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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고후13:6)

1. 성경 (고후 13:1 ~ 13)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1)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2)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3)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4)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5)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6)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7)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8)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9)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1)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2)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이제 내가 세번째……" ; 그는 계속해서 그가 언급한 자들의 오만불손을 꾸짖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는 방탕하고 해이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스스로 분쟁과 논박을 일삼으면서 자기 견책에 도무지 관심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말은 교회의 전체 몸에 적용하지 않고 오직 그 속에 있는 병들고 반쯤 썩은 특정한 지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 이 전체 교우들이 아니라 사사로운 개인들, 곧 친절이나 온유한 처방에는 굴복하지 않을 그런 개인들을 상대하면서 더욱 더 날카롭게 이야기하고 있었나 그는 그들 가운데 1년 반을 지낸 다음에 두번째 그들울 방문한 바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세번째 갈 것으로 경고하면서, 세 번 간다는 것은 그들의 오만을 정죄함에 있어서 세 번 증인을 서는 것과 같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증인들의 권위에 대한 율법을 인용하면서 그 본래의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현재의 의도에 맞게 비유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율법은 논쟁을 해결함에 있어서 우리들이 두세 증인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사실 그들의 안녕에 대한 그의 3회에 걸친 노력과 그가 서로 다른 기회에 입증한 지조는 충분히 서로 다른 세 사람의 증인과 맞먹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 그는 빈번하게 친철하고 침착하게 꾸짖었지만, 그것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그가 이미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말로 경고했던 더 가혹한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그가 그처럼 준엄하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비상하게 고집불통이요, 오만했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가 다론 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온유와  끊임없는 인내를 보여주었던가 하는 점이 그의  글에서 역력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눈 감아 주고 용납하는것이 좋은 아버지의 특성이긴 하지만, 때때로 가혹하게 나오며 준엄과 온유를 섞으려 하지 않을 정도로 자녀의 안녕에 도무지 무관심한 것은 우둔한 아버지의 특징이다.  과도한 아량보다 더 위태로운 것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온유하게 나와도 안전할 경우에는 온유하고, 또 우리의 온유에 있어서 진실함과 온건을 보이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더욱 더 가혹하게 행동하도록 하자. 그러나 왜 사도가 개인들의 사적인 죄악을 그처럼 공공연하게,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을 손으로 꼬집어 낼 정도로 폭로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된다. 나의 답변은 이렇다. 곧 그 죄악들이 숨겨진 것이었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 죄악들이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고 더없이 해로운 본보기로 공공연하게 선포되었던 만큼, 그는 그런 공적인 범죄를 범한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두번째 질문은 그가 말로는 더 이상 그들을 가혹하게 꾸중할 수 없었던 만큼 그가 그들에게 부과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는 교정책이 무슨 종류의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틀림없이 그가 그들을 출교를 통해서 처벌하겠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에서 잘려져 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사단에게 넘겨져 파멸울 당하는 것보다 더 몸서리치게 두려운 것은 없다.

 

"3. 이는… ..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 이 귀절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 첫째는 ‘너희들이 내가 스스로 말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동해서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중거를 바라고 있는만큼……' 하는 것으로 크리소스톰과 암브로스는 이 귀절을 해석한다. 그보다 나는 그의 권위가 연약하게 될 경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서 더 관심을 가지시며, 그들이 자신의 경고를 무시할 경우 그리스도의  인내를 시험하는 셈이라는 뜻으로 그가 말했다고 보고 싶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나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요, 따라서 너희들이 나의 가르침을 비판할 경우 너희들은 나보다 그리스도를 더 해롭게 하고 있다'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혹자는 ‘어떤 사람이 자기 말의 주인공이 그리스도인 것으로 자랑하는 그 이유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모든 심문에서 제외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온갖 거짓 선지자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것을 주장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참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해 낼 것인가?

