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후 11:16 ~ 33)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6)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7)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8)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19)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20)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1)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2)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3)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4)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5)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6)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7)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8)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29)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0)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1)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2)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3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 사도의 의도는 두 가지이다. 한편으로 그는 지칠줄 모르게 자신들의 찬사를 늘어놓는 거짓 사도들의 역겨운 허영을 폭로 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고란도인들이 자신에게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신의 찬사를 늘어놓게 하는 점을 들어 그들을 타이르고 있다. '다시 말하노니'라고 그가 시작하는 것은 자신이 멸시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앞에서 충분히 입증했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고, 그의 자랑을 그들의 자(尺)와 동일한 자(尺)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입증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한 번 자랑하는 의도가 무엇 인가를, 곧 자신의·사도직에 대한 멸시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은 만약 고린도인들이 그들의 본분대로 행동했더라면 이런 종류의 자랑이 한 마디도 자기 입에서 나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더라도……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 "혹 너희들이 나를 바보로 생각 한다면, 최소한 내가 바보처럼 어리석게 말할 권리를 허용해다오"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 극도로 어리석은 자들인데도 고린도인들이 단지 묵인함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는 데 대한 일종의 꾸지람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말하는 우메가 어떤 것인가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자화자찬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적대자들이 끝없이 하던 일이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아주 생소한 일이라는 점을 ‘조금' 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것을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시간적인 의미로 오랫동안 계속해서 자랑을 늘어놓을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잠간동안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가 곧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어떤 문제에 있어서 바보스럽고 부적절한 의도에 빠질 때, 바보들은 '엔 파레르고이스', 곧 하찮은 문제를 가지고 항상 애쓰지만, 우리는 어리석은 대로 강조할 것은 강조하는 것이 이차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 ; 그의 마음은 물론 하나님을 중심하고 있었지만, 그의 외모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울리지 않게 보였을는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 그가 거짓 사도들의 경우를 비난하는 내용인 것은 그의 의도가 자신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창피주려고 자신을 그들과 대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가 그들에게 특징적인 것을 자신에게 전용(轉用)하는 것은 고린도인들의 눈을 열어주려는 뜻에서이다. 내가 ‘기탄없이' (확신 가운데)로 번역하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 포스타시스'로서, 그 의미는 이미 9장에서 취급된 바 있다. '주제'니 ‘본 질'이니 하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여기에 부적합하다.
"18. 여러 사람이~~~~~자랑하니~~~" ; 그 의미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내가 하는 일이 나쁘다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똑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떠냐? 내가 그들의 본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육신적으로 자랑하는 사람이 나 혼자냐? 아니면 내가 제일 먼저냐? 그들의 자랑이 칭찬을 받는다면 내가 자랑하는 것은 왜 비판하느냐?' 라는 것이다. 바울의 자화자찬에는 결코 이기적인 동기가 없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들의 허영을 폭로할 수만 있다면, 그 자화자찬에 대한 비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육신을 따라서 자랑하는 것'은 선한 양심으로서가 아니라 겉모양으로 자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육체’라는 표현은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우리가 항상 세상의 주목거리가 되고 크게 인정을 받는 외모만을 추구하는 경우에 엿볼 수 있는 그대로이다. 조금 앞에서 그는 동일한 의미로 ‘외모'라는 단어를 사용한 바 있다.
"19. 너희는·… ..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 내가 보기에 고린도인들을 현명한 것으로 말하는 그의 표현은 냉소적이다. 그들은 그를 무시했는데, 이것은 만일 그들이 더없이 기고만장한 오만으로 부풀지 않았더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그러기에 그는 ‘그래 너희들은 현명하니 현명한 사람답게 너회들이 바보처럼 멸시하는 나의 말도 용납하라’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 귀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이 고린도인들 모두에게 직접 겨냥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아주 불친철하게 굴던 특정인들을 꾸짖고 있다는 점을 추론한다.
"20. 누가 너희로……너희가 용납하도다." ; 여기서는 세 가지의 의미가 가능하다.
