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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17)

1. 성경 (고후5:11-17)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1)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2)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3)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4)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5)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6)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7)

2. 묵상 (칼빈선생주석)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그는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 그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곧 “나로서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땅히 지배하고 있어야 하는 하나님 경외를 직접 체험해서 알고 있다”고 하는 말이다.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는 것은 우리 각자가 어느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낱낱이 아뢸 것이요, 만약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시람이라면 두려움에 압도되어 자신의 모든 경솔을 털어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지식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낱낱이 아뢰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명심하고서 충실하고 순결한 양심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수행하고 그와 동시에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 나 그의 원수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에 대해서 큰 소리치지만 그가 전파하는 것의 진실성을 누가 알고 있단 말이오?'  하고 반문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자신이 인간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 마음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하나님께 알려져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온 ‘내 입은 인간들에게 말하지만 내 마음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다' 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바라노라" ; . 이것은 일종의 징계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정직성을 증거 할 증인이 하나님만이 아니라, 고린도인들 역시 거기에 대해서 자신의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증거 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로서, 첫째로 어떤 사람이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고서는, 즉 사람들 앞에 영예롭고 정열적으로행동하는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요, 둘째로 자랑이란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실의 증거가 없을 경우는 헛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말을 남들에게 신임받기를·바란다면 그는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는 뜻에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할 행동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심에 알려지는 것'이 증거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온 양심 이란 육신의 판단 이상으로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12. 우리가 다시……·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  그는.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을 확증하며, 그와 동시에 자신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중상을 예상하고 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명성에 대해서 너무 관심을 쏟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마 악한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그에 대해서 했던 것 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그들에 대한 답변으로 볼 수도 있다. ‘추천한다’는 말은 여기서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떠들어 댄다' 또는 ‘허풍을 떤다’는 뜻이다.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라는 말씀에는 면저 자신이 그들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것을 포기하고  있는 만큼, 자신이 탄원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라 그들의 일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이 그처럼 적극적으로 사도직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그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사도직이 존경을 받는 것은 자신의 유익보다는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의 배은망덕을 간접적으로 꾸짖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이란 교회에 혜택이 되는 범위에서만 자신들의 평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바울의 예를 보고서 잘못된 구실을 잡고 늘어지는 일이 없어야겠다.  우리는 또한 어떤 사역자의 진정한 찬사는 그가 교회와 함께 나누는 것이라야지 자기 개인적인 것일 수 없다는 점을,  바뀌 말하자면 모두에게 혜택을 가져오는 것이라야  한다는 점을 여기서 배우게 된다.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 ;  이는 외형적인 전시를 위장으로 내세울 뿐 마음의 진실성을·중요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지혜로운 자들온 결코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고는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헛된 전시가 있는 곳에는 마음의 진실성이나 정직성을 찾아볼 수 없다.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  그는 지나가는 말로 허풍을 떠는 자들의 허영울 억제할 필요성과 그것이 교회의 임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한 야심은 가장 해로운 역병으로서, 그것을 시치미떼고 못 본 체하며 치켜주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다.  고린도인들온 과거에 이렇게 행하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장차 그렇게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  이것은 그를 적대하는 .자들에게 일종의 양보이다. 바울의 자랑은 충분히 멀쩡한 정신에서 나온 것, '아니 온건하고 거의 합리적으로 미친 것이었지만,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두 가지·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첫째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섬기는 일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접이요,

 

둘째는 만약 자신이`하나님과 교회의 일을 충실하계 수 행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든 두려워하지 않으며 멀쩡하다거나 미쳤다는 소리에 개의치 않겠다는 점이다. 

 

