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 6:1~7)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1)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2)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3)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4)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5)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6)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절" ; 누가는 여기서 집사제도의 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째는 시기에 관해서요, 둘째는 그 의도에 관해서요, 또 끝으로는 사용된 의식에 관해서이다· 그렇지만 그는그것이 제자들 가운데서 발생한 불평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채댁한 구제책이었다고 말한다. 속담에 “나쁜 풍습은 좋은· 법을 생겨나게 한다”는 말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직무가 교회에서 매우 필요하고 훌륭한 것이었으므로 어찌하여 사도들이 처음부터 자기들 자신의 책임으로 집사를 임명할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지금 그들이 마치 압력을 받아서 그. 제도를 받아들였는데 왜 성령께서는 그런 방향을 따라 그.들에게 권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일이 생겨난 것은· 그 때가 좋았으며 그리고 또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의 표본으로 더욱 유리하다. 만일에 사도들이 어떠한 팔요가 그것을 요구 하지도 않았는데 집사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면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을 그들이 알았을 것이요, 그들 자신은 따분한 수고를 피해 보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졌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제공해 주는 일에 그처럼 관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사가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들의 경험 울 통하여 확신을 얻게 된 것온 신도들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자기들 자신의 찰못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집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즉 우선 교회라는 것이 조금도 수정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한꺼번에 형성될 수 는 없는 것이다. 또 그러한 거대한 모습의 조직이 아무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을만큼 하루 아침에 완전하게 만들어지도록 마무리지어질 수도 없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부패하지도 않고 소용 가치가 적어 지지도 않게 될 만큼 그처럼 신성하고 찬양받을 만한 하나님의 기관이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세상에는 어떤 악이 선한 것들과 결코 섞여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잘 배열되어 있는 것은 결코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 (in genii) 의 부패는 그것의 원인인 것이다. 누가가 이미 위에서 설명한 그 제도는, 모든 사람들의 재물이 하나님께 성별되어 바쳐져서 일반에게 분배되었을 때, 또 사도들은 이를테면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의 집사가 되어 구호활동을 담당하였을 때, 그것은 거룩한 제도였음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 제도를 혼란케 하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 내가 지적한 바 있는 인간의 타락이 나타났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행복을 이용물로 삼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사단의 계략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그 효능이 순수하고 완전하계 남아 있지 않게하는 것을 자기의 과업으로 삼고 있으며 거기에다 불순물을 섞어서 불편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것을 경시하게 하고 다음에는 싫증나게 하며 마침내는 아주 없애버리는 것이다. 사도들이 실상 자기들의 시범으로 인하여 그러한 종류의 사단의 술책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불평을 마땅치 않게 여겨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로 알고 있었던 봉사활동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결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런 불평을 없이할 구제방법음 생각해 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그대로 존속시킨 것이다. 이것이 전정 일을 수행하는 바른 길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날마다 어떠한 거침돌을 일으키든 간에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다른 면으로 유익울 주는 제도를 사단이 쫓아내지 못하도록 크게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증대시키고 또 할 수 있는 대로 사방에서 그의 백성들을 많이 더해 주시는 일 이상으로 바람직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의 타락은 모든 것을 모든 점에서 성꽁시키는 일을 방해한다. 그것은 교회의 증대에서 많은 골치아픈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위선자들이 그 군중 속에 몰래 기어 들어온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악함이 교회의 양 무리에 감염되어 그 일부를 타락시키기까지는 그들의 사악이 즉시 발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뻔뻔스럽고 방종한 악한 자들이 거짓 회개를 핑계 삼아 교회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다른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의견의 일치를 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습관이 다른 것처럼 그들의 의견들도 다양하였다. 그래서 동일한 하나의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맘에 들게 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물의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하여 교회를 대신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선택하기를 원하계 하였으며 그 무리들을 멸시하고 미워하기까지 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중대시키려는 생각이 언제나 우리 가슴 속에 밀착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우리가 전도하는 일에 고난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전체 교회 기구와의 통합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 그런 사실들처럽 그렇게 크계 문제시되어야 할 일도 없고 혐오하여야 할 것도 없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원망한대" ; 종족이나 나라의 상위에서 불화의 계기를 찾게 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써 완전하게 중생되지 못했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갈 3 : 28), 따라서 이 적대 의식은 육체적인 또는 세상적인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런 종류의 일이 불시에 우리에게도 생겨나지 않도록 머욱 조심하여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들은 불평으로써 자기들의 분노를 표시하였기 때문에 또 하나의 잘못을 저지른 것이나 더구나 그 불평이 정당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가 헬라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에게 배려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투덜거렸다고 말했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도해 준 것이 아니요,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유대인 과부 쪽을 더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우선시킨 것인데 그것을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과부들이 이방인으로 멸시를 받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있음직 해 보인다. 