첫째는 고린도인들이 아무것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상하다는 점을 들어 빈정대는 것일 수도 있고,
둘째는 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그처럼 수치스럽게 굽실거릴 정도로 경솔하게 자신들을 내맡긴 점을 들어 꾸중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세째로는 자신이 마치 그들을 상대로 독재적인 지배를 행사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에 대해서 퍼부어지고 있는 비난을 반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두번째 해석이 크리소스톰, 암브로스, 그리고 어거스탄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것으로서 문맥에 가장 잘 어울린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세번째 해석도 다같이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대로 그는 얼마나 많은 기회에 악의적인 적대자들에 의해서 마치 그가 폭군이라도 된 것처럼 중상모략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론 해석이 보다 더 일반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나는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반대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서 말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 된 내용, ‘다론 사람들은 너희들을 압제 하거나 너희들에게 강압적인 요구를 하거나 너희들을 구박해도 모든것을 잘 들 참더라.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에 비해서 전혀 나온 것이 없는데도 왜 나에 대해서만은 그처럼 관용을 베풀수 없느냐?' 하는 귀절과 관련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너무도 탁월한 은혜를 자신에게 베풀었기 때문에 자신을 일반적인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약한'이라는 단어에는 곧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숨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종들을 거부하고, 더없이 하찮은 구실을 가지고 그들에게 분개하며, 쉬지 않고 투덜거리며, 온건하게 엄격한 규율을 불평하며, 아니 모든 규율을 가증스럽게 여기면서 거짓 사도들, 협잡군들, 쓸모없는 위선자들 앞에서는 벌벌 떨며,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치 않으며, 그들이 무슨 부담을 주든 달게 참는 것이 지금까지 세상이었돗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교황의 가혹한 독재는 한 마디 불평 없이 용납하지만,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엎드리는 사람은 삼십 명에 한 명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곧· 아버지와 같은 자나 목회자들의 유익한 질책을 듣고 펄펄 뛰는 그들은 바로 과거에 수도사들의 더없이 극악무도한 모독을 말없이 삼킨 자들이다. 전리를 듣는 데 있어서 그처럼 귀가 까다롭고 둔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지배보다는 적그리스도의 고문대와 고통을 받아 마땅한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창세이래 계속 그리하여 왔다.
"21.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 ; 바울은 자신이 어느 모로든 약하지 않았는데, 즉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데도 왜 고린도인들이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존경하는가 하고 지금까지 묻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만약에 비교를 해야 한다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당당하게 자랑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 그는 여러가지 예를 들어가면서 비교하기로 한다면 자신이 결코 못지않다는 점을 보다 더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의 경쟁자들이 가장 강력하계 자랑하던 자기 종족에 대한 자랑을 언급하고 있다. 곧 ‘만약에 그들이 자신들의 고귀한 가문을 자랑한다면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들과 동등하다’ 라는 식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리석고 헛된 자랑이지만 바울은 이점을 표현함에 있어서 세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아니, 그는 세 가지 다른 우월성을 조목별로 나누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반복을 통해서 그는 그들의 우매를 간접적으로 꾸짖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그처럼 하찮은 문제에 있어서 뛰어나다는 그들의 주장을 고집대로 잡고 늘어지면서 줄곧 지껄이므로 마침내 그것이 아주 역겹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머리가 텅빈 사람이 전혀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허풍을 떠는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이다. 히브리인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1장 14절을 볼 경우에는 그것아 혈통을 뜻하며, 에벨(Heber)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고, 창세기 14장 13절을 볼 경우에는 아브라함이 다른 의미가 아니라 오직 그가 에벨 후손이기 때문에 히브리인으로 볼리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단어를 강 저편에 거하는 자들의 의미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들의 추측을 뒷받침할 만한 본질적인 증거를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다. 물론 요셉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면서 실제로 그 강을 건너기 이전에는 아무도 히브리인으로 불리운 사람이 없으며, 후에 이 명칭이 그의 가문에 혼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혈통과 관계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점은 내가 인용한 귀절에 의해서 충분히 확증되고 있다.