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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11:15)

1.  성경 (고후 11:1 ~ 15)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1)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2)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3)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4)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5)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6)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7)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8)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9)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0)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1)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12)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3)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4)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1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원컨대 너희는~~~~·용납하라·"고린도인들의 귀가 아직도 절반쯤은 그를 대항하는 자들에게 솔깃해 있다는 점을 알고서 그는 한 가지 소원을 밝힘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설득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을 강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청탁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곧이어 그의 확신이 마치 반려되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가 이어지는 자신의 칭송에 대한 훌륭한 예고를 ‘어리석음’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가 자랑에 눈 먼 바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그가 자랑한 것은 팔요에 못이겨 한 것이요, 아무도 그가 중용의 한계를 넘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억제했다고 자화 자찬한다는 것이 어색한 노릇이요, 온건한 사람에게는 아주 생소한 일이며, 자신도 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용납하라”를 명령법으로 보지만, 크리소스톰은 헬라어가 애매하다 해서 긍정문으로 보는데 어느 편으로 보든 상관은 없다. 그러나 그가 덧붙이고 있는 이유들은 고린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용납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으며, 후에 그는 다시 그들에게 그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온 점을 들어 꾸짖고 있으므로 나는 빌게이트역을 따르기로 했다. '원컨대' 라는 표현 속에는 확신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그는 마치 자신의 주저함을 교정하는 것처럼 공공연하고 거침없이 명령을 내리고 있다. 

 

"2. 내가……열심 내노니" ;  이것이 바로 그가 어리석은 시늉을 하는 이유이다. 질투심이란 곧 사람의 정신을 잃게 하는 법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서 ‘나를 아무런 강한 감정의 동요도 받지 않은 차분한 사람으로 기대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들 때문에 느끼고 있는 질투심의 강도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질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악하고 사악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과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당하고 있는 것이 있으므로, 그는 이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지적해 주고 있다. 하나님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질투심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당하고 경건한 질투는 하나님의 이익을 이루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몫인 영예를 탈취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중매함이로다." ;  그는 자신의 전파의 동기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질투가 첫째가 아니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질투의 목적이 그들을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결혼시킴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와 계속 한 몸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신의 본을 통해서 그는 우리에게서 훌륭한 사역자의 상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교회의 신랑은 하나밖에 없으니, 곧·하나님의 아들이다. 세례자가 자신을 두고 말하듯이 모든 사역자들은 ‘신랑의 친구들' 이 요(요3 : 29), 따라서 그들은 모두 이 거룩한 결혼의 신의가 온전하게 남아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이것은 오직 그들이 교회를 위한 신랑의 사랑을 나누어 가지며, 그 결과 마치 남편이 자기 아내의 정숙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처럼 각자가 교회의 순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경우에만 가능하게 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냉담과 무관심을 거뒤버리자. 냉담한 자는 이 직분에 적합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사역자들은 그들이 신랑의 친구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신부의 사랑을 자신들에게 유인하는 간통자들이 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뻔뻔스럽게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없도록 하자.

 

"정결한 처녀로" ;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동정(童貞)을 우리의 지참물로 가져오며, 그것을 모든 부정으로부터 홈 없이 지킬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들을 정결하게 만들어 그것들이 그리스도에게 정숙한 약혼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복음 사역자들의 임무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의 모든 수고는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귀절의 의미를 그들이 스스로를 개벌적으로 정숙한 처녀로 바쳐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역자가 모든 백성을 그리스도 앞에 제시해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는데, 나는 두번째 해석을 택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에라스무스와 다르게 번역했다.

