순함을 수치로 여겼으며, 더우기 사도적인 덕에 있어서 탁월할 수 없었으므로 여러 면에 있어서 속된 철학과 닮은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냈으니, 거기에는 장황한 허풍이 있을 뿐 성령의 효과적인 능력은 없다.  복음을 꼴사납게 만드는 이 쓸데없는 장식을 가리켜 그가 ‘숨은 부끄러움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은폐와 위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발가벗은 상태가 필연적으로 추하고 흉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런 위장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뜻으로 주장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의 얼굴이 자신의 전과를 통해서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것은 더욱 더 영광스럽게 비취기 마련이다. 나는 여기에 그가 이미 언급한 모세의 수건(출34 : 33)에 대한 암시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거짓 사도들을 덮고 있는 수건은 전혀 종류가 다론 것이다.  모세가 자기 얼굴을 가린 것은 율법의 영광의 뛰어난 광채가 섬세하고 희미한 눈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컸기 때문 이지만, 거짓 사도들은 장식용으로 수건을 뒤집어 쓰고 있다. '복음의 단순성이 그대로 미치게 될 경우 그들은 볼품없고 흉측한 사람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들은 그처럼 무수한 탈과 가면 속에 자신들의 수치를 숨기려 한다.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여기서 책망하고 있는 간계를 그것이 마치 크나 큰 덕이라도 되는 듯이 마냥 기뻐했음에 틀림 없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진지하기 보다는 교활하며 , 확고하다기보다는 보다 더 고상한 척하며 , 유치함 그 자체를 재치로 여기는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나·이런 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재치와 기발한 생각에 대해서 평판을 사고자 애를 쓰는데, 이것이 무식한 자들의 박수 갈채를 사는 한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소위 바울이 말하는 이 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점을 지적받고 있는데, 즉 그는 간계가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부적당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 나는 이 번역이 바울의 의도를 충분히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아닌가 확실히는모르겠다. 왜냐하면 '돌룬' 이라는 헬라어 동사는 ‘기만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상품에 거짓 광택을 냄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숨기는 속임수, 장사들의 방법에 따라서 ‘위조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귀절에서 이 단어는 진지한 전파의 반대를 표현하는 데 ' 사용되고 있으니, 이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것과 일치한다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 그는 자신의 복음의 순수한 가르침을 단순하고 꾸밈 없이 선언한 것으로 자찬하면서,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증거하는 ‘온갖 사람의 증거'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궤변가들의 위조된 가르침을 진리의 계시와 대조시키고 나서, 여기서는 인간들의 양심과 하나님의 심판대에 호소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반대자들은 인간들의 잘못된 심판과 타락한 감정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칭송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보다는 그런 것처럼 보이려는 데, 더 관심을 가졌던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인간들의 양심에 대한 호소와 인간들의 귀에 대한 호소를 구별짓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종들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양심의 정직성을 인준 받는 것으로 충분해야 하며, 그들은 인간의 비뚤어진 욕구나 그들의 헛된 박수 갈채에 전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 ; 바울의 전파에 반대자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전파가 명백하다는 그의 주장을 쉽게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엄한 권위로써 이런 비난에 맞서면서 자신의 복음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위협하고, 그들에게 이것이 버림 받음과 사망의 한 상징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만약 내가 자랑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제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실을 통해서 그 사람은 자신이 버림 받은 자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으나, 그 까닭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나의 가르침의 전지성을 공공연하고 뚜렷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와 같다;

 