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 실제적으로 칭송의 근거를 제시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는 자신이 그들과 동등하계 인정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들의 자랑이 자 신의 것과 비슷한 것으로 대조함으로써 그들의 육신적인 자랑을 무산(霧散) 시켜 버렸지만, 실제적으로십각하계 자랑해야 할문제에 있어서는그들에게 아무런 확고한 가치가 없으므로 그듄과 자신윤 명백히 구별짓는 것이 당연 하다. 그리 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 은 아브라함 가문의 모든 장자 중의 장자 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예와 위엄이다. 그러나 날조를 미연에 방지하 는 뜻에서 그는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라는 말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설령 이 자랑이 어리석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사실이다’ 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 이것은 자신이 그들보다 더욱더 뛰어난 그리스도 의 종이타는 점을 입증하는 그의 방법으로서, 특별히 이 이론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입증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더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그 는 여 기 서 는 ‘수고들' (labours)이 타고 복수로 이 야기 하고 다음에 서 는 ‘수고’ (labour)라고 단수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가두번째 경우에 있어서는 보다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서 하나하나 열거하려는 내용을 묶고 있다는 점 외에는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우리 는 ‘죽음들'이라는 표현을 임박한 죽음을 위협하는 온갖 위험의 뜻으로 볼 수 있으며, 사실 그는 다음에 이 위험들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나는 자주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에서 자신을 입증했거니 와, "여러 수:rr"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렇다’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 1 장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24. 유대인들에게……" ;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법권이 허용되지 않았음이 틀림없지만, 이것은· 소위 말하는 경벌 사항에 속했던만큼 그들에게 그 권한이 허용되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법관 앞에서 때리되 40회 이상의 매질을 금하여 잔인함으로 신체가 해를 받거나 절단되는 일이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추측컨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들이 한참 때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숫자를 넘는 경우가 있을텐데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39번째에서 그만두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율법사들이 율법을 앞질러 행하는 일이 유대사회에는 많았는데, 경우에 따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그러기에 아마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리고 사정이 악화되어 감에 따라서 그들은 주님께 서 규정하신 것이 얼마나 찬인하계 나가느냐 함이 아니라 몇번째에서 그쳐야 하느냐인데도, 모든 범죄자들이 그만큼의 태형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졌다. 혹자는 이것을 그들이 다론 사람에 비해 바울에게는 더 가혹하계 굴었다는 뜻으로 보는데,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모든 범죄자들을 상대로 그처럼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다면 그는 자신이 통상적인 방법에 따라서 매를 맞은 것으로 이야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숫자를 언급하는 데는 그가 맞은 매질이 극도로 잔인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25~27 절. 세 번 태장으로 맞고……" ; 이 사실온 사도가 당한 많은 사실 가운데 누가가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내용도 있다는 점을 명백하게 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누가는 한번의 돌팔매질과 한번의 파선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그가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사건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족의 위험들"이란 모든 유대인이 그에 대해서 느낀 증오심의 결과로 자기 민족의 손으로 당한 사건들을 뜻한다. 그는 또한 이방인들을 자신의 원수로 언급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거짓 형제들"이 놓은 올무가 그를 위협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자의 증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굶음' (금식)을 내가 자발적인 금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는 이미 배고품과 기아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내용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탁월한 종이라는 주장에 대한 훌륭한 근거로서 그가 제시하곤 했던 이론들이다. 이처럼 무수하고, 이처럼 위대하며, 이처럼 무시무시한 증거 외에 달리 무손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종들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한일이 없고 아무 고통도 받은 일이 없는 애숭이 허풍선이들은 파렴치하게 자신들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질고, 위험, 그리고 고통을 당해야만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꼭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건들이 드러나는 곳에 더 위대하고 탁월한 증거가 주어지게 된다고 대답하겠다.