 

"3. 뱀이·… .. 두려워 하노라" ;  그는 이 동정(童貞)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순결한 가운데 그리스도에게만 매달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어느 곳에서나 우리들이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을 요구하고 있으며, 만약 어떤 사 람이 그에게서 돌아설 경우 자신에게 가해진 해를 더없이 가혹하게 보복하시는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서 5장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이와 같이 우리를 하나님께 결합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귀절에서는 우리가 복음의 순수한 단순성에 머무를 경우에 그것이 성취되는 방법을 우리에게 지적해 주고 있다. 결혼이란 것이 서로간에 계약이 성취될 때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영적 결혼도 일종의 계약과 갈은 복음에 의해서 확증된다.

 

우리는 우리가 거기서 약속한 신의와 사랑과 순종을 유지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대로 우리에 대한 신의를 지킬 것이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고린도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 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관심을 쏟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헬라어에는 '에이스 크리스톤'으로 되어 있으며,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그리스도에 대한,,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벌게이트역이 내가 보기에 바울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성이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본래 순결한 교의를 고수하며, 다른 외적인 오염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그가 지적하고 있는 점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으로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날 경우 더럽혀 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경고가 옳은 것은 결혼한 여자가 유혹자에게 솔것 하기 작하는 순간부터 그녀가 부정하다고 정죄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사단의 유혹자들인 불경건하고 거짓된 교사들에게 관심울 가질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부부의 신의를 유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단순성’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두려워한 것은 고린도인들이 당장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와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그들이 배운 단순성과 순결에서 벗어나 속 되고 생소한 생각으로 돌아서며 마침내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는 다음으로 하나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거짓 교사들이 우리를 설득함에 있어서 지혜를 가장하고, 웅변술에 있어서 강력하며, 그럴듯하게 청중들의 마음을 사면서 교활하계 자신들의 독약을 주입한다면, 바로 이들의 짓거리는 사단이 이와를 속일 때 사용한 바로 그 방법이다. 사실 사단은 자신을 공공연하게 그녀의 원수로 밝힌 것이 아니라 그럴듯한 구실을 대면서 은밀하게 파고 들었다.

 

"4.  만일 누가 가서……" ; 이제 그는 고린도인들이 거짓 사도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너무 성급했던 점을 들어 혹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괴팍하고 신경질적으로 나왔으며, 그러기에 그가 아주 온건하게 그들을 책망할 경우 더없이 하찮은 구실을 잡고 늘어지면서 불쾌해 했지만, 오만불손하며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거짓 선지자들온 두손 들고 용납하던 자들이다. 그는 분별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 그들의 이 무리한 존경을 정죄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이 너희들에 대해서 그처럼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지만 그래도 너희들이 그들의 뻐기는 행동을 참는 것은 어찌된 영문이냐? 그들이 혹 너희들에게 나에게서 받은 것과 다른 그리스도나 다른 복음, 또는 다른 성령을 가져왔다면 나는 물론 그들에 대한 너희들의 존경심을 인정하겠다. 물론 그렇다면 그들은 높게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 나 그들이 내가 너희들에게 먼저 준 내용과 다론 무엇을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너희들이 아무것도 신세진 것이 없는 그들은 거의 숭배하다시피하고,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수없이 큰 축복을 베푸는 데 있어서 사용하신 나는 그처럼 멸시하는데 무슨 감사가 그러느냐?' 라는 내용이다. 교황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종류의 감사를 오늘날 그들의 거짓된 갑독들에게 둘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들의 횡포에 의해서 더없이 아프계 압박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아무 어려움 없이 그것을 용납하지만, 그러나 그 리스도를 멸시함에 있어서는 주저하지 않는 그들이다• 여기에 나오는 ‘다론 그리스도',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서 1장 8철의 것과 의미가 약간 다르 다. 그 귀절에서는 ‘다른’이 참되고 순수한 것과 반대되는 거짓되고 허구적인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자신의 사역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역을 통해서 그들에게 온 복음을 뜻한다.

