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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후1:9)

1. 성경 (고후 1: 1 ~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2)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3)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4)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5)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6)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7)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8)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9)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0)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사도 된 바울" ;  ,자신을 그리스도의 한 사도로 소개하며, 자신이 ‘하 나님의 뜻으로' 이 영예를 차자했다는, 점을 설명하는 이유는 고린도전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들과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만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지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부르심과 거기에 부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요건이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거짓 사도들도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권리가 아닌 직책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아주 쉽게 그들의 주제 넘음을 간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사회에서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만다.  속이 없는 이름만의 사도란 무용지물로서 사도로 자처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의 행동으로 그의 주장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교회~~~" ;.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잘못이 있었는데도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체 안에 신앙의 참된 특성이 있는 교회는 비록 그것의 개별적인 회원들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성도에게'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들은·교회 밖에 있던 성도들인가? 나는 그가 그 지역의 먼 곳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대답한다. 이 소란한 시대, 곧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사방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던 시대였기에 함께 모여  예배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먼 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시며" ;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가 감사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칭송하고, 자신의 본을 통해서 고린도인들에게 용감하게 박해를 견딜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두고 자랑함으로써 거짓 사도들의 악의적인 날조에 대항해서 자기 자신을 주장하려는 뜻에서이다. 세상의 사악성이 일마나  지독하던지 그것은 마땅히 경탄해야 할 순교를 깔보며, 경건한 사람들의 경이적인 승리에서  중상할 원인을 찾으려고 꾀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관계 대명사 'who'에는 원인의 의미인 ‘왜냐하면'(because)의 뜻이 담겨 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고통을 용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견디어 왔는데, 그가 이 용감한 정신을 하나님의 덕으로 돌리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곁길로 가지 않은 것이 그의 위로의 지지이기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데, 그의 축복을  '기억함에 있어서 이 명칭이 아주 적절한 것은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는 아무런 축복이 없기 때문이다. 천상천하에 온 식구들의 이름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 하나님의 모든 자비와 위로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다른 모든 축복의 원인이 되는 그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있다.

 

"4. 우리로 하여금~~~~~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그는 앞에서 자신에게 산적하게 뒤집어 씌워지고 있는 수치와 중상모략으로부터 자신의 고통을 변호했듯이, 여기서는 고린도인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동해서 얻은 승리가 그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오만하게 자신의 투쟁에 멸시를 퍼붓지 말고 자신의 안내에 참여할 용기를 갖게 하고 있다. 이 사도는 자신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살았으며,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들을 더욱 더 돕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때 그의 본을 따라 우리 이웃에게 너그러울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셈이다. 성령의 재물은 우리 스스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받든 남에게 전해야 한다. 이것은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특별히 적용되지 않으면 안되지만 누구에게나 그의 상황에 따라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로 지탱해 온 것은 그가 남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 이 발언은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나 모두 해석 될 수 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의미는  ‘내가 다양한 고통을 통해서 더 시련을 받을수록 나는 남들을 위로하는 데 있어서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고통이 증대할수록 하나님께서 제공하는 위로도 그 만큼 더 클 것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를 택하고자 한다. 다윗 역시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94:19) 라는 말로써 이것을 체험했다는 감정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말로 된 이 가르침이 더 명료하다. 곧 그는 경건한 자들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한다(골1 :24). 물론 선인이나 악인이 모두 이 현세의 비참함과 고통을 당하지만, 그것들이 불 경건한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인 것은 바로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는 유일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아담의 운명에 있어 우리의 참여에 대한 것이요, 그것들의 유일한 결과는 영혼을 낙심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몸 속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혼적을 지님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이 앞으로 그들 속에서 드러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데 있어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물론 주께서.그들의 죄 때문에 부과하는 처벌이 그들에게 유익한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베드로전서 4장 13절에서 보듯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기 전에는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환난 가운데서 자신과 함께하고 계시며 자신이 약한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위로에 의해서 지탱되어 오고 있어서 자신에게 떨어지는 질고를 이겨 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6~~7절.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이라는 귀절 앞에 ‘그리고'(and)라는 단어가 삽입됐는데, 이것 때문에 에라스무스는 ‘너희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이다'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우리가 고통을 받는 그것은 너희들의 위로를 위해서이다' 하는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이 연결하는 ‘그리고'(and)라는 단어가 ‘따라서 또한'이나 ‘두 경우에 있어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그가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이 그것을 남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말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그 위로에 동참할 것이라는 한결 같은 소망을 품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더우기 가장 오래된 헬라어 사본 가운데는 첫 소절 다음에 곧 이어서 "너희들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한결 같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러한 독법을 따르면 애매한 점이 제거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중간에 올 경우 우리는 이것을 앞 문장과 뒷 문장을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두 소절에 동사를 덧붙임으로써 완전한 문장을 만드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별로 해로운 점이 없을 것이요, 의미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을 하나의 계속적인 문장으로 본다 하더라도 이것의 두 부분을 이 사도가 고통을 받고 위로를 통해서 새롭게 된 것은 고린도인들의 유익 때문이요, 따라서 그의 소망은 그들이 마침내 자신을 위해 저장되고 있는 동일한 위로에 참여하는 것이 라는 의미로 설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 최선의 것으로 생각되는 독법을 따랐을 뿐이다. 

