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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후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1. 성경 (고후 3:12 ~ 18)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2)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3)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4)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5)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6)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7)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의를 한 단계 더 이끌어가면서 우리가 이미 고찰한 율법의 성격이나그것의 지속적인 특성에 대해서만 아니라 그것의 폐에 대해서까지 다루고 있다. 이것 역시 그 성격에 속했던 것은 그것이 수건으로 씌워져 있어서 눈에 그처럼 선명하지 않았으며, 그것의 광채는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8장 15절의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서부터 노예살이의 영을 받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율법의 외형적이요, 부수적인 폐(abuse)를 두고 언급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유대인들이 보여준 완고한 그리스도의 배척은 선민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던 약한 양심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눈먼 상태가 처음부터 모세의 얼굴에 수건이 가려지기 전에는 그것의 보는 것을 거절한 거기에서 이미 예시되어 오고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어려움을 제거하고 있다

 

그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 율법의 영광에 대한 한 상징이었다는 점을 이미, 보여주었듯이, 여기서 이 수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눈 먼 상태가 되는 한 상징이었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모세가 율법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를 바라보지 않으려 함으로써, 유대인들은 자신에게 거기에 수건이 씌워지기 전에는 울법을 바라볼 눈이 없었다는 점을 증거 했다.  그는 이 수건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벗겨진다는 점을 덧붙이면서 그리스도에게 마음(mind)을 돌리는 사람들에게만 전정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가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긋고 있는 제일가는 구별은 율법의 광채가 인간을 일깨우기보다는 그들의 눈을 부시게 하지만,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얼굴이 뚜렷하계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그는 복음의 위엄이 무시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온유하며, 숨겨진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접근될 수 있다는 점을들어서 공공연하게 기뻐하고 있다. '팔레-시안; 말 의 담대함, 솔칙함' 이라는 단어는 복음의 모든 사역자의 특성이어야 하는 위대한 정신이나 그라스도에 대한 공개적이고 뚜렷한 제시를 뜻한다. 후자로 번역하는것이 더 적절한 것은 그가 이 '팔레-시안'을 율법의 모호성과 대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13.  우리는 모세가······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 바울은 모세의 의도에 대해서 관십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자신의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고, 그들 모두가 그것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그의 의도가 있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모호하게 감싸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모호했던 것은 백성들이 눈이 멀었기 때문이요, 모세가 자기 청중들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 하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주께서 그의 얼굴과 그를 보는 자들의 눈 사이에 수건을 쓰도록 명령하셨을 때 그는 순종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때 그 어느 것도 모세에게 불리하지 않았던 것은 자기에게 부과된 기능이 요구하는 이상을 하는 것은 그의 임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흐리멍덩함, 또는 약하고 흐린 시력은 볼신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다. 사실 율법이 여러가지 비유로 포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계속해서 젖먹이들에게까지 지혜를 전달해 주단기 마련이다.

 

"14~15절.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눈이 멀어서)" ; 그가 모든 비난을 그들에게 지우는 것은 율법의 가르침으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한 것이 바로 그들의 눈먼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 수건이 오늘 날까지 지속과는 것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 눈먼 상태가 단 한 시간만 지속된 것이 아나라 장차 백성들의 상태가 어떠하겠는가를 예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모세가 율법을 줄 때 얼굴을 가린 수건은 그 백성의 장차의 계속적인 우둔함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되는 오늘날도 그들은  그것을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무슨 신기한 일차럼 이상히 여길 팔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오래 전에 수건의 모형을 통해서 이것이 이렇게 될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셨다는 이야기이다.  율법에 어떤 비난도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다시 그들의 마음이 수건으로 덮여 있다는 점을 반복하고 있 다.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 그는 왜 그들이 빛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처 럼 오랫동안 눈먼 상태에 머물러 있었는가 하는 점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율법 그자체는 빛으로 가득 차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만 우리는 그것의 명료성을 이해하게 된다. 유대안들은 할수  있는 한 그리스도에게서 자신들의 눈길을 돌렸으며, 그 결과 그들이 테양을 보기 싫어 하는데 아무것도 보지 뭇한는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선민들의 눈먼 상태, 특별히 그것의 장기간에 걸친 지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을 너무 믿는 가운데 교만한 마음으로 우쭐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점을 그가 로마서 11장 20절에서도 다루는 사항이다. 이 눈먼 상태의 원인을 생각하고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욕으로부터 멀리해야 마땅하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심각하게 처벌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율법이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아무런 빛이 없다는 점을 배위야겠다 .

 

"16. 그러나 언제든자 주께로 들아가면…… " ; 이 귀절은 라틴 및 헬라 저자들이 그것이 이스라엘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잘못 해석되어 오고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모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미 모세의 글이 읽혀질 때 유대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인 것으로 지적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그가 주께로 돌아서는 순간 그 수건이 벗겨질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모세, 곧 율법과 관련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유대인들이 그것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배제할 때 그것은 다른 방향으로 제쳐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울법을 읽으면서 그둘이 곁 길로 방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 그 자체도 그것의 목적 (adsuum fuem)인 그리스도와 관련되 기 전에는 그들에게 곡해되고、심연과 같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한다면 하니나님의 진리가 그들에게 뚜렷하게 드러날 것 이지만, 그들이 그리스도 없이 지내려 하는 한 그들은 혹암 중에 방황할 것이요, 율법의 참된 의미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 전체 성경에도 적용되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와 관련 되는 것으로 보지 않을 경우 그자체의 목적과 핵심이 비뚤어지고 곡해되기 때문이다.

