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1. 성경 (고후 12:1 ~ 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2)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4)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5)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6)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8)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9)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10)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1)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2)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13)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4)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15)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6)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17)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8)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19)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0)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 말하자면 그는 도중에 자신을 억제하고 그의 적수들의 무례함을 더없이 시기적절하게 꾸짖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마지못해 그들과의 이 자랑 시합에 참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을 바울과 갈은 사람의 수준에 올려놓으려고 이곳 저곳을 쫓아다니며 표창장을 구걸하는 그들의 꼬락서니가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모른다. 바울은 자신이 자랑하는 면에 있어서 그처럼 주저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풍성하게 누리는 은혜가 더 위대하고 탁월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그것을 덜 생각해야 마땅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탁월성을 그처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항상 위험한 것은 수링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곧 그것으로 가로 막혀지며, 우리의 은사만을 너무 의식하며 자신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물론 제대로 인식되어야 하며, 그 결과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단계에까지 나가야 하지만, 그것을 자랑의 구실로 삼는 것은 아주 위험 천만한 노릇이다.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이것은 물론 내가 받은 은사들의 높이가 너무 높아서 내가 자신을 망각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땅에서 기어다니지 않고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구나하는 말이다. 물론 만약에 바울이 자신에 대한 집념 때문에 자랑했더라면 그는 그 높은 곳에서 곤두박질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겸손 뿐이기 때문이다. '환상'과 ‘계시'는 다르다. 계시는 종종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꿈이나 신탁의 형태를 띠지만, 환상에는 계시가 없이, 곧 주님께서 의도하는 바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허용되는 일이 거의 없다.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 자신을 억제하는 뜻에서 그는 한 가지 예만 선택하고 있는데, 그것도 그가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전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3인칭으로 이야기할 팔요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나는 침묵을 지키며 이 전체 문제를 나혼자만 알고 싶지만 내 적대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마지 못해 그것을 언급함으로써 내가 나의 의사에 반해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는 바이다’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혹자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단어가 자신의 이야기하는 내용을 확증하는 뜻에서 서원 형식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도 여기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본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데 그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그의 말은 이 계시의 위대성을 더욱 더 뚜렷하게 해주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동하셨다는 뜻이다. 이것이 믿기 어렵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행동 방법을 모르는 그런 방향으로 자신을 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말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우리의 깨달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우리의 신앙의 확실성을 전혀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만 알도록 추구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몸과 영혼이 통째로 하늘에 들리어 올려졌는지, 아니면 그의 영혼만 올려졌는지 모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 하고 있다.

"십사 년 전에" ;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멘 처음 주님께서는 바울을 유대교에서 복음의 신앙으로 개종하고자 했을 때 환상으로 자신을 바울에게 보여주셨지만, 그때 그는 이 비밀을 허용 받지 않았다. 그때 그는 여전히 복음의 초보 지식을 배우는 데 아나니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행9 : 12). 그때의 환상은 그로 하여금 가르침을 받을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그는 누가 사도행전 22장 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환상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을 가지고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는 것은 바울 자신도 14 년간에 걸쳐 침묵을 지켰으며, 만약에 악인들의 부당성 때문에 강요를 받지 않았더라면 결코 한 마디도 내밸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째 하늘에……", ;그는 여기서 전체의 구조에 대해서 정연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3이라는 숫자는 더없이 높고 완벽한 것을 지지하는 완전수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하늘'이라는 단어 그 자체도 여기서는 모든 천구, 궁창,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구조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왕국을 뜻한다. 그러나 하늘이라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바울은 자신이 그것의 가장 높은 곳, 가장 깊숙한 방에 까지 이르렀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 거기에 들어서며 지식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은 더 높이, 더 깊이 들어가지만, 세째 하늘에 닿는 것은 아주 극소수에만 허용되어 왔다.

