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행5:21)

1. 성경 (행 5:17~32)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17)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18)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19)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20)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21)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22)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23)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24)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25)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26)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27)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29)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0)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1)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 개역개정 사도행전 5:3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요약본)

누가는 이미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즉 교회에는 신도들의 수효가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 각종의 은사가 훌륭하게 갖추어졌다는 사실, 기적에도 탁월해졌다는 사실 등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거기에 모든 면으로 번창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즉 그러한 일들 때문에 악한 자들의 분노가 다시 불붙어서 그 잔인성은 전보다 더욱 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어떻게 그들을 구사하여 맹목적인 격노를 일으켰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분명한 능력이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그래서 그 들이 더욱 더 뻔뻔스러워지고 격렬하계 덤벼들어 마치 자기들이 하는자체를 뒤집어 엎을 듯이 날뛰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단한 무분별은 일종의 하나님의 두려운 형벌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을 드리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모두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도 역시 단지 자기들이 대항하여 밀어 붙이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계 되도록 현기증으로 휩쓸럴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영적 은혜로써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괴롭혀지는 일도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오늘의 상태가 그들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거할 만한 하나님의 은사를 자인하는 일은 악한 자들의 열광과 완강으로 인하여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17 그와 함께 있는 사람" ; 그는 대제사장과 더욱 가까이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 대제사장은 그둘의 충고를 따르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를테면 전체 성직자 계급 가운데서 그가 선발한 사람들이었다. 실상 재판의 목적 때문에서가 아니요 그 파당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열광 때문에 뽑힌 사람들이다. 왜냐하떤 당시에 그들은 자기들 자체 안에서 서로 지독한 원수들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당시에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사두게파 사람들이었다고 다시 반복해서 말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하나의 분파가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회의 전체 정치가 무서운 황폐로 인하여 일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한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회당으로부터 분리시키신 이후로 그 회당을 그처럼 극단적인 치욕 속에 잠겨져 있도록 분명히 허용하셨다. 그것은 복음을 업신여기고 또는 그처럼 쓰레기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 핑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더우기 또 장차 올 생명의 일은 조금도 염려 하지 아니 하는 그들 욕심장이 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탈취 한 그 지배권에 대한 노출된 야심과 거기 매달리려는 욕망 이외에 무었이 있을 것인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 나는 이 헬라어 ( 젤一루- ; 시 기 ―특히 그 말이 다론 방식으로 너무 혼하계 사용되기 때문에)를 ‘경쟁' (emulation) 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차라리 원어대로 두는 것을 좋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선자들이 자기네들의 미신을 방위하기 위하여 정신이 없고 가슴을 테운 그 괴악하고 폭력적인 세력에 대해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열심(C~AOU라는 말을 ‘열심'이타고 번 역할 수도 있음一역자 주)이라는 것이 이성과 신중성으로 조종되지 않을 때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으로써 지도를 받지 않게 될 때에 하나님 보시기에 무슨 가치가 있는것이며 무슨 칭찬을 받을만한 것인가가 분명해진다. 사람들이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신앙적이라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면서 무고한 사람의 피를 홀리려는 잔인한 정열을 가지고 악마적인 광포로 흥분하고 있는 자들을 우리가 오늘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말한 것같이, 많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무분별한 열심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유의하여야 한다. 다만 우리는 차라리 열렬하고 난폭한 공세로 이해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이 고의적으로 참된 신앙을 박해하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아무리 많이 자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신기한 일은 반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잘못된 종류의 열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거의 모든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역시 자기들의 배를 위한 열광자이떤서도 단순히 그 열심에 근거해서 (solo zeli momine)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전실하다고 허용하더라도 그 무분벌이 그들을 몰아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무엇이나 복수를 감행하도록 놓아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것처럼 여기는 그 불타는 잔인성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겸손한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에 받아들겨지지 않는 일이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구별하는 일이야말로 해야할 첫째의 일이다. 

