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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10)

1,성경 (고후5:1 ~ 10)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1)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2)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3)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4)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5)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6)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7)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8)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9)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우리의 장막 집이" ; 여기에 그가 멘 마지막으로 지적한 요점에 대한 강조와 더 상세한 설명이 따르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초조, 우리가 십자가로부터 움츠러드는 것, 우리의 싫증, 비천함에 대한 우리의 멸시, 우리의 모든 교만과 까다로움을을·바로 하려는 뜻에서인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무시하고 우리 마음(minds)이 똑바로 하늘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의 논리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그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비천한 상태를 지적하고, 다음으로 하늘에서 죽음 뒤에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의 완전하고 최상의 복된 상태를 계속 언급 하고 있다. 인간들이 이 세상에 대한 잘못된 욕망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여 스스로 기만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다가오는 생활의 복된 상태와 영광을 염두에 두지 않을 경우, 현재 생활의 비극에 대해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살려고 하는 욕망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어서 그 무수한, 그리고 크나 큰 고통에 직면할 경우 양자가 다 자신의 상태에 끙끙대고 슬퍼하며 자신의 질고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다론 점이 있다면 불신자들은 육체의 질고만을 계산하나 경건한 자들은 영적인 고통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모든 인간은 사망으로부터 움츠러든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불신자들은 그들이 이 세상의 생명을 역겨워하거나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것을 저버리지 않고는 결코 자발적 으로 포기 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기꺼이 떠나는 것은 그들에게 이 세상 저편에는 더 좋은 소망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이론의 핵심으로서 이제 여기에 나오는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  이 지식은 인간적인 지력이 아니라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 오는 것으로 오직 신자들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방 민족까지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개념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했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자랑을 할 수 없었다.  오직 신자들만이 확신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의 증거에 의해서 그들에게 알려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지식이란 단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곧 신자에게는 그들이 죽은 뒤에 더 나은 상태에 들어간다는 일반적인 확신만 있고 자신에게는 확고한 신앙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일반적인 확신이 그와 같이 힘겹게 얻어지는 위로를 낳을 수 없다. 그보다 각자는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나로 하여금 죽음을 즐거운 마음으로 직면하게 하는 것은 내가 더 나은 생활로 떠난다는 확고 부동한 확신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몸을 가리켜서 그는 "장막 집"으로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막 용 천막은 확고한 기초가 없이 가벼운 재료로 만들어져서 후에 헐어 지거나 저절로 쓰러지듯이, 인간들에게도 그들이 오직 몇 날만 살 수 있는 허술한 오두막으로서 유한한 신체가 허용된 것이다. 베드로도 그의 둘째 서신에서 동일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으며(벨후1 : 13~14), 욥 역시 '흙으로 된 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영원히 지속되는 건물과 대조하고 있다. 물론 그가 이것으로 신자들에게 죽음 뒤에 기다리고 있는 복된 불멸의 상태를 뜻하는가, 아니면 신체가 부활한 뒤에 드러날 썩어지지 않고 영광스러운 상태를 뜻하는가 하는 문재는 명확하지 않다. 어느 의미도 다 적합하지만 나는 사망 뒤의 영혼의 복된 상태는 이 건물의 시작이요, 그것의 완성온 최후 부활의 영광이라는 견해를 취하는 바이다. 이러한 설명이 보다 더 이 귀절에 적합하다. 그가 이 건물에 적용하는 형용사들은 그것의 영속성을 강조해 주고 있다.

 

"3. 이렇게 입음은……" ; 그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상태, 생명의 확말성을 신자들에게 국한시키는 것은 그것이 오직 그들에게만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경건한 자도 신체를 벗계 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수치스러운 발가벗 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입혀지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로 옷입혀지고 그의 의로 장식되는 신자들은 불멀의 영광스 러운 옷을 받는다. 나는 이런 해석을 택하고자 하며, 크리소스톰과 다른 사람들의 견해, 곧 여기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고 바울은 오직 그가 영원 한 거처에 대해서 이야기한내용을되풀이하고있을 분이라는 견해에 동의하 지 않는다.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옷입혀 주시는가를, 곧 먼저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히시고, 성령으로 성화시켜 주시며, 죽은 다음에는 불멸과 영광으로 옷입혀 주신다는 점을 묘사하고 있다. 첫째가 둘째의 원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영화롭게 하기로 작정한 자들을 먼저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다 시'『(etiam)라는 단어에 의해서 암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앞에 나온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죽 이 세상에서까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옷 입혀 주신다는 점을 생각할 때 죽은 다음에도의복(clothing)이 그들을 위해 서 제공될 것이라는 말이나 다음없다.