 

여기서 ‘환난받는'이라는 단어가 단지 외적인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내적인 불행과도 관련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 할 필요가 있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대조되고 있는 '파라칼레이스다이 ; 위로받는' 라는 단어와 그 의미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사람의 마음이 그가 느끼는 불행 때문에 불안으로 짓눌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위로’로 번역하는 헬라어는 '파라클레-시스' 로서, 여기에는 권면의 의미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여기서 사람의 마음에서 술픔을 덜어주고 소생시켜 주는 위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가령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의 위로로 격려하고 들어 올려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 무거운 고통의 짐 밑에 거의 깔려 죽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인들은 바울의 고난에서 힘과 용기를 얻고 있으며, 그의 모범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다. 이것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고린도인들 가운데 자신의 고통을 그를 멸시하는 구실로 삼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을 보고서 그들의 잘뭇울 교정하고 있는데,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고난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고 있기 때문에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점올 보여주고, 다음으로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고통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고난을 받든 위로를 받든 이것은 모두 여러분들의 혜택을 위해서요, 그것이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누릴 혜택이라는 점이 나의 확실한 소망이요' 하는 말과 다름없다. 바울의 고통과 위로는 만약에 고린도인들이 고의적으로 자신들에게서 이것을 박탈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신앙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공연히 그들 때문에 고난을 받고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할 정도로 고린도인들을 크게 신뢰하고 있음을 밝히 말하고 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그에게 불리한 치욕으로 뒤집어 씌우려고 발 버둥치고 있었다. 만약에 그들이 고집을 계속 부렸다면 그들은 바울이 그들을 위해서 당한 고통들을 무용지물로 만둘었을 것이요, 주께서 그를 소생시키는 데 있어서 사용하신 이 위로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술책을 목격하고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공언하고 있다. 그의 고통이 신자들에게 위로의 근원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그가 복음을 위해서 그처럼 수많은 고통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것을 보고서 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감수해야한다는 점을 당장 인정하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의 연약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만들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성도들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용기를 얻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개인적인 위로가 전체 교회에 흘러 넘쳤던 것은 그것을 통해서 신자들이 바울을 지탱하고 그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새로운 힘을 주신 하나님께서 결코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을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그의 고난 받음과 위로 받음을 통해서 증진되었다. 이것은 그가 ‘너희도 견디게 하시니라’라고 덧붙여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가 이 소절을 덧 붙이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가 받고 있던 고난 그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상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에라스무스는 '에네르구메네스 ; 역사'라는 단어를 적극적인 활동으로 보지만, 소극적인 의미가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활동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여기서의 유일한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고난 받는 쪽은 자기 혼자이지만, 그의 고난이 그들의 구원에 효용이 되는 것은 그의 고난이 그들의 죄에 대한 속량이나 희생 제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난이 그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울 확립해 주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구원이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뜻에서 그는 위로와 구원을 하나로 묶고 있다.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 고린도인들 가운데 일부가 거짓 사도들의 허위 때문에 바울과의 사이가 일시적으로 멀어졌으며, 그 결과 그의 평판이 그가 세상 앞에서 수치스러운 대우를 받고 있는 그 방법에 그들의 눈을 떨구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 불구하고 바울은 여전히 그의 고난을 서로 나누는 문제와 그의 위로에 대한 소망에 있어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을 공공연하게 꾸짖는 대신 그들의 자신에 대한 그룻되고 악의적인 견해를 바로 잡아 주고 있다.

