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후 9:1~15)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1)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2)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3)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4)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5)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6)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7)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8)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9)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0)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1)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2)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3)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4)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언뜻 보기에 이 발언은 앞에 나온 내용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아니면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동일한 주제를 계속하고 있지만 보기에는 마치 그가 방금 도입한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앞에서와 동일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고린도인에게 호소하는 것은 결코 신뢰가 없기 때문이 아니며 그의 권면에는 그들의 과거 기록에 대한 어떠한 비난이 동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여전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나는 너희에게 성도들을 섬기는 임무'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어디 있느냐? 너희에게 그들을 실망시킬 의사가 전혀 없다는 점은 너희가 잘 아는 사실이요, 너희의 행동 역시 이 점을 잘 증거 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내가 침묵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어느곳에서나 너희의 후덕함에 대해서 자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평판과 마찬가지로 너희의 평판이 문제 시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불안한 간청은 만약 그 뒤에 다른 동기가 숨어 있지 않았던들 고린도인들에게 불쾌하게 들렸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들의 소홀에 대해서 비난을 받고 있거나, 바울이 그들을 의심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없이 적절한 이 설명을 통해서 그는 그들을 조금도 불쾌하게 하지 않고 자유롭게 권면 할 뿐 아니라 연거푸 그들울 자극하고 있다. 혹자는 바울이 여기서 자신이 느끼지 않는 확신에 대해서 공언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가 생각하고 있다던 그가 그처럼 그의 권면에 있어서 자제할 이유가 무엇이며, 그리고 만약 그가 그들의 자발성을 의심하고 있다면 왜 권면하는 것이 중언 부언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겠는가? 사랑에는 좋은 소망과 초조한 관심이 개재되는 법이다. 만약 바울이 그가 말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확신하지 않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고린도인들을.그처럼 높이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유망한 시작을 지켜 보았으며 , 그들의 장차 진전이 똑같이 만족스러울 것으로 소망 했지만, 그러나 그는 인간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맹세한 의도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점을 그처럼 강조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1. 성도를 섬기는 일··~…" ; 돈을 제공하는 것에 비해 관용이 더 화려하게 묘사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단어를 자신의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바울은 신자들이 같은 몸 안에 있는 그들의 동료 형제들에게 신세지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서로 간에 봉사할 임무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형제들을 도울 경우에 우리는 그들의 몫이 되는 우리의 봉사를 수행할 뿐이다. 반대로 성도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도 그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단순한 불 친절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그들의 당연한 몫을 사취 하는 것이다.
"2. 내가·…·자랑하였는데……" ; 그는 그들이 주는데 있어서 '자발적이라는 점'을 자랑함으로써, 말하자면 그들의 보증을 선 셈이므로 여기서 그들에 대한 호의적인 견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실이 입증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종잡을 수 없이 내뱉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마치 그들이 일년 전에 준비를 갖추고 있던 것으로 그가 자랑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때 이미 그들에게 그러한 준비를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돈이 이미 금고에 저축 되어 있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대답한다. 그는 단지 그들이 스스로 결정했다는 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무슨 무책임이나 실수에 대한 비난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이 한 약속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3..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 이제 그는 그들이 할 것을 충분히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낸 것을 권면하고 격려함에 있어서 그처럼 노심초사한 이유를 그들에게 말해 주고 있다. 내가 나의 평판과 너희들의 평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약속을 한만큼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우리 모두가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의 염려를 좋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4. 