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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고후3:1 ~ 11

1. 성경 (고후3:1 ~ 1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1)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2)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3)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4)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느니라 (5)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6)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7)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8)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9)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0)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우리~~~~시작하겠느냐(우리가 다시~~~시작하고 있느냐?-역자주)" ;  바울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그가 너무 자신의 업적을 되풀이하는 것을 즐겨했다는 점인 것 같다. 이 협의는 그의 우수한 탁월성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영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당황한 나머지 그에 대해서 퍼뜨리고 있던 것이다. 내가 보거에, 첫번 서신에서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찬양을 노태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이미 첫째 서신에서부터 트집을 잡았던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자천하다’는 무철제한 허풍에 빠지는 것, 아니면 최소한 이기적인 이유로 자신의 덕을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사실 줄곧 자화자찬만 늘어놓는 것처럼 역겨운 일도 없으므로 바울을 헐뜯는 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불평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자랑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팔연성을 들어 변명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하논 의도 때문에 그는 모든 비난을 벗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유일한 관십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자신의 사도직의 영예를 손상하지 않는데 있었다. 그리스도의 영예가 위험스럽게 되지 않았면들 바울은 자신의 평판에 대한 공져올 아무 어려움 없이 그냥 답변하지 않고 지나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 사회에서 자신의 권위가 갑소될 경우 고린도인들에
계 큰 해가 돌아갈 것이타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그들의 비난을 들고 나오면서 자신이 그들 사회에서 돌아가고 있는 이야기와 소문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에게 알게 하고 있다.

 

"할 필요가 있느냐." ;  그는 먼저 비난 그 자체보다 비난하는 자들에게 대답한 다음에 그 비난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그들이 온 사방을 들아다니며 치켜올려 주는 찬사로 가득찬 펀지를 ' 구결하고 있을 때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 주신 은혜를 할수없이 언급했다 해서 자신을 트집잡는 자들의 악의를 꾸짖고 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울 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므로 굴로 된 추천장이 펄요없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가 그들에게 영광에 대한 굶주린 탐욕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것은 '그들이 사람들의 지지를 구결하면서 뻔뻔스럽게 자신들을 내세우고 -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 함으로써 그는 .... 우아하고 척철하계 그들의 비난을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선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것이라면 추천장을 받는 것이 전적으로 나쁘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겠다• 사실 바° 눈 자신도 많은 사람들을 추천한 바가 있는데, · 만약 그것이그론 일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l 다. 여기서 두 가지 요건이 따르는데, 그 첫째는 추천을 - 아침으로 얻어서는 안되고~ - 거기에는 꾸밉없논 증거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이요, : 둘째는 '그것이 - 사람의 출세를 위해서 쓰여질것이 아니라 오칙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보하는더]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사 바울은 거짓 협의를 들어 자신을 공져한 자들에대해서 관십을가지고 있다•

 

"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 ' 그는 동일한 비유를 계속하면서 이 편지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고린도인들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붓과 먹에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일이 자신에 의해서 받들어진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그는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자신을 도구로 삼음으로써 자기를 헐 뜯는 자들로 하여금 만약에 그들이 계속해서  그의 사도에게 악평을 말한다면 자신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상대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계 하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이 서신의 권위를 높이는 데 그 의도가 있지만 둘째 소절에서 그는 이미 율법과 거기에 뒤이어 오는 복음의 비교를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뒤에서 보게 되듯이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이 비교로 넘어가고 있다.  '먹'과 ‘영,' ‘돌비'와 ‘심비’에 대한 그의 대조는 그의 요점을 명료하게 해주고 있다. 먹을 하나님의 영으로, 돌을 마음과 비교함으로써 그는 아무런 비교어가 없이 그저 성령과 마음만 언급했을 경우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알고 읽는 바라·" ; 이 귀절은 역시 '알고 긍정한다’ 고하는 '아나기노-스케스다이'라는 동사에서 온 말인데 좀 애매한 점이 있다. 내
견해로는 그것이 좀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해석한 본문에서 지나치게 이탈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독자들 자신이 알아서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말을 ‘긍정한다’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처자 자신이 의도했던 여러가지 신앙적인 교훈들에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과의 · 사이에서 찰뭇 적용될 우려마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적용하고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 내용의 맥락들을 비교하다 보면 잘못 적용되거나 속일 염려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3. 너희는~~~~그리스도의 편지니" ;  바울은 이 서신이 그리스도에 의해 쓰여졌다는 똑같은 온유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인들의 신앙을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편지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잉크와 펜으로 적어서 그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적어보낸 것이기 때문에 그 . 자신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목회의 저신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서 사도 바울은 편지의 작자를 그리스도로 보고 그는 도구로서 그 자신이 쓴 펀지를 혹시나 그리스도의 사도에게 악랄하게 도전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조종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그들에게 보낸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본 편지의 권위를 증가시켜 주기 때문이냐 그러나 두번째 철에서 바울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비교할 때 ’ 나타나는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이 비교에서 얼마 지나가지 않은 과거의 상황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같이 재현하고 있다. 그는 이 비교에서 먹으로 쓴 것과 심령으로 쓴 것, 그리고 돌비에 새긴 것과 심비에 새긴 것을 대조시키면서 분명하게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먹에 비교하고 , 우리의 마음을 돌비에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은 만약 우리가  그의 성령과 우리의 마음 관계를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단순한 언급이다.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 바울은 새 언약의 은혜에 대한 예레미야 31장 31~33절과 에스겔 36장 26절의 약속을 빗대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을 것이나 내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 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에 내 율법을 쓰겠으며 그들의 내부에 내가 율법을 쓰겠노라' 하는 말씀을 하시고 있다. 또 ‘내가 네 가운데서 돌갈은 마음을 제거할 것이요, 네게 살갈은 마음을 주어 너로 하여금 내 교훈 안에서 행동하게 하겠노라’는 말씀 역시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이 약속이지·신의 전