"4. 그가 낙원으로" ; 성경에서는 특별히 복되고 유쾌한 모든 장소를 가리켜 ‘하나님의 동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헬라인 사회에서는 ‘낙원’을 하늘의 영광 대신에 사용하는 습관이 생겼다. 집회서(외경) 40 장 17절과 27절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것은 그리스도 이전부터 사용되던 단어이다. 이것을 갈은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도둑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말씀으로 사용하신 그대로이다. 이 말씀의 뜻은 ‘네가 복된 자의 상태와 생활 면에서 하나님의 어전을 향유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 여기에 나오는 ‘말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종종 ‘일들'의 의미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내가 여기서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들었다'는· 단어가 이런 해석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혹 이 말들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곧 그것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 하며, 다시 말해서 이것은 '발설하는 것이 율법적이다'라는 뜻이다. 이런 경우 바울이 들은 내용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 아니냐며, 영원히 침묵을 지킬 것이라면 들어서 좋을 것이 뭐냐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것이 바울 자신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수천 개의 심장이 있다 해도 그것을 다 부숴버릴 정도로 고된 고통을 앞에 두고 있던 사람으로서는 실망하지 않고 견인 불발하도록 특별한 방법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 팔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간 동안이라도 그의 가르침이 얼마나 많고 장대한 대적들을 상대로 겨루어야만 했으며,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공 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우리는 왜 그가 발설하는 것이 합법적일 수 없는 내용을 들었는가 하고 의아해 하지 않을 것 이다. 우리는 이 귀절에서 우리의 지식에 대해서 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한계를 지적 받는 셈이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에 빠지기 쉬우며, 그러기에 하찮은 질문에는 정신없이 말려들면서 교화(敎化)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은 경솔하게 지나치거나 단지 건성으로 맛만 보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 호기심에 우리는 만용과 무모함을 더하며, 그 결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숨겨진 문제에 대해서도 단언할 자세를 갖게 된다. 이 두 근원에서 수많은 스콜라 신학과 저 어리석은 디오니시우스가 오만스럽게도 하늘의 구조에 대해서 고안해 낸 모든 내용이 솟아나온 것이다. 우리로서는 주께서 기꺼이 자신의 교회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으로 우리 지식의 한계를 삼아야겠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 이것은 ‘내게 자랑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내가 더없이 마지 못해 그렇게 하는 것은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나의 의도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악의적인 친구들이 더 나를 잡고 늘어지면서 내가 원하는 바 이상으로 자랑하도록 강요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우매를 꺾기 위해서 그처럼 크고 존귀하게 높여 놓으신 사람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 자신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가 비난의 구실로 사용되거나, 악질적인 적대자들이 ‘그도 그럴 것이 그럴 재주가 있어야지 ? ' 하는 식으로 대들지 못하도록 하는 뜻에 서 그는 ‘정정당당하게, 그리고 허영을 부린다는 비난을 받을 염려가 전혀 없는 것은 내가 능히 자랑할 수 있었던 자랑거리가 있지만 자제하기 때문이다’라는 말로써 그들의 반박을 미연에 막고 있다. 여기서 ‘우매'라는 단어는 앞에서와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사실 떳떳하게 자랑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도 그저 허풍을 떨어대면서 실리추구에만 빠질 경우에는 바보스럽고 아니꼬운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떳떳한 근거도 없이 자랑을 늘어 놓을 경우, 곧 실제로는 아니면서 그런것처럼 위장할 경우 이 우매는 더욱 더 불쾌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리석음뿐 아니라 몰염치까지 작용하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는 자신이 자랑하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의 정당화가 겸손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기정사실로 잡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내가 너희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다' (I spare you)로 번역하지만, 나는 ‘내가 자제한다’를 더 좋아한다. 아니, 나는 실제로 ‘내가 참는다’로 번역하고 있다•

"누가……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 이제 그는 자신이 참는 이유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할당해 주신 장소를 메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곧 ‘나의 외모와 말만 가지고는 나에게 전혀 탁월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므로 그 점에 관한 한 내가 천하게 평가받는 점을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온건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을 볼 수 있는데, 물론 그는 다른면에 있어서는 탁월한 은사를 많이 부여받고 있었지만, 외모와 말의 빈약한 점 때문에 난처해 하지는 않았다. 이 귀절을 그가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사실로 만족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아무런 증거도 없으면서 자신에 대해서 많은 허풍을 늘어놓는 거짓 사도들을 은근히 질책하는 뜻으로, 자신에 대해서 도무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본다 해도 아무런 모순점이 없을 것이다. 