또 그 ‘주제' (ministerium) 라는 맡° 능동태 혹은 수동태의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교회의 시초에 과부들이 집사로 선택되었던 일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헬라인들이 그들의 과부들에게 충분한 보조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하였다 는 것이 나 자신의 의견이다. 그래서 ‘주제’는 그둘의 관습을 따라 행해진 일상적인 배급(配給)을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2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 사도들이 더 이상 성내지 않았다 는 것은 아량과 침착성의 표시이다. 그들이 재빨리 악의 순(荀)을 자르고 그것을 치료하는 방안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아니한 것은 신중함과 거룩한 관심의 증표이다. 왜냐하면 모든 불화와 대립이 일단 강하게 뭉쳐지면 그것은 고치기 힘든 상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질서와 사리분별로 다스려졌다는 사실과 그래서 권위가 사도믈의 수중에 쥐어쳐 있었으면서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였다는 사실이 이 모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또한 ‘제자’라는 말이 '믿는 사람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유의하여야 할 일이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며"(사 54 : 13, 요6 :45) 라고 한 이사야의 말, 그리고 또한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렘31 : 34) 고 한 예레미야의 말이 그들의 경우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마땅치 아니하니" ; 헬라어로 "우크 아레스톤" 이다. 이 말은 다른 것들보다 가장 우수하다는 뜻으로 쓰기도 하고 또는 더 좋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때로는 확정된 것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나는 차라리 사도들이 판결 한 것을 단순히 발표한다기 보다는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러한 행정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제까지 그일을 운영해 온 그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확실히 경험은 지혜의 아버지라는 말이 옳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 일이 자기들에게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에 의하여 발견한 다음에 그 임무가 면제되도록 교회에 요청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잘못이 있었다면 사도들에게 보다는 차라리 필요때문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을 내서 그침을 낚아챈 것이 아니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무시당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과중하게 그 짐을 질 것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다는 일이 마땅치 않다고 말 할 때에 그것은 자기들이 두가지 짐을 모두 동시에 감당할 수가 없어서 불 가불 어느 한 쪽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만일 당신이 우리가 복음의 선교를 즐거움으로 봉사하계 하려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우리에게서 면제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두가지 일의 과로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의견온 시기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런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찌기 구제의 임무를 결머지고 있었지만 가르치는 직책을 포기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이렇계 대답한다. 즉 그 행정관리 (行政管理)가 서로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르치는 일을 충분히 전념할 수 없을 정도로 휘말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르치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계 하는 다른 일을 거절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들이 가난한 일들에 대한 관심을 전적으로 단념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일에 저들의 주의력을 돌릴 수 있도록 일의 경감을 추구한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말씀울 전하는 임무라는 것이 그 사람을 전적으로 점유하고 그에게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강요하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그 일이 적절하게 고려되었다면 교회에서의 여러가지 일 처리 (ratio) 는 매우 다르게 할당되었을 것이었다. 집사직을 구실로 해서 교황의 감독들은 굉장한 부를 탐했다. 동시에 그들온 한 사람이 열의 머리를 가졌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여러가지 직업에 자신들이 종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가 그 깊은 구링덩이에 빠지지 않고는 존속할 수가 없다고 할 만큼 사악해졌으며 또 그 이상 더 부인 (否認)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자기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저들은 ‘봉사하는 식탁'에 관여하지 않도록 좋은` 배려를 했으며 그리고 자기들 자신의 식탁 (delicias) 의 쾌락은 이를 단념하도록 강요된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식탁을 염려하는 자는 남의 식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보아 넘기면서 우리는 이 귀절을 우리 자신의 이익에 적용시켜 보자. 가난한 이들을 둘본다는 사실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복음의 선교를 우선적인 것으로 여겼올 때에 우리는 거기서 그 일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종이 없다 는 것을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그 두 직무를 동일하게 해 낼 수가 없다고 말할 때에 어쨌든 그 어려움이 지적된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보다 확실히 어느 점으로나 우수하지 못하다. 따라서 누구든지 가르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전적으로 그 직무에 최선율 다하도록 자신율 적응시켜야 한다. "스파르타식을 충분히 이용하라,,는 격언이 있듯이.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나태에 빠지기보다 더 용이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육체는 그럴싸한 구실을 풍성하게 공급해 준다. 