그처럼 무수한 특징에 의해서 단련된 사람은 덜 고귀하거나, 단련을 덜 받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지도 않으려니와 교만으로 들떠 우쭐대지도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바울의 본을 따라서 위선자들과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들을 상대로 거룩한 개선을 거둠으로써 자신을 치켜세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라야 한다. 교만이나 이기심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이 모든 탁월성을 더럽히거나 흉측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말처럼 말이 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것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 이것은 온 사방으로부터 나에게 떨어지며, 말하자면 비상한 일들은 제쳐 놓더라도 어느 누가 계속적으로 나를 압박하는 일상적인 침을, 곧 나의 모든 교회를 위한 영려를 상상할 수 있겠는 가 하는 말이다. 그가 이 염려를 자신의 일상적인 짐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따라서 내가 '에피쉬스타신'을 이렇게 자유롭게 번역하는 것은 그것이 종종 우리를 압박하는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전지하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무거운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지기 마련이다. 그 관심과 열성이 한 교회, 열, 아니 서론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동시에 모든 교회를 포옹하기에 어떤 교회는 가르쳐주며, 어떤 교회는 힘을 주며, 어떤 교회는 권면하며, 어떤 교회는 충고하며, 그와 동시에 어떤 교회는 그들의 질병을 치료받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사역자의 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나오는 바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도 많온 난관의 짐을 지지 않고서는 교회에 대해서 진정한 관심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사실 교회 통치란 우리가 즐겁고 기쁘게 수행할 수 있는 유쾌한 업무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사단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고통을 거듭 거듭 우리에게 불러 일으키고 하나의 돌맹이도 그대로 놔두지 않고 다 뒤집어 놓음으로써 우리를 괴롭히는 힘겹고 비통한 전투이다.
"29. 누가 약하면……" ; 모든 과실을 그냥 못 본 체 지나치게 하거나, 자기 형제들의 연약성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짓밟는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것은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관심이란 '예과데이안', 즉, 동료의식을 낳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여금 모두의 감정을 스스로 짊어지고, 자신을 모두의 입장에 처하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모든 필요에 적응할 수 있게 한다.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 이것은 앞에 나온 모든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바울이 자신의 연약성과 관계된 모든 내용을 털어놓고 자랑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굶주림과 목마름, 옥살이와 돌팔매질, 태형 등, 세상이 보기에 영광보다는 멸시를 가져올 수 있는 여러가지 사건들로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큰 치욕을 당하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수치로 여기는 사건이다.
"31. 아버지……하나님……" ; 그는 이제 생소하고 잘 알려지지 않온 사건을 말하려던 참이었으므로 서원을 동해서 그 점을 확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경건한 서원 형식으로서,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진리를 확중 함에 있어서 정중하게 하나님을 불러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실 것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 다. 이 사건온 누가가 명백히 보여주고 있듯이, 말하자면 바울이 받는 박해의 첫 견습 과정이었다. 애숭이 신병이 맨 처음부터 그런 시련을 감당했다면 그가 노련하게 된 다음의 이야기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그가 도주한 이야기가 담대한 마음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왜 이것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왕도의 성문이 닫혀졌다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이 얼마나 그에게 대해서 큰 분노를 품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이 공연히 그런 감정을 노출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만약에 바울이 생기 발랄하고 비상한 열심을 갖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지 않았던들 악인들이 그처럼 노발대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이적인 인내는 그러한 가혹한 박해로부터 도피한 다음에도 그가 더욱 더 두려움 없이 주님의 일을 계속 수행함으로써 온 세상의 격분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혹 사실온 박수갈채, 대접, 존경, 그리고 안락한 숙식제공 이외에는 다른 체험을 전혀 가져 보지 못한 주제에 아주 탁월한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적대자들을 조롱하는 데 바울의 의도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접어 둔다 하더라도 자신이 어떻게 덫에 걸려 있었으며, 그 결과 수치스럽고 비참한 도주를 통해서 가까스로 자신의 생명을 구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혹자는 성벽을 타고 넘는 것은 사형죄에 해당했는데,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이 옳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나는 먼저 이 처벌이 당시 동방에서 법으로 허용된 것인가 하는 점이 확실치 않으며, 둘째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바울이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은 그가 원수의 입장에서 장난삼아서가 아니라 팔수적인 상황에 못이겨 성벽을 올랐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화재가 나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담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율법이 처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화재와 악당들의 맹렬한 공격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율법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공평과 공정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바울에게서 모든 비난이 제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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