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후 7:1 ~ 16)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1)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2)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3)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4)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5)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6)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7)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8)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9)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0)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1)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2)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3)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4)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5)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1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그런즉… ..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 안에서 주도권을 잡으시며 그의 순전한 은혜로 우리에게 예비하시지만, 이처럼 우리에게 그의 은혜를 자유롭게 허용하신 다음에는 곧이어 우리 편의 감사를 요구하신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 : 7) 하는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의 값없고 과분한 친절에 대한 제공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동시에 "내 앞에서 행하면 완전하리라” 하는 요청을 덧붙이셨다. 이 둘째 소절이 항상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닌만큼 바울은 이 조건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그 약속을 통해서 더욱 더 격려를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해야 마땅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해 주고 있다. 바울은 우리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을 어디서 찾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이 뛰어난 영예를 수여하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속성은 우리를 성화시키려 이끄는 것으로서, 그것온 하나님께서 암암리에 조건을 삽입하셨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또한 성경이 여러 다른 곳에서 구속의 의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을 잘 알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상징을 그 의도에 비추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안에 강력 하다면 우리는 고린도인들처럼 오만 불손에 빠지거나 거기에 자신이 휩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될 것이나, 외적인 우상숭배를 마냥 즐겨하면서도 그처럼 오만하게 그런 흉측한 잘못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조롱해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 속에서 지배하고 있다면 그들은 긴 논리를 통해서 확증을 받을 팔요가 없이 당장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무가치한 구실을 모조리 포기해 버리고 말 것이다.
"거록함을 온전히 ·이루어" ; 헬라어 '에피델레인' 에는 완성한다는 뜻도 있고 거룩한 의식을 수행한다는 뜻도 있지만, 전자의 의미가 더 일반적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 귀절의 주제인 성화를 지칭함에 있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완성을 뜻하는만큼 일부러 거룩한 기능에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 다. 신령한 예배에 있어서 모든 것은 완전해야 하며 결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께 올바로 헌신하려면 우리는 몸과 혼을 온전히 그분께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 그는 우리가 순결에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다음, 여기서는 이 순결이 몸과 혼에 있어서 명백하게 드러나야 마땅하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 ‘육'온 몸을 뜻하고 ‘영'은 혼을 뜻한다. 이 점은 만약에 ‘영'이 중생의 은혜를 뜻한다면, 바울이 영의 더러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모순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우리들이 하나님께서만 살필 수 있는 내면적인 불결뿐 아니라 인간들의 눈에 들어오는 외형적인 불결에서부터도 순결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그에게 우리의 온 몸과 우리의 모든 지체를 성별함으로써 우리의 어느 부분에서도 불결이 보일 수 없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여기에 나오는 그의 논리의 흐름을 자세히 살퍼본다면 우리는 온갖 종류의 구실을 들어가며 외적인 우상숭배를 변명하려고 발버뭉치는 것이 얼마 나 뻔뻔스러운 속임수인가 하는 점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의 불결이 내적인 불경건과 온갖 종류의 미신을 뜻한다면, 육신의 불결은 위장이나 전지성의 여부를 막론하고 불경건의 외적인 고백과 습관을 뜻하지 않고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들은 순결한 양심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허풍이요, 설령 그들의 자랑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바울이 신자들에게서 요청하는 것을 절반 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절반으로 만족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우상숭배에 대한 모습이나 암시를 드러내거나 사악하고 미신적인 의식에 참여할 경우, 설령 자신의 혼에 있어서는 그가 완전히 결백하다 하더라도--- 물론 이것 역시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죄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 그는 다시 교의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로 돌아오고 있지만, 이것은 자신이 고린도인들을 권고하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려는 뜻에서이다. 실제로 그는 앞에서 서두 형식으로 말한 바로 그 내용을 꺼냄으로써 이 멘 마지막 권면을 끝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받아들이라’ 또는 ‘너희들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라’ 는 표현은 "마음을 넓히라"는(6 : 13) 말과 동일한 것 으로서, ‘타락한 감정이나 잘못 된 견해 때문에 나의 가르침이 너희들의 마음에 들어가 자리 잡는 것을 훼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아버지로서의 진지한 마음으로 너희의 안녕을 위해서 상당한 고통을 받고 있는 만큼 너희들이 못들은 척하고 딴전을 피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 그들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자신이 그들에게 조금도 누를 끼친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는 세 종류의 누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 첫째는 공공연한 상처나 부당함이요, 둘째는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서 야기되는 타락이요, 세째는 세상적인 물질에 대한 기만이다. 대개 목사들은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 때문에 자기의 교인들에게서 멀어져가는 수가 있다. 곧 그들은 무리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독재적인 횡포나 압제의 구실로 내세우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올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람들을 오류 속으로 이끌고 가서 거짓된 교의의 타락으로 오염시키거나, 아니면 남에게 속하는 것을 탐냄으로써 무절제한 탐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첫째는 매정함과 주제 넘게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요, 둘째는 교의에 있어서의 불성실이요, 세째는 탐욕이다.
