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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10:6)

1. 성경 (고후10:1 ~ 18)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1)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2)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3)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4)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5)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6)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7)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8)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9)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0)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11)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2)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3)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5)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6)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7)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그는 권면을 마친 다음에 계속해서 거짓 사도들이 자기에게 내던전 거짓 혐의를 반박하고, 한편으로는 잠잠히 제지 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일부 불경건한 사람들의 오만불손을 꺾고 있다. 바울의 권위를 내리깎기 위해서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은 그가 그의 편지를 통해서 호통을 치는 열정을 단순한 '드라소데일리안' 소심한 허풍선이의 허세로 물아붙이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그가 그들과 함께 할 동안에는 그의 표정과 말이 그의 편지의 어조와 같지 않고 아주 조용하고 담담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인즉, ‘그것 봐, 이 찬구로 말하자면 자신의 열등감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앞에서는 아주 온건하고 수줍어 하더니만 멀리 있으니까 우리를 맹 공격하고 있지 않나. 그의 말이 그의 편지보다 덜 담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가 있을 때 그를 멸시했다면 그가 멀리 있는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멋대로 우리를 대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슨 배짱인가?' 하는 식이다. 이따위 낭설이 떠돌면서 그의 가혹성을 비웃었으며 그것을 불쾌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바울은 자기가 화를 내는 것은 그럴 팔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과 그들이 무시하는 자신의 외관상의 수수함 때문에 육신적인 과시가 아니라 영적 특성으로 빛나는 자신의 권위를 조금도 감소하지 않았다는 점을 답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권면, 꾸지람, 또는 경고를 비웃는 자들은 벌을 받지 않은 채 피할 수 없었다. '천히'라는 표현은 강조적인 것으로서, 이것은 악의적인 사람들이 제아무리 자신을 가리켜 일관성없는 사람이라면서 비난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으로서는 변덕이 없었으며, 항상 동일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에 대해서 쏘아붙이는 비난을 거듭 반복하고 있다. 표현상으로는 그들의 비난의 사실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것도 그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있다.

 

"너희를 권하고" ; . 강한 감정이 일어날 경우 대개 다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거칠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에 의지해서 제발 간청 하는데 내가 바라는 이상으로 더 가혹하게 나오도록, 곧 나의 외모가 형편 없다 해서 나를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영적 탁월성에 따라서 내가 판단을 받아야 하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 내가 취하고 있는 바 이상의 반대를 펴도록 고집을 피우지 말아 다오’ 라는 것이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간청의 형식은 현재 논의되고 있는 내용에 의해서 암시되고 있다. 곧 그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에 입각해서 그들에게 간청하고 있다.  그를 헐뜯는 자들이 그를 잡고 늘어진 것은 그의 신체적 모습에 위엄이 없었으며, 또한 그가 멀리 있을 때 그들에게 호통을 쳤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내용을 물론 그는 잘 반박하고 있지만, 또한 온유보다 자기 마음에 더 가까이 있는 것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온유는 그리스도의 사도에게 어울리는 것으로서, 주께서도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 : 29"-'30)라는 말로써 본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선지자도 그에 대해서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42:2,3)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 스도께서 친히 보여 주신 온유를 그는 그의 종들에게 구하신다. 여기서 바울은 이 점을 언급함으로써 자신도 거기에 대해서 생소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의 종들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너희들이 내게서 보는 이 온유를 멸시하지 말기를 간청한다'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2. 육체대로 행하는 자" ; 크리소스톰은 여기에 불충실하게 행하거나 자신의 직무에 있어서 못되게 행동한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말하는데, 바울은 사실 이런 의미로 종종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육신이 여기서 외적인 허영이나 과시, 곧 거짓 사도들이 보통 스스로를 추천하는 데 있어서 내세우는 유일한 표준과 관련되는 것으로 섣명하는 편을 택하고 싶다. 바울은 자신의 육신만을, 곧 사적인 목적에만 힘을 쏟는 모든 사람들의 통상적인 습관에 따라서 외적인 모습만을 보는 자들의 부당성을 두고 불평하고 있다. 바울은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서 일반적으로 칭송이나 평판을 사기 마련인 그러한 특성에 있어서 전혀 뛰어난 바가 없었으므로 혼해 빠진 사람으로 멸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멸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판단할 뿐,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기적이요, 야심적인 사람들이다.