파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으로 밝히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 우리논 그가 새 언약의 신실한 사역자---이것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적합한 찬사이다-----라는 점을 명백히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라는 단어에는 나쁜 의미가 담겨 있는것이 아니라 ‘냉랭하고 오만한의 뜻을 갖는 ‘돌같은'과 대조해서 온순하다는 의미가 있다.  인간의 마음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정복되기 전에는 자연히 돌같은 상태에 있기 마련이다.

 

"4. 우라가~~~~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 • 그는 지금까지 자신과 자신의 사도.직분을 더없이 귀한 용어로 추천해 왔기에 교만하다는 인상을 피하는 뜻에서 모든 영광울 하나님께 돌리며 자선의 가진 것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것인라는 점울 이야기하고 있다. 곧 이 자랑으로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극찬하고 있으니 현재 나의 나 됨온 '그 분의 은혜 덕분이다’라는 것이다. 그가 항상 그렇듯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흐름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통로가 되시기 때문이다. 

 

"5. 무슨일이든지 우리에게서~~~~~" ; 그는 모든 공로를 부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위장된 온건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그는 그가 실제로 마음으로부터 느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아무것도 인간의 것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어떠한 선한 행위든 거기서 가장 작은 부분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선한 행위에 대한 생각이 칭송의 첫째나, 둘째 몫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까지 그는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고 있다. '생각한다' 는 것이 '뜻한다 (to will)' 는 것보다 못하다는 점을 생각
할, 그리고 바울을 인간들에게 무엇이든 올바르게 생각하는 능력마저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올바론 의지가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교황주의자들은 벌게이트가 이 귀절에 사용하는 ‘충족성’이라는 단어에 속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인간에게 선한 의도를 품을 능력이 없다는 바울의 말에 동의하고 그와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조금만 도움을받을겅운에는스스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 올바론 이해력이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 볼 경우 그들이 바울의 내용에 근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에게 '아우타르케 이 안' 뿐 아니 라 '히카노테 -타 ; 능력 , competency'도 없는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인간에게서 온갖 선한 특성을 모조리 박탈해 버리고 있다.

 

