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2:17)

1. 성경 (고후 2:1 - 17)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1)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2)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3)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4)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5)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6)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7)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8)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9)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0)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11)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2)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3)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4)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5)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6)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17)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 내가……결단하였노니." ; 누가 장(章)을 구벌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끊는 것이 적당하지 않은 것은 이제야 바울은그가 어떤 면에서 그들을 아꼈는가 하는 점을 마침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더 이상 슬픔 가운데 너희들에게 가지 않기로, 곧 내가 감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을 슬프게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노라' 하는식으로 이야기 한다. 더 이상 가지 않는다는 말에는 그가 편지를 통해서 일단 그들을 방문한 셈이며, 이 편지를 통해서 그들이 몹시 혼이 났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가 방문하기를 꺼려한 것은 자신이 그들과 함께 있는 까닭으로 그들을 다시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는.그들에게 회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더 길게 허용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에크리-나' 라는 단어는 대과거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곧 바울은 이미 일어난 지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얼마 전에 내린 결정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 ·여기에 그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의 증거가 나오고 있다. 어떠한 인간도 스스로 자신에게 슬픔을 가져 오지는 않는데,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인들이 기쁨이 없다면 자신도 즐거워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과 동료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나 더 나아가서 그는 그들이 자기 기쁨의 근원의 주인공이라는 점과 만약 그들이 슬프다면 자기도 기쁨이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일 목사들이 자기가 섬기는 교회 성도에 대해서 이런 느낌을 갖는다면 이것이야말로 마땅히 그들이 친절하게 격려해야 할 사람들을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데서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바로 여기서 과격하게 신랄한 엄격성이 나오며, 그 결과로 우리는 교회의 행복에 마땅히 기뻐할 만큼 기뻐하지 못하계 된다.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  그는 두번씩이나 근심하며 가혹하게 그들을  대하는 일이.없도록 하려는.뜻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오지 않고 지체했다는 점을 설명한 바 있다. 이제 그는 자기가 처음으로 근심하며 편지를 통해서 그들을 찾아간 것은 그가 몸소 그들 가운데 있어 자신의 엄격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그들이 느낀 슬픔에 대해서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그것이 가해 질수록 더 그는 그들의 안녕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그가 편지를 쓸 때 그들을 괴롭히거나 그들에 대한 분노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보다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증거하고 싶었다는 점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편지에 담겨 있었을지도 모를 냉혹함에 대한 인상을 제거하고 있으며, 자신의 의도가 친근하고 선의로 가득 찬 것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여기서 부정하고 있는 가혹성을 조금 뒤에 가서는 인정하는대  여기에 언뜻 모순이 있는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고린도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 만큼 거기에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으로 대답한다. 그것은 오직 그가 그들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 줌에 있어서 택하는 방법일 따름이다. 여기서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 별로 달갑지 않은 그 성취 방법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있다. 

"확신함이로라. " ; 그는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자신의 선의를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뜻에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증오는 악의를 낳지만, 함께 나누는 기쁨에는 완전한 사랑이 담겨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이 그들에 대한 바울의 신뢰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들은 수치스럽게도 그를 낙심시키고 말 것이다.

 

"4. 넘치는 사랑~~~~" ; 여기서 그는 얼핏 보기에 가혹해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뜻에서 두번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불운을 보고 마냥 비웃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매정스러움만 드러내는 자들처럼 꼴불견도 없지만, 바울은 자신의 태도가 전혀 다른 데 있었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내가 그처럼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큰 술품 때문이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한 술품에서 야기된 것을 용서하지 않고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특별히 그의 비통함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생긴 것이요, 그가 자신의 직성을 풀고 그들을 괴롭혀 보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려는 뜻에서 그렇게 슬퍼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고린도인들은 그의 가혹한 꾸중 때문에 마음 상할 팔요가 없었다. 그는 ‘눈물’을 언급하는데,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큰 술픔의 상징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징계와 권면이 어떤 정신에 입각해서 실시되어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는 놀랄 정도로 열을 내며 배척하고 격노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전혀 느낌이 없으며, 그 결과 자신들의 목청과 폐를 단련시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끄러운 트집장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경건한 목사는 남을 울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으로 울어야 하며 자신의 분노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전에 자신의 깊은 마음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하며, 남들에게 슬픔을 끼치기보다는 더 많은 슬픔을 자신이 당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울의 많은 눈물로써 이것은 스토아 학자들의 강철갈이 굳은 마음보다 더 당당한 그의 부드러운 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넘치는'(더욱더 풍성하게)으로 번역된 부사는 일종의 비교급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거기에는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의 사랑에 보답하지 않는 데 대한 불평이 담겨 있는 셈이다. 곧 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온 뜨거운 데, 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차갑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을 보다 더 단순하게 해석하는데, 곧 바울이 그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추천하는 것은 이 확신을 통해서 혹 그의 말 속에 있을지도 모를 가혹성을 완화하려는 뜻에서 인 것으로 본다.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끼쳤을지도 모를 불쾌함을 감소시키는 뜻에서 세번째 설명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가 그들과 함께 술픔을 나누고 있으니 그것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너희들과 나는 동일한 술픔을 나누고 있으니 비난을 받을 사람은 다른 데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는 아주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곧, 어느 개인을 꼬집어서 비난을 퍼붓지 않고,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if anyone)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를 나에게 괴로움을 끼친 사람이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불쾌하게 하고 있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슬퍼했어야! 옳지만,거의 나 혼자만 슬퍼하도록 남아 있었으나 내가 전혀 혼자라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가혹하게 너희들을 조이는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라고 본다 ...

