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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1:0)

1. 성경 (고후6:1 ~ 10)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1)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2)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3)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4)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5)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6)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7)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8)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9)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1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그는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 곧 그리스도의 사자가 되라는 명령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그들이 명령받은 서신을 전파한 다음에 그것이 확장되도록 노력합으로써 그들의 일이 허무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그 들의 사명이 효과를 거두도록 하려면 그들의 서신에 계속적으로 권면을 더 해야 마땅하다. 이것은 '쉬네르군테스', 곧 그 일을 중진시키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동역자들이라는 의미이다. 가르치기만하고권면하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못하다. 이런 식으로 볼 때 uuv(쉰)이라는 접두사는 하나님이나 그가 그의 종들에게 위임한 사명과 관련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가르침에 권면의 조력이 따르는 것은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하며, 사역자들이 열성적으로 하나님의 위임을 수행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uuv(~)이라는 접두사는 또한 함께 수고하는 사역자들과도 관련될 수 있으니,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적극적이라면 서로 돕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첫째 해석을 택하고 싶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이 사역자들이 태만과 무기력으로부터 일깨워져 함께 일하며 듣는 자들(hearers)을 뜻한 것으로 본다. 여기서 사역자 들은 교의를 강론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점을 베우게 된다. 그들은 그것을 듣는 자들이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되,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에게 보냄을 받은 사신이 되는 그들의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하는 것이요, 둘째는 온 힘을 다 기울여 그것이 헛되이 제공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그는 이사야의 한 예언(사 49 : 8)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다루고 있는 권면과:·아주 적합한 것이다. 틀림없이 이 귀절에서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맥이 명백히 보여주는 그대로이다· 교회를 모으는 데 있어서 아들을 지도자로 임명하는 아버겨께서 그 아들에게 "내가 받아들일 만한 때에 그대의 말을 들었노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머리와 그 지체 사이에유사점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 주신 것은 우리의 구원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며, 그것은 오직 주님만의 관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기회가 올 때에 소홀히 하지 말라는 점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권고받고 있다. 헬라어 주석가들은 자비, 또는 무상의 은혜를 뜻하는 선지자가 지적한 원래의 '라죤'을 '유프로스데 크톤'으로 번역하고 있 다.

이 인용은 이런 식으로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적용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열어 젖혀 보여주는 확정된시간을 정하시므로 모든 때가 동일하게 거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특별한 날이 지명되고 있으므로 구원에 대한 값없는 제공이 날마다 공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하는 것은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시간이란 바로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때가 찼다고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먼저 용납의 시기를, 다음으로 구원의 날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하나님의 자비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팔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우리의 행위로 말미압아 하나님을 유인해서 우리에게 그의 은혜를 보여주게 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를 우리 자신 안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구원의 날이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의 과분한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기로 정해 놓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지체함이 없는 간박함의 팔요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그대로 고수하지 않우면 안된다. 사실 하나님께서 제공한 은혜가 냉담하고 무관십하계 받아들여질 경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괘씸하게 여기신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속을 위해 육신으로 나타나기로 된 시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 예언을 이용해서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지속적인 가르침을 통하여 계시되는 시간에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구원이 온 세상에 보내어졌듯이 오늘날 우리가 복음의 참여자가 될 때, 그것은 날마다 우리에게 보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고 있는 한, 하나님 나라의 문이 우리에게 열려져 있으며 구원을 받아들일 것을 초청하는 하나님의 친절의 표시가 우리 앞에 높이 들리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우리에게 콘 위로를 주는 아름다운 귀절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요청을 받을 경우, 우리는 그렇게 할 기회가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확신해도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회를 꽉 붙잡지 않는다면 우리논 제때에 들어가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곧 문이 닫혀질 것이라는 바울의 암시적인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보웅은 항상 말씀을 멸시할 때에 따르는 것이다