 

"19 주의 사자가~~~~~" ; 주께서는 사도들이 적의 손아귀로부터 영원히 구원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감옥에서 데려 내오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얼마 후에 주는 그들이 다시 감옥으로 끌려 가는 것을 허용하셨고 또 채찍으로 맞게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적으로 인하여 주께서는 그들이 이 주의 복음에 대한 신앙을 수호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수중에 두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신 것이다. 한편으로는 교회가 그 사건을 봉하여 생기있는 용기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요, 또 한편으로는 악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핑계거리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주께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을 바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아야 하며 다만 우리들의 생명이 그의 손에 의하여 그럴 팔요가 있는데도 보호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의 목적을 위하여 주께서 천사를 사용하신 일에 관해서는 그의 관용적인 관례대로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여러 곳을 통하여 천사는 주의 은해를 우리에계 전달해 주는 자라는 것을 중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허한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 뿐이 아니요 또한 하늘의 영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유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유리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 우리의 안전을 돌보아 주도록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보통 언약이 아니다. 더구나 그 천사는 밤에 감옥 문을 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적이 행해전 뒤에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하시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불신자들이 그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0 가서 성전에 서서 ~~~~말하라" ; 그들을 석방시킨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불굴의 노력을 계 속하계 하려 함이요. 또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용감하계 그들의 적에게 도전하는 일을 계속하계 하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달려갈 길을 다가고 하나님의 손이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社6) 그들은 마침내 죽음으로 끌려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특정한 시기에 주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옥문을 여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임무를 자유롭게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 사실은 크게 유의할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박해로부터 모면하게 되면 자기들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의 의무를 지고 있지 않온 양, 그 후로는 자기들의 입을 다물고 마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도망 칠 길을 찾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유케 해 주시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시작한 진로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차라리 장래를 향하여 더욱 큰 열정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실상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이유를 들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위 험이 따르지 않고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단 한번의 모임 때문에 이렇게 잡혀서 갇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만일 우리가 고집스럽계 나오는 것을 안다면 이후에 적의 격노가 얼마나 더 크게 불타오를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을(롬 14 : 8)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위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의무를 관심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단순한 계명으로 만족하고 일의 결과를 그에게 맡기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용기를 약화시키는 많은 일들을 가끔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의 말씀을" ; 복음이 여기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생명 부여의 교리로 훌륭하게 설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 있으며"(롬 1.: 17) 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희생으로, 부활의 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양자로 하시는 보증으로, 그 복음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에거 분명히 이야기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영원한 구원의 사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복음 때문에 발생되는 모든 싸움에 더욱 더 대담하계 참여하계 된 것이다. 지시 형용사인 ‘이' 라는 글자가 모든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첨가되었다. 마치 천사가 자기의 손가락으로 그 생명을 지적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의 입에 또는 우리의 마음에 소유할 때에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고 분명히 멀리 가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과도 같다. 혹시 어떤 이들은 ‘이 말씀' 이라고 하는 대신에 환치법이 사용된 것처럼 ‘이 생명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가 있을지 모론다. 나는 그러한 견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가 내게는 더 좋게 보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시가 있으며 그 안에는 생명이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1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  이재 대제사장은 전체 회의를 소집한다. 그것은 만일에 그가 자기의 일파만의 명예에만 사로잡혀 다른 파롤 무시한다면 자기가 그러한 책임을 다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전체 의회를 소집하게 한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또는 정확하계 법의 형식을 유지하였다. 감독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장로들이 소집되었는데 그것은 의회의 결정과 권위에 의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회의에서 누가 온건한 결말을 희망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분명히 폭력이나 횡포로써 진리를 탄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대로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도들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사도들이 인간적인 어떤 기만행위로 감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적에 의해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들의 목적을 수행하려는 뜻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그들의 사악한 행동이나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만이 아니요, 역시 무서운 광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선자들은 아무리 공정한 것 같은 외관을 그럴싸하계 꾸밀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자기들 자신의 악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감옥 문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써 열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공연하계 하나님을 대항하여 날뛰기를 주저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들어 맞는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이 합법적인 교회 의회는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금언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다. 더구나 그들이 합법적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합법적으로 받아 들여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란 모든 외적인 형식이 완전하게 되어 있는 그러한 모든 의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누가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의회란 우리가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모인 그런 모임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제사장들이 제 아무리 부정수단에 의하여, 혹은 운동을 해서, 은밀히 직책 (honorem) 에 나아가서 다른 나쁜 계략이나 뇌물 수여 또는 피차의 살인행위 등 폭력수단에 의해서까지 자기들의 직권을 행사한다 해도, 그러면서도 제사장직의 직책 (dignitatem) 이란 그리스도께서 아직 나타나시기 전이기 때문에 여전히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장로들의 회의에 교회가 대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추구되지 않았으며 전체의·외양은 단순한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이 방패의 그늘 아래서 자기들의 추행을 온페하려고 시도한다 해도 헛 수고인 것이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면 교회의 지배권을 가진 자들이 회의를 소집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가 자신을 ‘빛의 천사, (고후11:14) 로 위장하는 것이 그의 전형적인 술책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의 칭호 밑에 악마가 바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숨을 곳을 그에게 제공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26 성전 맡은 자가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 우리가 앞서 성전 맡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말해왔다 (4 :1 에서).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성전 맡은 자를 자기들 마음에 드는 대로 임명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소속 된 지방의 총독이 결정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강제로 잡혀온 것이 아니고 연행되어 왔다고 그는 말한다. 즉 민중의 폭동이 발생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폭력으로 꿀어 온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도들의 행동의 분별력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즉 그돌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소란의 원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관속들이 꿀어가는 대로 자신들을 맡겨 두었다.  