 

이런 식으로 본다면 둘째 소절은 첫째 소절을 바로잡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의 해석이 보다 더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이 문장을 하나의 계속적인 발언으로,  곧  그 사람이  나뿐아나라 너희들 거의 모두를 괴롭혀 오고 있다'는 식으로 읽기 때문이다.  내가 크리소스톰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일부분' 이라는 표현으로서, 나는 이것을 ‘어느 정도’로 본다. 암브로스는 고린도교회가 갈라져 있었다는 근거에 입각해서 이것을  '성도들의 일부’로 번역하지만, 이것은· 건전하다기 보다는 재주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

"6.  이러한 사람이.~~~~ 것이 족하도다" ; .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지었으며, 그들이 그의 죄를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상대로 화를 낼 수 밖에 없던 장본인에게까지 자신의 관용을 확대하고 있다. 그가 더 큰 처벌을 받아 마땅했던 사람을 즉시 용서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얼마나 과격한 가혹성을 싫어하는가 하는 점을 고린도교인들에게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특별히 그들을 상대로만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본래 너그러운 성격의 사람이었다. 여기서 고린도인들은 그의 크나큰 인정에 대해서 주시해야 한다. 더우기 그는 그가 너그럽게 나올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점을·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그 죄인을 동일하게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또한 당부하고 있다. . . . .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상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자기 계모와 근친상간의 결혼을 함으로써 자신을 더럽힌 사람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실수였기에 바울은 그를 추방하도록 명령했었다. 그는 또한 고린도인둘이 그 죄를 숨기고 그처럼 오래도록 그들 사회에서 용납한 점을 들어서 그들이 그것을 조장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꾸짖었다. 이 귀절에서 살퍼보건데 이 사람이 교회의 경고를 받은 다음에 회개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바울은 여기서 그를 용서하고 위로함으로써 북돋아 줄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 귀절은 세밀한 겁토를 팔요로 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교회의 규율이 너무 가혹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불편 부당하고 온유하게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혹성이 필요한 것은 사악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지나침으로써 더욱 더 대담하게 되는 일--이것은 죄로의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반면에 훈계를 받고 있는 사람이 낙심하게 될 염려도 있으므로 교회는 온건을 행사하면서 그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했다는 점이 확실하게 되면 당장 그를 용서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보기에 초대 교회의 갑독들에게는 이 방면에 있어서 지혜가 부족했으며, 그들에 대한 변명을 찾을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실수를 주의함으로써 그것을 피하는 법을 배위야 좋을 줄 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한 죄인이 회개한 다음에는 교회로 합쳐지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그들온 회개를 계산에 넣지 않고 참회의 기간을 3년 또는 7년,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으로 정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가련하게도 불행한 사람들울 교회와 계속되는 교제로부터 제외시켜 버렸다. 이와 갈온 대우를 받는 죄인은 교회로부터 더 멀어져가거나 아니면 위선에 말려들기 마련이다. 설령 이런 습관이 그 자체로서는 허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사도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돗이, 성령이 명령하는 죄인 처우(處遇) 방법과 다르기 때문이다.