 

"여기는 자들" ;  에라스무스는 ‘우리들이 육신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로 번역하지만, 내가 보기에 바울의 본래 의미는 ‘우리들이 마치 육신에 따라서 행동한 것처럼 우리에 대해서 판단하는 자들’로 번역하는 벌계이트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와 동시에 그 번역은 좋은 라탄어가 아니며, 사도의 의미를 충분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로기 제 스다이' 는 ‘여기다' ' '평가한다’ 는 의미가 있으므로 바울의 이야기는 ‘그들은 마치 우리들이 육신에 따라서 행동한 것처럼 우리에 대해서 생각한다, 또는 우리들은 그렇게 여긴다’라는 것이다.

 

"구하노라." ;  혹 자는 이 문장이 불완전하여 그가 간청하는 내용에 대해서 설명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가 앞 소절에서 부족된 것을 여기서 완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권면이 일반적인 것이 되고 있다고 본다. 곧 ‘너희들이 나에 대해서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보여 줌으로써 내가 억지로 가혹하게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양떼가 억지로 끌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고 상냥한 방법으로 따름으로써 스스로 인도를 받도록 유도하는 것이 훌륭한 목회자의 임무이다.  물론 나도 경우에 따라서는 가혹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는 언제나 온유하게 시작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순응할 경우에는 언제까지나 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가혹성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우리는 혹독하게 나오기 전에 다른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마땅하다. 그는 계속해서 그들이 자기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소심하고 수줍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으며, 고집을 피우는 자들은 당당하게 대면할 것으로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나를 정신이 약한 사람으로 멸시하지만 실전(實戰)이 시작되면 내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하고 왕성하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달램과 부드러움이 아무런 효과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시험한 다음에라야 가혹하게 행동한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의 결정이다’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이 더없이 칭송을 받아 마땅한 온건인 것은 우리들이 물론 최선을 다해서 사람들을 몰아 붙일(to drive) 것이 아니라 이끌어야 (to draw) 하는 것은 사살이지만, 온유가 고집스럽고 괴팍한 사람들을 다룸에 있어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않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엄격하게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밖에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온유나 침착이 아니라 느슨한 소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 여기서 ‘육체에 있어 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 곧 그의 표현을 빌자면 신체 안에서 거처하는 것 (고후5 : 6)이다. 사실 그는 자신의 신체라는 유치장에 갇혀 있었지만, 이것은 성령의 능력이 그의 연약성 안에서 경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것 역시 그의 원수들에게는 실제로 아무런 보댐이 되지 못하는 그런 양보이다. "육체대로 싸우는" 자들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그들만이 유일하게 자랑하는 세상적인 재원(財酒)에 의존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확신은 성령의 통치나 인도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이 세상과 육신에 속한 사람 들과 다른 무기로 무장된만큼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에게 적용된다. 그 까닭은 전에도 말했듯이 그들은 그들의 질그릇에 값을 정할 수 없는 보화를 가지고 있으며, 설령 그들이 육신의 연약성으로 에워싸여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은 그들 속에서 밝게 비취기 때문이 다.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  여기서 말하는 병기란 전쟁의 병기요, 바울이 여기서 자랑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영적 무기로 무장된만큼 그의 전투는 영적이다. 이것은 그의 전투가 육신에 따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나 복음 사역과 전투에 대한 비교가 기독교인의 전 생애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사단이 평화롭게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오직 계속적인 동요로 성가시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의 사역자들과 목사들은 남보다 앞서가면서 행군하는 것이 그들의 본연의 자세이다. 물론 사단이 심하게 괴롭히지 않거나 더 크고 가혹한 상처를 계속 입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투에 대비하는 병기와 무장이 없이 이 직분을 성취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오산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이란 싸우는 것 뿐이다. 그는 복음을 사단의 진노를 불붙이는 불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며, 따라서 복음울 증진 할 기회를 볼 때마다 전투에 임하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단을 격퇴 할 수 있는 무기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는 오직 영적인 무기에 의해서만 격퇴 될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스스로는 자랑 할지 모르겠지만, 곧 자신이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판명될 것이다. 그러나 영적 무기의 완벽한 정의를 내리자면 가르침이 열성에, 선한 양심이 성령의 효과적인 작용에 덧붙여지며, 기타 다른 은혜가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교황은 제멋대로 사도의 위엄을 주장하지만, 사도의 이 원칙을 우리의 판단의 표준으로 삼을 때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서……강력이라(강력하다)" ;  여기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강력하다'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하다’는 의미가 있다.  나는 여기에 이 강력함이 세상 앞에 그에게서 겉으로 드러나는 연약성과 대조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인간의 모든 판단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면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용기의 인준을 구하는 것으로 본다. 그와 동시에 이 대조가 다른 의미로도 통용되는 것은 그의 무장의 능력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진을 파하는" ;  그가 말하는 ‘진'(요새)이란 하나님에 대항하는 모사와 모든 성벽을 뜻한다. 그는 이것에 대해서 다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지만, 이 단어는 여기에 적절할 뿐 아니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곧 그의 의도는 이 세상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방비를 갖춘 것은 전혀 없다는 점을 자랑함에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물론 육적인 사람들이 허풍을 떨면서, 그리고 갖은 모욕으로 나를 멸시한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자기들은 지고하게 높은 곳에 있지만 내게 논 비천하고 볼품없는 것 뿐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들의 장담이 어리석은 것은 내가 덧입고 싸우는 주님의 갑옷은 그들이 의지하면서 천하 무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방어를 능가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다.