 

"4.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 불경건한 자들도 그들의 현 재 상황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탄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에는 다론 감정이 우세하기 마련이다. 곧 현세의 생명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며, 그 결과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움츠러들며 이 유한한 생명의 오렌 지속을 짐 으로 느끼 지 않는다. 그러 나 신자들의 탄식 은 그들이 본향으로부터 떠 나온 망명 객 이 요, 감화원 (感化院)과 갈은 신체 에 갇혀 있 다는 그들의 지 식 으로부 터 일어난다. 따라서 그들이 현세를 침으로 여기는 것은 그들이 죽음이 아 니고는 최의 노예살이를 파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하고 완전한 행복을 누 릴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곳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 명을 가전 모든 것이 지속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어떻게 신자들이 삶을 중단하는 것을 즐거위할 수 있겠는가? 사도는 신자 들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무엇을잃으려는뜻에서가 아니라 보다더 나은 삶이 있다는 접을 말합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곧 바울은 이 생명 그 자체를 두고 고찰할 때 아무도 자기 옷이 벗겨지는 것을 원치 않듯이, 이 현세의 삶을 떠나는 것 울 우리가 자연히 싫어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멋있고 새로운, 그리고 질긴 옷을 입게 될 것이라 는 점을 확신할 경우 미련없이 남루한 옷을 내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 망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이것은 신앙의 확신을 동해서 극복된다 는 접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타"는 말로써 이 비유를 더 설명하고 있다. 살과 퍼로써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므로 우 리가 철두철미하계 새롭게 되고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려면 우리 본성(nature) 에 있어서 썩어질 것이 죽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 리의 몸이 우리가 포로로 갇혀 있는 감옥(career)으로 불려지고 있다.

 