이 믿던 것에……" ; 헬라어로는 '휘포스타시스' 이다. 그러므로 벌게이트역은 이것을 substantia, 본질이라는 라탄어로 번역하고, 에라스무스는 여기서 주제를 뜻하는 argumentum으로 번역하지만, 둘다 실제로는 부적합하다. 부데우스(Budaeus)는 폴리비우스(Polybius)의 글에서 처럼 담대함, 또는 자신감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곧 폴리비우스의 글에는 ' 우크 후토 테엔 두나민 호스 테엔 휘포스타신 카이 톨만 아우투 카타페플레-그메노온 토온 에난티온', ‘원수를 당황하게 한 것은 그의 힘이라기보다는 그의 담대함과 용감성이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휘포스타티코스' 는 때때로 담대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제 누구든지 이 번역이 여기에 나오는 바울의 문맥에 잘 어울린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것을 알아채지 못한 주석가들이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점 역시 명백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
"5.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인색이 아니라 아낌없는 마음씨의 문 제-역자주)" ; 혹자는 여기에서 ‘아낌없는' (bounty) 마음씨가 아니라,. '연보' (collection)라는 단어를 집어 넣는다. 그러나 나는 축복, 곧 행운에 대한 기도와 자선의 의미가 있는 히브리어 '브타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한 헬라어 '울로기아스'와 마찬가지로 직역을 택하고 싶다. 물론 나는 이 단어가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된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의 의지의 행사만으로도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인간에게 전용(轉用)되는 경우에도 그 의미는 동일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부 적당한 것은 인간의 축복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한 효력이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전용해서 사용하는 것이 꼭 어울리지 않는 것 만은 아니다. 이 축복을 바울은 '플레오넵시안' 곧, 헬라어에 있어서 과도한 탐욕과 인색을 뜻하는 단어와 대조시키고 있다. 여기서는 반대 개념이 뚜럿하게 제시되고 있으므로 인색으로 보는 것이 최선의 의미를 가져다 준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그들이 투덜대면서가 아니라 아낌 없는 마음으로 바칠 것을 바라고 있다. 이 점은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더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 “그는 여기서 주제를 아주 훌륭하게 파종에 비교하고 있다. 파종할 때 씨앗은 손에서 이곳 저곳의 땅위에 홀뿌려지며, 이랑이 쳐지고 마지막으로 죽어져버려서 거의 잃어전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구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은 우리의 가진 것을 감소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매가 거두어지는 추수기는 오고야 만다. 주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을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셈하시며, 따라서 나중에 더 많은 이자로 갚아주신다. 그러나 바울의 비교를 살펴보자면, 그는 듬성 듬성 파종하는 자는 적은 수확을 거둘 것이지만 너그럽게 한웅큼씩 쥐고 뿌리는 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우리 마음에 꼭 세김으로써 육신적인 분별로 우리가 잃는 것이 두려워서 선을 행하치 뭇하도록 우리를 붙잡을 경우에 당장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육신적인 분별력의 충동을 저지하도록 하자. 이 추수는 영생이라는 영적 보상과 하나님께서 자선을 베푸는 자들을 영예롭게 함에 있어서 사용하는 지상적인 축복이 두 가지 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의 선행을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상해주신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너회들이나 이옷에 대해서 더욱 너그러울수록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둘에게 내리시는 축복이 그만큼 더 풍성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는 축복을 앞에서 인색과 대조했듯이 여기서는 ‘적게 심는 것'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 단어는 도량이 크고 넓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 그들에게 후하게 낼 것을 권면한 다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 후함의 여부를 내는 양(量)이 아니라 동기 면에서 판단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그는 그들이 많은 액수를 내서 형제들이 보다 풍성하게 도움 받기를 원했지만, 그에게는 무엇이든 그들의 의사에 맡기며 억지로 빼앗을 의사는 전혀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들에게 마땅히 감화 받는 대로, 따라서 가능한 한 후하게 낼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는 ‘마음의 뜻'을 ‘투덜대며'나 ‘억지로'와 대조 시키고 있다. 우리가 팔수적인 강제에 눌려 행동할 경우 우리는 마음의 뜻이 아니라 마지 못해 행동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필연(억지)은 소위 말하는 외적인 강압, 곧 밖에서부터 부과되는 필연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마음으로 행한다. 다시 말해서 이 경우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스스로에게 필연성을 부과하고, 또 우리의 육신은 마지 못해 하기 마련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필수적인 임무를 수행하도록 강요하는 단계까지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꼭 피하고 싶어하는 것을 밖으로부터 강요 받을 경우, 우리는 적극적으로나 기쁜 마음으로가 아니라 마지 못해 억지로 동의하면서 그 일을 실천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률 사랑하시느니라." ; 그가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데려오는 것은 맨 처음에 내가 지적했듯이, 구제란 일종의 제물로서 오직 자발적인 제물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그의 말 속에는 그 반대의 내용, 곧 그는 인색하고 억지로 내는 자들을 배척하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를 상대로 마치 폭군처럼 지배하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 대해서 자신이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시며, 그러기에 우리에게서 아들로서의 자유로운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8. 