따라서 딴 일에 스스로 관여한 사람들은은 자기들이 해야 할 적절한 일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즉각척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직자들에게 이 귀절을 자주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격려를 받도록 하여야 한다. 죽 거기서 사도들은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단념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하나님을 섭긴다는 면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면서도 그것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 밖의 세간의 직업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직무야말로 무슨 구실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리는 집사들이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 이제 우리는 집사들이 세워진 그 목적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명칭 자체는 분명히 일반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세워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사실에서 집사들에게 성찬용 접시나 잔을 다루는 일을 유일한 의무로 맡겨주는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얼마나 무성의하게 하나님과 인간을 업신여기고 있는 일인가가 분명해진다. 확실히 그들은 사도들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일치점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긴 논의가 불필요하다. 그러나 만일 독자들이 이 일에 대해서 좀더 알기를 원한다면 나의 저서 〈기 독교강요〉 8 장에서 자유롭게 탐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본 귀절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선 그들을 선택하는 일이 교회에게 허용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에 어떤 한 개인이 자기의 권한으로 교직자들을 임명하게 하였다면 그것은 하나의 전제적인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방법은 교회의 어떤 공직을 맡게 되는 자들을 위해서는 일반의 투표에 위하여 선택되는 일이다. 한편 사도들은 어떤 사람이 선택되어야 하는 것을 내세웠다. 즉 성실하고 지혜와 그 밖의 성령의 은사로 갖추어진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제와 무질서한 방종 사이의 중간 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백성들의 동의와 찬성에 의하지 않고는 실상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목사들은 일반 신도들이 지나친 과열상태로 달려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사람들의 충동을 마치 말 굴레 씌우듯이 자기들의 권위로서 억제하도록 규정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다음의 사실을 유의할만 하다. 즉 신자들에게는 원칙이 지워졌논데 그둘은 누구든지 적당한 사람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전혀 우연한 방식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집을 관리하게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적지않은 손해를 끼쳐드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대의 용의주도함이 채용되어야 하며 그래서 양심적인 자신감이 없이는 아무도 교회에서의 신성한 기능을 맡도록 선택되지 않아야 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그때의 필요에 적당한 수 였다. 그래서 거기 무슨 신비한 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누가가 말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라는 말을 나는 다음과 갈이 해석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공급받는 일만이 아니요, 또한 확실히 지혜를 구비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는 그 칙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상습적으로 얻어 먹으려는 생각만을 가전 자들의 협잡과 사기행위, 또는 극도로 빈궁에 젖어 있는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까지를 빨아내는 자들을 경계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할 계제가 아닌데도 끊임없이 험담을 조작해내는 자들의 중상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직책이란 매우 힘든 일일 뿐 아니라 또한 당치 않은 불평도 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 다시 그들은 그러지 않고서는 여러 다른 일들이 자기들의 일평생 건부를 분주하게 만들어 줄만큼 과중하계 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한 때 예배에도 (in sacris) 사용된 바 있었던 옛말 ‘이것을 하라’는 격언이 이 문제에 잘 해당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프로스카르데레-사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는데 그 말의 의미는 이를데떤 무슨 일에 애착을 두어서 바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온 자기들이 날마다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해도 자기들의 의무롤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또 하나의 노력, 다른 또 하나의 열심, 다른 또 하나의 부지런함이 모두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설교하는 일에 스스로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자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기도를 첨가한다. 그것은 자기들만이 기도해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 아니요(기도는 모든 신도들의 일반적인 공통된 업무이기 때문에), 다론 이들과 비교해서 그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기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실상 거기에는 교회의 일반적인 번영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분명하게 그 임무가 부과되어 있는 목사들이 그 일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전력하여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리하여 모세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하기를 권장하였으면서도 더욱 자기 자신은 기수와 같이 그 길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바울이 그처럼 자주 자기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유없는 일이 아니다 . 결국 우리는 다음의 사 실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즉 하늘로부터 성장시키는 일이 없이는 우리가 밭갈고 씨 뿌리고 물 주고 하는 수고가 다 헛 된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고전 3 : 7).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아니하고 열매 없이 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 온혜를 간구하지 않는다면 선교하는 일에 분 발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말씀을 중거하는 교직자들에게 있어서 열심히 기도하도록 권장되고 있는 일온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밝혀진다.