나는 멘 처음에 언급된' 해석을 더 좋아한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 ·이것은 그가 자제하는 둘째 이유로서 하나님께서 자신 속에 있는 온갖 반항심의 창조를 억제하는 뜻에서 자신을 매로 굴복시켰다는 것이다. 이 매를 그는 ‘가시', 또는 가축을 모는 막대기로 부르고 있다. '육체’라는 단어가 헬라어에서는 여겨으로 되어 있다 해서 에라스무스는 ‘육체에 의해서'로 번역하는데, 나는 이것을 이 가시의 찔림이 자기 육체 속에 있었다는 의미 로 보는 편을 택한다. 여기서 이 막대기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바울이 정욕에 대한유혹을받았다는 식으로터무니없는 생각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 온 당치않은 소리이다. 그가종종두동을 앓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 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이 마귀의 사주를 받고 바울에게 큰 번민을 일으켰던 후메내오, 알렉산더, 그리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

나는 이 귀절이 바울을 단련하는'데 쓰여전 서로 다른 모든 종류의 시련을 종합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우리의 신 체가 아니라 중생되지 않은 영혼의 부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나에게 나의 육신을찌르는호1초리가 주어지고 있는 것은 내가 아직 육신에 따르는 유혹으로부터 면제될 정도로 영적이지 못하기 때 문이다'타는 식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사단의 사자’로 부르는 것은 모든 시험이 사단의 충동을 받은 것인만큼, 시험이 우리에게 닥치는 순 간 그것은 사단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는 점을 경고해 주기 때문이다. 따 라서 어떠한 시험이 닥쳐도 우리는 당장 깨어나서 무장을 하고 사단의 꽁져 을 물리쳐야 한다. 바울에게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된 것이 더없이 유익했 던 것은 그가 이것을 알고서는 위협에 처하지 않은 사람처럼 안이하계 지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험에 싸여 있으며 원수를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은 승리의 노태를 부를 수 없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그는 ‘주께서는 나에게 어 울리지 않는 들뜬 마음에 대한 최선의 치료책을 허용해 주셨는데, 그 이유 는 사단이 나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망을 보고 있는 동안은 내가 교만을 퍼 울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그를 치료하는 데 사용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닌 것은 그가 또한 비천하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나를 쳐 서"타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바로잡히게 되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훌륭한 표현이다. 두들겨맞는다는 것은 정말 분한 노릇이다. 어 떤 사람이 얼굴을 두들겨맞아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면 그는 창피해서 자신을 남들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슨 약점 을 안고시 부지런히 일할 경우,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겸손을 배우 도록 하는 뜻에서 우리를 두듄겨서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마땅하다.

특털히 탁월한 은사를 가전 자들이 이것을 명십해야 마땅한 것은 그들에게 결점이 덕과 섞여 있거나, 증오십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저 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하늘의 교사로서의 회초리일 분 아니타 모든 오만을 제지하고 그들에게 온건을 채워주기 위해 의도된 매 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교만이란 얼마나 무시무 시한 독인지 모르며,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또다른 결점분이다'타는 말을 명십하도록 하자. 이것은 어거스탄이 〈사도의 어록〉에서 한 세번째 섣 교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인간 타락의 첫째 원인이었듯이 우리가 씨 름하지 않으면 안되는 마지막 결점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악은 악한 행동 과 관련되어 있지 만, 교만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행하는 최 선의 행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태어날 적부터 우리에게 착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한다는 것이 더없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 다. 그로 말하면 그 무수한 고문, 위험, 그리고 다른 악들을 극복했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원수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사람이요, 사망의 공포를 몰 아내고 세상을 부정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자산의 교만을 완전하계 굴복시 키지 못했으며, 그러기에 두들겨맞지 않고서는 정복할 수 없는 의십스러운 대결을 자신 속에서 계속 안고 있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본을 받아 우리 의 다른 걷점에 대항해 싸우면서 교만을 물리치려는 전투에 우리의 노력을 중점으로 바치도록 하자. 그러나처음부터 살인자인사단이 바울에게 의사노 릇을 하면서 그의 몸을 치료할 뿐 아니라 그의 영혼을 회복하는 가장 큰 임 무를 수행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의 대답온 이렇다. 곧 사단의 유일 한 의 도는 그의 배 역 (character)과 습관에 따라 죽이 고 파괴 하는 데 있으며 ,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는 막대기에 극약이 묻어 있어서 주님께서 원래 사망 의 수단이었던 것을 치유의 수단으로 바꿔놓으신 것이 그의 특별한 자비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8..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 여기서 ‘세 반이라는 단어는 빈번 한 반복을 뜻한다. 그의 의미는 자신이 이것 때문에 너무도 시달렀기 때문에 자주 그것이 제거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했다는것이다. 그것이 하찮거나 견디기 쉬운 것이었다면 그처럼 간절하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겠지만, 자신의 청탁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이 겸 손하계 되어야 할 팔요성이 얼마나 컸는가하는 점을보여주고 있다. 