그러므로 그것이 숨겨지고 있는 당사자들은 눈이 멀 뿐 아니라 온갖 합리적인 이해의 혼적이 부족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불신자들의 눈먼 상태가 결코 자신의 복음의 명료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양온 눈먼 사람들이 그것의 빛을 감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덜 밝은 것이 아니다. 율법 그 자체도 ‘우리의 발을 안내하는 등불'이요(시119 : 105), '우리의 눈을 밝혀주며,(시19:8), 멸망하는 자들에게만 가리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율법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가 율법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태양이 구름을 퀘뚫고 빛을 발하듯이 인간들이 그들의 용도에 충분한 빛을 갖게 되지만 그리스도가 율법에서 떨어져 나갈 경우 거기에는 혹암 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아니 인간의 눈을 돕기보다는 부시게 할 뿐인 거짓 된 빛의 모양 밖에 없는 것으로 대답한다.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 감히 버림받은 자들로 처리한다는 사실은 큰 확신의 증거이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취급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확신을 가짐으로써 두려움 없는 양심을 가지고 자신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들을 이끌어 내어 하냐님의 십판대 앞에 세워 거기서 확실한 정죄를 받도록 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하겠다.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 이것은 자기 원수들의 사악한 완고성을 조금도 개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곧 그는 ‘그들이 대낮에 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악마가 그들의 이해력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치고 사도가 여기서 사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우스파에서는 이 귀철을 오용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면서, 그를 가리켜 하나의 신 (a god)으로 보는 입장을 지지했다. '이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던 힐태리 (Hjlary)는 본문을 곡해하면서 이 세상의 이해력을 어둡게 한 분은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크리소스톱은 후에 마니교의 두 가지 제일 원리에 대한 이원론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뜻에서 이 번역을 따랐다. 왜 암브로스 역시 이것을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은 명백하지 않지만, 어거스틴의 이유는 역시 크리소스톰의 그것과 동일했다. 그 역시 곧 마니교도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것은 논쟁이 계속 열을 뿜울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한 한 예이다. 곧 이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보다 침착한 마음으로 읽었더라면 이 귀절을 이처럼 억지 의미로 바꿔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원수들에게 괴롭힘을 받자 바울의 의미를 설명하기 보다는 그것을 반박하는 데 더 급급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이유가 어디 있었는가? 아리우스파에서 마귀가 이 세상의 신(god)으로 불리고 있다 해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는 하나님(God)이라는 단어가 참되고 영원하며, 유일한 신성(divinity)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론을 벌인것은 유치한 궤변이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고전8 : 5)라는 말을 하고 있으며, 다윗도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96':,5)라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마귀가 인간을 다 지배하고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 대신 예배를 받기 때문에 신으로 불린다 해서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훼손할 수  있겠는가? 

 

마니교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명칭은 마귀를 가리켜 이 세장의 왕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견해를 지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절을 마귀에게 적용해서 해석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할 팔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여기에 아무런 해가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아리우스파에서 사단이 신으로 볼리어지는데서 그의 신령한 본질이 입증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명칭이 주어져 있다 해서 거기서 그의 신령 본질을· 입증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다문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수식구(句) 없이도 절대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볼리어지며,  ‘영원히 찬양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불리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셔온 하나님으로 블리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귀는 바알을 가리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의 신으로 부르고 개를 가리켜 애굽의 신으로 부르는 것과 똑같은 방식에서 이 세상의 신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마니교인들은 그들의 사악한 견해를 변호하는 뜻에서 내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귀절 이외의 다른 성경 귀절에 의존하지만, 그들의 오류를 반박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들은 마귀의 명칭이 아니라 그 능력에 대해서 더욱 왈가왈부한다. 