 

"28절 " ; 대제사장은 사도들에게 두 가지의 죄를 씌웠다. 그것은 그들이 의 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관명 (官命)항거의 죄를 물온 것이다. 그의 선언의 둘째 부분에서 그는 그의 악의를 보여준다. 혹온 적어모 하나의 법정에서 그는 공적 사항을 다루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 의 개인적인 이에(利害)속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사도들이 그리 스도의 죽음의 오명 을 제 사장들과 율법 학자들에 게 전가하려고 하고 있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괴롭혀 주는 것온 사악한 살해의 복수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들의 가르침을 핑계삼아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을 보면 ::::z. 가 ::::z.처럼 염려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사도들을 폭동 교사죄 (敎陵 罪)로 비난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정당하계 사형을 받은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것으로 그는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고소의 주요점은 그들이 제사장들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그런데 전체의 명령을 일축하는 일은 얼마나 더 큰 죄일 것인가?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볼 때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자기의 걸머진 책임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기의 권력을 마치 그것이 모든 법의 구속을 받지 않은 권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폭군처럼 그 권력을 남용하였다. 오늘의 교황이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구속받지 않는 최고의 권력을 가로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명령이 우리로 인하여 거부당하는 것을 보자마자 우리를 종파분리자로 정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눅 10 : 16) 고 하는 말씀을 갖고 그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 러나 그가 만일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계 하려면 반 드지 그리 스도의 말씀을 가지 고 말해 야 하는 것 이 다 (ex Christi ore) . 이 제 그가 공개적으로 사단의 사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움도 없이 또는 허락도 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권위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제사장이 사용하는 말의 형식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제한없는 권력을 강탈해서 어떻게 영적 폭군이 되어 있는가를 증거 해 준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나 자유롭게 기탄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우리가••임금하였으되"라고 그는 말한다. 자기둘이 명하는 바는 무엇이나 이의 없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 아니라면 어디에 그러한 결정적인 단호함이 생겨났을 것인가?  

 

“29      “ ; 이것이 바로 변호의 요건이다. 즉 사람은 인간보다도 하나님편을 택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상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우리를 참 잘하도록 명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한다"는 말이 타당하다는 이 선언에 관해서는 4장 19절에서 내가 설명한 바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범위 안에서 인간에게 권력을· 주어 우리를 지배하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가 침해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뜻을 이행해야 한다. 권력의 행사가 정당할 때에는 하나님과 사람과를 비교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어느 성실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무엇을 명하거나 혹은 금하거나 한다면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한다고 반대하고 나서도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이 들려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에 어떤 행정장관이 충실하게 그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누가 그를 하나님과 대립시키려고 조작한다 해도 그 행정장관은 하나님과의 불일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반대의 결과가 될 것 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법이 행해질 것이다. 즈 O위해서 그의 대행인 교직자에게 기 라가 하나님을 순종하기 순종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나 주 인의 경우에서 생겨나는 일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통치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복종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 즉시로 그들은 불경하고 완강하게 하나님과 충돌하계 되는 것이므로 그들은 제 위치를 지켜서 하나님과 그의 권위가 최고의 자리에 있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직무의 모든 영향력은 사라져 버럴 것이다. 왜냐하틴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영예로운 관직을 그들에게 주시려고는 생각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버지되는 자가 자기의 신분으로 

