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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1. 성경 (고후 4:7 ~ 18)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7)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8)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9)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12)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3)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4)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5)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6)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7)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8)

2. 묵상 (Calvin 선생주석)

"7. 우리가 이 보배틀 질그릇에 가졌으니……" ; 바울이 자신의 사역(使役) 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그처럼 높이 평가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세상의 눈에 대해서는 그가 너무도 수치스럽고 볼품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본 사람들은 그들이 그의 비천한 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면, 그의 자랑이 유치하고 그가 어리석고 우스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악인들은 특별히 이점을 구실로 붙잡고 늘어지면서 바울에 관한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더없이 재치있게 그는 무지한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사도직의 영광을 가장 훼손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것을 사용해서 그 영광을 증대 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먼저 그는 호화롭게 장식된 상자가 아니라 전혀 아무 가치 없는 값싼 그릇에 담겨 있는 보화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더 영광스럽게 되며 더욱 더 뚜럿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나의 천한 신분을 가지고 내 사역의 영예를 훼손하는 구실로 삼는 자들이 부당하고 불합리한 재판관들인 것은 어떤 보화가 아무런 가치 없는 그릇에 담겨 있다 해서 그 가치가 더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 다. 사실 크나큰 보물이 질그릇에 보관되는 것은 혼한 일이다.  따라서 사역자들에게 아무런 탁월성이 엿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이며, 그들의 어떠한 위대성도 하나님의 능력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그들은 깨닫지 뭇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의 볼품없는 상태와 그들의 외형적안 비천함이 하나님에게 영광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복음의 가치를 사역 자의 신분(person)에 따라 서 측정하는 것은 어리석고 나쁘다’ 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전반적인 인류의 상태 뿐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유한한 인간들이 한낱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사람, 곧 출신, 가문, 지식, 그리고 행운으로 호화롭계 장식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복음의 사역자가 된다면 그는 측량할 수 없는 보화를 담는 무자격한 질그릇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외형적으로 과시할 것이 전혀 없다 해서 종종 멸시를 받는 자신과 자기의 동역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 이것은 자신의 볼품없는 상태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기는 커녕 그것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뜻에서 설명 형식으로 덧붙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 까닭은 우리가 궁핍한 상태로 전락되지만 마침내 주님께서는 도피할 길을 열어주시며, 우리가 빈곤으로 괴로움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우러 오시며, 우리를 대항해서 무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의 지켜주심 가운데 우리는 안전하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모든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우리가 비천하계 된다 하더라도우리는 멸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맨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가능성은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중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그는 악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제기하는 모든 혐의를 들어서 모두 자신에게 유익하게 이용하고 있다.

 

"10~11절 예수 죽인 것을"여기서 그는 계속해서 거짓 사도들이 복음을 멸시하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구실 때문에 복음이 실제로 조금이라도 멸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럽게 된다는 새로운 사항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에게 세상의 멸시를 가져오는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또는 ‘굴욕'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는 바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그의 복된 부활에 참여할 자세를 갖추었다. 먼저 그리스도의 여러 고난은 그것이 세상 보기에는 제아무리 흉측해 보인다 하더라도, 장군들의 모든 승리나 왕들의 모든 화려함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 영예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러나 우리는 또한 최후의 결과를, 곧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되기 위해서라는 점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그는 자기와는 반대하지만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고 있노라는 자들의 항변을 아주 적절하게 꾸짖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바울의 가련하고 볼품없는 모습에 대한 그들의 조소 때문에 우리가 더없이 높은 영예를 돌려야 하는 그의 고난을 보고 실족하는 나머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죽음' (dying) 또는 ‘굴욕' (mortification) 이라는 단어가 여기서는 그밖의 많은 성경 귀절에서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여러 정욕을 저버리고 새롭게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극기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현재의 생활의 마지막을 묵상하게 하는 고통들을 뜻한다. 편의상 우리는 전자를 가리켜 내적인 굴욕으로, 후자를 외적인 굴욕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양자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전자를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후자를 통해서는 간접적으로 닮게 된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절과 로마서 6장 6절에서 내적인 굴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곧 거기서 그는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로마서 8장 29절에서 외적인 굴욕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것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고통이 그리스도의 굴욕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오직 신자들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그 까닭은 악인들이 현재 생활에서 오는 여러 고통을 받을 경우 그들은 아담과 교제하는 것이지만 선택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참여하며, 그 결과 그 자체로서는 저주가 되는 그들의 모든 비극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증거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큰 은사를 받은 자일수록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법이다.