 

"5. 내가……즐 생각하노라(여기노라)." ;  그는 그들이 내세울는지도 모를 그럴듯한 구실을 제거시킴으로써 그들의 배은망덕을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서 그는 자신이 사도들 가운데 으뜸가는 자와 맞먹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인들은 체험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당연히 그에게 속하는 권위를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양도함으로써 그를 충분히 높게 평가하지 못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온건하게 나오는 뜻에서 그는 이것을 자신의 위치로 ‘여긴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고 모두에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의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도직을 요한이나 베드로의 그것에 못지않게 그의 은혜의 표적으로 장식해 주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여러 은사를 분명히 인식한 다음에 그것을 멸시할 경우 그는 악의적이요, 배은망덕하다는 핀잔을 면할 수 없다.  어디서 하나님의 은사를 식별하든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에 있어서 뛰어나므로, 특별히 이 선물들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혜택을 끼칠 경우 그는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  그의 이 웅변술의 결핍은 쉽사리 그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한 가지 이유였다. 그는 자신이 말에 있어서 치졸하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이 비판을 예상하고 또 그것을 교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지식이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말' 이란 이 문맥에서 표현의 우아함을 뜻하고, ‘지식 ' 은 그의 가르침 의 본질을 뜻한다. 사람이 영혼과 몸으로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의에 있어서도 가르쳐지는 부분과 그것을 덧입히는 구두적인 장식이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설령 가르침을 세련되고  유려 (流麗)한 말로 펴나가는 유능한 웅변가는 못된다 할지라도 가르쳐야 할 내용과 알아야 할 내용은 알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웅변술이 사도들에게 있어서 팔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없을 경우 어떻게 가르칠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론 사람들에게는 지식으로 충분하겠지만 어떻게 교사가 벙어리일 수 있겠는가?  나는 바울이 자신을 어린 아이처럼 전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을 못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유려(流麗)한 웅변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필적할 수 없었으므로 이면에 있어서 그들의 우월성을 인정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문제, 곧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무게가 없는 달변은 그들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혹 사람의 혀를 만드신 주님께서는 왜 그처럼 위대한 사도에게 웅변술을 허용하셔서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지 않았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그의 웅변술의 부족을 충분히 보충할 특성이 풍성하게 허용되었지 않았는가 하고 대답하겠다. 우리는 그의 글에 나타난 위엄성이 어느 정도이며, 그가 도달한 높이가 어느 정도이며, 그가 계시한 숭고함이 어느 정도이며, 그가 소유한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알고 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말이 아니라 청천벽력이었다.  그리고 성령의 효능은 웅변이나 장식의 가면 밑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련되지 않은 말 속에서 보다 더 명백하계 드러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마지막 장에 나오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가 그의 원수들의 반론에 구두상으로 동의를 표하지만, 동시에 그것의 본질은 부정하고 있다는 말로써 이 귀절을 요약 하도록 하자. 우리는 그의 본을 통해서 말보다는 내용을 택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이것은 표현은 좀 거칠지만 다들 알고 있는 라탄어. 속담, ‘남들은 말을 갖게 하고 우리에게는 내용을 주오'에 나오는 바로 그대로이다.  만약 웅변이 덧 붙여진다면 그것을 특별한 무엇으로 보아도 무방하나, 그것이 교의를 곡해하는 데가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인 단순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일로·…" ; ·자신을 주요 사도들과 대등한 것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주 당돌한 주장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오만으로 간주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의 체험에 입각해서 판단할 경우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판단해 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의 자랑이 헛되거나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할 만한 중거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의미는 사실과 체험이 그의 말하는 내용을 뚜렷하게 입증하고 있으므로 자신에게 말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7. 