"6. 저가 또 우리로~~~~ 만족케 하셨으니" ;  그는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점을 인정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전에는 감당할 수 없던 직분에 대해서 자격을 갖추계 된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칙분의 위대성과 어려움을 추측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아무도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준비를 시켜주지 않고서는 시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의 의도는 복음의 가치를 극찬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이것을 통해서 사실온 하늘의 은혜를 단 한 방울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 거창한 은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빈곤함을 암암리에 비난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그는 앞에서 언급한 율법과 복음의 비교를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이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고린도에 율법을 잘못 신봉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론 이유에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나로서는 고린도에서 거짓 사도들이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도무지 볼 수 없는만큼 그의 의도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다를 떨면서 호의를 받아보려고 덤비는 무력한 말장이들이 그들의 과장된 전시를 통해서 고린도인들의 귀를솔것하게 하고 있었으므로 복음의 제일가는 탁월성과 그 사역자들의 제일가는 추천장, 곧 성령의 효력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의도에서 볼떠] 율법과 복음의 비교는 큰 의의가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는 이 문제를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의문'(문자)을 동해서 그가 뜻하는것은구약이요, ‘영'은 복음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십의 여지가 . 없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새 언약의 한 ·작역자라는 점을- 밝힌 다읍에 곧 이어서 설명 형식으루 자신이 성령의 자역카라는 점을 었붙임으로써 - 영관 ; 문자를 , 대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이런 석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문자란 성경윈 문법적이요, --:. 본래적인 의 센혼 (이것을 그는 문자적인 의미로 말한다 ), .,J 영이벌풍유적인〉의멘 (이것을 三흔히 영적인 의미로 본다)라는 오리겐의 이야기를 크게 생각해오고었다. 그 결과 수세기에 걸쳐서 바울이 여기서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열쇠를 우리에게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흔히들 이야기해 왔고 그런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사실은 이것 보다 바울의 의도에서 거리가 먼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한면 이같은 복음의 외적인 증거는 문자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에 이르지 뭇하나 그것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 인간들의 영혼 속에서 효과적인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는 죽어 있으며 효력이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귀로만 이해되는 글자 그대로의 전파를 뜻하고, 영은 입으로 발설될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그것의 생생한 의미가 효과적으로 파고드는  영적인 가르침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미 인용한 예레미야 31장 31~33절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귀절에서 주께서는 율법이 말로만 선포되고 백성들이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잠간 동안만 지속될 뿐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중생의 영이 그의 복음, 곧, 새로운 언약을 그들의 마음에 쓸 것이라는점을  약속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이 예언의 성취를 자신의 전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고란도인들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서 떠둘어대는 허풍선이들의 모든 잡담의 무가치성을 깨닫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여기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오칙 의적인 ' 음성으로만 말씀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영을통해서 내면적으로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말씀하시지는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나의 첫 대답은 바울이 여기서 특별히 율법에 속했던 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납께서 그 당시에 그의 영을 통해서 역사하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 모세의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는 요한복음 1 장 17절의 말씀에서 알 수있는 그대로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든시대에 있어서 활동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율법의 특수한 축복이 아니었다는 점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모세도 그가 생명의 가르침에 약속과 경고를 덧붙여 전달할 때 자신의 직분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가 율법을 문자로 부르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서는 죽은 전파이기 때문이요, 그러나 복음을 영으로 부루는 것은 그것의 활동이 생생하기에, 아니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나의 둘째 대답은 이러한 모든 내용들이 전직으로 율법이나복음에 대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가 다른 것과 대조를 o! 루는 범위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복음 그 자체마저 항상 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양자가 비교될 경우울법에는인간들을문자적으로만 가르침으로써 그들의 귀 이상을 파고들지 않는 속성이 있지만, 복음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의 은혜의 도구이므로 그들을 영적으로 가르치는 속성이 있다는 점을 확증하는 것은 옳고 마땅한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십에 의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보다 ·복음 안에서 성령의 효력을 ' 드러내는것을더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성령만의 일이다.

 

그러나 자신을 영의 한 일꾼으로 부르는 바울의 ‘말에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자신의 전파와 너무도 밀접하게 묶여 있어서 자기가 원할 때마다 그가 발설하는 말과 함께 영을 내뿜을 수 있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뜻하고1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에 그의 영으로 축복하셨으며, 그렇게 ' 함으로써 복음에 대해서 예언된 내용율 성취하셨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을 어떤 사람의 가르침에 허용하시는 문제와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 그자체의 힘만으로 우세한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영의 사여자인 것은 우리가 그를 사로잡고 있거나 곧 포로로 잡고 있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의 변덕에 따라서 그의 은혜를 모두에게나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지성을 깨우쳐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새 롭게 함으로써 그둘을 온전히 중생 시 켜 주시 기 때 문이 다.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특성이 종종 사역자에게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간의 일 사이의 이 기반 (bond)과 관련성 때문이댜 다시 말해서 이것은 어떤 캐인기 아니라 복음의 전체 적인 체제 (dispensation) 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복음의 체제란 그리스도의 은밀한 능터가 안간의 외적인 일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  이 귀철은 먼처 오리 겐과 그밖의 ·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곡해되어 오고 있는데, 이들이야말로 성경이 ·풍자적으로 해석되지 않을 경우 그것이 쓸모없을 분 아니라 실제로 해롭다는 더없이 흉측한 오류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 오류가 많은 악의 근원이 되어 오고 있다. 그것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곡해하는 길을 열어 제쳐놓았을뿐아니라  뻔뻔스럽게 풍자화하는 것을 해석의 으뜸가는 원리로 세워놓고 말았다. 그러기에 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무철제하게 하나님의 성스러운 말씀을 가지고 마치 공을 이리저리 던지는 식으로 온갖 종류의 놀이를 했었다. 이것은 또한 이단자들에게 교회를 . 와중으로집어던지는 계기를 주었으니,  그것은 누子돈 어떤 문맥이든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일종의 용인된 관습이 되고 그 어떠한 망상도 그것이 ' 제아무리 · 터무니없고 극악스터위도 풍유라는 미명 아태 소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니심지어 선한 사람들까지 ' 그들의 잘못된 풍유에 대한 호기십에 이끌터 무수한 그릇된 견해를 형성하계 되고말았다.