이것으 로 그는 앞에서 그가 말한 내용, 곧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오만을 부리 지 못하계 하는 재 갈이 었다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공연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은 신앙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 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가 믿음으 로 구하는 모든 것은 연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기 도하지만 연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간청에도 종류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으로 대답하겠다. 우리는 우리가 확 살한 약속을 받고 있는 것들,- 가령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의 이름을 거룩 하계 하는 것, 죄의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유이한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 런 제한 없이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증진될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거나, 그의 이름을 거룩 하계 하는 데는 여러가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때마다 찰 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듄이 우리의 안녕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 종종 기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히 약속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하고 주저함이 없이 요청하지만 그 방법 울 규정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며, 만약에 우리가 그것의 제목을 정한 다면 우리의 기도에는 언제나 그 속에 표현되지 않은 제한이 포함되는 것이 다.

그런데 바울은 이 점을 찰 깨닫고 있었으며, 그의 기도의 의의나 목적 에 있어서는 설령 그가 그의 청을 드린 형식에 있어서는 거철을 받았다 하 더라도 틀림없이 응답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청에 응하시지 않거나 그것을 만족시켜 주시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가 낭비된 노력 이 라는 식 으로 낙십 하지 말라는 경 고를 받아야 마땅하다. 왜 냐하떤 그 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족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았 다는 사실로써 충분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께 서는 종종 그가 그의 진노 가운데 불경건한 자들에게 허용하시는 것을 그의 자비 가운데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보류하신다. 곧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우 리 마음이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잘 내다보시기 때문이 다.

"9. 내게 이르시기를" ; 이 응답이 특별한 신탁을 통해서 그에게 왔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하지 않지만 이것은 별로중요한 문제가아 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면적으로 그의 영에 의해서 우리에게 힘을 주고 그의 위로로써 우리를 지탱해 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응답 해 주시며, 그 결과 우리의 소망과 인내가 그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 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의 은혜로 만족하고 채찍을 거부하지 말 것을 당부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이 제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하나 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어서 우리를 지지하고 있는 한 우리는 아주 훌 륭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서 그 고동을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나오는 ‘은혜'는 다른 곳에서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것이 아 니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로부터 우리에게 미치는 성령의 도움에 대한 전 유법적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은혜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충족해야 마 땅한 것은 이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 주는 확실하고 억제할 수 없는 지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 능력이" ; 우리의 연약성이란 언뜻 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그의 능력을 완성하는 데 하나의 장애물이 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바울은 그 점을 부인할 분 아니라 그 반대의 입장을, 곧 하나님의 힘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연약성이 겉으로 드러날 때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 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과 우리의 힘을 구별하 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나오는 ‘나의’라는 단어는 강조직인 것이다 .• '나 의 능력은I (곧 곤경에 빠진 인간들을 돕고, 그들이 쓰러져 있을 때 일으켜 세워주며, 그들이 기진백전할 때 활기를 되찾아 주는 그 능력은) ‘인간들의 연약성 안에서 완전하게 만들어진다. 곧 인간의 연약성이 명백하계 드러날 때 그것은 그 자체를 드러낼 기회를 가지며,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는 그 것의 전가가 분명하계 인식된다’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완전하게 만들어진다'타는 동사는 하나님의 힘이란 그것이 거기에 합당한 칭송을 얻 기에 충분할 정도로 뚜렷하게 비칠 경우에만 완전하계 만들어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인간의 이해력과 인식에 관련된다. 사실 인간은 그들이 하나님 의 힘의 필요성을 확신하기 전에는 그 맛을 전혀 모르며, 자신의 연약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계속 지적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의 전가를 당장에 잃어 버리고 만다.