 

그리고 영들을 시험해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가를 판가름하라는 말씀(요일4 : 1)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 라는 식의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강력하게 작용하셨다는 점을 지적 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모든 반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신 분"이라는 두 귀절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가르침 안에서 너희들에 대한 그의 능력을 행사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내 입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셨으니, 따라서 너희들의 무지에 대한 변명이 도무지 없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는 대로 그는 말로만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고린도인들에게 자기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기 전에 이것을 확증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말하는 사람의 직책이 무엇이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가르침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까지 그 사람의 가르침을 시험하는 것이 옳온 것은, 이때 심판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포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 명백할 경우 그때 불신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바울의 말 역시 사실이다.  모세도  동일하게 자신만만하게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리는도다 아론은 어떠한 사람이관대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민16 :11)라는 말을 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도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사7:13)라는 말을 하고 있다. 말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로서 자신의 직무를 신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하게 될 경우 거기에는 회피할 여지가 없다.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가서 그의 사역이 고린도인들 가운데서 그처럼 효과적인 증거를 가졌으며, 주께서 그 안에서 자신을 공공연하게 제시하신 만큼 그가 거기에 대한 반대를 그처럼 매섭게 다루는 것은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대항하는 반역자들인 것으로 비난 할 수 있었다.

"4. 그리스도께서……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  그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것을 그들이 멸시했을 것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빌2 : 8). 그와 동시에 그는 십자가 상의 굴욕이 그의 비교할 수 없는 부활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에게서 그 굴욕을 멸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에서 그의 연약성을 보이셨다 하여 그리스도께서 부활 뒤에 살아나신 하늘의 생명이 그의 신적인 능력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아니라는 식으로 그를 보다 못하게 평가하겠느냐 ? ' 하는 말이 나 다름없다. '육신’ 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신성을 지칭한다.

 

이 귀절은 그리스도께서 그런 연약성 아래서 수고하신 것은 그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사에 반해서 거기에 예속되었기 때문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고난을 받을 경우 우리는 자발적이 아니라 강제로 고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옛날 아리우스파에서는 이 논리를 악용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으며, 정통 교부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하심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가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지 어떠한 필연이 그를 강요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옳은 대답이다. 하지만 마치 연약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허용하신 그의 본성에 반대 되는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 연약성을 정하신 문제를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의지에까지 잘못 확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은 그의 인성 자체가 죽음에 예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함에 따라서 죽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이 선택이란 그 돌아가셨다는 점을 인정하지 자신이 우리의 유한한 본성을 덧입기로 한 결정 이외에 또 무엇이겠는가?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 자신의 것과 너무 상이한 것으로 만들다 보면 우리 신앙의 주춧돌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도록 하자. 곧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 있었는데---팔연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정하심에 의한 것이지만----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연약성을 통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 ;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하다는 것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연약성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연약성을 그가 그속에서 그리스도를 닮고 있기 때문에 자랑거리로 만들고 있으며, 더 이상 그것의 치욕으로부터 움츠러들지 않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들에게 대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나 또한 나의 연약성이 제거된 뒤에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생명'을 ‘연약성’과 대조하고 있으며, 생명이란 인간이 번창하며 풍성한 존귀를 받는 그런 상태를 뜻한다. '너희를 향하여'라는 귀절을 ‘하나님의 능력으로'라는 말과 함께 묶어서 볼 수도 있지만 그 의미는 동일하므로 벌로 중요하지 않다. 그 의미란 고린도인들은 그들이 올바론 판단을 갖기 시작하게 될 때라야 바울에게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존귀하고 정중하게 생각할 것이요, 더 이상 그의 외적 연약성을 멸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5.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  그는 그가 방금 이야기한 내용,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사역 안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났다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속을 들여다 보고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을 인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판단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먼저 한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역자와 백성들 속에 거하고 계시는데,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백성들 속에 거하신다면 어떻게 사역자에게서 그리스도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의 전도에서 그의 능력을 너무도 명백하게, 그리고 모호함이 없이 제시하셨으므로 고린도인들은 그들이 철저한 바보가 아니었던들 그점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신앙, 그리스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이 그들에게 왔던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속을 들여다 봄으로써 그들이 생소한 것으로 무시하는 그것을 거기서 발견 하도록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 사역자가 지니는 참되고 기초가 든든한 확신이란 그가 가르쳐 온 자들의 양심에 자신의 가르침을 인준 하도록 간청할 수 있으며, 그 결과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진지한 경건에 대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실성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듯이 여기서 바울의 의도이다. 그러나 이 귀절이 특별히 주목을 받을 만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이 귀절은 백성들이 신앙과 사역자의 전파와의 관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전파는 잉태를 가져오는 어머니요, 신앙은 자신의 근원을 명심해야 마땅한 그 딸이다. 둘째, 이 귀절은 신앙의 확신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서, 이 가르침은 소르본느의 궤변가들이 너무도 곡해 해 왔기에 이제는 인간의 마음에서 거의 뿌리가 뽑혀지고 없는 그런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점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점을 확신하는 것은 무모한 만용인 것으로 주장하며, 그렇기에 그들은 우리에게 정신적인 추축 (이것은 한낱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으로 만족할 것을 당부하는데, 결국 우리의 양심은 영원히 결정하지 못한 미결 상태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는 점과 그의 몸의 지체 됨을 의심하는 자들은 버림받는 자들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의심스러운 마음이 아니라 확고하고 끈질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계 하는 것이 오직 참된 신앙이라는 점을 이해하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  그는 그들에게 버림받은 자로 여김을 받는 것과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그들이 올바론 증거를 대는 문제를 놓고 선택을 하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들이 자신의 사도직을 인식하는 것과 그들 스스로를 버림받은 자로 인정하는 문제 사이에 아무런 중간 노선을 허용치 않고 있다. 그들의 신앙이 그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받은 것이요, 그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 복음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의 구원의 어느 부분이든 그의 좋은 신앙을 용납하는 문제와 결코 분리할 수 없었다.