 

"예수의 생명……"역경에 대한 최선의 치료책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문이듯이, 우리가 우리의 모든 비극의 끝에 가서 복된 부활에 이르게 되리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만약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바쳐 그와 함께 죽을 경우, 우리가 그의 생명을 나눌 것이라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에게 결합시켜 주시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은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죽음에 넘기어진다”라는 귀절을 지속적인 박해로 시달리고 여러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으로 본다면', 이것은 특별히 바울과 또한 그와 같이 악인들의 횡포에 공공연한 공격을 받아오던 자들과 관련 있는 것이 된다.

 

이 경우 ‘예수를 위하여'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위해서’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 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죽음에 넘겨진다는 것이 한결같이 우리 앞에 죽음을 두고 있는 것과,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실제로 사망의 그늘이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뜻하고 있으므로 나는 이 귀절을 모든 신자들과 각자의 방법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로마서 8장 36절에서 바울 자신도 시편 44편 22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 ‘예수를 위해서'라는 표현은 ‘이 조건이 모든 그의 지체들에게 부과되어 있기 때문에'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내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으로 번역 한 것을 에라스무스는 '맡아 있는 우리’로 번역하지만 내 번역의 의미가 더 낫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가 산 자라기보다는 죽어 있는 자와 같다는 것이 바울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12.  그런 즉 사망은……" ; 이것이 냉소적으로 이야기 되는 것은 바울이 끝없는 고생으로 분투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고린도인들이 즐겁고 자유롭게 살며 편하게 지낸다는 것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서로 각각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부당한 일이었을 것이요, 고린도인들은 어리석게도 아무런 십자가 없이 기독교를 자신들에게 편리하게·이용하거나, 그리스도의 종들을 그들이 너무 까다롭지 않다해서 무시하려 한 데 대해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망이 모든 역경 또는 고통으로 가득 찬 생활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귀절에 나오는 생명 역시 번영되고 유쾌한 상태를 뜻한다. 이것온 ‘삶이란 그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 살기 위한 것이다’라는 속담에서 나오는 말 그대로이다.

 

"13. 기록한 바." ;  내가 앞에서 언급한 잘못된 해석을 가져오게 한 것이 바로 다윗의 이 귀절에 대한 인용이다. 그러나 이 인용은 신앙의 통일성보다는 신앙의 고백과 곧 앞에 나오는 것보다는 뒤에 따르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복 된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감히 말하고 전파 하노라. 이것은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이다’라는 내용이 된다.  이것은 시편 116편 10절(駐2)의 인용으로서, 거기서 다윗은 자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극심하게 고통을 받아 거의 쓰러질 정도로 상하게 됐지만 재빨리 자신의 신앙을 되찾고 시험을 이겼다는 점을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하는 식으로 자신의 시편을 시작한 것은 믿음이 고백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도 자신을 격려하는 가운데 시편 기자를 본 받고 있으며, 고린도인들에게 똑같이 따를 것을 권면하고 있다. 벌계이트는 미래 시제가 아니라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문제 시 되지 않는다. 그가 뜻하는 것은 신자들이란 자신이 마음 속으로 믿는 것을 고백함에 있어서 담대하고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니고데모의 잘못된 추종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자신들 속에 감추어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생에 걸쳐서 전지한 고백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얼마나 신앙을 비뚤어지게 만들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우리에게 갈은 믿음의 영이 있으니)~~~~~" ;·여기서 그는 앞에서 그가 비꼬듯이 말한 내용을 시정하고 있다. 그가 고린도인들을 자신과 전혀 다른 것으로 묘사한 까닭은 그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아무런 십자가의 위협이 없이 유쾌한 복음을 바라고 그들의 처지가 영광스럽지 못하다 해서 경멸하는 가운데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동일한 복된 상태에 대한 소망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더 고된 대우를 받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아껴주시고 더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있지만, 우리 사이의 이런 차이점 때문에 우리 모두가 마침내 동일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또한 동일한 기업을 받기 마련이다’라는 말이다.