하나님이 능히 " ; 그는 다시 한번 우리의 부족한 신앙이 항상 우리 귓전에 속삭이는 쓸모없는 제안, 곧 ‘뭐, 네 자신의 이익을 생각치 않는다고? 그걸 준다면 그만큼 네게 손해라는 걸 모르나 ~~' 아는 내용에 대처하고 있다. 이러한 제안을 반박하는 뜻에서 그는 우리가 나누어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자신의 혜택으로 바뀔 것이라는 훌륭한 약속으로 우리를 무장시키고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들이 천성적으로 지나치게 인색한 것은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것에 집착하게 유혹하는 부족한 신앙에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을 교정하려면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자는 사실 전답에 물길을 대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이익을 내다보고 있다는 이 약속을 고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들의 구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들어 그들을 부요하계 할 수로를 그만큼 많이 만드는 셈이다. 바울의 의미는 ‘그러한 너그러움은 결코 너희에게서 상실되지 않고, 오히려 너희들히 주는 것이 더 풍성하계 되돌아온다는 것을 확증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나 다름없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인들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능력을 그에게 돌리는 일반적인 성경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단지 상상 할 수 밖에 없는 비 활동적인 잠재력이 아니라 우리도 그 능력의 효과를 오늘날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넉넉하여‘… ." ; .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그가 약속했던 은혜의 두 가지 결과, 곧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충분할 뿐 아니라 남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도 충분히 갖게 된다는 점을 묘사하고 있다. '넉넉함'이라는 말로써 그가 뜻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아시는 그런 양 (量)이다. 사실 포식하도록 채위지는 것이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한 만큼의 것을 베풀어주시되 많이 주시는 경우도 있고 적게 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우리가 만족할 정도를 유지해 주시는데, 이것이 우리의 양을 채우려고 온 세상을 다 차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이렇게 넉넉할 경우 우리는 남들에게 선을 행하는 면에 있어서 풍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각 자가 자신이 받은 것을 스스로 보관하도록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필요할 경우에 우리 서로가 나누어 쓰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9. 기록한바 저가 흩어……" ;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입증하는 뜻에서 그는 시편 112편 9철을 인용하고 있다. 거기서 선지자는 경건한 사람이 다론 많은 덕 가운데서 그가 자선을 베푸는 면에 있어서 ·부족하지 않고, 마르지 않는 생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너그러움이 결코 중단하지 않고 흐를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의 의도는 우리가 선행을 이룸에 있어서 지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선지자의 말이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10. 심는 자에게 " ;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로서 탁월한 위 로가 가득한 귀철이다. 제철에 파종하는 자는 추수기에 자신의 땅과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파종이 우리의 양식이 우리에게 오는 근원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점을 부정하면서 다론 사 람들이 씨앗을 뿌려놓고 양육되는 것은 자신의 수고에 의한 것인 줄로 생 각하는 농부들에게 씨앗을 제공하고 양식을 제공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너의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만 나로 너 를 먹 이 는 것 은 혹 네 가 내 가 너 희 에 게 줄 그 땅에 이 를 때 "내 손 과 나의 힘이 나에게 이 재물을 가져왔다”고 말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뜻에 서이니, '그 까닭은 너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는 이는 여호와이시기 때 문이다'타는 동일한 내용이 신명기 8장 16"'-'18철에도 나오고 있다.
"먹을 양식" ; 그는 우리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두 가지 결과를 언급 하고 있는데, 첫째는 우리에게 생명 유지에 충분한 것을 주시는 것과 둘째, 우리가 다른 사람의 궁핍울 덜어줄 수 있는 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만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자신의 소유를 사적인 목적에만 사용해서도 안된다. '씨' 와 ‘의의 열매'는 모두 연보를 뜻한다• 의의 열매를 그는 간접적으로 사람 들이 자신의 부요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긁어모아서 노적이나 창고에 쌓아둔 그들의 수고의 소득과 대조시키고 있다. 씨앗은 선을 행하는 수단을 뜻하 고, 그 열매는 일 자체나 베풀어지는 도움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의는 자선에 대한 대유법적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 ‘너희들 에게 너희 자신의 용도에 충분한 것분 아니라, 너희들의 관용의 샘이 항상 흘러넘치고'결코 마르는 일이 없을 정도로 채워주시기를 바라노라’ 하는 말 이나 다름없다. 우리 이웃의.곤경을 돕는다는 것은 의의 일부-결코 하찮은 부분일 수 없는 일부-인만큼 자신들의 임무 가운데 이.부분을 소홀히 하 늠 자둘은 볼의한것으로 여겨질 수밖에없다. 1 주시는 이?꾹·이 귀절은 헬라어 사본에서도 다양하계 읽혀지고 있다. 어 떤 사본에 는 ‘주실 것 이 다, 풍성 하게 하실 것 이 다, 더 하게 하실 것 이 다’ 라는 세 가지 미태 동사가 나오고 있다. 이렇게}키면 이 문장은 바로 앞 문장에 대 한확증이 될 것이요, 사실 바울이 동일한 내용을다른 말로 바꿔 반복하면서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생소한 일이 아니다.