 

세상이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와 전쟁을 하기 위해 자신을 무장함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곧 한편으로는 교활하고   악한 계략, 음모, 기타 은밀한 조작을 동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악과 압제를 동원하므로 그는 양자를 다 다루고 있다. ‘모든 이론’이란 육적인 지혜와 관련된 모든 것을 뜻한다. '높은 것'은 세상적인 영광과 권세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그 어떠한 반대 앞에서도, 그것이 제아무리 거대하다 하더라도 두려워 떨 이유가 전혀 없다.  그것에도 불구하고 지탱하다 보면 모든 조작을 무산시키게 되고 말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고 확립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세상에서 높여진 모든 것을 낮춤으로써만 가능하다. 육신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영적 지혜와 대항 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의 본래 능력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위배되는 것도 없으며, 제상이 높여진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인간을 낮추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립하는 유일한 기초이다. 선지자도 ‘주께서 통치하기 시작하실 그 날에 달이 부끄러워할 것이요, 해가 어둡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써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고자세가 낮아질 것이요, 유한한 것들의 거만한 모습이 비천하게 될 것이요, 주께서만 홀로 그날에 높아지실 것이다' (사5 : 15, 2 : 17)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만 홀로 광채를 발하기 위해서는 온 세상의 영광이 사· 라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5.  모든…  사로잡아……" ; 내가 보기에 그는 영적 무장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는 장애물과의 갈등에 대해서 지금까지 말하고 나서, 이제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게 하는 일상적인 준비 과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체험으로 만족하며 우리 자신의 눈에 드는 데서만그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너무도 먼 거리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명하고자 한다면 먼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곧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을 포기하고 육신의 지혜를 배척하며, 그리스도에게 빈 마음을 바침으로써 그것을 그로 하여금 채우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라는 표현에 주목할 팔요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마음의 해방은 그것이 제지받고 재갈 물려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의 밖에서는 결코 지혜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요, 그것이 담대하게 제지받는 유일한 길온 그것이 노예로 사로잡히는 것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스스로 질서를 잡고 자발적인 노예상태(captivity)에 머물러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그들 중 아무도 너무 가혹하게 대함으로써 소외시키지 않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신중한지 모르겠다. 반역적인 자들에 대해서 처벌을 경고했지만, 자신의 말이 그들을 격노케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임무가 다른 데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종하 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가 로마서의 처음과 나중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복음에 적합한 목적과 목표이다(몸1 : 5, 16 : 26). 그러므로 먼저 기독교 교사들은 그들의 청중의 반역성에 처벌을 가하기 이전에 우선 그들을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하게 만들며, 친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간청하는 것을 자신들의 불변한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 서 그리스도께서는 매라는 명령에 앞서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리셨던 것이다.