그러나 이 귀철의 뜻은 하나님의 : 말씀이 · 입 으로만 제공될 경우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 된다든 것으로, 그 까닭은 구것이 마음 속으로 ' 받아들여질 때만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 '문자’와 ‘영'이라는- 단어는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 및 열매와 관련된 것이다. 귀에만 울릴 분 마음에 미치지 못하는 가르침이 왜 사망을 주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다음에 곧 겁토하게 될 것이다.

 

"7.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위임을 허용하셨지만 그래도 복음의 위업과 비교할 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논리를 평으로써 복음의 가치를 좀더 ' 상세하계 실명하고있다. 율법은 많은 기적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여기서 바울은 그 가운데 오직 한 가지, 곧 모두의 눈을 부시계 할 정도로 모세의 얼굴을환하계 비추었던 광채를 언
급하고 있다. 이 광채는 율법의 영광의 한 상칭이었다. 보다 작은 것에서부터 보다더 큰 것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가운데 그는 복음은 율법보다 훨씬 더 우월하므로 그것의 영광기 더욱더 광재를 며어야 마땅하다는점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먼처 그는 율법을 죽음의사역으로부르고, 둘째,  그것의 가르침이 먹물로 된 굴자에 쓰여졌다는접, 세째 , 1 그것이 들판에 쓰여졌다는 점, 네째,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것이 ' 01-니라일시적이요, 순간처이라는 접을 지적하고, 다섯째, 그것을 다시 정최의 사역으로 부르고 있다. 이 명제를 완벽하게 하는 뜻에서 바울은 . 구밖에도 여기에 、상응하는 복음의 그 여러가지를  열거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영의 사역이요, 의의 사역이, 그리고 영원히 존속한다는 접만을격적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표현만 가치고는 그 비교가 완벼하지 않지만,`그의 의미를1 분덩하게 함에 있어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이미 영은 생명을 주는 것이라. 돌 대신 인간의 마음이 작용했으며, 먹 대신 구들의 듯이 작용했다는 점을지적한 뱌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이러한속성을  간단히 살펴야겠는데,  여기서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담겨 있는 전반적인 가르침에 대핵서 언급하고 있거나, 구약시대의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특벌히 모세의 사역에 속한 것만을 간략하계 .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명십하도록 하자. 율법은 돌에 새겨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문자적인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걷접이 복읍에의해서 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이 들판에 새겨져 있는 한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저 복음이 거룩하고 침해한수없는 언약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흰 영의 보장 밑에 선포되고 있기 때품이다. 여기지 율법은 정죄완 사망의 사역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곧 인간들이 자신의 입무에대해서 :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의 소 의에 합당하게 살지 뭇한 모든 자들이 처주받프 있다는 말을  둘을 때 그들은 죽어야 , 마땅한 최책이 었는 것으로 발견되며 정죄받기,4 마련이다. 이와같이 율법으로부비 그들이이 정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받지 , 못하는 것은거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몫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수행할 아무런 능력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인간은 중생되고 그들의 죄악에 대한 값없는 사면으로 말미암야 하나님께 하핵되며 그 결과 그것은 의와 생명의 사역이 뒤는 것이다.