내가……하나님의 복음을" ;  그의 굴욕으로 말하자면 사실온 보통 이상의 칭송을 받을 만한 탁월성이었지만, 그는 바로 이것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굴욕은 자발적인 굴욕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특별한 가치가 없다는 듯이 겸허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를 보통 사람으로 여긴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실온 그는 고린도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처신했던 것이다. 그들의 안녕에 대한 그의 열성과 관심이 얼마나 그의 내부에서 강력하게 불탔던지 그는 자신보다는 그들을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위대성을 포기한 것은 그들이 그의 굴욕을 통해서 위대하게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그의 목표는 그들의 구원을 중진하는 데 있었다. 이제 그는 그들이 그러한 경건한 의도를 잘못으로 돌린 데 대한 배은망덕함을 탓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을 비난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올바론 마음으로 돌이키려는 뜻에서이다. 사실 이 냉소적인 표현이 직접적인 책망보다 그들을 더 가슴 아프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내가 너희 들을 위해서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해서 나를 멸시하다니, 이 무슨 영문이냐?' 하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날카로운 질문 방법이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는 데 더 효과를 발휘했다.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 이것 역시 그의 굴욕의 일부로서 그는 마치 자신의 위치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낮다는 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사양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아무런 보수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듯이 그를 얕잡아본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그가 고린도인들에게 거저 수고를 바친 이유가 당장에 덧붙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것이 그의 보편적인 습관이 아니라, 고린도에서는 우리가 지난 장(章)에서 보았듯이 거짓 사도들에게 그의 동기를 헐뜯는 구실을 제공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8. 탈취한 것이라." ;  내가 보기에 그는 의도적으로 반론을 살 만한 단어를 골라 사용함으로써 고린도인들의 자신에 대한 멸시가 얼마나 부당한 것 이었는가 하는 점을 더욱 더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갈다. 곧 ‘내가 다론 교회로부터의 약탈을 나 혼자 탈취한 것은 너희들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아끼는데도 나에게 그처럼 못되게 대하는 것은 무슨 짓이냐 하는 식이다. 이것은 군대 용어에서 취한 이유로서 정복자가 패전자들에게서 약탈물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그가.그리스도에게 인도한 교회들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말하자면 그의 승리의 약탈물이었다. 물론 그는 그들의 뜻에 대항해서 그들로부터 무엇 하나 취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기부한 것은 말하자면 영적 전투의 권리 상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신이 ‘부족했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자신이 팔요에 따라서 그것을 억지로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았던들 자신이 그들에게 결코 부담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이제까지 그는 노동을 했었지만, 그의 손의 일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여분의 기 부가 마계도냐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었다. 그러기에 그는 마계도냐인들이 자신에게 생계를 제공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부족했던 것을 그들이 제공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사도가 경건한 분별력과 신중을 기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계도냐인들의 경건한 열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들은 복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  '아니 ' 자기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 까지 전파 되도록 하는 뜻에서 서슴없이 자신들의 생계비를 기부해서 그를 도왔던 것 이냐 오늘날 마게도냐인들은 극소수인데 고린도인들은 곳곳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 아무도 바울의 이 말 속에는 장차 그들이 그에 대해서 더욱 관대하게 나오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과거의 부족을 수정하도록 하는 저의가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설령 그것이 제공된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그들이나 아가야에 있는 교회로부터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단호히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안에 있으니' 라는 표현은 맹세의 형식을 띤 것으로서, ‘내가 아가야 사람들 가운데서 이 영광을 갖지 못할 경우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는 것으로 믿지 않아도 좋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고린도는 아가야에 있었다.