 

"6.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  그는 여전히 그들을 다그치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울에게 그에 적합한 존경을 바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불신앙을 정죄하고 자신들에게 교회가· 없다는 점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바란다’ 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가 말한 혹독한 내용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사실 우리가 올바론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자들의 소망을 좌절시키는 것처럼 잔인한 것도 없다.  그러기에 그는 ‘나는 너회들이 올바론 마음을 되찾을 때 알게 되기를 바란다' 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자신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그들이 부여받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케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보다는 그들의 구원을 강조한 것은 현명한 일이다.

 

"7. 우리가……구하노니……" ; 다시 한 번 그는 자신이 자기 명예에 대해서 조금도 상관치 않고 오직 그들의 안녕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그의 가르침의 여러 혜택을 박탈 당하는 것보다 더 해로운 일은 있을 수 없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교만과 조소 때문에 이미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나는 나 자신이나 나의 평판에 대해서 조금도 초조해 하는 바가 없다.  다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 뿐이다. 따라서 너희들이 모든 비난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나 스스로 버림받은 자로서의 취급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버림받은 자'란 가장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을 식은 죽 먹듯이 배척해 버리는 인간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뜻이다.

 

여기에 나오는 ‘…같을지라도' (as)라는 단어가 결코 필요없는 것이 아닌 것은 그것이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 되고"(6 : 8)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규정되고 있는 원칙, 곧 목회자가 자신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내용은 참으로 건전한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평판에 대해서 관심을 갖되 그것이 공적인 혜택에 영향을 끼치는 범위에만 국한하고, 그것을 소홀히 해도 공적으로 불리한 점이 없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뿌리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겠다.