 

그러 나어기서 한 가자 질문이 1 제기된다r 、만약 복음이 일부에게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고후 2 : 16), : 그리스도께서 , ‘실족의 바위'요, ‘많은 사람들의 패망을 위해 제위진 걸림돌’이라면(눅 2 : 34 ; 벤전 2 : 8) 왜 그는 : 오칙 율법만이 죽음을가져오는 것으로 이야기하는가?, 복음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여기에 대해시 우리가·- 사망의 근원 (source)이더는것은 복음에 오직 부수적인것이요 , 1 따라서 사망의 원인 (cause)이 아니타 그것의 계기 (materia) 일 분인 것은 그것의본태 성져이 모두에게 구원을 . 가져오는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해도 이 난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채로남아 있게 되는데, 그 까닭은 율법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할 수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자신이 백성들 앞에 생명과 사망을 놓았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신 ' 30 :15), 바울 자신도 로마서 7 장 10 철에서 율법이 우리에게 패망의 원인으로 드러난 것은 거기에 무손 ' 찰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정최를 가져오는 것은 율법과 복음에 모두 부수적인 것이므로 여전히 난제는 그대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자 자이에 여전히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대답한다. , 왜냐하면 비록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망의 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중생윗 수단이며 하나님과의 화해를 거저 제공하므로 당연히 생명의 교의로 부를 수 있기 [비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 마음을 개조시켜서 의를 순종하계 함이 없이 선한 생활의 원칙만 규정하며, 위반자들은 영원히 멸망 받는다고 위협하고 있기 떠]문에 정죄 이상의 다몬 일을 이룰 수 없다. 이것을 바꿔 말하자면 , 우리에게 치료에 대한 아무런 소망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질병만 보여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요, 절망에 , 빠진 자들에
게 차로책을 제공하는 것이 복음의 기능이다. 율법은 인간을 자신에게 맡기기 때문에 그에게 팔연적인 사망을 . 안겨주지만 복음은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며, 따라서 생명의 문을 열어젖혀 준다. 따라서 죽이는 것은 율법의 영구적이요, 팔연적인 사건 (accident) 이다. 이것은 사도가 다른 곳에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처주 아태 있나니 모두는 그것의 처주 아태 있다" (갈 3 : 10) 라고 말한 그대로이 다. 그러 나 복음이 항상 죽이지 만은 않는 것 은 그 인에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믿는 모든 사람 (everyone) 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
력 ' 이 기 때 문이 다(몸 1 : 16""-'17).


그래도우리는 그가 율법과 복음을 두고 제시하는 · 마지막 비교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모세의 사역이 일시적인 것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는 많이 있는데, 그림자들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마 11 : 13)라는 할언이 , 구림자둘보다 더 많은 법위 、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사역이 그것의 특성에 의해서 복음과 구별되기 때문에 거기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구약의 연약성온 그것이 인간의 마음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
을 밝혀 주신다(렘 31 : 32"'33). 나로서는 여기서 문제시되고 있는 율법의 철폐를 그것이 복음과 대조된다는 의미에서 구약 전체에 적용시킵으로써 율법과 선지자들이 요한 때까지라는 발언과 그것을 일치시키는 바이다. 사실 이것은 문맥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기서 오칙 의식에 대해서만 관십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율법시대보다 복음시대에 얼마나 더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계 작용하고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  바울은 이것을 통해서 복음을 너무 천박한 것으로 멸시한 나머지 그것을칙접 바라볼가치도없는것으로여겼던자들을 간접적으로 꾸중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율법의 광채가 얼마나 위대했던지 유대인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접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모세를 능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훨씬 능가하는 영광을 지닌 복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겠는가?

 

"10. 영광 되었던 것이~~~~~" ;  이것은 그가 이미 언급한 것에 대한 시정이 아니라 확증으로서, 여기에는 복음을 제시할 경우 율법의 영광이 철폐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마치 별과 달이 그 자체로서는 물론 밝고 온 지구에 빛을 퍼뜨리지만, 보다더 밝은 태양의 광채 앞에서는 그 빛이 사라지는 것처럼 율법도 그 자체로서는 제아무리 영광스럽다 하더라도 복음의 광채 앞에서는 아무런 영광을 자랑하지 못한다• 여기서 영의 능력과 위업이 복음을 통해서 광채를 발하는 가운데 인간의 지성과 마음을 천국으로 이끌어 올릴 수 없울 경우 태양의 광채가 그 햇살을 통해서 빛나는 것처럼 우리는 복음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충분히 귀하계 여기지 않을 것이며, 복음은 엉뚱하게 남용되거나 사악하계 더럽혀진다는 결론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