"이러므로……크게 기뻐함으로……" ; 이것으로 내가 제시한 설명이 확증된다• 이어서 그는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 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타"라는 말을 하고 있다. 너무 수줍어하는 나머지 이런 방법으로 자랑하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리며,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자신에게서 몰아내는 것은 우리의 연약성 울 닫게 참으면서 고백할 경우에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자리를 비워놓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높은 산꼭대기는 말라 있지만, 골짜기는 빗물 로 직서지며 풍성한 수확을 내기 마련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적 은혜라는 하늘의 비를 맞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의 골짜기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는 "크게 기뻐함"이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 한 욕망으로 얼마나 불타고 있던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마다하지 않을 입장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영광을 시생했다가 신성모독을 범할까봐 하나님께 굴복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아니 마땅히 자발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10. 내가… .. 약한 것들… . 기뻐하노니" ; 그는분명히 ‘연약성’이라는 단 어를 다론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육신에 대한 가시의 찔림을 두고 이야기했지만, 여기서는 세상의 멸시를 사는 외적인 사건들을 뜻하는 데 사용한다. 온갖 종류의 연약성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한 다 음에 여기서는 이 전체 토론의 시발점인 특수한 연약성으로 되돌아가고 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성이 우리 본성의 연약성과 모든 외적인 굴욕의 상칭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용어라는 점을 파악할 팔요가 있다. 처음에는 바 울의 외적인 비천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바울은 거기서 더 나아가 주님께 서 그의 영광이 자신의 결점을 동해서 더욱더 뚜렷하계 비추도록 하는 뜻에 서 그를 모든 면으로 낮추셨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영광 이 신의 영광을 가리고 숨기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 는 자신의 탁월성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들의 일반 적인 견해로 볼 때는 그에게 칭송보다는 멸시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 이것은 ‘내가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주님께서는 내게 팔요한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그의 힘으로부터 더욱더 후하계 제공 해 주신다’는 것이다. 철인들이 칭송하는 강한마음가침이란오만불손하거나 또는 광신자 특유의 열광에 지 나지 않는다. 그러 나 전정 으로 강하게 되 기 를 원하는 사람은 또한 자신이 약하다는 점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자 신이 주 안에서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바울이 힘의 부족에서가 아니라 빈곤과 다른 고동에 대해서 이 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연약성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하는 수단이라고 대답 하겠냐 왜냐하면 만일 주님께서 바울에게 그런 시련을 부과하지 않았더라 면 그가 그처럼 뚜렷하게 자신의 연약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비단 빈곤과 그외의 모든 어려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연약성을 깨닫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 신을 불신하고 겸손하게 되도록 하는 효과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 지금까지는 자신이 왜 자화자찬하 고 있는가를, 곧 자신의 습관에 위배되는 일이며 자신의 사도칙에 너무도 어 울리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뜻에서 많은 변명을 제시해 왔다. 이제는 변명하는 대신에 자기를 마땅히 칭찬하는 일에 몰두했어야 옳을 고 린도인들을 비난하며 책임추궁하고 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과소평가하 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은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대항하면서 그가 받아 마땅한 탁월성에 대한 증거를 신실하계 고수했어야 옳았다. 이렇게 하 여 그는 그들에게 시기져철한 비난을 가함으로써 자신에게 악의적인 사람들 로 하여금 그들의 배은망덕 때문에 할수없이 제기하는 이 자신에 대한 방어 를 악용하지 못하고, 또 -;;;i:}:J_에 대 해 서 거 짓 비 난을 계 속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 우리가 만약 우리 자신에게 분명한 하나님 의 은사들을 무시받계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충분히 감사를 돌리 지 못하는 샘이다. 이것이 여기서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비난하는 잘못이다. 곧 그들은 그가 지극히 큰 사도들과 동등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지 만, 그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비난하는 자들의 중상모략에 귀를 기 울였다. 혹자는 "지극히 큰 사도들"이 스스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자신의 경쟁자들 가운데 으뜸가는 자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지만 나는 그가 열두 사도들 가운데 으뜸가는 자들을 뜻하는 것 으로 본다. 곧 이 것은 나를 어느 사도들과 비교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뒤질 걱정이 없다'라 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실 바울은 모든 사도들과 더없이 친근한 관계를 유 지하고 있었으며 얼마든지 그들을 자기보다 월등하게 치켜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이름에 잘못 따르고 있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을 벌였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이 열두 사도들과 교제를 나누었다느니, 그러 기에 그들의 모든넬의도를 이해하고 있다느니, 그들의 모든 제도를 알고 있다 느니 하는 사실을 그들의 거짓 주장의 기초로 삼고 있었다. 그러기에 바울 온 이런 의적인 모습과 거짓된 직합에 대한 그들의 못된 교만과 그들이 단 순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보고서 할수없이 이런 비교를 하게 된 것이다. 덧붙여지고 있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라는 표현은 일종의 정정 으로서,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든 자신의 공로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데 있다는 내용이다. 아니면 이것을 자신의 적대자와 모 략자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표현으로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 다.