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  그는 오만불손한 사람들이 자신의 사역에 대항하면서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나칠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이 점을 덧붙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원하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이끌 뿐 아니라 반역적인 자들에게 벌을 내릴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점과 자신의 경고가 그들을 겁 주기 위한 빈 말이 아니라 그들을 처단 할 각오도 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처벌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보장을 받고 있다(마18 : 18).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께서는 사역자가 판결을 내리는 매 순간마다 당장 하늘에서 벼락을 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역자가 영적 무장을 하고서 싸우는 한 그 심판은 비준되는 것이며, 때가 되면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이 사도가 고집 센 자들이나 불경건한 자들에 대해서 재앙을 가한 육체적 처벌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곧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게 한 것과 바울이 박수 엘 루마를 눈멀계 한 경우가 그것이 다(행 5 :1~10, 13 : 6 ~ 11). 그러나 사도들은 처벌하는 그 권세를 보편적이고 무분별하게 사용한 것이 아니므로 첫째 의미가 더 적합하다.  바울은 여기서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면서 모든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해서 당장 재앙을 내릴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너희 얼굴 앞에 있는 것들)" ;  ‘너희 얼굴 앞에'라는 귀절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그들이 눈으로 똑똑하게 보는 것들로 보는것이요, 다론 하나는 그들을 속이려고 그들 얼굴 앞에 제시되고 있는 외관상의 가면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하나의 진술 또는 질문으로 볼 수도 있으며, '블레페테'라는 동사는 직설법이나 명령법으로 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문장에는 하나의 비난이 담겨 있다. 곧 바울은 고란도인들이 실속 없는 과장으로 자신 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을 꾸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너희들은 자 화자찬에 빠진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귀담아 들으떤서 나는 과장이나 허풍 을 떨지 않는다 해서 멸시하는구나' 타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리스도께서도 ‘의로운 판단'을 ‘외모에 따르는 판단'과 대조시키고 있다(요7 : 24, 8 : 15).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의관상의 전시로 만족하고 제대로 그리스도의 종들로 인식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주의깊게 명십하지 않는 접을 들어 꾸짖고 있다.

 

"만일 사람이……믿을진대……" ; 그는 여기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여자라는 점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이 특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점을 기정사실로 취급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 든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나도 바로 그런 사람이 라는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왜 그런가? '그런 사 람은 이것을 자기 속으로 생각할 것이요, 그렇게 될 경우 자신으로 하여금 이 직분에 합당하게 만드는 모든 특성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 기 때문이다 .. ' 이것은 바로 그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을 마땅히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길 수 없다는 접을 시사하는 방법이기도하다. 이것이 누구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성질의 내용이 아닌것은날마다일어날수있고실제로일어 나고 있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에게 치욕거리밖에 되지 못하는작자들이 주제 넘게 바로 이런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모든 내용은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를 통해서 고린도인들에거]입증되었 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제넘게 동일한 방법으로 자신을 치켜세우지만 자 신의 말하는 내용이 실제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런 사람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샘이다.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사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 받기 를 원하면서 그리 스도를 섭 긴다는 구실 아태 권세 나 권위 몰 횡령하는 것이다.