다른사본에서는 동사가 부 정사로 되어 있는데, 다들 아는 대로 부정사는 때때로 기원문 대신에 사용되 기도 한다• I내가 이 후자의 번역을 택하는 것은 그것이 보다더 전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것일 분 아니라, 바울은 통상적으로 그의 권면에 기도를 덧 붙이면서 그 기도에서 자신의 권면의 주제가 되었던 점을 하나님께 간청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 번역을 택한다 하더라도 전혀 나쁠 것은 없다. '
"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 여기서 다시 너그러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선행의 성겨이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 나님께 내놓고 기꺼이 우리의 소유를 그가 지시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 곳에 내바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A,l자들이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을충족하게 먹여주실 것으로 신뢰하며, 믿음이 부족하 여 선을 행하기에 뒷걸음질하지 않을 때 전정한 부요(richness)를 즐긴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풍요라는 단어를 써서 알맞은 공급으로 만족하는 관대 한 마음의 충족성을 묘사하는 것은 찰한 일이다. 자신들의 재산에 대한 불 안 때문에 온갖 평안올 빼앗기는 믿음 없는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아니기 아에 시달리는 사람도 없다.
"우리로 말미암아……" ; 그는 그들이 내려는}연보가 가져올 또 다론 효력, 곧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도움야될 것이라몬-정을 들어 연 보를 추천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이 접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일상적인 사랑의 열매분 아니라 또한 감사하는 마음을 낳을; 것이다’라는 말로써 그 접을 더욱더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그들을 돕는 데소 동원된 너그러움분 아니타, 고린도인들의 전반적인 경건한 생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말이다• . . ' I, I _ic· < • >· -~ 크 -, , ' . -f
"12. 이 봉사의 직무……" ; 이것은 자신이 교회들의 청에따라서 수행한 것 을 뜻한다• 우리가 ‘섬김'으로 번역하는 단어는 .ilur~uprta(레이루르기아)로 서, 여기에는 희생의 의미도 있고 공적으로 부여된 칙분의 의미도있다. 어 느 의미이든 현재의 문맥에 다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제가 희생 이라는 말로 블리어지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어느지방 주민불해게 칙분이 분배될 경우 아무도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두덜대며 수행하는 사람 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도 재물을 분담하는 일을 팔수적인 임무로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고린도인들과 다른 사람들은' 예루살렘의·형 제들을 도움으로써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거나, 그들에게 부과된 올바론 임무를 수행하는·.1이었다. 바울은 희생제사의 사역자였다. '봉사fI혹은 ‘섭 김'이라는 단어는 또한고린도인들과 관련된 것으로도 분수있지만, 이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 다른 많은 귀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서 입증한다는 말 역시 증거 또는 단련을 뜻한다•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그 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들에게 그처럼· 너그럽다는 점, 곧 그들의 사랑을 입증하는 좋은 계기였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는 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곧 그는 복음에 대한 그들의 일치된 순종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 곧 우리논「그런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있다 는 접을명백하게 드러낸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그들의 일치는 그들 모 두의 동위에 따라서 연보가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도 명백하게 된다. -
"14. 또 저희가…… 간구하며……" ; 그는 고린도인들의 마음을 움칙일 수 있는 내용, 곧 그들의 자선의 혜택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먼저 그 논 신자들이 체험할 위로를,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그들의 감사를, 다음으로 이것은 또한 그들의 신앙과 경건한 순종의 만장일치를 입증 하는 고백이 될 것이라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는 고린도인들이 성 도들에게서 받을 보상, 곧 자비로운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과 간철한 기도에 서 그 모습올 드러낸 것이타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곧 ‘구들이 너희들에 게 보상할 수단이 주어지게 되는 것은 그들이 너희들을 너희가 받아 마땅한 사랑으로 대할 것이요, 그들이 기도를 통해서 너희들을 하나님께 추천할 것 이기 때문이다'타는 말이다• 걷론적으로, 마치 그의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그는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이 문제를 이미 정해 전 사실로 취급함으로써 그들에게 그들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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