. "3. 우리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 우리는 바울이 어떤 때는전반적으로복음의 사역을, 또어떤때는자신의 성실성을추천하고있다는 점을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보여준 바 있다. 여기서도 그는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훌륭하고 신실한 사도로서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고린도인둘로 하여금 그들이 자기 대신 허망한 수다장이들을 더 좋게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가를 깨닫게 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순전히 거짓을 좋아함으로써 실제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피상적인 방법들은 더없이 존경하고, 사살 가장 훌륭한 자들은 낮게 평가한 셈이다. 바울이 자신을 칭찬하면서 여기에 언급하는 내용들은 바로 그들이 자신에게서 멀시한 내용들이었으며, 따라서 정당한 칭찬을 받울 자격이 있는 것들을 욕되게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더욱 더 비난을 받아 마땅했음에틀림없다.

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그는 복음 전파자들에게 있어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 탁월성을 보여주고, 다음으로 자신이 이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세째 고린도인들에게 그가 자신의 본을 통해 여기서 규정하고 있는 방법대로 행동하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정하지 말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그의 의도는 자신 및 자신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한 자들에 대한 권위를 사는 데 있으며, 이 권위가 깨어전 곳에, 그것을 회복하고, 고린도인들을 그들의 복음에 있어서 필요한 만큼 진전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거짓 사도들에 대한 어리석은 집착으로부터 소환하는 데 있다.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실수 때문에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이 복음의 진전을 방해할 경우 걸려 넘어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셈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 하면서 자신의 사도직을 그 어떠한 치욕으로도 얼룩지게 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자신의 관심을 증거하고 있다. 사실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복음을 볼명예스럽게 할 경향이 있는 잘못을 찾아내는 것이 사단의 술책 중의 하나이다. 만약 그가 이 사역을 얕잡아 보게 함에 있어서 성공한다면 진전에 대한 모든 소망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역의 영예를 지탱함에 있어서 모든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자신이 그 명예를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 줌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비천하고 사악한 생활로 자신을 더럽히면서 남들·앞에서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보다 더 터무니없는 노릇도 없다.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부적합한 것이라고는 그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영예로운 사람이다 ..

"4. 오직……많이 견디는 것과…·" ; 여기에 나오고 있는 이 목록의 목표는 주께서·통상적으로 주님의 사역자들을 단련시킴에 있어서 사용하는 모든 시험을 바울이 거쳤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언급하는 것 가운데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항상 필요로 하는 것은 ‘수고로움, 깨끗함, 지식, 자지 뭇합, 오래 참음, 사랑, 진리의 말씀, 성령, 하나님의 능력, 의의 병기’이다. 그러나 영속적으로 팔요하지 않은 것도 있는데,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 서 꼭 ‘매 맞음'과 ‘갇힘'으로 단련받을 필요는 없다. 제아무리 훌륭한 사역자들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이러한 것을 면제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주께서 기뻐하신다면 바울처럼 매 맞음과 갇힘을 통한 단련에 자신을 내어 말길 용기를 가지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견디는 것"은 역경 속에서 바울을 제어하는 것으로 훌륭한 사역자에게 항상 있어야 하는 특성이다. ‘환난'에는 ‘궁핍'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후자를 나는 빈곤으로 본다. 이것은 많은 목회자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도 볼 수 있으나 그들이 다 가난한 것은 아니고 그렇지 않은 자도 많이 있다. 어떤 사람이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다론.면에 있어서 경건하고 정직하며 영예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탁월한 점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없다. 어떤 사람이 다만 부자라 해서 그는 훌륭한 사역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가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배척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실 다른 귀절에서(빌4 : 12) 바울은 자신이 궁핍한 상황과 부요한 상황에 다 대처할 줄 안다는 점을 들어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역자의 탁월성에 있어서 일시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5~6절 매 맞음과…… 요란한 것" ; 바울의 성격의 침착성과 온유함은 그가 난동에 대치해서 끗끗하게 섬으로써 보여준 용기와 잘 대조를 이루었는 데, 그는 여기서 물론 그런 난동을 싫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용감하게 거기에 대처한 것을 자랑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자신이 여러 난동에 동요되지 않았다는 것 뿐 아니라, 이것은 모든 난동꾼둘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린 난동 때문에 자신이 경악한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복음의 사역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곧 그들은 최선을 다해 평화의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소요를 당할 때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바론 길에서 이탈하지 않음으로써 끗끗하계 통과하는 것이 마땅하다. 크리 소스톰은 '아카타스타시아스 ; 동요'를 여러 곳에서 바울이 당했던 많은 추방의 뜻으로 보는데, 그것은 그가 어느 한 곳에서도 안주하도록 허락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

