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후5:18~21)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8)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19)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0)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21)
2. 묵상 (칼빈선생주석)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중생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것은 결코 혼한 은사가 아니다’라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일반적인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의 선택자들에게 수여하는 중생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 은혜가 하나님께서 나온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자와 조물주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그의 형상으로 개조하심으로써 교회의 새로운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육신은 겸손하게 되고 신자들은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권고받고 있다. 이것을 그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세상을 망각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니,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이제는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 혜택을 받는 수단이나 이들은 앞에 이야기된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선한 양심이 온갖 종류의 특성보다 낫다는 점을 보여주고, 사도는 여기서 계속하여 전체 복음이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 다. 그와 동시에 그는 사도직의 참된 가치를 보여주면서, 외적인 모습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참된 사도들과 거짓 사도들을 구벌할 수 없던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사도에게서 마땅히 찾아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권면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그는 그들에게 복음의 가르침에 있어서 더 큰 진전을 보도록 격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보다는 자신들의 야망을 섬기는 세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어리석은 찬사는 복음 전파자의 직분에 무엇이 포함되고, 그것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데서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두가지 요점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하자.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 다’는 접이다. 곧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점과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셨다는 설명이 따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실천하신 방법이 다음에 덧붙여지고 있는데, "저희의 죄를 저회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요점은 이 화해의 은혜가 복음에 의해서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으므로 우리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의 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서 글자 하나 하나를 세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 ..." ; 여기서 복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사신을 통해서 전달된 메시지로 아주 훌륭하게 묘사되고 있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권을 가진 사신과 우리에 대한 그의 선의의 보증으로서 우리에게 파송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역자들을 영화롭게 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경건한 자들을 위로 하려는 뜻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하고 계시며, 말하자면 그들이 그의 은혜로 들아가는 문제를 놓고 그들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겠다. 이보다 더 바람직한 축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
따라서 비록 본성으로 볼 때는 진노의 자녀들이지만 하나님과 우리와의 싸움이 해결될 수 있고, 또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온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자. 사역자들에게 권위가 주어진 것은 이 좋온 소식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더욱 더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제대로 임명받은 사역자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되셨다는 점을 복음으로 선언할 때,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하고 이것을 우리에게 선언할 정당한 권위를 부여 받은 하나님 의 사신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1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 혹자는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그에게 화해하고 계셨다”는 뜻으로 보지만, 거기에는 이보다 더 깊고 자세한 의미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점과, 다음으로 이 개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하셨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로 이야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요한복음 10장 38절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아들(the Son)을 가진 자는 아버지 (the Father)도 .. 또한 가지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에 의해서 우리와 소통하시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또한 발견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족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는 ‘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멀리 계셨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참 임마누엘이 되시고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님을 인간에게 가까이 이끄는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둘째 소절은 그리스도의 일, 곧 우리의 화해(propitiation)하는 문제와 관련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의에서 떠나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떠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인가? 화해를 위해서이다. 곧 적대감이 끝나고 낯선 자들인 우리가 자녀로 입양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오심의 원인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중보자에 의해서 화를 푸셨다는 점을 알기까지는 그들을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구별이 그들 편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상세하게 나온다.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 여기서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가 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의로운 취급, 곧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음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시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증스럽게 여기실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죄인들을 다정하게, 또는 은혜롭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엔 1 : 4) 하는 귀절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 의해서 속량한 이유였다는 점을 말씀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원인은 항상 결과보다 앞서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창세 전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와 무관했던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의 사랑이 시간과 순서에 있어서 먼저였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제사 안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중보자와 무관하게 하나님을 생각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를 내시는 것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중보자가 우리 사이에 개입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화를 푸셨다는 점을 우리가 알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의 근원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셨다는 점을 또한 우리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성경은 분명하게 양자를 다 가르치고 있다.
곧 아버지의 진노가 아들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풀어지고, 따라서 아들이 인간들의 죄의 속량으로 제공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이 제사를 통해서 인간을 그의 은혜로 받아 들인다는 표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죄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전가시켜 도말하시기 전에는 그가 우리에게 너그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양심이 그리스도의 희생 사건과 무관하고서는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바울이 그것을 우리에 관한 한 화해의 근원과 원인으로 삼는 것이 옳다.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 그는 다시 이 화해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위탁이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인 그리스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는 얼마나 멀리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과거(once)에 고통을 받으셨듯이, 이제는 날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완성된 화해에 대한 확실한 기록으로서 이 세상에 주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의 고통의 열매를 제공하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역자들의 임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를 적용하는 데 있다.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교황주의자들이 고안해 내는 마술적인 방법으로 작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그가 다음에 말하는 내용과 이 적용이 전적으로 복음 전파에 달려 있다는 점을 세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황과 그의 사제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그들이 영혼 구원 문제를 두고 시행하는 아주 불경건하고 추한 형태에 대한· 일종의 보장책으로 이용 하려 들고 있다. 그들은 "주께서는 우리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위임과 권위를 허용하셨다” 라고 주장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바울이 여기서 묘사하는 그대로 사신의 임무를 수행한다면 여기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교황 주의자들이 실시하고 있는 사면(absolution)은 전적으로 마술적인 것이요, 그리고 그들은 죄의 용서를 납이냐 대리석상에 봉합하거나 그것을 허구적이요, 우스운 미신과 관련시킨다. 이 모든 것과 그리스도의 계명 사이에 무슨 유사점이 있단 말인가?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에게 화해하계 되었는가 하는 점을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르고 질서 있는 방향으로 회복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증거가 제거될 경우 남아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하찮은 협잡 뿐이다. 복음이 아닌 그 어느 것도 신뢰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라.. 물론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례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점과 그 속에서 우라와 하나님과의 화해가 우리의 양심에 확증된다는 접을 부정하지 않지만, 복음의 증거가 성례에 새겨져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성례는 그 자체로서 따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복음과 밀접하게 관련시켜야 하는 것으로 본다. 성례란 일종의 복음의 부록과 같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교회의 사역자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적합한 보증을 제공하는 복음에 입각해서 말한다는 조건에 서만 화해의 축복을 층거하고 선포하는 사신들이다.