"8. 우리는… .. 아무것도 할 수 없고……" ; 곧 ‘내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수여하신 능력 이외의 다른 능력을 도무지 추구하지 않는 것은 내가 진리를 섬길 수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거짓 사도들온 권력 그 자체를 위해서 거기에 매달릴 뿐 그것을 선용하는 면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사역의 영예가 하나님의 진리와 관련되는경우에만 그것을 주장하고 변호한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가 내계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진리를 증진하는 데 관심이 없다면 나의 모든 주장은 거짓되고 부당한 것이 되고 말 것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가진 권위가 무엇이든 그것을 진리 증진에 바친다면 나는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되고, 내 가르침의 권위가 손상을 받지 않고 진리가 해를 받지 않는다면 나의 바람은 성취된 셈이다. 따라서 그처럼 힘을 다해 싸우는 데 있어서 나는 전혀 자신에 대한 관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기에 그는 오직 진리만을 위해서 싸우고 수고하는 사람이 팔필에 따라서는 사람들 보기에 버림받은 자로 취급을 받는다 하더라 도 하나님의 영광, 교회를 세우는 일, 그리고 건전한 가르침의 권위에 아무런 해가 끼쳐지지 않는 한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귀절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기에 교회 목회자들이 가져야 마땅한 권력의 한계가 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리의 사역자로서의 자신들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의 것이 필요치 않다.  교황주의자들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눅10 : 16),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13 : 17)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큰 소리로 외치면서 이 본문을 무한한 통치권을 주장하기 위한 더 없는 자유를 요청하는 구실로 삼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진리의 공공연하고 지독한 원수들로서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진리의 파멸을 목표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바울의 이 한 가지 발언이면 그따위 극단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도 진리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다는 점이 분명히 여기에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9. 우리가……기뻐하고" ;  여기에 나오는 rap(갈)이라는 원인 접속사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고, 그가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 이 버림받은 자로 취급을 받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두번째 이유를 유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별 의미가 없으므로 독자가 마음대로 선택하기 바란다. '너희들이 강하기만 하다면 나는 천만 번 연약한 취급을 받겠다'라 는 그의 말 속에는 표현상으로는 대조가 나오고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그렇 지 않다. 여기서 연약성이란 앞에서와 갈이 조소를 뜻하나, 그의 의미는 고 란도인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넘칠 경우에는 강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또 이것을……" ; 앞에서도 여러 번 그랬지만 여기서도 다시 그는 자신이 그들 이 바라던 바 이상으로 그들에게 가혹하계 나온 것은 자신의 성격이 아니타 필요 때문이었다는 점을 반복하면서, 그러기에 그가 도착할 때 더 가혹한 대 책을 강구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언급하는 ‘온건' 은 모든 지체들의 올바론 일치와 건전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신체의 다 론 부분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특수한 질병을 치료하는 훌륭한 의사 에게서 인용한 비유로서, 그는 그들 가운데서 이런 종류의 완전한 상태를 확보하는 데 관십이 있었던만큼 더 엄격한 처방에 호소할 필연성을 미연에 제거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대로 처음에는 가벼운 동중이나 붕대의 불편을 마다하는 사람들도 마침 내 무서 운 통증의 고문이 나, 결과가 너 무 모호할 때 는 절단하는 것까지도 참을 수밖에 없게 되는 수가 있다. .

 

"10.  그 권세를 따라……" ; 먼저 그는 그가 준업하게 말하는 배후에 하나님 의 명령이 있으므로 그 준엄을 벼락없는 천둥이나 공연한 사람의 화풀이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이 자신의 권세를 다론 목적으로가 아니라 그것의 올바론 용도, 곧 그들을 세워주는 데 사용할 것이타는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나 는 성급하게 찬인한 처방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요, 나 자신의 화에 사로잡 히지도 않을 것이요,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명 령을 수행할 뿐이다’라는 이야 기나 다름없다. 그는 여기서 파괴가 아니타 세우는 일을 위해 자신에게 권세가 주어쳤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재 10장에서와 의미가 좀 다르다. 그곳에서 그는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유익을 지적하면서 복음을 추천 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에게 혜택이 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우리에게 호갑 이 가고 반갑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그의 의도는 물론 그가 자 신의 권세를 그것의 본래 목적에 따라서 고린도인들을 업하게 처벌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파멸이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 하고 있다 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을 분이다. 복음이란 본래가 “모든 믿는 자에게 구 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몸1 : 16),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 새"(고후2 : 15, 16)로서 ,' 오칙 경 우에 따라서 만 ‘사망의 냄 새' 인만 콤 복음 사역자들에게 수여된 권위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구원 울 위해서만 사용되어야지 그것이 그들의 파멸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그 본 태 성격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너희 자신의 잘못으로 하 나님께서 너희들의 구원을 위해 정해 놓으신 것을 너희들의 정죄거리로 바 꾸지 말아라' 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자신의 본을 동해서 모든 목회자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권세 행사를 제한해야 하는가를 권면해 주고 있다.