"3.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 그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일종의 불평이었으며, 우리는 불평을 하는데 있어서 비난을 파하기 어려운 만큼 그는 자신의 말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그는 곧 ‘나의 의도는 너희들에게 창피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내 자신의 결백성을 입증하는 데 있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고린도인들이 볼친절했으며, 바울이 무고한 것으로 판명되었던만큼 그들이 대신 비난을 받아 마땅했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곧 배온망덕과 무고한 사람에게 거짓된 혐의를 제기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의 온건이 얼마나 크던지 그는 단순히 자신을 변호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을 삼가고 있다.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 우리는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욕설을 퍼붓지 않고, 만약 그들이 무슨 잘못을 범할 경우 친절한 마음에서 그것을 덮어주거나 가볍게 처리한다. 비난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증오의 상징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언짢온 마음을 갖게 하고 싶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뜻에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밝히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그가 어떤 면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충영(蟲W)과 식초가 크게 다르듯이 우리가 증오심에서 어떤 사람의 비행을 들어 혹평하는 정죄와 죄인을 올바른 길로 불러들임으로써 그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예를 손상치 않고 다시 찾도록 하는 정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 곧 ‘나는 너희들을 내 마음 속에 가두어 둔 채 간직하고 있다’라는 이야기이다.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 곧 ‘그 결과 어떠한 변화도 우리들 사이에 있는 기반(bond)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은 내가 너희들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너희들의 우정을 포기하기보다는 너희들과 함께 죽고 어떠한 고난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뜻으로, 이것은 특별히 목사들이 품어야 마땅한 생각이다 .
"4. 내가……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그는 이제 그가 요구해 온 열린 마음을 고린도인들에게서 얻은 것으로 가정하면서 불평을 그만두고 즐겁게 마음을 털어놓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왜 이미 끝난 일을 두고 더 이상 수고할 팔요가 있겠느냐? 나는 내가 요구해 왔던 것을 이미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디도가 너희들에 대해서 내게 전한 소식은 나의 불안을 제거하는 데 충분할 뿐 아니라 너희들에 대한 신뢰를 두고 자랑할 이유가 되고 있다. 사실 그의 소식을 듣고 내가 당했던 많은 고통의 슬픔이 가시고 말았다' 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는 여기서 점충법을 사용하고 있다. 자랑한다는 것온 침착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보다 더한 것이요, 고통이 주는 슬픔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들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곧 ‘내가 너희들에게 보다 너그럽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가 나에 대한 너희들의 큰 친절을 신뢰하며,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그처럼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 외람된 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라는 식이다. 디도의 보고로 그를 괴롭히던 불리한 인상이 제거된 것으로 보는 나의 설명이 더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 " ; 그의 슬픔이 컸다는 사실온 그것을 제거할 수 있던 위로 또한 강력했음에 틀림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사방으로, 곧 안팎에서 오는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너희들이 내게 준 기쁨이 우세하게 되는 것을, 아니 넘치게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라는 말이다.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라는 말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도무지 쉼이 없었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그에게 계속 힘이 되어온 영적 위로는 예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몸과 마음 양쪽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의 인간적인 김정에 관한 한 자신의 여러 고통에 대한 크나 큰 비애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는 다툼이요……" ; 그가 말하는 ‘다툼’ 이란 자기 원수들이 자신에 대해서 외부로부터 가하는 공격을 뜻하고, ‘두려움'이란 그가 교회의 내적 질고를 두고 당했던 불안을 뜻한다. 그를 괴롭혔던 고통은 사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공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공공연한 원수들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질고로부터도 마찬가지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니 그들 거의 모두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보았으며, 또한 사단이 모든 것을 혼란 속에 내던지려는 뜻에서 얼마나 많은 책략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곧 지혜로운 자, 성실한 자, 꾸준하게 버티는 자가 극소수인 반면에 위선자, 가치없는 자, 야심적인 자, 말성꾼이 얼마나 많은가를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할 경우 하나님의 종들이 필연적으로 두려워서 떨며 아주 초조해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들이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많은 일들을 침묵 속에 삼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더 그렇다.