 

"7.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 잘못을 저지론 사람을 추방하는 목적은 그가 자신의 죄악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겸손하게 되며, 순수한 뉘우침과 죄악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용서를 청하도록 하는 데 있다 .. 순수하계 뉘우치고 죄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비는 단계에 까지 온 사람은 징계가 아니라 위로를 필요로 하며, 그를 계속해서 가혹하게 대우하는 것은 훈계가 아니라 잔인한 직권 남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규율이 이 한계를 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죄인을 낙심시키도록 하는 기회를 사단에게 주는 것보다 더 위험스러운 일도 없다. 자신의 죄 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 자들의 말을 듣고-감동을 받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언제나 사단의 손아귀에서 놀야나는 자들이다. • I

 

"9.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 ; 그는 자신에게 제기될 수 있었던 반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곧 ‘우리가 이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해서 당신은 화를 내고 있는데 이건 무슨 뜻이요? 갑자기 엄격한 재판관에서 변호인으로 바뀌다니, 이것은 줏대가 없는 사람의 징조 가 아니요?' 하고 질문할 사람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한 인상온 바울의 권위를 크계 훼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가 원했던 것을 이제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곧 만족스럽기 때문에 이제 지신의 화가 관용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답변하고 있다. 그들의 경솔이 교정된 이상 절망한 나머지 엎드러져 있는 사람에게 그들이 자비를 보여주지 않고 그를 다시 맞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전무하다. 

 

"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 그들의 호의를 더 쉽게 받으려는 뜻에서 그는 그들이 허용한 사면을 인준하고 있는데, 그것온 ‘주저하지 말고 그사람을 용서하시오. 나는 여러분들이 행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확증하기로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도 그 사람을 용서하기로 한 여러분의 결정에 동의를 표하는 바입니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는 계속해서 그가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이렇게 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미 그가 얼마나 이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입증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그가 고린도교인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동의를 표하겠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바울이 이 화해를 이름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며 그의 신분을 대표했다 해서 ‘그리스도 앞에서'를 ‘그리스도의 신분으로'라고 읽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단순히 그의 용서가 진지하고 꾸밈이 없다는 점을 밝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깨끗하고 가장이 없는 진실성을 지시함에 있어서 대개 이런 표현을 잘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다른 독법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가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하도록 하자. '

 

"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합이라" ;  이것은 그가 앞에서 과격한 술픔을 두고 이야기한 내용과 관련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단의 가장 악독한 술책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서 모든 위로를 박탈하고, 그 다음에 우리를 절망의 심연속에 집어 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크리소스돔의 해석이다. 나는 이것을 바울과 고린도교인들에게 관련시키는 편을 택한다. 사단은 두가지 위협, 곧 너무 매정하고 가혹하게 되는 위험과 그들 사이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위험을 그들에게 덫으로 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혼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인간은 바로잡는데 너무 열성적인 나머지 바리새인적인 가혹성에 빠져 가련한 죄인을 치료하기보다는 그를 내던지고 마는 수가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바울은 여기서 둘째 위협에 대해서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가 어느 정도 고린도교인들의 소원을 제지하지 않았던들 사단은 그의 위치를 이용해서 그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의 경고를 통해서 알고 있듯이, 그가 우리를 공공연하게 해칠 수 없을 경우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죄는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 우리를 기습 공격하는 것이다. 그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며 은밀한 시도를 반복할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미리 앞을 내다보면서 아무런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이다. 그가 사용하는 '궤계'라는 단어는 '참마 ; 계획'라는 히브리어와 의미가 동일하지만, 여기에는 나쁜 의미가 담겨 있다. 곧 이것은 신자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하며, 또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할 경우, 경계하게 될 기발한 음모와 술책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단이 그의 모든 세력을 동원해서 우리를 파괴하려 덤빌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또 하나님께서 사단이 사용할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으므로 우리의 할 일은 그와 대전 할 준비를 갖춤으로써 그가 우리의 갑옷에서 아무런 틈을 발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

"12"'13절 내가……드로아에 이르매" ; :그는 그가 최근에 하고 있던 일, 그가 방문했던 지역, 그리고 그가 따랐던 코오스를 열거함으로써, 그가 앞에서 말한 대로 고린도인들을 찾아가고자 했던 점을 더욱 더 강력하계 확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에베소에서 드로아로 돌아온 것은 복음을 위해서였다는 점과 그가 마게도냐를 통과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그 길을 통해서 아가야로 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고린도로 보낸 디도를 드로아에서 찾지 못하고, 따라서 그가 고린도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기대했던 소식을 그에게서 얻을 수 없게 되자, 물론 거기서도 얼마든지 유익한 일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제쳐 놓고 디도를 만나 보기 위해서 마게도냐로 갔다. 고린도인들에 대한 자신의 관심 때문에 아무데서나 곧 크계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마저 그들의 소식을 듣기 전에는 편히 쉴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그의 아주 특벌한 애정올 입증해 주고 있다.