"20. 이러므로……하나님이……권면하시는 것 같이" ; 이것은 더없이 중요한 귀절이요, 사실 우리의 사역에 권위를 주는 데 절대적으로 팔요한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관계되는 문제를, 오직 인간들의 증거에 의존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이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임명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점을 확신하지 않는 한, 인간의 보장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vital) 문제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도들을 우리에게 추천하고 있는데 "너희 말울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눅10 : 16)라고 하는 말씀과,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 : 18)라는 말씀에서 엿 볼 수 있는 그대로이다.
"우리가 간구하노니" ; 여기서 우리는 "복된 좋은 소식을……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52 : 7) 하는 이사야의 말의 정당성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완전한 축복을 위해 필요하고 그것이 없을 경우. 우리가 더없이 비참 하게 되는 바로 그것이 복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수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임무가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부과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수행하지 않는 자는 사도나 목사 취급을 받을 수 없다면 여기서 교황과 그의 전체 체제의 진실성을 침작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물론 사도들과 목사 취급을 받고 싶어하지만 그들 자체가 벙어리 우상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어떻게 그들의 교만한 주장이 바울의 이 말씀과 일치하겠는가? '간청한다’는 말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간청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을 정도로 낮게 엎드리라는 점에서 그의 은혜에 대한 놀라운 찬사가 담겨 있다. 그러한 친절을 받고도 우리가 당장 순응하지 않고 고분 고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악성은 더더욱 핑계 할 수 없다.
"너희는 화목하라." ;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날 마다 그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는 데, 이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꼭 한 번만 우리의 죄악을 속죄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며, 복음은 우리가 세례 받기 전에 지은 죄만 용서되도록 하는 뜻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있으므로 날 마다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로 받아들이시려는 뜻에서 제정되었다. 복음의 사신들의 일이 영구적인 것은 복음이 세상 끝까지 교회 안에서 쉬지 않고 선포되지 않으면 안되며, 거기에는 사죄에 대한 약속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성취된 속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세례 후에 지온 죄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도록 요청하는 교황주의자들의 불경건한 가르침을 반박함에 있어서 뚜렷하고 적합한 귀절이다.
교황주의자들의 모든 학교에 공통되는 가르침은 우리가 세례 받은 다음에는 열쇠의 힘(교황권)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참회에 의해서 우리 죄악의 용서를 빌지(to merit)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참회란 보상(satisfactions)이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세례 받기 전이나 후를 막론하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의 속죄를 지적해 보여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항상 값 없이 얻어지는 은혜(freely unmerited grace)에 의해서 용서를 받는다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고안해 낸 세례 전과 세례 후의 죄악에 대한 구별갈은 것은 전혀 생소한 일로 그냥 지나쳐버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황권 행사에 대한 그들의 법석이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사실 열쇠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신 화해에 대한 증거일 뿐인데, 그들이 이 열쇠를 복음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 바울의 모든 글에서 주목할 점온 오직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이 따로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책을 면제 받고자 할 경우 항상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하자. 혼히 여기에 나오는 ‘죄가' 죄에 대한 속죄 제사를 뜻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그 결과 그것이 라탄어에서는 paculum.으로 번역 되고 있다. 이것과 다른 귀절에서 바울은 이 표현을 히브리어에서 빌어오고 있는데, 히브리어에서 '아샴'은 속죄 제사와 잘못 또는 법죄의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다.
그러나 이 단어에 ·담겨 있는 두 가지 반대되는 면을 비교할 경우 이 단어와 전체 문장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죄는 의와 반대되는 것이다. 곧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죄로 만들어진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만들어진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의란 특성이나 습관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무엇이니, 그 까닭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의 저주가 회생 제물에게 내쏟아졌돗 이 그리스도의 정죄는 우리의 사면이요, 그의 매 (His stripes)로 우리가 치료되는 것이다.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 ; 먼저 하나님의 의란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용납될 수 있게 만드는 의를 뜻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12장 4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인준(認淮)하는 것을 뜻하고, 인간들의 영광은 세상의 헛된 인준을 사는 것을 뜻하는 것과 갈은 이치이다.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것으로 행세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것이 의에 대한 거짓 된 모방에 블과하고 마침내 우리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것만이 참된 의이기 때문이다. 이제 의와 죄에 대한 대조를 다시 검토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신 것과 갈다. 다시 말해 서 그리 스도께서 우리의 신분(person)을 취하신 것은 그가 우리의 이름으로 범법자가 되고, 그렇게 해서 죄인 취급을 받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물론 이것은 그 자신의 과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과실 때문이었다. 그분 자신으로 말하면 깨끗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하는 처벌을 담당하셨다. 이제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보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와 관련해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의 의를 신앙으로 우리가 덧 입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이 전치사를 ‘통해서' (per)로 대치시키지 않고 ‘속에(in)' 라는 단어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것이 바울의 의도에 더 일치하는 의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