그러나 통치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다면 그 즉시 로 그들은 불경 하고 완강하게 하나님 과 복종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한 로 그들은 제 위치를 지켜서 하나님과 그의 충돌하계 되는 것이므 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직무의 권위가 최고의 자리에 있게 하 왜냐하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영향력은 사라져 버럴 것이다. L간이 하나님 자신의 영 광을 영예로운 관직을 그들에게 주시려 흐리게 하기 위해서 고는 생각지 않으시기 만일 아버지되는 자가 자기의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의 영예를 하나님 신분으로 만족하지 0 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 해도 }니하고 아버지로서의 최 다른 것이 되 己수 없다· 만일에 어떤 왕이나 군주나 그는 여전히 인간이요 예와 권위를 약화시켜서 그것으로 자시 ° 행정장관이 하나님의 영 나의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0 \..:.늘 높이려고 한다 해도 그도 역시 하 대로 }니다. 똑같은 入적용되어야 한다. 성각이 역시 아무라도 자기° 목사들에게도 그 냐 직무의 님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 l.. 한계를 넘어서는 자는 하나 야 하는 것이다 亡것이기 때문에 · 그가 겉치레와 속임수를 쓰게 ,3;.l 그 직책에 해당한 칭호는 벗겨져 己것에 대비해서이다. 목사의 직책은 영예롭고 교회의 권위는 위대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조 `금이타도 감소시켜서는 안되며 그리스도의 지배를 손상하는 일이 되어서는 ’詩된다. 이 사실에서 우리논 쉽게 교황의 거만이 우스광스럽다는 것을 추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의 전체 주권을 자기 발 밀에 유란하고 있으며 또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이름 밑에 숨어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축인 예수 이 귀전에서 사도들은 교회의 수호자들로 자부하면서 최고의 영예를 원하고 있던 자둘이 분명히 하나님의 적이타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에게는 최소의 권위조차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저 사람들이 부끄러 운 일이타고 생각한 바로 그 일을 자발적으로 또는 자유롭게 찬양할 때에 하나의 확신의 증표인 어떤 장애를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치욕적인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인해서 그의 영광이 어 떤 모양으로든지 감소된 것 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 다음과 갈이 말해질 수 있는 사실이다. 즉 "실상 당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요, 그리고 당신들의 잔인성온 단순한, 혹은 평범한 죽임으로써 만족하지 못하여 그를· 나무에 달아 죽인 것이요, 그러나 죽음이 그의 능력을 소멸시킬 수가 없었 던 것이요, 또는 당신들이 그에게 가했던 불꽁정한 치욕도 그의 영예를 파 괴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견고하게 확실하계 촌속되 는 것 이 요"라고, 그러 므로 사도들은 제 사장들이 범 한 그들의 최 과, 그리고 그듄의 사악함을 인하여 그들을 체망할 때, 그들은 역시 그 범최의 칭본인돌이 마치 자기들이 승리나 얻은 것처럼 날뛰게 될 것에 대비하여, 그 리 스도에 게 가해 전 수치 스러 운 죽음의 방식 을 언급하면서 하나의 양보하는 방식으로 미리 처리하는 것이다.너희가 나무에 달아 축인 예수 이 귀전에서 사도들은 교회의 수호자들로 자부하면서 최고의 영예를 원하고 있던 자둘이 분명히 하나님의 적이타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에게는 최소의 권위조차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저 사람들이 부끄러 운 일이타고 생각한 바로 그 일을 자발적으로 또는 자유롭게 찬양할 때에 하나의 확신의 증표인 어떤 장애를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치욕적인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인해서 그의 영광이 어 떤 모양으로든지 감소된 것 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 다음과 갈이 말해질 수 있는 사실이다. 즉 "실상 당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요, 그리고 당신들의 잔인성온 단순한, 혹은 평범한 죽임으로써 만족하지 못하여 그를· 나무에 달아 죽인 것이요, 그러나 죽음이 그의 능력을 소멸시킬 수가 없었 던 것이요, 또는 당신들이 그에게 가했던 불꽁정한 치욕도 그의 영예를 파 괴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견고하게 확실하계 촌속되 는 것 이 요"라고, 그러 므로 사도들은 제 사장들이 범 한 그들의 최 과, 그리고 그듄의 사악함을 인하여 그들을 체망할 때, 그들은 역시 그 범최의 칭본인돌이 마치 자기들이 승리나 얻은 것처럼 날뛰게 될 것에 대비하여, 그 리 스도에 게 가해 전 수치 스러 운 죽음의 방식 을 언급하면서 하나의 양보하는 방식으로 미리 처리하는 것이다.
 