 

여기서 왜 그가 방문을 지체했는가 하는 점이 분명하게 드 러나는데, 그것은 그가 디도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는 그들에게 오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디도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는 자신의 방문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접을 깨달았다. 여기서 바울이 고린도인들을 얼마나 사랑했던지스 그들을 위해서라면 그의 여행 계획을 바꾸어 ;수백 리라도 여행할 각오를 하고 있었으며, 그가 약속한 것보다 뒤늦게 그둘에게 도착한 것은 그가 자신의 약속을 잊어버렸거나, 성급하게 마음을 바꾸었거나, 줏대 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지체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 나을.것이었기 때문이 라는 접아명백하계된다.·

 

"문이 내계 열렸으되" ;  • .l-나는 이미 고린도 전서의 마지각장에서 이 비유를 다문 바 있다; 그의 뜻은 복음울전전시킬 기회가 스스르 드러났다는 것이 다·"문이 열려 있어야' 들어갈수 있는 것과 마찬가자로주의규종들은 그들 에게 기회가주어처야전전을보게된다. 문이 닫혀있다는것은성공와가 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경우를 뜻한다. 따라서 문이 휴닫혀 있을오경우 우리논 그첫을 뚫고 들어가려-.하다가 공연히 지쳐버랄 것이 『아니.라 다른.7J..로 가 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교화(敎化)의 기회가·드러날!경우에는[우리로 하여 금 그라스도를 그 곳에 '소개:하도록 하나님 의 손에 ;의 해 서 ~ 우리에 게 A문이 열 려지고 있다는 첩을 깨닫고서, 하나님께서그처럼 너그럽게예;:허용하시는 초청 을거철하는일이없어야겠다

 

언뜻 보기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이 기회를무시하고, 아니..,._최소한그것을 포착하지 못하고대신 마계I도냐로 가기로 한-·~{는찰못인 것으로 보일는지 모본다_:_그는자기 손가까이 있는 일을 지작만하고·급급히 다른곳으로 가기 보다는 그 일에 몰두해야 하지 않았는가? '나는 '바울이’ 결코 한-교회에만 관십을 두처 않교 다론 많은 교회에 대해서 :항상 책임감을`느끼고`있었다 고 대당하겠다 .. '.따라서 당장 눈앞에 있는 상황 때문에 이 다른 교회에.대한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그에게 옳은일 될 수없었을것이다. 또한 고린도교회와 자신과의 관계는 너무도 밀접한 것이므로 그는 언제라도 그 교회를 돕기 위해 특별히 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사역의 바탕이었던 교회에 대해서 그가 특별한 애정을 느끼는 것은 얼마든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전체·교회 (the whole Church)를 섬기고 전체 몸(the whole Body)을 ,보살피는 것이 물론 우리의 임무이지만, 각자는 자신이 특별히 섬기도록 묶여 있는 자기 교회에 대해서 더 강하고, 성스러운 유대를 갖기 마련이다. 고린도의 사정이 너무도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그 결과에 대해서 초조해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불안이 아니라면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울 기회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자기에게  '열려진 문'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무손 대책을 세우지 않고는 드로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다.

 