 

"11. 마지막으로……형제들아" ;  그가 그의 전체 서신에 제아무리 신랄한 점이 많았다하더라도 이 모든것을 완화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격분 한 상태가 아니라 침착한 상태에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견책이란 말 하자면 거기에 꿀이 배합되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능하면 그것을 받아 들이계 할 경우에만 유익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소수의 병든 자들로 부터 전체 교회에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그 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 이 자신의 관십이요, 그들을 ‘위로하는 것' 이 자신 의 욕망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마음을 갈이하는 것'과 ‘평안하계 사는 것'은 후자가 전자의 결과라는 점에서 다르다• 곧 전자는 의견의 일치와 관 련되 고 후자는 자비 와 마음의 연합함과 관련된다.

 

"평강의 하나님……" ; 그가 이 런 말울 한 것은 자신의 권면을 보강하려는 뜻 에서인데, 그와 동시에 우리가 서로간에 평화를 일구고 가꿀 경우, 하나님 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실 것으로 밝히는 것은 서로간에 대립하고 있는 자들 온 하나님으로부터 찰려져 있기 때문이다. 논박과 분쟁이 있는 곳은 어디서 나 마귀가 다스리고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빛과 어둠 사이에 무손 일치가 있겠는가(6 : 14 참조)? 그를 평화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그가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와 사랑을 추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 님은 이 둘을 사랑하시며, 이 둘의 주인공이시다. '입맞춤’에 대해서는 두 서신에서 다룬 바 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그는 기도로 이 서신을 끝맺고 있는데, 기도에는 우리의 구원 전부를 포함하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는 그들 을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의 은혜를, 둘째로하나님의 사랑을, 세째로 성령의 교제를 바라고 있다. 여기서 ‘은혜'는 값없는 호의가 아니라 구속의 모든 축복에 대한 전유법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은혜의 근원이요, 따라서 순서상 첫번째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이 두번째로 언급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으로 보일논지도 모른다. 나는 성경에 언제나 용어의 배열 에 있어서 그처럼 정확한 배려가 마르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기에 나오는순서는 대개의 경우성경은 두 가지 다론 방법으 로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온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십을 인 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몸5 : 10)는 말씀과 갈은 성경에 담겨 있는 통 상적인 형태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때에 따라서 성경은 내가 여기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는 방법에 의해 이야기하면 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화목되기 전에는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에 적 대감이 있었던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처를 믿는 자마 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십이니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다. 이 두 발언은 언뜻 보기에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은 쉽게 조화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후자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부터 문제를 보는 것이 요, 전자는 우리 자신 편에서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 관한 한, 우리 를 창세 이전부터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오칙 그가 우리를 사랑 하셨기 때문이지만, 우리 자신을 불 경우 우리는 전노를 불러일으키는 죄악 이의의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우리는 중보자 없이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 의 사랑을 포착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들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이다.

 

문제를 멘 처음 방법으로 보았을 경우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하나님의 사랑 앞에 놓는다면, 그것은 결과를 원인 앞에 두는 것이므로 옳지 않겠지만, 두번째 견해에서 볼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 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 이 은혜에 의거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자녀로 입양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과거에 최 때문에 증오하고 가증스럽게 취급하던 자들을 그의 사랑으로 촌귀케 하신 것이다•

 

"성령의 교통하심……" ; 이것이 여기에 덧붙여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 도와 그의 모든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오직 성령의 인도하십으로 이루 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격리된 개인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 타 은혜의 분량에 따라서 각자에게 분배하시며, 그 결과 교회의 지체들이 그 들의 은사들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연합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바울은 그가 다른 곳에서 언급한 성령의 다 양한 은사를 여기서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