 

"11.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대하기 마련이다. 바울이 마게도냐인들로부터는 도움을 받아들이면서 고린도인들의 관대함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과 앞으로도계속 거절하겠다는 그의 맹세 때문에 고린도인들이 불쾌하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여기서 이 의심에 대해 취급하고 있다. 그들의 가능한 반론에 대답하는 뜻으로 먼저 그는 그 이유가 자신이 그들에게 호의를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하고 묻고 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직접 대답은 하지 않지만 그의 간접적인 대답이 더 효과적인데, 그는 하나님을 불러 그들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증거해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세 귀절에 두 가지 맹세가 담겨 있지만, 그것이 합당하고 거룩한 맹세인 것은 그 목적이 선하고 합당한 명분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맹세를 무조건 정죄하는 것은 흰색과 검정색을 구별할 줄 모르는 미치광이 짓이나 다름없다.

 

"12. 내가 하는 것을……" ; 그는 다시 그가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거짓 사도들은 무지한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기 위해서 아무런 보수를 취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무보수 봉사는 언뜻 그럴듯하고 비상한 열심의 표시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면,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식으로 그에 대해서 오만불손하게 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을 해치는 기회를 부정하는 뜻에서 자기도 복음을 아무것도 받지 않고 전파 했다. 이것이 ‘기회를 찾는 자들의 기회를 끊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거짓 사도들은 이러한 계략을 써서 파고들려 했으며, 마치 자신들이 바울보다 더 우월한 것처럼 그의 평판을 훼손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우리도 그들만이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자랑에 있어서 그들과 동등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귀절은 악인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대로 우리에게 불리하게 악용하려 드는 기회를 허용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있어서 유익한 것이다. 그들을 이겨내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경솔 때문에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 그는 이미 그의 적대자들의 크나 큰 주장을 반박한 바 있지만, 그들이 그를 능가하는 것으로 말하는 거기에 자신도 동등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에게 도무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돈을 무시하는 것이 크게 칭찬받을 만한 것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들의 경우 그것이 기만적인 계략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창녀가 귀부인의 옷을 빌어입는 경우나 다름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가면을 아예 벗겨버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팔요한 일이었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궤율의 역군"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처음에는 자신들의 사악성을 드러내지 않지만 교묘하게 무슨 구실을 대면서 파고들어 환심을 산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을 철저하고 세밀하게 검토해서 우리가그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종으로 용납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는데, 이것은 그들이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탁월성을 위장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악의나 질투로 실제적인 덕을 두고 불리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성실 때문에 마지못해 그들의 배후의 악을 폭로하고 있다. 사실 그들의 거짓 주장 속에 담겨 있는 진정한 덕에 대한 모독온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의 주장보다 더 크게 번질 위험이 있었다.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 이것은 보다 큰 것에서 보다 작은 것을 추론하는 방법이다.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타락한 자요, 악한 사람들의 우두머리인 사단이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면 그의 하속들은 무손 짓인들 못하겠는가?  우리는 날마다 이 두 가지를 체험하고 있다. 사실 사단은 우리를 악으로 유혹할 경우 실제 신분을 공언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 가 우리의 철천지 원수요, 우리 구원의 파괴자라는 점을 우리가 알아챈다면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속이기 위해 항상 어떤 가면을 뒤집어쓰며, 옛말처럼 당장에 뿔을 드러내지 않고 어떻게 해서 든 '빛의 천사’로 나타내려 한다. 우리를 더없이 흉측한 죄악으로 끌고 갈 경우에도 그는 여전히 그럴듯한 구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경계를 허술하게 하며, 마침내 그의 덫으로 끌어가 버란다. 그는 선한 자의 모습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 가면서까지 우리를 공격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의 종자들은 그들의 대장과 동일한 수법을 따른다.

 

그리스도의 대리니, 베드로의 후계자니,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니 하는 이름이야 그럴듯하지만 그러한 가면들이 벗겨질 경우 교황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것인가? 그의 스승인 사단도 그의 가장 뛰어난 문하생의 가증스러운 행위에는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바벨론이 황금 잔에 독을 담아 사단에게 마시게 한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이 우리는 위장전술에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어리석게 간과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바울은 단지 여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겉 모습만 보고 사물을 판단하는 일이 없게 하는데 , 그 까닭은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경우 주님께서는 그 진상을 곧 드러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도의 종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우리들이 겉모양에 현혹될 것이 찾도록 경고하고 있다. "의의 일꾼"이란 신실하고 정직한 일꾼을 뜻하는 히 브리어식 표현이다.

 

"15.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그'뜻에서 이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인간들의 어리석은 판단을 무시하고 주의 날을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용감한 사람의 발언이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특유하고 담대한 양심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