"14. 항상 우리를……이기게 하시고" ;  이 동사를 직역하자면 ‘우리를 상 대로 승리를 거두는 자’이지만, 바울의 의도는 라탄어에서 쓰이는 이 귀절 의 일반 의미와 다르다. 포로들에게 욕을 보이려고 그들을 쇠고랑으로 묶어 서 정복자의 마차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을 가리켜 개선식에서 포로들을 끌고 간다고 말한다. 그러 나 바울의 의도는 자신의 일을 동해서 개선을 이루었으 므로 자신이 하나님께서 축하하고 있는 개선식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것 온 주로 참모들이 대장의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가면서 그의 개선에 참여 하는 것 이 나 마찬가지 이 야기 이 다. 따라서 복음의 모든 사역 자들은 하나님 의 깃발 아레서 싸우고 하나님을 위해서 승리와 개선의 영예를 획득하는만 큼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군대에서의 위치와 그의 노력에 따라서 그의 개선 에 참여하게 해주신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개선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개선하시는 것은 그리스 도의 신분을 통해서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하나님 나라(imperium)의 모든 영 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를 통해서 승리하는 자’로 번역하는 편을 택한다 하더라도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  승리란 바울이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얼마의 사람들에게 가져다 줌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강력하고 영광스럽게 역사하셨으며, 건강을 주는 그의 은혜의 냄새를 이 세상에 가득 채우셨다는 것이다. 그는 ‘냄새'라는 비유를 더 사용하면서 복음의 아름다운 향기와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그것의 능력과 효력을 강조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의 전파에 향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의 향을 통해서 영혼에 생명을 가져온다는 점을 그들에게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에 있어서 올바른 진전을 보는 유일한 길온 그리스도의 향기에 이끌리며, 그 결과 우리가 세상의 여러 유혹을 작별할 정도로 그리스도만을 바라는 데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그는 '각처에서'라는 말을 덧 붙임으로써 그가 가는 모든 곳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그의 일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인들은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미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복음이 그들 모두에게서 크게 칭송을 받아오고 있다는 점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사역의 성과를 두고 자랑하면서 그가 찾아다닌 여러 곳에서 게으름을 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자랑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은 그가 감사로 시작해서 끝나는 데도 감사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치켜 세우려는 욕망으로 자신의 업적을 축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속으로는 교만과 오만으로 우쭐대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척하는 바리새 인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있어서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이 하 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만 극찬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가 자신의 칭찬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그가 다른 곳에서 그처럼 성공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오고 있다는 점을 들을 때, 그들 가운데서의 그의 활동이 공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로 하여금 당장 인정하게 하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서 그처럼 영광스럽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도록 한 사역(使役)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크게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무시하거나 얕잡아 본다는 것은 죄악이다. 고린도인들에게 있어서 바울의 사도직과 가르침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품는 것보다 더 해로운 일이 없었으며, 양자를 존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도 있을 수 없었다. 자기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그로서는 자신의 침묵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외에도 그는 이 거룩한 자랑을 자신의 적대자들의 악의와 대조시키고 있다.

 

"15. 우리는……그리스도의 향기니." ; 그는 그가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해 온 동일한 비유를 사도들에게 적용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세상의 빛으로 볼리어지고 있는 것온 그들 자신에게서 어떤 광채를 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눈을 뜨게 (illuminate) 하기 때문이 듯이 , 그들이 여기서 향기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서 무슨 향기가 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져오는 가르침이 온 세상에 그것의 향기로운 냄새를 가득 채울 정도로 향기롭기 때문이다. 이 칭찬이 복음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한 것은 복음에 대한 순수하고 꾸밉 없는 전파가 있는 곳에서는 그 어느 곳이고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강한 향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여기서 특별히 자기 자신과 그의 동료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를 헐뜯는 자들이 잘못으로 주장하는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고린도인들 가운데서 일부가 그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은 그를 반대하며 증오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그의 답변은 복음의 충실하고 진실한 사역자들은 그들이 구원의 향기로 영혼들을 살릴 때만 아니라 그들이 불신자들에게 사망을 가져올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향기를 풍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이 제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어야겠다. 그는 선택 받은 자들을 재 창조시켜 구원받게 하는 냄새나, 버림 받은 자들을 괴롭히는 냄새가 둘 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전파의 결과가 무엇이든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의 순종이 그분께 받아 들여질 수 있는 것인 이상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훌륭한 귀절이다.  복음이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해서 그것의 훌륭한 이름이 멸시 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버림 받은 자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때도 영광을 받으시며, 이것은 어떻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향기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그래야 마땅하다. 곧 복음 전파에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결과가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 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버림 받은 자들에게 정당한 처벌을 가져 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경우 그것으로 충분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복음 선포자들의 성과가 항상 그들이 원하는 만큼 크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들이 나쁜 냄새를 피운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께 향기를 뿜어 올리고 있으며, 세상의 코에 불쾌한 것도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에게는 향기가 된다는 점을 알고서 더없는 위로를 받기 마련이다. 그는 ‘냄새'라는 단어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복음 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던지 그것은 그것의 맛뿐 아니라 냄새만으로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다.  결과가 생명이든 죽음이든 그것이 결코 공연히 전파 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조금 뒤에서 ‘생명의 사역'으로 정의하는 복음의 성격과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재기된다. 대답온 간단하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구원을 얻도록 하는냐? 에서 이것만이 참된 목적인데, 신자들만이 이 구원에 참여하며 불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정죄의 계기가 되며, 그렇게  만드는 장본인은 바로 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 분 없이도 정죄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어 풀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묶게도 하시며, 죄악을 용서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또한 그대로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시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빛이요, 불신자들을 눈 멀게 하시며 유일한 주춧돌이요, 많은 사람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시다. 그러나 복음의 올바른 기능은 항상 소위 말하는 그것의 부수적인 기능과·구별 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생명을 사망으로 바꿔버리는 인간들의 타락성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16. 이 사람에게는~~~~~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혹자는 여기에 이 감탄문이 끼어 있는 것이 오만을 경계하려는 뜻에서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선한 사도로 입증하는 문제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로 말하면서 그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선한 사역자들이 부족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나는 여기에:그가 계속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대조기 암시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말은 '직분은 일반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 자랑하지만, 그 자체를 가진다는 것은 아주.회귀하고 탁월한 특성이다.  나는 만약에 시험을 받을 경우 내게 없는 것으로 밝혀질 것에 대해서는 전혀 나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있다’ 라는 말과 다름없다.  교사의 직분을 수행하는 자들은 모두 거기에 마땅한 영예를 주장하므로 바울은 특별한 탁월성을 주장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조금 갖고 있거나 아니면 전혀 갖고 있지 않는 다른 교사들과 자신을 구벌하고 있다.