 

"8. 형제들아 우리가……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  바울이 그가 관련되어 온 무수한 어려운 투쟁을 지적하는 것은 그가 쟁취한 영광스러운 승리를 더욱 더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뜻에서이다. 그가 지난번 서신을 보낸 뒤로 그는 크나큰 여러 위협을 당했으며 난폭한 공격을 견뎌내었다. 아마도 그는 여기서 누가가 사도행전 19장 23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건들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 갈다. 물론 그 대목에서는 위기의 심각성이 그처럼 명료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는 온 도시가 소란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나머지 사항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중적인 봉기가 일단 터질 경우 그 결과를 우리는 잘 알기 때문 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 점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에 지나도록 심하게' 박해를 받아 억눌려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이 비유는 육중한 짐의 무게에 눌려 넘어지는 사람이나 중량이 초과되어서 침몰하는 배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이것은 바울 자신이 실제로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지 않았던들 그의 힘은 부족하여· 실패할 수 밖에 없었음을 느꼈다는 이야기이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 곧  ‘그 결과 내 생명이 거의 상실된 것으로, 아니면 최소한 나에게 소망이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마치 전혀 도망할 가능성이 없는 감옥에 갇힌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라는 이야기이다. 그처럼 용감했던 그리스도의 군인이, 그처럼 당당했던 선수가 실재로 기운이 없음을 느끼고 '죽음 이외에 다른·무엇을 바라보지·못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불안이 자신의 절망의 원인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바울은 자신의 재원(resources)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느꼈던 점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힘이 사그러지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라도 자신의 연약성을 통해서 오로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인간의 힘의 완전한 붕괴의 위협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나는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엑사포레이스다이' 라는 단어를 나는 에라스무스의 ‘절망'보다 단순히 당황하는 불안의 의미로 보고자 한다. 바울이 뜻하는 것은 그가 어찌나 큰 난관에 봉착되어 있었던지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는 그 어떠한 방법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는 것이다.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즐 알았으니" ;  이것은 혼히 우리들이 말하는 ‘보나마나 나는 죽는 줄 알았지' 하는 식의 내용이다. 그는 자신을 오직 처형 시간을 거다릴 것 밖에 없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이 사형 선고가 스스로 부과한 것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본 것은 자신의 판단 뿐이었다는 뜻이다. 그 까닭은 그가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계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맨 마지막 절의 '엘 사포레이스다이'  넘어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핵심은 그가 왜 그와 같은 위기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한 그의 설명이니, 그것은 ‘우리도 자기를 의뢰하지 말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나는 바울에게는 실제로 굴욕을 통한 교훈이 필요 없었지만 남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뜻에서 자신을 일부러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는 크리소스톰의 견해에 찬동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인간의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추위와 더위뿐 아니라 잘못된 신뢰, 성급함 등등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나는 그가 이런 잘못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런 것을 통해서 시험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가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체험은 하나님께서 그런 잘못들이 그에게 '영겨붙지 않도록 제때에 제공하신 치료책이었던 것으로 이야기 할 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우리를 들뜨게 하는 육신의 자만이란 참으로 집요한 것이어서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극심한 절망에 빠지는 것 뿐이다.  육신은·교만하며 자진해서 굴복하지 않는 만큼 그것이 억지로 제어될 경우에 한해서만 그것의 이러 저러한 핑계가 그치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박살 내는 손길에 의해서 납작해지기 전에는 실제로 굴복하지 않기 마련이다. 둘째, 우리는 이런 종류의 교만의 병폐가 성도들에게 있어서까지 남아 있으므로 들의 모든 자만을 벗겨 버리고 겸손을 배우게 하려면 그들 역시 아주 빈번하게 극심한 상황에까지 전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이런 일이 인간의 마음에 얼마나 깊게 뿌리를 박고 있던지 우리들 가운데 제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사망을 대면하게 하기 전에는 이 악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형 선고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볼 때 우리의 자만이 얼마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자만을 포기하고 우리의 연약성을 인정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에 대한 거짓 된 주장을 중지하도록 하려면 우리는 먼저 죽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을 경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먼저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곧 우리는 스스로 낮아지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다시 일으켜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육신의 교만이 무(無)로 떨어진 다음 곧, 이어서 그 자리에 하나님께 의지하는 확신(confidence)을 놓아두고 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브라함을 두고 이야기할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논리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롬4 :17). 다시 말해서 ‘있지 않온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죽온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은 무에서 그 선택자들을 창조하시고 죽어 있는 자들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사망이 자기 눈앞에 놓여진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자기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크게 인정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제 1단계는 물론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힘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우리의 우매함이 어찌나 심하던지 우리의 눈은 현세의 빛에 곧 잘 현혹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데려와지기 전에는 죽음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될 정도이다.