 

"8. 주께서 .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면서도 자신을 그리 스도의 종들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 키 는 것 은 그가 온건하다는 표 시이지만, 자신의 권위를 손상할 정도로까지 온건하게 나가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이야기할 권리에 비한다면 아무리 해도 다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 그는 통상칙인 사역자단가운데 한사람 이 아니라 사도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내가 좀 지나치계 자랑한다하더라도수치를 당하지 않은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 가 있기 때문이다'타는 말을 덧붙이고 있냐 여기서도 그는 자신의 자랑만 늘어놓고 있지 않느냐는 반론을 예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더이상 언 급하지 않음으로써 고린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오칙 마지못할 경우에만 자 랑을 늘어놓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거짓 사도들 이 여러가지 악한 형의를 들고 나오면서 그를 강요하지 않았던들 전혀 자기 입으로 자랑을 늘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권세'(권위)는 그가 고린도인들 사회에서 지니고 있던 사도저 권위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모든 사 여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동일한 칙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사회에 도 영예의 등급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수고를 사용해서 교 회의 터를 놓으시고 다른 많은 방법으로 그의 사도칙을 장식해 주십으로써 그를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 올려주셨다. 자기에게 권위가 있는 것으로 말 한다 해서 악의적인 사람들이 그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이 권위가 자신에게 베풀어전 목적을, 곧 고 란도인들의 안녕을 위해서라는 접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권세는 그 들에게 불쾌하거나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아는 것에 대해서는 참기 쉽다• 아니, 사랑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또한 그의 권위와 거짓 사도들이 자랑하는 그것에 대한 대조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의 권위에서 고란도인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으며, 아무런 덕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 씀의 모든 사역자들이 틀림없이 이 권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그것이 없을 경우 교의의 전파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처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 버리는 것이라"(눅10 : 16)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그 러 나 실제로는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 도 권위 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만 큼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권위가 오칙 신자들의 교화(敎化)에만 소용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따라서 교회를 파괴하는 데 자신들의 권위 를 행사하는 자들은 목회자가 아니라 스스로 폭군과 강도임을 입중하는 셈 이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전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겠다. 이것은 무손 일을 하기 위 해서 권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먼처 하나님에 의해서 그 권위가 허용되 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거짓 주장을 퍼는 사람들이 있는데, 주 제넘게 큰 소리를 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호통치는 교황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할 수 있는 중거는 무엇인가? 그리 스도께서는 이런 종류의 권위를 벙어리들에게가 아닌 사도들과 다른 사역자 들에게 수여하십으로써 그의 복음의 가르침이 무방비 상태가 되는 일이 없 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말씀 위에 굳게 선 사역자들의 권위는 모두가 우리의 주인이시며 선생이신 그리스도를 항상 기억함으로써 그 방법이 모색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당한 권위에는 두 가지 필수 요건이 있다는 점을 명십해야겠는데, 그 첫째는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수여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 둘째는 그것이 교회의 안녕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 님께서 누구에게 이런 권위를 수여하고 계시며, 그것을 행사하는 면에 있어 서 무슨 제한을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충실하게 그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들만이 합법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 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 어뜨리며 건설하며 십계 하였느니라"(렘1 : 10) 하는 말씀을 예 레 미 야에 게 하고 있으며, 우리가 바로 5철에서 배운 바로는 사도 역시 그들이 그리스 도에 대항해서 높여지는 것들을 모조리 파괴한다는 동일한 입장에 근거해서 성별되고 있으며,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복음의 교사들이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온 옛 사람을 파멀함으로써 만 가능하고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은 불경 건한 자들에게 죽음과 정죄를 가져온다. 나는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대답하겠다. 그는 자신의 사도 칙을 동해서 혜택받기를 바라는 고린도인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가 그들 사회에서 행한 모든 것은 그들을 세우는 문제와 관련될 분이었 다. 이미 보았듯이 바울이 이 접을 명백하계 밝히고 있는· 것은 자신의 권위 를 공격하는 자가 그들의 구원의 원수인 사단이요, 이 권위의 목적이 그들 을 세움에 있다는 점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가르침은 파괴가 아니라 세우는 데 치중한다는 점은 전반적으로 인정 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것이 파괴하는 경우는 그것의 본질적인 무엇 때문이 아니고, 본래 기초로 세워지기로 의도되었던 돌에 걸려 넘어지는 사 람들의 죄악 때문이다• 물론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회복되는 것은 옛 사 람이 파멀됨으로써만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결코 바울이 여기서 말 하고 있는 것과 배치되지는 않는다. 옛 사람의 파멸이란 좋은 것이지만 여기 서는 나쁜 것, 곧 하나님 소유의 파멀, 곧 영혼의 죽음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권위가 그들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녕울 증 진하는 데 분명히 유이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9. 이는 내가……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  그는 자신이 이미 반박한 바 있는 내용, 곧 그가 편지로는 큰소리치지만 그들 앞에서는 담력이 시든 다는 비난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핑계삼아 그의 굴을 얕잡 아보고 있었다 ... '뭐 ! 우리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할 주제에 멀리서 굴로는 우리를 겁주겠다고?' 하는 식으로 그들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굴이 권위를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이런 따위의 반론이 어느 모로 보나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의 평판을 파괴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것은 행동이 최소한 말과 갈은 효력을 지니며,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고 있을 동 안에 그가 취한 행동 하나하나가 그가 부재중에 굴로 보낸 말처럼 강력했으 므로 자신의 신체적 촌재를 멀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이타는 점 을 지적하고 있다.