"5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 누가는 마치 신앙 자체가 역시 성령의 은사가 아닌 것처럼 신앙을 성령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성령’’이라는 말로써 스데반이 받은 다른 은사들을 의미하고 있다. 이를테떤 열심이라든지, 신중성, 선행의 의지, 형제애, 근면, 선한 양심의 성실성 둥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는 특히 하나의 예를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데반이 특별히 신앙에 있어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른 덕행에 있어서도 특출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성령의 은해가 충만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온 그 와 견줄 수 없었던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에 누가는 그처럼 크계 다른 사람들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렇다· 그리고 고대의 저작자들은 모두가 다 일치하게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즉 이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인 니골라는 요한이 계시록 (2 : 15) 에서 그가 바로 여인들이 창녀가 되기를 원한 자이므로 창피하고 치욕적인 한 종파의 창시 로 지목한 그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교회의 교직자들을 선댁함에 있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말해 주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위선이 최대의 자기 방위를 위해 유의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속이는 것 이라면 무관심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에게야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동시에 만일 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만 당하는 사실이 생겨난다면 사도들까지도 그 악한 자들에게 속임 당한 일이 있다고 누가가 우리에게 이야기한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가 지나치게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 선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지도된것이 아니었음이 실지 결과가보여줄 때 그렇다면 권면은 무슨 필요며 기도는 무슨 소용인가? 라고 이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성령께서 여섯 사람을 선택하는 일에 그들의 판단을 지도하신 일은 큰 일이요, 성령이 교회로 하여금 일곱째를 선덱하는 과오를 범한 일이 어리석은 일이타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들과 우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겸비해지는 일이 옳다. 즉 한편 악한 자들과 불신앙의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일, 한편 그들의 사례로 인하여 경고를 받아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검토할 줄 알게 되는 일,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기만의 주머니를 없이 하는 일, 한편 우리가 렇게 좀더 분별하는 일에 조심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호하며 이를데떤 그 그러한 함으로써 부정하고 배신하는 자들이 우리를 포위하지 못하게 하는 일, 그러한 여러 면에서 겸비해질 필요가 있다. 니골라의 직무가 잠시동안은 유용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러한 존귀한 지위로부터 그처럼 떨어졌다면 그리고 우리 각자가 더 높이 치켜 울려지면 질수록 더욱 겸비와 두려움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도록 해야 한다.
"6.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 안수하는 일은 율법 아래서는 성직수임의 엄숙한 상징이었다. 이제 사도들이 집사들에게 안수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하나님께 바쳐졌다 (ofJerri) 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그러한 목적에서였다. 그렇지만 의식 그 자체는 무용한 것이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기도가 가해졌고 그로써 신도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교직자들을 하나님께 위임한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사도들에게 속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전부 자기들의 손을 집사들 위에 얹은 것이 아니고 사도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했을 때에 다론 사람들도 그들의 기도와 안수에 참여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의 일을 추측할 수 있다. 죽 안수하는 일온 사도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아 질서와 품위를 세우는 하나의 견실한 의식이다. 물론 그 자체 안에 무슨 효능이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요 그 힘과 효력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의식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이어야 한다.
"7절" ;. 누가는 다시 한번 교회의 확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교회의 계속적 인 발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더욱 더 설중(實證)되기 때문이다. 확 실히 교회의 급속한 확장, 마치 순식간에 세워진 것같은 일은 이미 하나닙 의 놀라우신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방해에도 붕 듈의 구하고 자신이 시작하신 그 성업을 추전시키시며 그러면서 이 세상이 믿는 이 수효를 감소시켜 그 전체의 그루터기까지 근절시키려고 그처럼 열십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그 수를증대시키셨다는 사실온한층 더 놀라운 일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라고 누가가 말한 것은 그 말씀이 훨 씬 멀리 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확대 가되는가 되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한편 새로운 제자들이 말씀에 복종하게 되어 중 하면 다른 한편 우리 각 사람이 말씀 안에서 진보를 이룬 방식이 다. 그런데 누가는 여 기서 전자와 같은 종류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다음 ‘제자의 수’를 언급함으로써 그 일을 설명하고 있 한시키고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신앙의 증진을 단일한 도시에 국 있다. 왜냐하면 다론 지방에도 역시 제자들이 흩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정한 조직체가 있었던 곳은 단지 예루살렘 뿐이었기 때문이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 …·적절하계 말해서 우리의 믿음은 복음의 가르 침에 복종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이 도에 (믿음에) 복종하니라”고 한 것은 누가가 이른 바 전유법 (轉兪法 ; metonymy) 을 사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 기서 질적인 그는 믿음’이타는 말을 하나님의 으로, 또는 그리스도교의 싣 적해서 신앙고백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하계 제사장을 . 리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대체로 적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런 이유 때문에 들 의 다만 몇 사람의 개종자, 아니 많은 무리 의 개종자가 생겨 다는 것은 모두가 욱 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이 다. 왜냐하면 멘 처음에 제사장들은 "당 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처주를 받은 자로다"(요 7 : 48, 49) 라고 비웃으며 말하여 그리스도 자신을 거스러 분노를 터뜨렸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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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행5:34) (1) | 2022.05.06 |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행5:21) (1) | 2022.05.04 |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행5:12) (1) | 2022.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