 

혹 자는 여기서 사도가 구약시대에 살았던 거룩한 조상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들이 우리들과 동일한 신앙을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사실임에는 틀림없지만 현재의 주제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나 다른 조상들이 아니라 잘못된 야심 때문에 자신들을 그와 구별하고 있는 고린도인들과 자신이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현재 상태가 제 아무리 형편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언젠가 동일한 영광의 똑같은 몫을 차지하계 될 것은 우리가 한 신앙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문맥울 세밀히 검토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올바른 해석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 다. 환유법에 따라서 그가 믿음을 믿음의 마음(spirit)으로 부르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  이제' 그는,장차 복 된 상태 뿐 아니라 고린도인들이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던-바로 그  고통에 있어서 까지  그들과 자신이 동일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고통을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 또한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상호 간에 누리는 은밀한 교제(communi9n), 특별히 그들 사이에 있어야 마땅한 상호 밀접한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이 권면은 특별히 고린도인들에게 유익한 것이 없으며, 그들에게 크나 큰 위로를 안겨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들은 온유하게 대하시고 더 큰 힘을 부여 받은 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공통된 유익을 위해서 고통을 받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바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으므로 최소한 그들의 기도와 한 마음(sympijthy)으로 그를 뒷받침해야 옳다는 점을 여기서 권고 받고 있다. 

 

"은혜가……더하여 넘쳐서……" ;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지체들간에 이러한 연합과 동료의식을 권면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는 열매를 가져온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혼한 일이지만, 그는 '은혜'라는 단어를 써서 환유법적으로 그가 앞에서 언급한 구출의 축복, 곧 그가 비록 거꾸러뜨림온 당했어도 망하지 않았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십하지 않았다는 접,  사실 온갖 종류의 고통에서도 지속적으로 구출을 받았 다는 점율 표현하고 있다. 곧 이 은혜가 증대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국한되어 혼자만 그것을 증긴 것이 아니라 고린도인들에게 확대되어 그들에게 큰 혜택을 끼쳤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사가 이렇게 증대될 경우 주신 분(Giver)에게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뜻에서 그는 우리들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감사를 돌리지 않을 경우, 우리의 경솔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축복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접을 지적해 주고 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 그는 자신의 사건에 있어서 승리한 것으로 가정하고서 전보다 더 자신있게 나오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낙심하거나 십자가의 무게로 인해 지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십자가가 나를 아주 복 되게 해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본을 통해서 고린도인들이 어느 때이든 동일한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용기를 가질 것을 격려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비뚤어진 야심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서 떨어져 있을수록 그를 높이 평가하는 죄악스러운 오만을 제지하고 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 주석가들 가운데는 어리석게도 '겉사람'을 ‘옛사람’과 혼동하지만, 우리가 로마서 6장 6절과 관련해서 설명한 대로 ‘옛사람’이라는 표현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크리소스톰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겉사람’을 신체와만 관련시키는데, 이것 역시 잘못임은 사도가 현세의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을 여기에 포함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삶, 곧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겉 사람이란 우리의 지상적인  삶의 지속으로서 원기와 건강, 부, 명예, 우정, 그리고 다른 좋은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우리의 현세의 생명을 지탱하는 데 팔요한 이러한 것들이 부족되거나 없어질 경우 우리의 겉사람은 그만큼 폐하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소원대로 되어 갈 경우,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기 마련이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관심을 파먹는 이러한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제거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보다 나온 생활을 설계하도록 부르신다.