 

'행실'이타는 그의 표현을 나는 그의 전파의 효력과 성 과분 아니라 한 사도에게 적합한 그의 모든 담대한 행실과 그의 모든 생 활 양식의 의미로 본다. '말'이라는 표현으로써 그가 뜻하는 것은 그의 가 르침의 본질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의 형태와 의형적인 윤곽분이다. 그의 교의를 방어하는 문재였다면 그는 더욱더 강력하게 나왔을 것이다. 그들의 멸시의 원인은 호감을 사기 마련인 그럴듯하고 세련된 웅변이 그에게서 부 족했거 때문이다. 

 

"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 할 수 없노라 " ;  그의 이 이야기가 냉소적인 것은, 그는곧이어서 자신을 담대하게 다른사람들과 비교하고 있을 뿐 아니 라 그들의 주장의 허영에 멸시를 퍼부으면서 그들이 자기보다 훨씬 뒤지고 있 는 것 으로 이 야기 하고 있 기 때 문이 다. 이 냉 소를 통해 서 그는 어 리 석 은 허 풍선이들뿐 아니라 그들이 찰못 인준함으로써 그들의 우매를 격려한 고린도 인들까지 후러치고 있다. '나로서는 나 자신의 중용으로 만족하며 감히 자신 들의 특성을 자랑하고 다니는 너희들의 사도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 하는 식으로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그들의 자랑에는 아무런 실속이 없고 다만 말과 허풍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 고 쓸모없는 자들인가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말이 아니라 실체를 자신의 것 으로 주장하고 있다.