따라서 그는 밖으로는 다툼이 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는 말로써 자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성실한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공격하는 공공연한 원수들에게 저항하지만, 교회가 감히 치유받기 어려운 내적인 고통을 받으떤서 괴로와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온 내면적으로 번민과 은밀한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울이 거의 지속적으로 이러한 투쟁에 관련되 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추측컨대 그가 이 편지를 쓰던 당시 그는 보통 때보다 더 심한 괴로움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종들이 언제고 두려움을 면할 날이 있는 것은 아니요, 바울이 외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왔던 것도 아니지만, 그는 이 때 더욱 더 혹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다툼과 두려움을 복수로 언급하고, 많은 원수들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많고 다양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는 뜻이다.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위로 받았는가 하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낙심하고 질고 때문에 거의 압도되어 있을 때 자신에게 위로가 나타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비천한 자들과 낮아진 자들을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한 위로도 그만큼 더 크다는 더없이 유익한 교훈을 여기서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이 묘사에는 비참한 자들과 땅까지 구부리고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이 특별히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훌륭한 약속이 담겨 있다.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디도가 오게 되니 반갑다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당신은 그를 좋아하는 만큼 그를 보고 마땅히 반가와하지 않겠소?' 하는 식으로 반문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내다 보고 있다. 바울은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디도가 그들에게 다녀 올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전적으로 즐거운 소식을 자신에게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기쁘게 한 것은 한 개인과 자리를 갈이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비참한 상태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너희의 사모함과" ; 바울이 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얼마나 즐거운 소식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사모함' 은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높은 평가에서 나왔으며, 그들이 그의 꾸지람을 듣고 감동을 받아 자들의 죄악을 두고 애도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의 '동함'은 존경의 상칭이었으며, 그들의 ‘열심'은 그들의 선의의 증거였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바울은 그들이 회개하고 있었다는 점을 파악했는데, 이 사실만으로 그가 전적으로 만족스러워한 것은 그의 유일한 관심과 염려가 그들의 안녕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 곧 ‘그 결과 나의 모든 비애와 고통이 기쁨에 압도되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공적 유익을 추구하는 바울의 열정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점 뿐 아니라 그의 성품이 얼마나 온유하고 부드러웠던지 그에 대해서 저질러진 그 심각한 실수들을 당장에 잊어버릴 정도였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문장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 곧 다음에 이어지는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한 해석이 바울의 의도에 더 잘 어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소한 문제이므로 나는 여기 에 대해서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겠다.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툴 근심하게 한 것을" ; 이제 그는 그가고 린도인들에게 그의 첫번 서신에서 아주 가혹하계 대한 접을 사과하기 시작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접은 그가 아주 다양한 배역을 동해서 굴을 쓰고 있는 것으로·보일 만큼 많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접 이다. 그 이유는 그의 말이 전체 교회를 상대로하는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그를 불쾌하계 본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를 최대 한으로 존경한 사람도 있었고, 의십을 품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확고한 믿음을 가전 사람도 있었고, 순응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고집불통 인 사람도 있었다. 이런 다양성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는 이 집단을 상대로, 처기서는 처 집단을 상대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그들 모두에게 적응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누그러지면서 자신의 가혹성이 그들의 유익한 결과 가 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야기시켰을지도 모를 불쾌한 점을 모두 제거하고 있다.
