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후6:11 ~ 18)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1)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2)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3)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4)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5)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6)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7)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1. 우리의 입이 열리고……" ; 입을 여는 것은 담대함의 상징으로서 이것을 앞 내용과 관련시키고자 한다면, 그 의미는. '나에게는 자랑할 이유가 충분히 있으며 정직한 양심에 따라서 담대하계 내 입을 여노라. 너희들이 우리에 대해서 좋지 않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라 너희들의 판단이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면에 있어서 너희들에게 영예로운 것으로 입증한 나의 사역을 좀더 너그럽계 평가했어야 옳았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론 해석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입이 열린 것은 자신의 마음이 넓혀져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넓혀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의심할 것 없이 그것은 선한 뜻에 의해서 자극받는 열심을 뜻한다.
흔히 작고 위축된 마음은 슬픔이나 싫온 느낌, 또는 분노를 뜻하며, 마찬 가지로 넓혀진 마음은 그 반대의 감정을 시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가 매일 매일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친구들을 대할 때 우리의 마음이 넓혀지며 모든 감정이 드러나고 아무것도 숨겨지거나 닫혀지지 않으며, 우리의 온 마음이 적극적이요, 그 자체를 기꺼이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또한 거침이 없고 더듬거리거나 목구멍 뒤에서 마디가 끊기는 일이 없게 되지만, 마음이 그다지 기쁜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적극적인 선의를 나누지 못하는 것은 너희들 자신의 잘못이다. 나의 입은 너희들을 나의 절친한 친구로 대하려고 열려 있으며, 나는 기꺼이 너희들에게 나의 마음을 쏟아 놓고 싶지만 너희들은 나에 대해서 너희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그에 대한 그들의 비뚤어진 판단 때문에 그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그들이 전혀 맛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13.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 그는 그들을 자기 자식에게 하듯 부드렵게 이야기하고, 자신이 여전히 그들에 대해서 좋은 소망을 품고 있다는 방향으로 그들에게 간청함으로써 자신의 꾸중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종류가 갈은 보상'이란 말은 부자 쌍방간에 서로의 임무가 있듯이 그들간의 임무가 상호 관계에 있다는 점을 뜻한다. 자기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분별있게 지도하고 지키는 것이 부모의 임무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온 부모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공의의 요청이다. 그가 뜻하는 것은 헬라인들이 ‘안티펠라르기안’, 곧 상호간의 정으로 부르는 것이 다. 그의 이야기는 ‘나로서는 너희들에 대해서 너희들의 아버지로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들대로 정과 존경으로써 나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입증하도록 하거라' 라고 하는 뜻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점이 한 가지 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그들 편에서 마음을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처럼 인자한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들의 순응을 통해서 자신의 정에 보답하도록 하고 있다. 벌게이트는 바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habentes라는 분사를 덧 붙임 으로써 ‘종류가 같은 보상을 가지고서'라는 식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다. 하지만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나의 설명에는 전혀 억지가 없다.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 이처럼 그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되찾은 다음, 그는 계속해서 그들이 외형적인 우상숭배에 있어서 불신자들을 자신의 짝으로 알고 어울리는 점에 대해 더욱 더 자유롭게 꾸짖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아버지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대할 것을 권면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권리를 가지고 그들이 빠져 있는 잘못을 꾸짖고 있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에서 이 잘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들이 외형적인 면에 있어서 아무것도 금지된 것이 없는 것으로 상상하고 거침없이 불경건한 미신으로 자신들을 더럽히기 시작했는가 하는 점을 설명한 바 있다. 그들은 불신자들의 잔치에 자주 드나들면서 그들의 속되고 불결한 의식에 참여했는가 하면, 그들이 흉측한 죄악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깨끗한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여기서 바울은 외적인 우상숭배를 공격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과의 모든 관계를 타파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가 이와 갈은 일반적인 발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특수한 예로 들어가려는 뜻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과 멍에를 갈이 멘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혹암의 열매 없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고, 불신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그들과의 사귐을 상징한다. 여기서 바울이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문맥은 그들이 잘못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의미는 "동일한 멍에를 끄는 데 있어서 함께 결합되는 것”이요, 이 비유는 같은 멍에에 묶여 있기 때문에 갈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함께 걸어갈 수밖에 없는 소나 말들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불신자들을 우리의 동료로서 알고 동일한 멍에를 끌지 말라는 말은 단지 우리들이 그들의 타락한 일들에 있어서 그들과 사귐을 전혀 갖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하나의 태양이 우리 모두에게 비취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동일한 빵을 먹고 동일한 공기를 마시며, 우리가 전적으로 그들과 모든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은 불경건의 멍에, 그리스도인들이 합법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행위들에 대한 참여이다. 이 금지 규정 속에는 물론 결혼도 포함된다. 사실 결혼도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불경건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하와의 올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바울의 가르침은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라서 그것을 꼭 결혼에 국한시킬 수는 없는 것으로 본다. 그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우상숭배를 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꼭 피하려면 또한 불경건한 자들과의 결혼도 삼가할 것을 부탁받고 있다.