 

곧 자신에게 자랑할 만한 실제적으로 확고한 근거가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자신을 추천하고 있는만큼 얼핏 보기에 그는 남들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바로 그 우매를 법하고 있 는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론다. 나는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우리들이 명 십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야십에서 완 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은 주님을 유이하게 섭길 자져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 의 찬사 그 자체를 자신의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귀철에 관한 한 우리들은 단어 그 자체에만 관십올 가질 팔요가 있다. 자기를 칭찬하는 사 람들이란 가련하고 참된 칭송에 허덕이는 사람들로서 헛된 자랑을 통해서 자신들을 치켜세우며, 실제와 다론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점은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 여기서 그는 그들의 우매를 꼬집어 이야기하고 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 사 람들 세계에서 다분히 똑똑하게 보며, 귀가 반쯤밖에 뚫리지 않은 사람은 전 혀 듣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에서 다분히 명백하게 듣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 로 그들이 의도적으로자기들보다 위의 사람들을 모조리 무시하기 때문에 난 의 앞에서 자신만으로 만족하고 허세를 부리는 자들의 꼬락서니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그들이 자신을 바울이나 그와 같은 사람과 비교했더라면 그들 온 당장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허풍에서 수치로 듄아서고 말았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응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멀리 갈 팔요없이 수도 사들로서 충분하다. 왜 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전적 으로 쓸모없는 나귀 들에 불과하지만, 단지 그들의 간 두루마기와 두건 덕분에 그들은 유식한 사람의 평판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타도 만약에 어설프계나마 교양을 가질 경우, 그는 그의 털을 마치 공작처럼 펼치며 그의 명성을 넓고 멀리 늘어뜨탈 분 아니라, 그의 동료들에게서 거의 예배를 받을 정도이다. 그 두건 달린 겉옷이 벗겨지고 공정한 십사를 할 경우에는 그들의 허영이 당장에 들통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왜 그런가? "무지는 담대하다”는 옛 속담도 있지 만, 수도사들의 과도하게 오만불손한 교만은 주로 그들이 스스로 를 자기 자신으로 측량한다는 사실에 서 기 인한다. 그리 고 그들의 굴 속에 서 는 야만 이외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눈 한쪽 가전 사람이 맹인들의 나라에서 왕 노릇하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 못된다. 바울의 상대자들이 바로 이린 인 물들이었다.

 

곧 그들은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자신들끼리 서로 아첨하고 있 었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칭송을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이며 , 그들이 바울이 나 그와 같은 사람들의 특성과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 각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이것만 생각했어도 그들은 얼굴이 붉어졌겠지만 그들의 우매가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고-이것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회피하 고자 하던 일이다―그들이 그처럽 무철제하게 욕망하는 영광 대신에 그들 이 얻는 것은 수치분이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  이제 그는 자신의 중용을 거짓 사도들의 우매와 대조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한계를 지킬 때만이 우리의 자랑이 실재적이요, 순수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곧 ‘주께서 나에게 이것을 주셨으니 나는 이 분량으로 만족하겠으며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도 주장하지도 않겠다’라는 이것이 ‘한계의 분량’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용하신 은사와 소명을 더 이상 확대하지 말아야 할 한계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와 소명이라도 우리 자신을 위해 자랑하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그의 손으로부터 받고 있다는 점을 깨닫도록 하는 뜻에서 우리에게 그처럼 관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허용된다는 이야기이다.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영광의 일부, 아니 다른 곳에서 그가 말하는 표현을 빌자면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 하는 자들아"(빌4 : 1)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슨 긴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이미 사용한 동일한 비유법을 계속해서 이용하고 있다. 곧  ‘나의 한계를 지나치지 않고도 충분히 자랑할 전답 (field)이 있는데, 이 전답 가운데 일부가 너희들이다’라는 이야기이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인준의 도장을 받고 있는 자신의 사도직 특별히 높이 평가했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의 간과해 버린 점을 들어 그들의 배은망덕을 가법계 꾸짖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그런 도장을 보여줄 수 없는 거짓 사도들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

 