사단에게 불신자들을 눈멀게 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돌려지고 있다고 해서 그는 그 자신의 능력대로 모든 악의 주인공이며, 따라서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즉 성경이 여러 곳에서 마귀들을 가리켜, 물론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하나님의 사역자들, 아니 하늘의 천사들르 부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천사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사역자들이라면 마귀들은 그의 진노를 수행 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선 한 천사들을 가리켜 우두머리요, 능력이라 부르는 것은 오직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수여하신 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단이 이 세상의 왕인 것온 그가 이 왕직인 권세를 자신에게 수여했거나, 자신의 권리상 그것을 획득했거나, 아니면 그것을 자신의 뜻으로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그에게 그것을 허용하는 범위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선한 영과 선한 천사들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사무엘상 16장 14절의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 지라”라는 말씀이 그러하며, 시편 78편 49철에는 ‘벌하는 사자들'이 부과한 처벌이 나오고 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본문으로 돌아가서, 불신자들을 눈멀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단에게 공통되지만, 이 양자가 소유하는 능력은 동일하지 않으며, 그것이 시행되는 방법도 마찬가지로 다르다. 나는 여기서 그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성경은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명령에 따라서 그의 재앙을 부과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아합이 사단에게 속은 일이 있는데(왕상22: 21), 사단은 이것을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해를 입히는 임무를 하나님께서 제공한 그였기에 그는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도록 파송받은 적도 있다(왕상22:22).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눈을 멀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우리의 지각(minds)의 올바른 사용법과 그의 영의 빛을 박탈한 다음에 주님께서 우리를 버림받은 마음(mind)으로 전락되도록 마귀에게 넘겨주시며 그에게 우리를 속이는 능력을 주시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의 진노의 사역자에 의해서 우리에게 정당한 재앙을 부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미는 자신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마귀에게 홀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눈 먼것을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들을 마귀의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더 신랄하다. 조금 앞에서 그는 그런 사람들이 파멸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판단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그들이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가 자신들의 불신으로 그들이 파멸을 자초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 이것은 그가 앞에서 말한 내용, 곧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복음을 배척할 경우 그것은 그 사람의 눈먼 상태로 인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확증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 까닭은 복음 속에서는 오직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으며 그는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환하게 비 취고있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는 이어서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자들이 전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들이타는 점을 명백히 하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접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7절의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댜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사도칙을 의십하던 자들에게 그처럼 가혹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들이 복음에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는 그리스도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표현에는 히브리어 관용법상 ‘그 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이라는뜻이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비춰고 있놉 복음'이라는 뜻이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나는 둘째 번역이 보 다더 상세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싶다. 그리스도를'가리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혼히들 말하는 대로 성부와 본질이 공통된다(co-essential)는 접에서 그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그가 성부를 우리에 게 대표한다는 점에서 우리에 대한 관계와 관련된다.