“30절.”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들은 자기들이 제사장들의 명한 일들에 중요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경솔하계 생각하고이를 폐기한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기들의 해명 (hypothesis)으로 나아간다(駐7). 왜 냐하면 내가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어떤 종류의 대립이 있윤 경우를 재 외하고는 하나님과 사람과를 비교할 만한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들은 하나님 을 두려 워 한으로써 제 사장들이 금지 하였 음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 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명령을 거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 첫째로 성경이 언제나그렇게 말하는 바와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용구는 성경의 곳곳에 보여진다. 죽 하나님께서 어떤 위대한 일을 이루시려고 하면서 그들 을 사용하려 고 결 심 하셨 던 예 언자들이 라든지 사사들이 라든지 혹은 그밖의 교직자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셨다는 그러한 논법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비범한 또는 훌륭한 일을 맡기시려는 사람들에게 독 별한 은사로써 무장시켜 주는 일이 없이는 제아무리 뛰어난 재질을 가전 자 라도 여전히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자기의 첫 설교에서 인용한(신 18 : 15, 행 3 : 22) 저 모세의 유 명한 말을 아마 그들도 역시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종 류의 종교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어떠한 새로운하나님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타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 조 상의 차나님 ' 을 그 창시 자로 (as the Author) 명 백 하게 내 세 운다. 왜 냐하면 자기들이 거짓된 비난을 받고 있음을 자기들도 잘 알고 있는 대로 자기들이 백성들을 율법과 신자들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책임 지우려 한다는 그 거짓된 비난을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화되 지 못한 사람들이 (proJani) 조상들이 어 떤 특정 한 방식 으로 가르쳐 준 하나의 주제를 계속 되풀이하고 그래서 자기들의 조상들의 습관이나 의식을 따르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 것처럼 사도듈은 자기들의 선조들에게서 받은 예배의식을 무엇이나 승인한 것온 아니다. 그러나 사도 들이 여기서 의미하는조상들이란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계약을 맺은사 람들, 옳고 순수한 가르침을 따른 사람들, 참된 신앙과 합께 구원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 이를데떤 자기들의 기원이 하늘 아버지께 있다고 밀고 또는 그 독생자를 봉해서 그들의 모든 자손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사람 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31절.”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여기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의 구 원을 위하여 주장하신 그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데면 그가 그의 백성들을 회개하계 하시고 죄의 용서를 통하여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는 것 이다. 더구나 복음의 전체 내용이 이 두 선언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들은 여기서 자기 자신들을 변명하기 위해서 만 역설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직무를 훌륭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가능하다면 그들은 그 신앙의 위험한 적들 가운데서라도 몇 몇 사람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논 이미 ‘회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한 바 있다(2 : 38에서). 이를데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내적 전향이요 나중에 그것은 의적인 행동으로 자체를 나타내주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적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또는 그 마음과 생각의 갱신이 새로운 생명윤 일으켜 주게 하기 위하여 중생케 하시는 성령을 우리 에게 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마음울 주는 기능이 그리스도에게 속 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정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며 우리로 하여금 죄의 종으로부터 의에 복종 하는 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놀라운 개혁을 일으켜 주는 그 무엇이기 때 문에 인간온 스스로 개심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창조할 수도 없는 것이 괴 는 일이다. 회개만 자발적인 회십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정을 변화시키셔서 돌과 같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단단하고 뻣뻣한· 것을 부드러운 것으로 만드시며 그래서 마침내 꾸부러진 것으로부터 올바른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그-러한 자발성의 의욕을 일으켜 주는 근원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런 일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쵸L 말미암아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 인 은사가 아니오 우리의 전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완전하계 하나님께 이꿀 려지기까지 날마다 더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육체를 벗어버탈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일찌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이 자기자신과 제상을 포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때 그것은 확실히 회개의 시초인 것이다. 그러나 우 리는 다만 출발했을 뿐 아칙 목적지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계속 해서 정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그리스도의 도우심 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에서 회개볼 시작하신 바와 같 이 또한 우리에게 인내심도 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헤아털 수 없는 은해이지만 그것이 죄의 용서와 연결되지 않았을 때에는 우리에 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 님의 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는 결함이 언제나 붙어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 대하여 온헤로우지기보다는 적대시해도 좋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 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는 곳에 의 (義)가 존재 한다. 그러므로 이 후자의 은혜는 결코 전자의 은혜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 반면에 복음이 이 두 부분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의로써 하나님과 화해된다는 자실, 그리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그들이 터득하지 않고는 그것은 불완전하계 될 것이요, 또는 부패하계 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논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서 구원이 얻어지는가를 간단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불신앙의 사람들 이 무슨 일을 고안해 내거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위탁받으신 칙책을 성취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없다는 것을사도들은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의 ‘하나님의 오른손'이란 그의 능력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가 앞서 2장에서 본 바와 같이 또는 다른 곳에서 가끔 보게 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울리워지셨다고 말해졌을 경우와 같은 그런 동일한 은유가 여기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는 천 사들과 인간들,우1에 군립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높이 울리워지셨 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단과 세상의 모든 음모에 대하여 조용히 대 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7-J.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독생자 안에서 강력하계 역사하셨고 또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으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그들이 훼방할 만큼 그렇게는 결코 높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계 략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타고 그가 말하논 것과 같다. 어쨌든 동사에 그 목적 이 참가되 었 는데 그가 임 금과 ‘구주 (saviour)·' 가 되 셨 다는 것 이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셨을 때마다 군주나 왕 을 약속하신 것이 언제나 있는 일이었는데 그들의 손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 주권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 고 증언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그의 역할을 다론 말로써 좀더 분명하 계 설명한다. 요겁온 바로 다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또 그것 뿐이 아니요 자신이 구원을 가져오는 주님 으로서의 혹은 구원의 창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최고의 영예 의 자리를 차지하셨다는 것이다.
 