곧 ‘너희의 안녕이 내게 있어서 너무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너희에게 유익을 끼치게 된 것을 보고 흐뭇해 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꾸지람의 어조를 낮추는 것은 교사가 자신의 칭계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는 경우에 한해서만 적당하다. 왜 냐하면 만약 고린도인들이 아직도 오만불손한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들을 바로잡으려는 자신의 노력에 아무런 좋은 결과가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조금도 그의 이전의 가혹성을 완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 리는 그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근십을 끼치게 된 것을 두고 기뻐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팔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들의 비위를 사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면을 더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덧붙이는 "후회하였으나"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만약 에 바울이 그가 쓴 내용에 대해서 볼만스럽게 생각했다면, 우리는 그의 첫째 서신이 성령의 인도 아태서가 아니라 성급한 충동에 이끌려서 쓰여쳤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나는 ‘후회한다’는 단어가 여기서는 ‘서운해 한다’는 느슨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대답한다. 사실 바울은 고린 도인들에게 근심하게 하면서 자신도 그 근심을 나누고 있었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자신에계 부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비록 내가 나의 의지에 반해서 너희들을 아프게 했으며, 너희에게 가혹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을 슬프게 생각했지만, 이제 그것이 너희들에게 얼마나 유익했던가를 보는 이상 그것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가슴아파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이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채찍을 가할 수 밖에 없을 때마다 자신의 가혹성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만, 그래도 그가 그것을 실시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식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내다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고린도인둘을 괴롭히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하는 데 훌륭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의향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한 즐을 앎이라." ; 여기서 그의 의미는 단 몇 마디에 축소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명료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첫째 편지가 그 당시에는 비록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고린도인들에게 유익을 끼친 실제적인 결과가 자신에게 드러났다는 점을 보여주고, 다음으로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가 즐거워한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 이것은 자신이 결코 그들의 고통을 두고 기뻐하지 않으며, 만약에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의 안녕과 그들의 행복을 동시에 증진하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던 만큼 그들이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르게 된" 것을 기뻐할 정도로 그들의 안녕이 자신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면에 있어서는 친절하고 성실하지만 경우 에 따라서는 자기 환자들에게 가혹하고 그들을 아끼지 않는 의사들이 있다. 바울은 자신이 꼭·그태야 할 경우가 아니고서는 가혹한 처방을 사용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가혹한 치료에 대한 그의 실험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므로 그는 그것의 성과를 두고 자축하고 있다. 그는 5장 4절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을 구사한 바 있는데, ‘우리가 이 장막에서 침을 지고 있기에 슬퍼하는·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벗기를 바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덧 입고자 하는 뜻에서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경건한 근심)……" ;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근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대조시키고 있는 것, 곧 ‘세상의 근심'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기쁨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의 기쁨이란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우매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경외심이 없이 이 세상의 허영으로 마냥 즐거워하며 순간적인 향락에 도취되며, 그 결과 그들이 지상의 일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게 하는 것 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기쁨이란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행복을 찾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은혜 안에서 기뻐하며, 세상을 멸시하면서 이 세상의 번영을 즐기되 그것을 즐기지 않는 것처럼 즐기며, 역경에서조차 마음을 가볍게 하는 그러한 경건한 기쁨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술픔이란 인간들의 마음이 지상적인 고통으로 짓눌려지고 근심에 압도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근심이란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은혜로부터 떨어져가는 것만을 유일한 비참으로 여기며, 그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들의 죄악을 두고 슬퍼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근심이 회개의 원인과 근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을 특별히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죄인이 자신에 대해서 볼만스럽게 여기며, 그로써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깊은 근심에 빠지지 않을 경우, 그는 결코 주님께로 돌아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마음의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이런 근심에 빠질 수 없다. 따라서 회개가 술품으로 시작되는 것은 이미 지적했돗이 아무도 먼저 자신의 죄악울 증오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길로 들아올 수 없으며, 죄악에 대한 증오가 있는 곳에는 자책과 비애(grief)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후회할 것이 없는"이라는 표현을 써서 이 회개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처음에는 제 아무리 쓰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넘치는 유익한 결과는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이 귀절은 회개가 아니라 구원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회개와 관련시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최종적인 결과는 그러한 근심이 우리에게 고통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회개에 제 아무리 씁쓸한 면이 따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후회를 가져오지 않는 것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그것이 가져오는 귀하고 유쾌한 열매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 바울은 언뜻 회개를 구원의 원인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결론이 따를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답변은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정확한 요점을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의 원인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맺는 열매를 보여주고, 회개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길로 비유함으로써 그것을 