 

성부께서 ‘눈에 보 이지 않는' 분으로 이야기되는 것은1、그 자A,l이 인간의 지성(mind)으로는 갑지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동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 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어떤 면에서 눈에 보이게 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아리우스파에 대한 그들 의 열떤 논쟁에서 성자와 성부 사이에 있는 본질의 내적인 은밀한 몽일성 때문에 성자가 성부의 형상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할 분, 보다더 실제 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는 내용, 곧 그가 계시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숨겨 져 있을 아버지 안에 있는 내용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십으로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형상’이타는 단어는 바로 뒤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와 관련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이라는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고 있지만, 그것은 팔요없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1 있다. '

"5. 우리가 우리틀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 혹자는` 이것을 액식어법(範 式語法;駐1)의 한 예로 보면서, 이것을 ‘우리는'우리 자신을·주인으로서 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만물 위에세워놓으신 하나님의 한 아들을 전파한다 라는 식으로 번역한다. 내가 이런 해석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번역을 택하는 것은 그것이머 자세하고 강조적이며 거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댜. :사람들이i' 다른 사람에게 주인 노릇을 하지 않고도자신을 전파하는 경우란, 가령 교화 (敎化)보다는 자랑을 일삼거나어만 면에 있어서 탁월하기를바라거나,· 아니 면 복음으로 돈을 버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역자에게 있어서 야십과 탐욕, 그리고 이와 같은 다른 찰못 때문에 자신의 가르침의 순수성이 더럽혀 지며, 그 결과 안에서는그리스도만 높여지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고 만다. 오칙 그리스도만을 전파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잊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 혹시 ‘그러나 실제로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소’ 하고 반문할 경우에 대비해 서 그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란 다름아닌 그들의 종이 되는 것이타는 점을 답변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그처럼 나 자신 에 대해서 칭송을 늘어놓고, 당신들 보기에 너무 장황하게 말한다고 하더 라도내가 목표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에서 당신들이 유이하도록 섭거려는 것이요'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만약 고린도인들의 이러한 설명을 배척한 다면 그것은 오칙 그들이 너무 교만하고 배은망덕하기'때문일 것이다. 사실 바울이 그들에 대해서') 품고 있는 거룩한 사랑을 그들이 중히 여기지 않 고있다는 사실 그자체는 그들의 판단의1타락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의 모든 목사들은 그들의 지위와 상태에 대해서 지적받고 있는 샘어니, 그 까닭은 그들에게 그들을 구별해 주는 제아무리 영예로운 명칭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오직 신자들의 종들에 불과하기 때 문이 다. 다시 말해 서 그라스도를 섭기는 유일한 길은 ~1~ . 그의 교회를 마찬가지로 섭기는 것분 .~이것은 사실 영예로운종살이요, 세상의 그 어떠한 지배보다 나온 것 이지만, 이 총살이의 유일한 관십온 그리스도만이 높여지고 그 어떠한 경쟁에 의해서도 흐려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 있다.' 따라서 훌륭한 목사의 임무는 주도권을 행사하고 싶은 온갖 욕망을 여제할 분 아니라 하나님의 백 성을 섭기는 일을 그가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영예로 여기는 데 있다. 반면 에 백성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종들을 촌귀하계 여기는 것이니, 첫째는 그 들의 주인(Master)의 위엄을 생각해서이고, 둘째는 그들의 칙분의 위엄과 탁월성을 생각해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들은 주께서 높은 자리에 앉힌 자들을 멸시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 나는 이것이 네 가지 다론 방법으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빛 으로 하여금 혹암으로부터 비칠 것을 명령하신 것으로, 곧 그들 자신의 본 성에 있어서 혹암의 자녀인 사람의 사역을 통해서 복음이 이 세상에 비취 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빛으로 하여금 어두운 그 림자 속에 드리워져 있던 율법을 대신하계 하셨으며, 그 견과 혹·암에서부타 빛을 이끌어내셨다는 것이다. 음흉한 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설 명을 당장 받아들이겠지만, 이 문제를 보다더 자세히 살피는 사람이라면 누 구든지 이것이 사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아니라는 점을 당장 인정하 게 될 것이다. 세째 설명은 암브로스의 것으로, 모든 인칸이 혹암 속에 묻 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복음의 빛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곧 인간들 이 무지의 혹암 속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으로 그 들을 환하계 비추1주셨다는 것이다. 네째 설명은· 크리소스톰의 것으로서 :::L 는 여기에 천지창조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씀으 로 빛을 창조하시고, 또한 그것을 혹암으로부터 이끌어내신 하나님께서 혹압 속에 묻혀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을 영적으로 일깨워 주신다는 것이 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빛과 영적인 빛에 대한 유추(anagoge)가 더 마음에 드는 해석인 것은 거기에 전혀 여지가 없는, 까닭이지만 압브로스 의 해석 또한 아주 적합하다. 각자는 자선의 판단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형상이 라는점을지적한바 있는데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계시된다는 말 역시 갈은 내용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위업 그대로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는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는 법위 안에 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점을가르쳐주는훌륭한 말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지도가 헛된 것은 그들이 정도에서 벗 어나 방황하기때문이냐 물론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비천하고 볼품없는 것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십자가에서 부활로 거쳐가는 인내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리고 또한 persona여기서는 '얼굴'로 번역되고 있음-라는 단어에서 그것이 우리와 관련된다 는 접을 알 수 있는데, 이유는 하나님의 은밀한 본질을 람구하는 것보다 그 의 독생자 안에서 드러나시는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훨씬 더 우리에게 유 익하기·대문이다. ... -..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 우리는 그가 여기서 관련시키고 있는 두 가지 깨 우침 (enlightening)에 대 해 서 주목할 팔요가 있 다. 곧 깨 우침 에 는 먼저 복 음의 깨우침이 있고,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깨우참 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지창조시 우리에게 태양의 광채 를 부어주시고,· 또한 우리에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허용하셨듯 이 우리의 구속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복움으로 말미암아 그의 아 들 안에서 우리를 환하게 비춰주시지만, 하나님께서 동시에 그의 영으로 우 리의 마음을 비취주시지 않는다면 눈먼"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헛된 일이 되 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의미는 굴t님께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압아 우리 의 이해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로히-여금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의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