그의 의미는 ‘사람들은 나의 좋은 믿음에 대한 나의 빈번한 주장을 자기들 좋을 대로 생 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과 그의 교회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이익이 요구하는 대로 침묵을 지키기도 하고 말할 준비도 갖추고 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미쳐 있기만 한다면 세상이 나를 가리켜 정신 나갔다고 하는 말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라는 식이다.  이 귀절은 그저 지나가는 식으로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묵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여기 나오는 바울처럼 단호하지 않을 경우, 제아무리 불쾌한 일의 원인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우리의 임무가 연거푸 방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14.  그리스도의 사랑" ;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지만, 나는 전자를 택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강철보다 더 단단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사망에 내어 맡김으로써 보여주신 그 큰 사랑에 대한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그에게 헌신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에 대해서는 살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말로써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자신의 일을 낱낱이 고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계 되었다는 점을 이미 밝힌 바 있는데, 여기서는 또다른 동기,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 우리에 대한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랑에 대한 지식은 우리 편에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의 감정을 강권해야 마땅하다. '강권한다’는 말에 담겨 있는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을 곰곰이 묵상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더없이 단단한 쇠고리로 그에게 묶여지고, 그 결과 그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리는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설명을 주목할 필요 가 있다. 이것을 좀더 충분히 설명하자면 우리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우리를 그의 능력 안에서 그의 특수한 소유로 삼기 위해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로마서 14장 17~19절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두 가지 별개의 사항이 제시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있으니, 따라서 우리가 모든 야심과 탁월성에 대한 욕망을 아까 와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는 점과 우리의 생명과 사망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으며, 이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신에게 묶어 놓으셨다는 점이 그것이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알지 아니하노라." ;  여기에 나오는 ‘안다’ 는 말은 ‘판단한다' 는 말과 동등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는 외관상 가장 탁월해 보이는 사람이 정말 그런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겉 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육신’이라는 말 속에 그는 사람들이 대개 소중히 여기는 모든 외형적인 재능 및  귀중한 중생과 무관한 모든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기만적인 겉모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으며, 그가 이미 언급한 육신의 죽음, 또는 굴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의도는 ‘우리가 이 세상 삶에 대해서는 죽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어느 누구도 육신의 무슨 탁월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종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하는 뜻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  그가 뜻하는 것은 ‘비록 그리스도께서 당분간 이 세상에서 사셨으며 이 세상의 삶을 구성하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알려졌지만, 이제 주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곧 영적으로 알려져야 하며, 우리가 조금도 주님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것이다.  세르베두스 같은 광신자들은 이 귀절을 그리스도의 인성이 이제 그의 신성에 흡수되어 버렸다(has ?een absorbed)는 점을 입증하는 데 잘못 사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이 아니라 그의 외적 모습(His external appearance)인 만큼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얼마나 그 마음과 거리가 민가 하는 점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육신(flesh)을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신대로 그를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점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전체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고통을 받은 것이 우리의 육신안에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의 육신 안에서 그의 영광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선포하고 있다. 사실 이 기초가 무너진다면 우리의 전체 신앙도 파괴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증거가 아니라면 우리의 불멸성에 대한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입고 율법을 성취하고 아담의 불순종을 철폐 함으로 말미암아 의가 우리에게 회복되듯이 생명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간성에 그것이 추방당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젖혀 놓고 하늘의 처소에 자리를 허용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회복된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깨닫지 않을 경우 우리가 주님 안에서 가져야 마땅한 모든 확신과 위로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를 참된 인간과 우리의 형제로만 알 뿐이지 육적으로는(carnally) 알지 못하는 것온 우리의 신뢰가 오직 그의 영적인 은사에 대한 고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것은 그가 몸을 제쳐놓고 영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백성을 중생하고 통치하는 것이 그의 영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7.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이 문장과 문맥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의 나라나 교회 안에서 자리를 하나 얻고자 한다면 그런 자들은 새로운 파조물이 되도록 하라’는 식으로 제시되어야 마땅하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는 인간들이 통상적으루 생각하는 온갖 종류의 탁월성에 마음의 갱신이 따르지 않을 경우 그것이 무익하다는 점을 단언하고 있다.

 

학문, 수사, 그리고 다른 재능이 귀중하고 존귀한 것이지만, 여호와의 경외나 양심의 정직이 없는 곳에서는 그것들의 모든 영예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으뜸가는 찬사는 그들이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가 지고 있는 특성을 갖고 자랑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것은 거짓 사도들의 허영을 제시할 뿐 아니라 고린도인들의 전시적이요, 피상적인 판단의 기준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이다.  곧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참된 성실보다 외형적인 모습이 더 중하계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거의 모든 시대에 있어서 공통되는 잘못이기도 하다.  참된 성결보다는 전시를 더 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새로와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다른 방면에서 소유하고 있는 특성이 어떠하든, 교회 안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사65:17)이 을 것으로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것이 보다 낫게 변화될 것이요, 그때 가서 경건한 자들의 행복이 완성된다 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이므로 이러한 변화는 주로 영혼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바울이 이것을 먼저 들고 나오는 것온 옳은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주 멋있고 적합하게 이 예언에 대해서 비유하면서 중생을 극찬하는 데 그것을 적용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새롭게 되지 않은 것을 가리켜 ‘이전’ 것들로 부르면서 새롭게 하는 은혜와 대조시켜 사용하고있다. '지나갔다’는표현에는 ‘사라진다’는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지속성이 짧은 것들이 제철이 지나면 썩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번창하고 증대할 수 있는 사람은 새로운 사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