“어찌 사귀며”: 그는 그처럼 반대되는 것들을 관련시킨다는 것이 터무니 없고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권면을 더 강력하계 만들고 있는데, 사실 기독교와 우상숭배는물과 불처럼 상존(相存)할 수 없는 것이 다. 그들이 모든 것을 혼란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들온 불경건한 자들의 타락한 습관을 삼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 속으로는 미신적인 습관을 부인하지만 시치미 떼는 일이 없이 공공연하계 거기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한, 여:전히 그것에 의해서 오염되는 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 히브리인들마저도 벨리알의 어원에 대해서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실로 명백하다. 왜냐하면 모세는 벨리알의 말이나 생각을 블경건하고 사악한 생각의 의미로 사용했으며, 많은 귀절들에 있어서 범죄자들이나 악에 버려진 사람들이 벨리알의 자식들이나 사람들로 블리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여기서 이 단어를 모든 행악자들의 두목격인 마귀의 의미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두 우두머리에 대한 비교에서부터 그는 곧 지체로 넘어가 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적대감이 있으므로 우리 는 자신을 불경건한 자들과의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물론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말로서, 바울은 내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음식, 옷, 땅, 태양 또는 공기를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구별해 놓고 있는 불신자들의 이 특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지금까지 그는 신자들에게 일반적인 용어로 그들이 불경건한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금했다. 이제 여기서는 이 금지에 대한 자신의 주요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우상숭배에 대한 고백을 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인들의 이런 방종한 태도를 공격한 바 있지만, 추측컨대 그들 모두가 자신의 권면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는 그들의 마음의 강팍성이 그들을 붙들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하소연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주제를 새롭게 들고 나오 는 것이 아니라 간략하게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문제를 다를 때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문체가 간결하다는 이야기와 급소를 찌르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우상들과 하나님의 성전 사이에 전혀 일치점이 없다는 점을 설명하는 그의 간단한 문구는 아주 강력한 표현이다. 사실 우상이나 어떤 우상숭배 형식을 하나님의 성전에 도입하는 것은 신성모독의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므로 우리 자신을 어떠한 우상숭배의 오염으로 더럽히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이 한가지 생각은 수천 가지의 생각과 비중이 같으니, 이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도대체 우상과 무슨 관계가 있겠소. 당신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오?'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내가 지적했 듯이, 바울이 교의보다는 권면을 통해서 여기서 더 강력하계 우상숭배를 공격하는 것은 거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여전히 의심스럽고 애매한 것으로 장황하게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쓸모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실 것으로 약속 하신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점을 입중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각자가 그를 모셔들여야만 하는 것이며, ‘내가 너희들 가운데 거하겠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특별한 축복으로 약속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혹 어떤 사람이 ‘속에' (in)라는 전치사는 단순히 ‘가운데' (among)를 뜻하 는 것이 아니냐고 반대한다면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만, 우리들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그는 또한 우리 속에 머물러 계신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
이것의 상징은 모세가 레위기 26장1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언약궤로서, 바울은 이 본문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바울은 그보다 에스겔 37장 27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논리는 동일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회복에 대한 그의 묘사에 있어서 선지자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그 회복의 으뜸가는 축복으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궤를 통해서 미리 보여졌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임마누엘이 되셨다는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더 충분히 드러났다. 내가 여기서 모세가 아니라 에스겔이 인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그가 언약궤라는 상징과 관련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상징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성취될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는 하나님께서 오직 거룩한 곳에서만 거하신다는 점을 기정 사실로 들고 있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그가 여기서 거한다’ 하더라도 그곳은 성전이 되지 못하고 단지 일상적인 집에·그친다. 하나님께서는 영예롭게 임재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또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대권(大 權)이시다.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이 권면은 이사야에서 취한 것으로(사52 : 11), 선지자는 그 민족의 구원을 예언하면서 계속 제사장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이 ‘주의 그릇들을 들고 있는 너희들'' 곧 제사장들과 관련되는 것은 제사와 다른 신령한 예배에 있어서 사용되는 그릇 관리가 그들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심할 수 없는 점은 그들이 그들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 온 땅에 만연하고 있던 수많은 오염에 전염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경고하는 것이 그의 의도라는 점이다. 이것은 옛날 레위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합하다. 곧 그릇을 관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와 갈은 순결이 필요했다면 그릇 그 자체는 얼마나 더 그러했겠는가 !
우리의 모든 지체는 하나님의 영적 예배를 위해서 성별된 그릇들이요, 우리 자신은 장엄한(royal) 제사장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속량 받은 사람들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를 오염시키지 않으려면 어떠한 불결로든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 옳다. 그렇다고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들이지만 그것의 더러움으로부터 속량 받고 건져내진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하여 우리의 모든 불결을 없이한답시고 목숨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모두 피하도록 해야 한다. 요약해 서 말하자면,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구속의 축복을 위 해 분발할 경우 우리는 이 세상의 오염에 조금이라도 개입함으로써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 이 약속은 단지 한 귀절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주 반복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이것을 덧붙이고 있는 것 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는 위대한 위엄성(dignity)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 더 열성을 품고 성결에 매진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속된 민족들로부터 모으시고 회복하실 때 이 구속의 결과는 신자들이 그의 아들과 딸들로 보여지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끼는 것으로 취급 받는 것은 결코 혼한 영예가 아니며, 우리 편에서도 우리들이 그의 타락한 자녀가 되는 일이 없도록 관심울 가져야 마땅하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면서 가증스러운 우상숭배로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뻔뻔스러운 짓인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위대한 고결성을 생각하며 성결과 순결에 대해서 우리가 열망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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