"14. 우리가·… .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 그는 사람들이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판을 뻗치거나 발뒤꿈치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연상하고 있다. 영광에 대한 탐욕스러운 욕망은 이와 갈지만 대부분 수치스러운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야심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팔을 뻗치고 발 뒤꿈치로 설 뿐 아니라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핑계를 대서든 달려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상대자들이 그와 같은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이 어떻게 고린도인들에게 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곧 그것은 자신의 사역울 통해서 그들의 교회의 터를 놓기 위해서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온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그는 그들에게 빈 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맨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가져온 사람이다. 혹자는 전치사 ‘안에서' (in)를 ‘… ... 에 의해서' (by)와 동등한 것으로,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로 번역하는데, 여기에도 아무 나쁜 점은 없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너무도 귀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므로 자신이 고린도인들에게 오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  이제 그는 거짓 사도들이 남의 수확을 거두려고 감히 팔을 뻗치면서 그것을 위해 준비 작업을 하느라 땀을 흘리며 수고한 자들을 헐뜯는 자들에게 거침없이 꾸중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면서 여간 투쟁을 하지 않았고 헤아릴 수 없는 난관을 이겨 내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들이 나타나서 보니 길이 만들어져 있고 문이 열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좀 무게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들은 수치스럽게도 그들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하면서 바울의 수고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바라노라." ;  그는 다시 한 번 고린도인들이 복음을 펼치는 자신의 진보에 장애물 노릇을 한다는 점을 들어 그들을 꾸짖고 있다. 즉 ‘그들의 믿음이 더할수록' 자신의 자랑의 범위가 늘어날 것이라는 말 속에는 그들의 신앙의 연약성온 그 진보가 어느 정도 지연되는 이유라는 내용이 암시되고 있다.  곧  "너희들이 마땅히 진전을 보아야 하는 단계에까지 나갔더라면 지금쯤 나는 새로운 교회 확장을 위해 몰두하고 있을 것이요, 거기에 대한 너희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을 것이나, 그러나 사실은 너희들의 연약성 때문에 내 일이 지연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주께서 장차 너희들에게 더 큰· 진전을 보도록 허용하시며, 그 결과 내 사역의 영광이 하나님의 소명의 분량에 따라서 중대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라는 식이다.  ‘예비되어 있는 것들을 두고 자랑하는 것이’ 역시 남의 수고를 두고 자랑한다는 내용과 마찬가지이다.  전투를 한 사람은 바울이고, 승리를 구가(講歌)하는 자들은 그들이었다.

 

"17.  자랑하는 자는……" ; 그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자랑 자체가 한낱 허풍에 불과하다는 나쁜 인상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과 남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소환하면서 자랑할 권리를 가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준을 받은 자들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주님 안에서 자랑한다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1 장 31절이나 예 레미야 9장 24절의 그것과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들의 주인공이라는 점과 따라서 모든 좋은 것을 그의 은혜의 덕으로 돌려야 하며, 인간들은 자신들을 치켜올릴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의 자랑을 오직 하나님의 심판에 귀속시키고, 다른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견해에 의지하면서 여론이라는 잘못된 저울 추에 자신들을 달아보는 사람도 있고 자신들의 교만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 자랑(glory)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것을, 곧 우리가 일어서고 쓰러지는 데 있어서 판단의 주인공이 되시는 주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점을 당부하고 있다. 이방인들까지도 참된 자랑은 순수한 양심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곧 거의 모두가 과도한 자기 사랑으로 눈이 먼 상태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우리 자신의 평가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가 다른 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사항(고전4 : 4), 곧 자신으로서는 자기에게 아무런 해악이 없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동시에 명심해야 할 사항은 우리 자신이 우리 문제에 있어서 유능한 재판관이 될 수 없으므로, 우리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권리는 하나님에게만 유보(留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귀절은 바로 이런 해석을 확증해 주고 있다. 인간은 거짓 인상에 의해 쉽게 속아 넘어가기 마련인데, 이것은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인준(認淮)을 사는 것을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오직 그의 인준으로 만족하도록 해야겠다. 그 까닭은 하나님의 인준이 온 세상의 모든 박수갈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인준이 수천 사람의 인준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 판단이나 누가 누구보다 더 우월한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판단을 전복하는 대권을 쥐고 있는 하나님 자신의 판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