"12. 사도의 표 된 것은……" ; 사도의 표적이란 그의 사도직의 순수성을 입 증하는 도장, 바꿔 말하자면 그것에 대한 증거와 중인들을 뜻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닐께서는 너흰들 가운데 나의 사도직분을 너무도 풍성하 거L확증하셨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런 증거가 필요 없다’라는 말이나 다름 없다. 그가 멘 먼저 ‘인내'를 언급하는 것은 자신이 사단과 원수들의 모든 공 격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섰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탁월한 지위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평정한 마음으로 모든 손해, 끝없는 시달립을 참았으며, 인내로 갖가지의 울분을 극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영웅적인 덕은 주 님께서 그의 사도들을 점적어 두는 하늘의 도장과 같다. 그가 다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기적들로서, 이 기적에 대해서 프턴본} 虫遠고.' 세 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이 기적을 ‘표적’으로부 르는 것 은 그것 이 의 민~그~~觀끽―안브프느인책을-가론선츠느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가 그것을 ‘기사’로 부르는 것은 그것의 싶기성 때문에 인간이 놀라며 격~때문인요, 구것을 ‘능력' 또는:막 강한 일들’로 부르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일상 자연계에서 보는 것보다 더 명백하계 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복음이 처음 울 때 기적의 한 으뜸가는 기능은 복음의 가르침에 더 큰 권위를 부여 ~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iL쓰}람에게 기적이 더 많이 따르면 따를수록 그 의 사역은 그만큼 더 확증을 받은 셈이었다. 이정호二셴_7} 로-마서 15장 주 석에서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구

"13 내 자신이…… 무엇이 있느냐 " ; 그의 탁월성이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의 배은망덕이 더욱더 새까맣계 보이는 것은 그들이 그의 사도직을 동해서 그가 베푼 여러 혜택을 받았지만, 이제 와서는 거짓 사도들의 중상모략을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뜻에서 그는 그어1계 모자란 접이 오직 한 가지 있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그들에게 짐이 되 지 않았다는 점이라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사실 그가 아무것도 받지 않고 그둘을 섭겼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그들에게 베푼 많은 축복의 극치였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껏 한다는 짓둘은 그에게 조소를 퍼붓는 것이었으니, 이 어찌 그의 온건에 대한 모독이 아닐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에게는 그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들어 이처럼 호되게 꾸짖을 이유가 일마 든지 있다.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 그들은 그 모든 축복에 대해서 그처럼 신 세를 지고 있는 사람을 멸시할 분 아니타, 그들이 그의 아량을 비난거리로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곱철로 배은망덕한 자들이었다• 크리소스톰은 여기에 어떤 냉소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변명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 나 전체 문맥을 면밀하게 검토해 본다면 이 견해가 바울의 의미와 아주 반 대된다는 점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14. 보라 이제 세번째" ; 여기서 그는 고린도인들이 더없이 배은망덕했던 바로 그 행동을 들어 칭찬하고 있다. 그는 그가 그들에게서 돈을 받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는데, 그 첫째는 그가 그들의 재물이 아닌 그들 자신을 구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가 그들을 아버지의 입장에서 다루고 싶 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온건이 비록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 때문에 고린도인들에게서 욕을 얻어먹은 것밖에 없지만 얼마나 큰 칭송을 받아 마땅한가 하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나의 구하는 것은" ; 자기 양메로부터 이득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참되고 정칙한 목회자의 임무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 서도 사람들을 우리 자신의 제자로 삼을 목적으로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겁 울주목해야겠다: 이득에 치우치거나 복회자들의 칙무로부터 혜택을 보기 위 해서 그것을수행하는것도나쁘지만, 그보다더 악독한것은제자들의 충성 을 개인적인 야십의 여러 이유 대문에 횡령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바울의 의도는 자신이 조금도 보수에 대해서는 관십이 없고 오칙 영혼의 안녕에 대 해서만 관십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참으로 우아한 데가 있 으니, 이것은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품삼을 추구하고 있는 데, 그 까닭은 내가 너희들의 재물로 만족하지 않고 너희들 전체를 온통 나 의 목회의 열매에서 나온 제물로 주님께 바치고자 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 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수고를 통해서 그 자신을 부양하는 것은 어떤가? 