 

"10~11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일반적인 발언을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함에 있어서 자신의 기대에 실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죽음에서부터 그것도 더없이 경이적인 방법으로 구출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과장법온 성경에서 회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선지서와 시편에 자주 나오며, 일상생활에서도 역시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점을 각자의 경우에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바울은 그가 과거에 그처럼 자주 체험했던 하나님의 친철이 장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을 자신에게 확증하고 있는데,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음은 주님께서 그가 약속하신 것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시면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을 당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로부터 받는 모든 호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확증하는 담보요, 보증이다. 바울은 물론 하나님께서 기꺼이 자기와 함께 계셔 주심울 전혀 의심치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들의 기도로 자기를 도우라는 가정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권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다만 하나의 의무로서 그렇게 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혜택을 입힐 것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또한 나를 도울 것입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건성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역시 유익이 된다는 말을 듣고서 우리는 이에 격려를 받아 우리가 역경에 처할 때 우리 형제들의  중재를(intercessions) 간청하고 마찬가지로 동일한 도움을 그들에게 베풀어야 바람직하다. 사도가 자기 형제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결코 신앙의 부족이 아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인간적인 도움이 자신에게서 철회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전을 돌보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교회의 기도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인정 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지지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고려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갖도록 의도하시는·도움의 근원을 어느 것이든 소홀히 하지 않고자 했던만큼 그는 자기 형제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바랐다. 이 문제를 요약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되 그것의 계명들을 순종하고 그것의 약속에 집착하는 방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자들의 기도에 호소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앞의 말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은혜의 수단으로 만족하지 않고; 전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생소한 것을 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서로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 속에는 죽은 자들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명백히 살아 있는 자들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교황주의자들이 이 귀절에서 그들의 미신적인 관습의 지지를 얻으려 하는 것은 유치한 짓이 다.

 

"너희도……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 바울의 이 대목에서는 약간 어려운 문제가 있으며, 거기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내가 다른 번역들울 여기에 소개하지 않고 건너뛰는 것은 우리가 참된 의미에 있어서 의견의 일치를 본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고린도인들의 기도가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는 그들의 기도로부터 얻게 될 두번째  혜택을 덧붙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더 위대한 계시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축복이 많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그는 말하고 있다. 또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 데 있어서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신 만큼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사람들이 많을것이다' 라고 옮겨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호의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찬양을 드리지 않고는.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특별히 우리는,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호의적인 응답을 주실 경우 그의 자비를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편 50편 15절에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사적인 이익이 개재될때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반적인 안녕이나, 우리 형제 중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다가 우리의 요청하는 것을 받을 때 하나남의 영광이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온 우리 모두가 개인들과 교회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는 전혀 여지가 없다. 물론 헬라어에는 ‘많은 사람'과' 나에게 베풀어진 은사' 사이에 관사가 들어 있어서 양쪽을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귀절들에서 혼히 볼 수 있듯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그것이 '반의적인 단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은 비록 그 은사의 근원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오로지 바울에게만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처럼 '디아폴론'울 중성으로보는 것온 문맥과 일치하 지 않는다. 여기서 왜 바울은 많은 남자들로부터 ' (from many men)가 아니라 많은 사람둘로부터 ' (from many persons)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 이 ‘사람(person)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그가 많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 (with respect to many)라고 말한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바울에게 호의가 베풀어전 것은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려는 뜻에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 둘을 마음에 두고 계셨으므로 바울은 많은 ‘사람들'(persons)이 관련되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헬라어 사본 가운데는 '휘페르 휘몬 ; 너희 들 때문에'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울의 의미와 이 대목의 문맥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사실온 ‘하나님께서 나의 안녕과 또한 너희들의 안녕율 위해서 너희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면 많은 사람이 너희 때문에 감사를 드릴 것이다’라는 뜻으로 설명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