촉구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이것온 옳은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우리들을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사실은 오직 우리가 죄악을 포기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두 가지 일들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데, 그 결과 우리는 회개에 의해서 새롭게 되고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또한 신앙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죄악의 저주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서로 분리 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들이요, 그것들 사이에 들어 있는 다양한 관련성 때문에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의 시발점으로 부르는 것이 정당하고 적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동반 사항(acco mpan1ment)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이 교만한 회피가 아니라 난제에 대한 단순한 설명인 것은 우리가 회개 없이 결코 죄악에 대한 사죄를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성경이 가르치면서 동시에 많은 곳에서 우리의 사죄의 유일한 근거가 하나님의 자비라는 점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1. 보라……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너희 안에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가져왔으며)" ; 내가 여기서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사항들이 회개의 결과인가, 그것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것에 대한 준비 사항인가 하는 점을 두고 논쟁을 벌이지 않는 것은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바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회개에 따르는 외적인 상징들을 통해서 고린도인들의 회개를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근심'을 나머지 모든 것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대로 불만을 품을 경우에 한해서만 우리는 나머지 모든 것을 추구하도록 자극 받기 때문이다. ‘진지한 관심’의 의미를 우리는 거기에 반대되는 것과 그것을 비교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죄악에 대한 인정이 없는 한 우리는 졸면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졸음, 경솔, 또는 무관심은 이 ‘진지한 관심'의 반대이다. 따라서 죄악스러운 것을 바로잡고 우리의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진지하고 적극적인 욕망이다.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 에라스무스가 이것을 ‘보상’으로 번역하고 있기에 미숙한 주석가둘은 이 단어의 에매성에 속은 나머지 이것을 교황주의자들의 보상에 적용해 오고 있지만, 실제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아폴로 기안'은 ‘변호' (defence)를 뜻한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벌게이트역을 따르면서 라틴어역에서 defensio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것이 협의를 반박하기보다는 용서를 구하는 것과 더 관계가 깊은 변호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변호사처럼 자신의 문제를 두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자신만만한 항변이 아닌 겸손한 탄원으로 자신을 변명하는 이들과 같다. 위선자들 역시 자신을 변명하고 거만하게 변호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법적 분쟁을 일삼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자들이다. '변명' (excuse)이란 단어가 더 좋다는 사람이 있다면 의미 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으므로 나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본다면 고린도인들이 지금까지는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들의 문제를 변명하도록 자극을 받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얼마나 분하게 하며" ; 이것 역시 거룩한 근심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 선하고 경건한 열성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께서 욕을 당하시는 것을 볼 때 분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은 자신의 잘못을 두고, 아니 자기 자신을 두고 분노로 이글거리게 된다. 이 김정은 근심보다 더 격렬하다. 첫째 단계는 악이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고, 정말 양심의 가책을 받을-정도로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하 지만 이것은 고린도인 자신들이 지금까지 눈감아 준 사람이나 적은 무리의 실수에 대해서 품은 분노의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자신의 동의와 묵인을 회개한 셈이다.
"얼마나 두렵게 하며" ; 죄인에게 ‘네가 앞으로 낱낱이 네 일을 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러한 재판관 앞에 무슨 변명을 제기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 신령한 심판에 대한 의식은 두려움을 낳기 마련이다. 그러한 생각에 당황할 경우 그는 두려움으로 떨것이지만 불경건한 자들도 종종 이와 비슷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는 ‘사모함'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두려움보다 더 자발적인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그의 목록의 클라이막스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단순한 진지한 섬김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 간에 경쟁심을 자극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각자가 자신의 회개를 입증하기 위해서 더 열정적으로 분투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이 해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따라서 사모함은 강렬한 욕망이다.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 분노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한 내용이 ‘복수’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과거에 묵인하고 너그럽게 대함으로써 조장했던 사악성을 그들이후에 스스로 가혹하게 복수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분간은 그들의 근친상간을 용납했지만 바울의 경고가 있은 다음에는 더 이상 그것을 찬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엄격한 재판관으로서 그것을 처벌했다. 이것이 그들의 ‘복수' 였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이 어디서 발견되든 그것을 처벌해야 마땅하며, 그것‘도 우리 자신을 상대로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사도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더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는 회개의 상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것은 우리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어떤면에서 하나님 자신의 심판에 대처하는 특수한 것이다.
이것온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 : 31)라고 가르치는 그대로이다. 여기서 인간들은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마땅히 하나님의 몫인 형벌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상하는 셈이 되며,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속하게 된다는 추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찍하는 것은 우리를 무관심으로부터 일께움으로써 이와갈이 그의 진노를 생각나게 하는 것을 몸에 지니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장래에 대해서 경계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따라서 죄인이 먼저 자발적으로 자신을 처벌할 때 하나님으로 부터의 그와 갈은 경고는 필요가 없다. 여기서 고린도인들이 이처럼 자신을 벌한 뒤 사모하며 욕망하게 된 것둥은 바울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였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회개에 다양하계 동반하는 사항이지만, 하나님께서만 홀로 보시는 은밀한 죄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공개적인 죄에 대한 차이가 있다고 대답한다.