이렇게 되면 그는 자기 교우들의 생계를 돕는 것인 가? 어떤 사람이 참으로 신실한 목회자라면 그는 자신의 양데의 안녕만을 추구하고 그 이외의 것은 거들며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 사례금이란 하 나의 부가물에 불과하고 그의 유일한 목표는 내가 앞에서 말한 그것임에 틀 림없다. 그 외의 것에 마음을 두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지어다.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는 아버지가 아니었 던가? 그리고 그들은 그가 그들 앞에 없을 때도 그를 부양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다론 사도들 여시 교회들이 부양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 가운데 는 아무도 아버지 된 자들이 없었던가? 이것이 참으로그의 의도가 아닌 것 은 부모들이 나이가 들어 자녀들의 부양을 받는다는 것이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비용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버지들 에게 적합한 영예에 꼭부적당하지도 않지만, 바울은 자신이 행동한 것이 그 의 아버지로서의 애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점을보여주고 싶었을 분이다. 그러므로 이 논리는 거기서 부정적인 의미를 캐내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된 다. 그가 행동한 것은 아버지로서의 행동이었지만 그가 다르게 행동했다 하 더라도 그는 아버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허비하리니……" ; 이것이 아버지로서의 애정보다 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일과 그밖의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뿐 아 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그듣울 섭기는 데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돌같은 마음인들 이처럼 열렬한 사랑을 맛보고 더우거 거기에 신실성이 더해질 경우, 누그러지며 깨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바 울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경단하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그를 본받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모든 목회자들은 그가 하고 있는 말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대해서 무 슨 빛을 지고 있는가를 배우도록 하자.

"16 하여간……" ; 이 말에는 바울이 악질적인 원수들에게서 그가 자기 손 으로 받기를 거부한 돈을 그들이 매수한 사람들을통해서 은밀하계 착취하고 있었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그가그런 일을 조금이 라도 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이 자신 들의 주먹만한 자(尺)로 남을 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악한 사람들은그 들 자신이 기회만 있으면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하나님의 종들에게 동 상적으로 문영치하계 뒤집어씌우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이 터무니 없이 날조된 비난을 깨끗이 하는 뜻에서 바울은 할 수 없이 자신의 사자였던 자들의 정직성을 변호하고 있다. 만약에 그들이 혹시라도 죄를 지었다면 그 것은 모두 그에게 책임이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처럼 조십하는 데도 여전히 부당한 비난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기부금을 받 는 데 있어서 그가 그처럼 신중을 기하는 것에 놀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경우를 거울삼아 때에 따라서 우리들이 바로 이와 동일한 종류 의 거짓 형의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만 떨어 지는 새롭거나 참을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점을 명십하도록 하자. 그리 고 무엇보다도 우리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아무런 구실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더없이 신중을 거해야 한다는 점을 명십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도움을 받는 사람들 역시 정칙한 것으로 발견되지 않을 경우 우리 자신의 정칙성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 리가 그런 도움을 선택할 때 가볍게 하거나 형식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더 없이 세십한 배려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19. 이 때까지……생각하는구나… " ; 양십이 나쁜 사람들이 대캐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더 초조하계 자신들을 변호하기 마련이므로 바울이 고린도 전 서에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변호한 것이 아마 그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사 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종들이 자신들의 평판에 대해서 너무 초조해 하는 것은 찰못이다. 