 

속사람이 새로와지도록 함에 있어서 우리의 현세의 생활이 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최소한 신자들의 경우, 지상적인 생활이 기울어질수록 그만큼 더 천상적인 생활이 발전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소한 신자들의 경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 악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겉 사람이 폐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보충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이 썩음이 그들의 중생의 시작이요, 중생의 원인이 된다. 그가 이것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줄 곧 활동하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생활을 생각하도록 고무하시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우리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박는 가운데, 겉사람이 폐하면서 줄곧 우리가 전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 우리의 육신은 우리에게 무슨 보상이 제시되든 그것이 파멸되는 것으로부터 움츠러들기 마련이요, 우리는 하늘의 축복에 대한 소망보다는 우리의 현재 느낌으로 더 영향을 받기 마련이므로, 바울은 경건한 자들의 역경과 비극이란 영원한 영광의 무한한 축복과 비교할 경우 조금도 아니, 전혀 비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해 주고 있다. 그는 앞에서 겉사람이 썩어가는 것으로 슬퍼하지 말 것은 거기서부터 내적인 사람의 갱신이 비롯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썩어짐은 눈에 보이는 것이요, 갱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들을 이 현세의 삶의 육신적인 영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뜻에서 바울은 현재의 여러가지 비극을 장래의 축복과 비교하고 있다. 이 비교만으로도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인내와 온건을 채우며, 그들이 무거운 십자가의 짐 때문에 쓰러지는 것을 저지하기에 충분하다.

 

인내가 우리에게 있어서 그처럼 어려운 문제인 것은 오직 우리가 고통에 대한 짤막한 체험으로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우리의 생각을 위로 들어 올리지 않기 때문이나 바울은 이 고통을 우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복된 상태와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고통의 압력으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과거에는 무거운 것으로 보이던 것이 가볍게 되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보이던 것이 짤막하고 순간적인 것으로 되고 만다. 바울의 이 말씀에는 어느 정도 모호한 점이 있다. 벌게이트와 에라스무스는 "지극히 크고"(more and more exceedingly)라는 표현에 대해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늘 영광의 위대성을 묘사하고 극찬하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이 표현이 ‘이룬다'(worketh)는 동사와 함께 쓰여지는 것으로 본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지만, 내 자신의 해석도 동일하게 적합하므로 이 문제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바이다.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바울의 의미는 고통에 일괄적으로 이런 효과가 따른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사람들을 내리 누르는 온갖 종류의 악이 그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그들을 더 파멸시키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는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여기서 이야기가 된 내용은 오직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곧·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복된 부활의 준비 단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하시는 특별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절을 잘못 인용하면서 고통이 우리의 구원의 원인이라는 점을 입증하려 하고 있지만, 혼히 그렇듯이 ‘원인'을 ‘수단’의 의미로 보지 않는 한, 이것은 빈약한 이론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수많은 환 난을 거친 다음에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우리가 순간적으로 받는 가벼운 고통이 우리 속에서 영원한 무게를 지니는 영광을 이룬다는 것으로, 그 까닭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십자가를 견뎌냄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정해져 있으며 (predestined), 이런 방식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값없고 은혜로운 입양에 의해서만 그들의 것이 되는 하늘의 기업을 누릴 준비를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황주의자들은 하 늘나라를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 되며 공로가 되는 행위를 많이 꾸며내 고 있다. 간략하계 다시 반복한다면 우리는 고통이 우리가 하늘나라에 이르 는 수단이라는 접은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입양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오는 기업을 우리의 고통을 동해서 당연히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한다. 교황주의자들을 아무 생각없이 조그만 말 한 마디라도 잡고 늘어지며, 더구나 하늘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획득해 놓은 기업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상이라는 바벨탑을 지으려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더 상세한 해답은 나의 〈기독교 강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을 쉽게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인 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나라의 영원성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 주위만 바라본다면 일초가 긴 시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마음을 들어 하늘을 향할 때 천년이라도 한 순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사도의 말에는 또한 우리가 현재의 일만 바라 볼 경우 우리가 속게되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일시적이요, 따라서 장차 생명에 대한 확신이 아니고는 아무데도 안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니"라는 표현 역시 주목할 팔요가 있다. 신앙의 눈은 인간이 타고난 모든 의식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기 마련이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둘을 보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