 

"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하지 아니하고" ;  여기서 그가 자신과 거짓 사도들을 더욱 더 뚜렷하게 구벌하는 것은 차이점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그들에게서 그가 자신에게 주장하고 있는 신뢰를 제외하려는 뜻에서이다. 곧 ‘내게는 나의 사도 직분을 두고 화려한 용어로 이야기할 권리가 있으며,· 설령 시험해 보더라도 허영의 죄가 있는 것으로 발각될 염려는 전혀 없다. 그러나 동일한 것을 스스로 주장하지만 나와 공통된 것을 전혀 갖지 않은 것으로 판명될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곧 그들은 내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모든 신의와 성실을 다해서 받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다' 하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꾸지람을 듣고 있든 자 들이 공공연하게 사악하거나 거짓 된 가르침을 전파한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추측컨대 그들이 이득이나 아니면 야심 때문에 올바른 교의의 용도를 와전 시켰기 때문에 그 속에 아무런 능력이 남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을 그는 ‘혼잡하게 만드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장사하는 것 '으로 번역 하고 있다. 헬라어 동사 '카페 엘류에 인'은 자기들의 물건 값을 올리려고 거기에 무엇을 섞는 장사들이나 여인숙 주인들의 나쁜 습관에서 유래한다. 나는 cauponari라는 동사가 라탄어에 있어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실히 모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대조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진리에서 떠나기보다는 그것을 거짓 된 의도에서, 그리고 순수한 성실성이 없이 강론하는 데서 오는 교의의 와전이라는 점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교의는 두 가지 면에서 곡해 될 수 있는데, 직접적으로는 거기에 기만과 거짓말이 섞임으로써 그것이 더 이상 순수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교의가 아니라 그 이름만 도용하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요, 간접적으로는 그것의 순결성은 유지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비뚤어지며 호의를 사는 데 사용하려는 못된 시도 때문에 변형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그 가르침에 있어서 경건한 것은 전혀 담겨 있지 않고 재치나 웅변을 전시함으로써 세상의 인준을 사고자 하는가 하면, 어떤 위치를 탐하거나 더러운 이득을 잡으려 하는 나머지 교의 그.자체를 더럽히고 그것을 자신의 악한 목적에 남용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불순한' (adulterate)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이 단어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장난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편의에 이용하려고 바꿀 경우 대개 일어나는 점을 훨씬 더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리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으며, 어느 정도 사이비요, 불순한 복음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

 

"곧 순전함으로~~~~~" ; 여기에 나오는 'as'라는 단어는 다른 많은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덧붙여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이미 언급한 곡해를 순수성과 대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파의 성격과 전파자들의 동기 양자에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나는 후자를 택한다. 둘째로 그는 이 곡해를 자신의 신실하고 양심적인 사역과 대조하고 있다. 곧 그가 복음을 손에서 손으로 교회에게 신실하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은 이것이 그가 위임 받은 일이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이다. 세째로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덧붙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이 세가지를 마음에 새긴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할 위험이 없다.  먼저 우리의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열성에 입각한 것이어야 하며,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오직 그로부터 온 것만을 소개해야 하며, 세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고 계시다는 점을 명심하고 모든 것을 그의 판단과 관련시키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는 ‘그리스도에 따라’ 라는 표현과 같다.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두고’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