이 두 거짓 비난을 반박하는 뜻에 서 그는 먼처 자신이 악한 양십들이 언제나 두려워 머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 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그들보다 자신에 대해서 덜 생 각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선한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내 할 각오가,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버릴 각오까지 서 있었지만, 그 가 자기가 받아 마땅한 평판을 유지하면서 그의 사역이 멸시받는 일이 없도 록 하는 것은 고린도인들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20. 또 내가……두려워하며" ; 그가 자신의 정칙에 대한 변호가 그들의 교화(敎化)에 보댐이 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그가 멸시와 천대에 떨어전 것 으로 생각하고서 마치 견제하는 고삐가 풀려진 것처럼, 이미 방자하게 나 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촌경십이 그들을 회개하게 하는 한 방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의 권면을 찰 듣게 될 것이었기 때 문이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이 두려움은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다 시 말해서 그들의 안녕이 그에게 큰· 관십이 아니었던들 그는 이 모든 것을 쉽사리 간과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거기서 이득을 볼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우리는 우리의 실수가 자신에게 해로울 것으로 판단할 때는 그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보일까" ; 그가 두번째로 두려워하는 것은 더욱 가혹하게 행동하도록 강요를 받는 것이다. 가혹하게 나오는 데서 움츠러들고 더욱더 온유한 대비책 울 강구한다는 것은 사랑과 아량의 상칭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제 내 가 나의 권위를 주장하며 너희들을 순종으로 되돌려놓으려고 발버뭉치는 것 온 만약에 내가 와서 너희들이 아무것도 개선된 데가 없는 것을 보고 너희 들의 완고성을 더욱더 가혹하게 처벌할 계기가 내게 주어지지 않도록 하려 는 뜻에서이다’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본을 동해 서 목회자들이 과격하게 나오기 전에 찰못을 시정하는온건한 대비책을 항상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충고와 견책을 동해서 최종적 인 혹독함은 피할 수 있다.

"또 다툼과……있을까……" ; 그는 거의 모두가 한 근원에서 나오는 고린도인들 의 잘못 가운데 으뜸가는 것을 열거하고 있다. 각자가 자신의 일만 돌아보 았더라면 그들 가운데 아무런 다툼도 없었을 것이요, 그들이 서로를 시기하 지도 않았을 것이요, 그들 가운데 중상모략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잘못에 대한 이 목록의 캐요와 본질을 한 마디로 사랑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ptAauria(팔라우티아)와 자기 사랑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jJ 亡

"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낮추실까 두려워하고……" ; 자신의 굴욕이 지 금까지 하나의 잘못으로 간주되 어 왔는데 , 그는 그 비 난을 자신의 사도직을 촌경했어야 하는데도 거기에 치욕으로 가득 채워놓고 말았 던 고린도인들에게 내던지고 있다. 그들이 성결에 있어서 진전을 보았더라면 그것이 바울의 사도직의 영예와 영광이 되었을 것이지만, 너무도 많은 찰못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그 대신 최선율 다해서 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 그 는 그들 모두가 아니 라, 무책 임 하게 자신의 모든 충고를 무시 한 소수의 사람 들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다• 그 의미는 곧 ‘그들은 내가 볼품없다 해서 나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나에게 굴욕의 명분을 주지 말고 대신 그들의 고집불통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여러 잘못에 대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 도록 하라.

거 만하계 남을 멸시 하지 말고 스스로 땅에 엎드리 도록 하라’ 고 하는 것 이 다• 바울은 자신이 다론 사람들의 죄 악을 슬픈 눈길 로 대한다는 말을 동해서 참되고 전지한 목회자의 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모든 목회자는 교회의 여러 관십을 자기 마음에 안고, 그것 의 병페를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그것의 술품에 동갑하고, 그것의 죄악에 슬퍼하는 것이 옳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재앙을 두고 슬퍼하기 위해서 "눈물의 생"(렘 9 : 1)이 자신에게 허락되기를 기도한 바 있다. 백성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경건한 왕들과 선지자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졌었다. 하나 님께 최를 저지를 때마다 슬퍼하며, 자기 형제들의 몰락을 두고 애롱하며, 그들에게 죄책이 있을 경우 그들 대신 하나님 앞에 나서는 것은 경건한 사 람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이것은 특별히 목회자들에게서 더욱더 요 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바울은 한 마디로 부정(不貞)으로 꼬집어 말할 수 있는 모든 잘못에 대한 목록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