먹지 못함……" ; 이것은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배고품이 아니라 자발적인 금식을 뜻한다. '지식'은. 가르치는,자체를 뜻할 수도 있고, 올바르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재치를 뜻할 수도 있다. 그는 곧이어 ‘진리의 말씀'이라는 단어를 덧 붙이고 있으므로 둘째 의미가 더 가능한 것으로 본다. 성령은 영적 은사들에 대한 환유법적 표현이다. 크리소스톰은 여기서 성령이 단독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해서 여기에 언급되는 다른 모든 특성이 바울의 타고난 재능(endowments)이요, 성령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오래 참음, 지식, 순결; 의의 병기가 성령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는 성령을 특수한 예들 가운데 일반적인 용어로 따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 성, 진리의 효과적인 방어, 복음의 전파, 원수들에 대한 승리, 기타 그와 같은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7.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여기서 말하는 의는 양심의 정직성과 생활의 성결성이라는 뜻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병기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마귀란 항상 그들을 전복 할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모두가 싸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무장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마귀란 만일 한 번 공격 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당장 다른 공격을 퍼부으며, 때에 따라서는 전방에서 혹은 후방에서, 어느 때는 이쪽 측면에서, 때로는 반대 측면에서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 이것은 인격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더 힘겨운 일도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결코 하찮은 시련일 수 없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영웅적인 정신을 가졌지만 모독적인 공겨을 받고 쓰러지지 않은 사람들은 극소수였다는 점을 보고 있다. 따라서 무슨 수치를 당하든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덕으로 잘 다져진 마음(mind)의 상태이다. 이것은 희귀한 탁월성이지만, 이것이 없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점을 입증한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자신의 평판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나, 그것이 우리 형제들의 교화 (敎化)와 일치하는 범위에서 그쳐야지 우리에게 불리하게 퍼질 수도 있는 여러 소문 때문에 동요되는 정도로까지 나가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가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간에 혼들리지 않은 채 동일하게 곧은 진로를 지켜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살고 있으며, 오직 인간의 비위만 맞추는 사람이 아닌가를 입증하기 위해서 악인들의 욕설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시기도 한다. 사람들의 불 친절 때문에 자신의 임무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수치와 멸시를 받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한 정신으로 계속 밀고 나가면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모든 장애물을 타파했다는 점을 생각하고서 동일한 일이 우리에게 생긴다 하더라도 낙망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

속이는 자 같으나……" ; 여기서 그는 불 경건한 이방인들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비난에 대해서도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고린도인들이 얼마나 형편 없이 배은망덕함에 빠졌으며, 바울이 얼마나 담대하게 그처럼 거대한 장애물들에 대항해서 분투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비록 그들은 바울 자신을 죽어 있으며 슬픔에 압도된 사람이라고 무시 하지만, 자신은 살아 있으며 즐겁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간접적이지만 예리하게 꾸짖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멸시를 받고 있을 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었다는 점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배은망덕을 꾸짖고 있다. 사실 그들은 그의 재산으로 부요하게 된 자들 가운데 일부였으며, 그들 각자는 여러가 지 면에 있어서 그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자신의 수고의 열매가 실제로 온 사방에 퍼져 있지만, 그들에게 자신이 ‘무명한 자'였다는 말 역시 동일하게 비꼬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공급하는 사람의 가난을 멸시 하는 것이 야말로 얼마나 잔인한 노릇인가 !. .물론 그가 뜻하는 것은 지상적인 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으로 여겨져야 마땅한 영적 재물을 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