"5.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 이것은 이 죽음에 대한 준비가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뜻에서 덧붙여지고 있다. 단순히 타고 난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죽게 할 수 없는 것은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쳐 죽을 때 따르는 백 배의 보상을 그것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이 준비 자세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이루어주시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방법울 여기서 덧붙이 고 있는데, 그것은 장차 올 것에 대한 보증과 맛(foretaste)이 되는 그의 영에 의해서 우리를 부축하시는 것이다. '또한'이라는 단어는 강조형식으로 덧붙여지는 것 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 안에 이런 욕망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용기가 식어지거나 동요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담보로 주시고 있다• 곧 그의 증거에 의해서 이 약속의 진리가 확증되고 비준되는 것이다’라는 말 이나 다름없다. 성령온 두 가지 칙분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신자들에 계 그들이 간구해야 할 것을 제시하는 것이요, 다음으로 모든 망설임을 재 거 하고 그들의 마음을 효과적 으로 갑화시 킵 으로써 그들이 꾸준하계 선한 것 울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루셨다’는 단어의 의미를 확대해서 거기에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세상에서 그의 백성에게 허용하는 생명의 갱신까지 포함시켜도 무방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오늘날도 그들 을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구벌하고, 그의 은혜로 말미압아 특별한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는 접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  이 말은 우리가 성령의 보증을 의 지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성령의 보증이 없다면 우 리에게는 항상 확신이 결핍되고,-때로는 용갑하다가도 두려위하게 되며 마 음의 통일성을 지키지 못하계 되고 만다. 바울이 여 기 서 말하는 ‘담대 합' 이란 그것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지탱되지 않을 경우, 전혀 우리 안에서 자리 를 잡지 못하고 만다. 다음에 나온 ‘그리 고' (and ; 한굳 개 역 성 경 에 는 생략됨-역자 주)라는 단어는 ‘왜냐하면'의 원인 접속사로, 곧 ‘우리가 담 대하여 몸에 거하지만 •. …·올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읽어야 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침착과 확신의 근원이다. 불신자들이 항상 볼만으로 흥분 하며 하나님에 대해서 완고하게 줄곧 불만을 털어놓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 들이 곧 멸망할 것으로 생각하며, 현재의 생활에 그들의 최상의, 그리고 최 종적인 행복의 소망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침착한 마음으로 살아 가며 주처하지 않고 죽음을 맞으러 나가는 것은 더 나온 소망이 우리를 위 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와 따로 거하는 줄……" ;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으로 선언하고 있지만,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언뜻 모순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임재와 부재의 종 류가 다르다는 접을 깨닫게 되면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께서 그의 능력으로 모든 인간들을 지켜주신다는 접에서 하나님은 그들에 계 임재하고 있다. 곧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기거동작하며 촌재한다는 접 으로 그들 속에 거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의 더 큰 힘 안에 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임재하고 있다. 곧 그들 안에 살고 계시며, 그들 가운데, 아니 그들 속에 거하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부터 부재하시는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 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제시하지 않으며, 우리가 아칙 그의 나라로부터 떨어져 있는 망명객으로서 그와 함께 있는 천사들이 누리고 있는 저 복된 불멸을 아직 소유하지 못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귀철에서의 ‘따로 거한다’는 바로 그의 자세한 설명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의 지식의 한계와만 관련되고 있다.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  나는 eMos(에이도스)라는 헬라 어를 species(겉모습)가 아니라 aspeetum(통찰)으로 번역하는데, 이 용어 를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 안된다• 그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표현에:)우리가 아칙 그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고 있지 않다는 의머가 담겨 있음을 설명하고 있냐 하나님의 부재(不在) 방식은 우리가 그를 뚜렷 하게 파악할 수 없는 그런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 으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앙이 눈으로 보는 것과 대조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갑각으로부터 숨겨져 있는 것들을 파악하며, 아 칙 드러나지 않고 있는 장태의 일들에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 온 그둘이 종종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으로 보이며, 항상 자신들 속에 죽 음의 요소를 지니고 다닌다는점에서 살아 있는'자들이라기보다는 죽어 있 는 자들이 댜 따라서 그들은 소망을 향하여 사모하지 않으면 · 안된다. 왜 냐하 면 소망하는 내용들이 현재로서는숨겨져 있으며(롬8 : 24), 신앙이란 아칙 나타나지 않은 것들에 대한윤은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여기서 우 리가 신앙으로 행하지 않는 한 우리는 보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하 다. 사실;:,우리는 보기는 보되 희미한 거울을 통해서 불 분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씨 우리가 실체 대신 말씀에 의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8. 우라가 담대하여……" ;  그는 경건한 자들의 확신에 대해서 이야기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데,.그것은 그들이 힘든 십자가 때문에 실패하거나 고 룽 때문제너심하기는커녕, 이 모든것을 통해서 그들이 더욱더 담대하게 된 다는 것이다. 가장 크나큰 질고가 죽음인데도 신자들이 그것을 바라는 것은 그것이 、완전히 복된 상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and)는 여기서도 여시 -t왜냐하면'의 뜻을 갖는다• 곧 ‘우리가 당하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확 신과 용기를혼들어버릴 수 없는 것은그렇게들 무서워하는 죽음이·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하신 곳에서 그가 실 제적이고도 작휴롭게 임재하시는 가운민1 함께 출기려면 이 몸을 떠나는 것 보다떠 좋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우리로서는 겉사람의 부패가 결코 손해 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ll서군주목할 접온 우리가 이미4저적했듯이 참된 신앙이란 죽음에 대한 멀사분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욕망을,.낳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망에 대한 공 포가>~방의 기쁨이나 위로보다 더 강력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불신이 있 다는 칭조이다. 신자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주께서 정 해 놓은 날을 앞당길 정도로 무리하게 바라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들 은 주님께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한, 기꺼이 스스로가 처해 있는 이 땅 에서 싸우며,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고 죽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욕망은 신앙에서부 터 나오는 것으로, 결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몸을 빠쳐나간 영혼들이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접을 추론할 수 있는데,讐 그 까닭 온 만약 그들이 몸을 떠나· 있을때 그들이 하나님을 모시게 된다면 룰림없 이 그들은 그와 함께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거룩한 조상들 가운데 죽음으로부터 피하려는 사람들이 있 었는가 하고 질문을 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시편 6편, 이사야 38장 3철, 시편 115편 17철에 나오는 다윗, 히스기야, 그리고 이 스라엘의 전체 교회를 예로 돈다. 여기에 대해서 혼히 그들이 죽음을 그처 럼 두려워한 것은 장차 생명에 대한 소망이 아칙 희미했으며, 거기서 오는 위로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것이 설명의 일부가 된다는 접 에서 동의하지만, 그것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옛날 교회의 거룩한 조상들 이 항상 죽음의 사자 앞에서 부들부둘 떨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합은 수명이 다 되어 아무런 후 회 없이 떠났으며, 아삭이 마지못해 죽었다는 시사를 우리는 아무데서도 찾 울 수 없으며, 야곱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신이 주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접을 선언하고 있다. 다윗과 히스기야가 특별한 계기에 눈물을 훌리 며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거 ° 챠: 그들이 특정한 최 때문에 주님께 처벌을 받고 있었으며, 따라서 죽음을 통해서 댜 이것이 바로 그들의 경악의 이유였으며, 주의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 통치 아래서도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신자들은 오늘날 그리 스도의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욕 망이란 잘 조정된 마음의 성향이다.