 

"17. 주는 영이시니 " ; , 이 귀절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처럼 찰못 해석되어 오고 있으며, 그것이 요한복음 4장  24절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는 말씀과 동등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이 발언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아무 관련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직분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될 뿐이다.  그것은 율법의 교의가 문자적이요, 죽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사망의 원인이 된다는  귀절과 관련된다. 이제 그가 그리스도를 율법의 영으로 부르는 것은 율법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불어 넣어질 겅우에만 살아나게 되고 생명을 주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신체에 영혼이 들어가면 이해와 지각이 있는 산 사람이 되며 모든 생활에 적합하게 되지만, 신체에서 영혼을 제거할 경우 남는 것은 아무 지각없는 쓸모없는 시체 뿐이다.

 

이 귀절이 특벌한 관심을 요하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율법이 ‘영혼을 소생케 하며'  '눈을 뜨게하며''  '젖먹이에게 지혜를 전하는' 것으로 말하는 다윗의 칭송을(시 19 : 8) 바울의 좀 모순적인 듯한 발언, 곧 율법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고후3 : 7)이라는 내용에 조화시키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 문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생기를 받을 경우 다윗이 말하는 내용을 참으로 거기에 적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제거 될 경우 그것은 철두 철미하게 바울이 묘사하는 그대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생명이시다.

 

"주의 영이 계산곳에는……" ;  이재 그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에 생명을 주시는가, 곧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는 점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영'온 앞 귀절과 다른 의미로 사용 되고 있다. 거기서는 그것이 영혼을 뜻했으며 비유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 되었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손수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을 뜻한다. 영혼(soul)이 인간의 모든 생생한 기능의 원천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율법에 생명을 주시고 자신이 생명의 원천이심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말하자면 모든 인간들의 우주적인 영혼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혜와 관련되는 말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의 생명을 주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에 그가 바로 그 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는 또한 "자유함이 있느니라"라는 말로써 우리가 여기서 받는 혜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자유'라는 말을 나는 죄와 육신의 노예살이로부터의 자유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입양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거로 부터 받는 신뢰로도 이해한다. 이것은 로마서 8장 15절의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위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는 말씀과 일치된다. 그 귀절에서 바울은 노예살이와 두려움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의 반대는자유와 신뢰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단에서 우리가 본래는 죄의 노예지만 중생의 은혜를 통해서 자유롭게 된 다는 점을 추론하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라도 무방하다.

 

곧 율법의 문자 밖에 없는 곳에는 죄의 지배가 있을 뿐이지만, 여기서 자유라는 단어를 더 넓은 의미로 보고 싶다. 물론 성령의 은혜를 특별히 사역자들에제만 국한시킴으로써 이 발언이 본장의 시작과 일치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른 영적 은사와 재량권(liberty)이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보다 더 사역자들에게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각자의 은사의 척도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첫째 해석이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성령의 효력에 대해서 지적 하는 점을 간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효력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함을 받은 우리 모두가 체험을 받아  구원받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나는 어떻게 에라스무스가 이것을 사역자들에게만 적용시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분명히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물론 '카토프트라 제스다이' 라는 헬라어 동사가 어떤 때는 거기에 들여다 보도록 거울을 제시 한다는 뜻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그렇게 제시된 거울로 본다는 뜻도 있으므로 애매하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벌게이트는 둘째 의미가 여기에 더 적합한 것으로 지적하며, 나 역시 그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번역을 따르고 있다. 이것이 그가 앞서 말한 내용에 대한 적합한 결론인데, 복움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계시를 받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4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계시의 위력과 그 안에서 우리가 날마다 보는 전전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거울의 비유를 여기서 사용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수건을 쓰지 않은 그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접할 때 아무런 모호성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과, 둘째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므로 그것이 쓸모없고 무이한 생각이 아니라는 점과, 세째로 이 두가지 일 중에 그 어느 것이든 당장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의 형상을 닮아 감에 있어서 증대한다는 점을 지적하려 는 뜻에서이다. 이것이 "영광으로 영광에"의 의미이다.

 

그는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다시 한 번 더 복음의 모든 능력은 그것이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게 되는 데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복음의 의도는 죄로 인하여 없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데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이 우리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비치계 하시므로 이 회복은 정전적이요, 우리의 일생에 걸쳐서 지속된다는점을 주목하도록 하자.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일어난다. 바울은 우리들이 수건을 쓰지 않은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첫째 서신(고전 13 : 12) 에서는 우리가 오직 거울을 통해서 보듯 희미하계 하나님을 아는 것 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언뜻 보기에는 여기에 모순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만 사실온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리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나타나실 때에 볼 영광스러운 장관에 비해 희미하고 볼품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하고 우리의 역량이 미치는 범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허용하신다. 따 라서 사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완성을 볼 진전에 대해서 언급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