32절 우리는 이 일에 중인이요 •••••• 그듄은 자기듄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 부터 얻어전 것이라는 사실울 증거한 다음에 이제 다론 논점으로 옮겨간다. 즉 처둘이 사태를 성급하게 단언하는 방향으로 갈 것에 대비해서 자기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자기들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에 말하는 것 뿐 이타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만을 꽁중 앞 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또 다음으로는 자기둘이 그 일을 하도록 부르십을 받 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하지 않고는 가르침의 필요성을 회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꽁개적으로 표명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복음의 일 군들에게 필요한 것이니 만큼 그들에게도 역시 자기들의 민호에 있어서 없 어서는 안될 필수사항이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는 여기서 히브리인의 어법을 마타서 ‘사물들' (rebus) 대신에 ‘말들' (筋µa-ra;verba)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누구라도 만일 그것을 말 자체 (speechitself)로 해석하기를 원한다 해도나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 요점은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중인으로 세워졌을 때에 그에게 등을 둘리는 일은 옳 지 않은 처 사요, 오직 그가 명 령 하시 는 바를 알려 주도록 말해 야 하는 것 이 다. 성령도 그러하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소명을 그 따르는 결과로써 확인한 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셨을 때에 그들의 가르침을 승인하는 하나의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상 복음 의 신앙이 하나님께 시인을 받고 또 그를 기쁘시게까지 한 것이라는.정율 이로써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이 라고 말할 때 그것을 나는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말로 생각한다. 그 말은· 이렇게 되었어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순종의 대 가로 하나님 으로부터 후하게 보상을 받는다. 그러 므로 하나님 께 서 는 우 리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교직까지도 그 겁 에서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어쨌든 다음과 같은 전문이 있을 수 있다. 죽 "우리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믿음을 얻는 것인데 어찌하여 여기서는 신앙 이후에 성령이 주어진다고 말해지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나는 이렇 게 대답한다. 죽 성령이타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자신의 교회를 풍 부하게 하신 방언. 예언, 몽번 병고침, 또는 그와 유사한 은사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마치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 미를 찾을 수 있': 2)라고 물었을 때에도 같은 의 亡것과 같다. 그래서 성령의 된다는 것을 보 조명 (照明)은 신앙의 원인이 己때 그것은 신앙을 앞선다. 그러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녀덕하게 된다"(마 13:.12)는 말씀대로 볼 때 나중에 그밖의 은혜가 우리를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계속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만일 계 속 성령의 새로운 은사로 풍성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 의 가슴 (the bosom of faith) 을 비 워 놓아야 한다. 그러 나 오늘 우리 의 불 신앙은 우리에게 훨씬 다른 대가를 받게 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우리가 하 나님의 성령이 결핍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며 이해하지도 못하 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