"9.  그런즉 우리는·····힘쓰노라." ; 그는 합에 있어서 팔요한 용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 미 고린도인들이 고통을 갑당 곧 그들이 죽으면서도 죽음의 정복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고통과 죽음을 동해서 복된 생활에 도달하기 때문이냐 여기서 그는 동일한 전제로부터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 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전력을 기을이며 그것을 자신의 최 대 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 이 다. 부활에 대 한 ‘소망과 {.~J 판에 대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도록 관십을 갖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항상 기여해야 할 것, 곧· 우리는 당분간 이 세상에(유숙하는 객이요, 우리의 길이 다 끝나면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접 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의 임무가 소홀해지는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 욕망이 산 자나 죽은 자에게 공통된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영혼의 불멸성 울 다시 확증하고 있다.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드러나" ;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 는 것 이 지 만, 모두가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들어 올려 매 순간마다 그들이 그리 스도의 십판대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접을 명십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관십을 가지면서 계속 자신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아태 두었는데, 여기서 그가 의도하는 것은 인간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으로 충 분하계 생각하던 야십적인 교사들을 ·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아무도 피할 재주가 없다는 말로써 그는 그들을 하늘의 재판정으로 소환하는 셉이 다. 내 가 ‘드러 나계 되 다' (to _be made manifest)로 번 역 한 단어 는 단순히 ‘드러나다’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바울의 말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갈다. 곧 현재로서는 많은 것이 마치 혹암 속에서 마 냥 감추어져 있지만 그때 가서 우리는 빛 가운데 환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 논 의미가 담겨 있다. 그때야 현재는 닫혀 있는 책들이 펼쳐질 것이다.

 

"각각……받으려 함이라." ;  이 귀철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과관련되는만 콤 우리는 악한 행동이 하나님의처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행동 역 시 보상을 받지만, 거기에는 각각 다른 이유가 있다는 점을 간략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악한 행동에는 거기에 마땅한 처벌이 따르지만선한행위를 보상합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의 가치나 공로를 참작하시지 않는 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의 인준을 받을 정도로 그 모든 면에 있어 서 완벼하고 충분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하나 님께 기쁨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온 전체 율법을 다 만족시킵으로써만 가눙 한 것인데, 그 정도로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유일한 대비책 은 하나님께서 그의 무상의 친철에 따라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것이다. 이 텅게 우리를 그의 호의로 받아들인 다음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행위 를 은혜롭게 받아주시며 보상이 따르는 것도 바로 이 분에 넘치는 용납 (undeserved acceptance)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행위를 보상하신다는 말 속 에 우리가 값없는 은혜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 것으로만 본다면 여기에는 전혀 모순된 점이 없다. 나는 이 문제를 나의 고린도 전서 주석에서 더 상세하게 섣명한 바 있는데, 충분한 논의는 〈기독교 강요〉에서 찾아보기 바란다• ‘몸 안에서'타는 바울의 표현을 나는 오칙 의적인 행동일 뿐 아니라 이 육체름 입고 사는 생활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의 뜻으 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