그 죄가 은밀하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로 충분 하지만, 그죄가 공적인 것이라면 거기에는 또한 공개적인 회개의 표시가 필요하다. 따라서 공공연하게, 그리고 착한 사람들에게 크게 누를 끼치면서 죄를 범했던 고린도인들은 팔수적으로 그들의 회개에 대한 증거로서 이러한 공개적인 상징들을 보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벌게이트 역은 "너희가 자신의…… 보여주었느니라"하는식으로, 에라스무스는 "너희가 자신이…… 천거하였느니라"하는식으로 번역하지만, 나는 다음의 번역이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고린도인들이 자신들의 묵인 때문에 그들이 관계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던 죄악에 전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명백하고 순수하게 증거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중거가 무엇인가하는 점에 대해서 이미 생각해 보았다. 바울은 그들을 완전히 용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책을 완화하고 있다. 그들이 보여준 지나찬 관용은 비난을 받아 마땅했지만, 그는 그들이 그 죄악에 관계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용서해 주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가 그들 모두는 개별적으로 무죄하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몸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도 있었고 그것을 조장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리고 모두가 그것이 야기시킨 수치에 빠져들어 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극소수에게만 잘못이 있었다는 점이 후에 명백하게 드러 난 것으로 믿어도 무방하다.
"12. 그런측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 이것은 화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혼히 취하는 태도이다• 그는 과거를 묻어버리고자 하며, 그들에-,대해서 더 이상의 꾸중이 없이 아무것도 책임을 묻지 않고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항변하지 않고 있다. 사실 그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그들의 회개만으로도 자신을 전적으로 만족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인들이 일단 회개하는 자리에 이르고· 나면 너무 가혹하게 조이지 않는 것이 옳은 방법이냐 다시 말해서 만약에 우리들이 여전히 그들의 실~켜는 생생하게 기 여한다면, 그것은악의와십술에서 나오는 처사이지r경건한 에정이나:그들의 구원에 대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일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바·울이 변명 형식 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기에게 실수를 처지론,문제를 자신이 너무 혹 독하게 다루는 가운데 거기에 대해서 책임 있는 사람을처벌하기를·바랐지만 이제는 과거의, 말하자면 달갑지 않던 것을 여제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제 내가 과거에 굴을 쓴 목척이」바로-너희에게 나에 대한 너희의 진지한 애정을 보여줄 기회를 제공하려는 데 있었다는 접을 생 각해 주길 바란다. 그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내버려두도록 하자' 하 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 혹자는 그가 그의 굴에서 한 개인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의 공통적인 유익에 대해서 관십을 두고 있었다는식으로 보지만,' 다론 해석이 보다더 자연스럽다.
"우리틀 위한 너희의 간절함(우리를 위한 너희의 · 전지한 관심)……" ; 이것이 헬라어 사본에 있어서 가장 찰 입증되고 있는 독법이므로 나든 이것을 전직 으로 무시하고 싶지 않지만; 한 옛 사본에는 그것이 eµwJJ(헤-몬)이라고 되어 있고, 크리소스톰의 주석을보더라도당시 헬라인문사회에 있어서 더 일반적 으로 용인된 독법온 라탄어 번역에 나오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사 말해서 ‘너희들에 대한 우리의 전지한 관십이 너희들에게 드 러나도록·., 곧 바울이 고린도인들 때문에 얼마냐초조해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 그들에게 드,러나도록 하는 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다른 독법, 곧 대부분의 헬라어 .사본온 현재 일치하고 있는 독법이 더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에 따를경우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이 시련을 통해서 그 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마침내 깨닫게 되는 ·정을 두고 그들을 축하하는 샘이 되기 때문이요, 그의 이야기는 ‘너희들도 너희 들이 이런 식으로시련을 받기 전에는 너희들이 니나에대해서 얼마만한 애정 율 품고 있었는가를 깨닫치 못하고있었다’ 하는 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이것울 한 개인위 특벌한 감정과 관련시킴으로써 .'각자가` 나에 대해 서'얼마만한 존경을품고있는가 하는 점이 너희들:r가운데 명백하게 드러나 고이 문제가 너희들 각자룝를 위해 제공하"q"아 기회를 이용해서;그때까지 너희들 마음-속에숨겨져·-있던 것을 드러내,보여주게 되도록 한다'논 의미 루 본다• 이것은 벌로중요한 문제가,아니프로4나는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맡기겠지만, 그가 곧이어서 ‘하나님、앞에서'라는 단어를 덧붙 이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 각자가 마치 하나님 앞에서처럼 자신을 신중하게 반성합으로써 전보다 더 자신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조그의 의도였던 것으로 . -기.. . 생각하고 싶다. ' '' . ' ' . , I l'、\、~ · ‘’ ’
"13.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 ; 바울의 전체 거도는 그에게 있어서 고린 도인들위 안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접을 그들에게 획중지키는 것이 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그들과 갈이 '위로를 받은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 다. 이 위 로의 근원은 그들이 자신들의 찰못을 인정 하되 자신의 꾸중을 대 부분이 받아들였을 분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영접했다는t데 있었다. 어떤 꾸중의 씁쓸한 면온 우리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했는가 하는 점을 깨 닫기 시 작하는 순간 1 바로 달콤하게 바뀐다. -그는이 제 축하 '형 식 으로 "우리 의 받은 위 로 위 에 디 도의 기 쁨으로 우리 가 더욱많이 기뻐함은"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디도는.그가 예상했던 이 상으로 크들이 더 순종적 이 요; 고분고분한 접을 알고서 , 아니 더 나은 상태 로갑자기 변화된 것을 발견하고 기쁨을1갑추지 못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온유성에r전혀 걸치레의 요소가:없냐는 접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그가,그들과 합께 나눈 기쁨의 으뜸가는 근원이 그들의 회개였기 때문이다.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 여기서 그는 자산이 고란도인들에 대해서 항상 얼마나 친근감을 갖고 있었으며, 얼마나 성실하고 친철하계 그들을 판단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r간접적으로 보여주 고 있냐 사실 그들이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당 시에도 그는 여전히 그들 속에서 여러가지 덕을 찾고 있었다• 이것은 정직 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전 사람이 그가 사랑하는 자들을 그들의 면전에서 비 난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큰 소망을 계속 품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이 소 망을 갈이 품도록 하는 훌륭한 본보기라 하겠다. 그에게 이 전실성이 있었 기에 그들이 그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바울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지나치는 말로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한-자신의 신실성을 다 시 그들에게 추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너희들은 나의 정직성 울 입증할 기회를 갖게 되고 나는 내 자신이 모든 면에 있어서 변덕스럽지 않고 신실되다는 점을 입증하계 된 샘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다른 사람 들에게 너희들에 대해서 자랑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계 된 점에 대해서 기뻐 하고 있다. 라고 하는 이 야기 나 다름없다 • . ,
"15. 두려워하고 떪으로" ; 때때로 그는 단순히 촌경의 뜻으로 이 누 단어 를 사용하기도 하며, 이것이 이 귀철에 잘 어울리지만 나는 럽을 굴자 그대 로의 의미로, 곧 그들에게 나쁜 양십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디도를 만냐 기를 꺼렀다는 뜻으로 보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죄악에 있어서 고집을 부렸단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재판관 앞에서는 떨기 시작하는 법이지만 전정한 수치십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럽은 회개의 한 상칭이다. 하 지만 어떤 의미를 택하든 이 귀철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둘을 어떻게 받아들 이는 것이 올바론 것인가 하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신실하고 정직한 목사를 기쁘게 하는 것은 떠들썩한 찬치나, 화려한 복장이나, 정중하고 명예로운 존칭이나, 다수의 박수갈채가 아니다. 구원의 가르침이 자신의 입술로부터 정중하게 받아들여지고, 자신이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자신에게 속 하는 권위를 행사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스스로 그의 지도에 굴복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을 때 그는 그것으로 충분히 기뻐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본보기를 디도에게서 엿보게 된다. 맺음말로써 그는 그가 이미 말했던 내용, 곧 자신이 고린도인들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잃어버릴 정도로 그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 라탄어 본문에는 viscera(십장)로되어 있다. 십장은 다정한 자비의 자리이므로 사랑과 모든 경건한 애정이 그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그의 의도는 디도가 전에도 고린도인들을 사랑했지만, 이재는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그들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접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디도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애정을 사고 있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사랑을 받는 것은 그들 이 더 큰 유익을 끼칠 힘을 갖게 될 분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모든 선한 사람둘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유익 한 전전을 보도록 겨 려 한다는 접에서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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