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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행5:34)

1. 성경 (행 5:33~42)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3)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4)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5)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6)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7)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8)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39)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0)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1)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4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33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 제사장들은 비록 철판 갈은 마음을 가졌다 해도 깊이 감동을 받았어야 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이론을 전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데는 조그마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속에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외적인 가르침은 귀를 때리는 일일 뿐 다론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적들을 꺾어서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거친 성품이 굴복되거나 교정되기는커녕 그들은 더욱 더 미친 사람들처럼 날뛰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그 말씀의 효과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나아지도록 번화시키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의 양심을 움직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심판자로 인하여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 사실에서 그들의 분노가 솟아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무슨 중요한 일을 하는것처럼 복음의 전부를 기꺼이 비웃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간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의 경솔한 행동을 맹렬하게 쓸어버리는 어떠한 숨은 존엄이 복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오도록 나팔소리가 그들을 소환할 때에 그들의 광기 (狂氣)가 분명해 질 것은 사실이다.

 

“34절 이제 누가는 주께서 어떻게 그 악한 자들의 광기를 씻어버리셨는가를 이야기해 준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여 버리려고 생각하였을 때에 가말리엘이 양자 사이에 끼어 들어서 그 무모한 의논을 저지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어떻게 단 한 사람이 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한 바리새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파는 우리가 아는 대로 가장 존경을 받고 있었던 파였다. 그는 국민 전체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고 누가는 전해준다· 그러나 또한 당국자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고도 전해 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그의 의견을 감히 반대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 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들 앞에  돌발적인, 또 예기하지 않온 공포의 원인을 설정함으로써 원수들의 폭행을 처지하시는 일 둥을 행하시는 것이다.  게다가 가말리엘은 자기 말이 사도들울 한충 더 대담하계 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들을 밖에 나가 있도록 명령한다. 왜냐화면 가말리엘은 자기가 복음의 가르침을 시인했거나 혹은 복음을 수호하는 일에 변호하기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론 모든 사람들이 격분
에 불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점잖고 온건한 인품을 지닌 그는 그들의 지나침을 온건한 말로써 누구러트리는 것이다.


어쨌든 만일 아무라도 그 모든 일율 적절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의 견해는 우리가 신중성있는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될 것이다. 실상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충분히 밝혀진다. 즉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람은 아무도 형벌하지 말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모든 범죄는 처벌되지 말도록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의 생명울 한 순간이라도 연장하는 일이 우리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모든 것도 거부되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가말리엘이 말한 두가지가 다 분명히 옳다. 즉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깨뜨릴 수가 없다는 사실, 그러나 한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까지나 존속할 수 있을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 꿀어 낸 결론으로서 대체로 그것은 아무것도 할수 없는 사태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차라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를 찾아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물론 하나님은 악행이 벌을 받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목적 때문에 그는 행정장관들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검으로 무장시키신 것이다. 그러한 목적 때문에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셔서 다루기 힘든 사람들에게 질서를 강요한다· 그래서 그들은 제 멋대로 빠져들거나 제한받지 않고 날뛰는 죄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악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자신 혼자서 넉넉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쨌든 그의 전체 권고는 그와 같은 것이다. 가말리엘은 율법학자들이나 장로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 일에 대해서 의심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로써 다음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그는 그 사건의 진가에 관해서 이미 근본적으로 불확실하여 계속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감히 그의 마음을 확정짓지 못하고 그 상황이 자연히 좀더 잘 밝혀지기까지 얼마동안 시간이 연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요약한다면 가말러엘은 올바른 전제에서 잘못된 결론을 꿀어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에만 적용해야 할 것을 외적 행사나 행동 방식에 잘못 응용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을 우리의 논리가 되게 하도록 하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비록 전 세계가 그를 대항한다고 할지라도 확립되는 것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써 확증되고 있는 신앙은 사단이나 인간의 어떠한 공격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존속 될 수 밖에 없다. 비록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창조자요 수호자이시기 때문 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켜 주시기 때문에 어떠한 제력도 그것을 전복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님에게 그 기초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 아무리 이를 대항하여 싸우며 흔들지라도 여전히 안전하계 남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악한 자들이 아무리 교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대적하여 제 아무리 치열한 싸움을 도발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들은 승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도를 타격주는 것이 하나님의 특성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요. 또 그런 방식으로 그들의 무모함에 형벌을 가하시기 때문이다· 그 두 선언이 다 신앙에 잘 적용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종들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덜 열심이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자기돌의 게으름 때문에 교회를 파멸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다는 이유도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악행을 못본 체하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 야할 이유가 그들에게 있을 수 없다

 

“36 두다가 일어나” ; 만일 우리가 요세푸스 (Josephus)를 신빙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가말리엘은 여기서 역사의 참된 진로를 거꾸로 만든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요세푸스는 다음과 갈이 말해 준다. 죽 가말타(Garn­ a la) 성에서 태어난 유다 가울라니데스(Judas Gaulanites) 는 퀴리니우스 (Quirinius) 혹은 싸이레니우스(Cyrenius)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인구 조사의 실시를 막기 위하여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드다(Theudas)는 쿠스피우스파더스(Cuspius Fadus)가 총독이었을 때에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예언자타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더스는 굴라우디우스 가이사(Claudiusca·esar)에 의하여 유대로 파견되었던것이다. 전자의 이야기는 고대사 <Antiquities> 18권에 수록되어 있고 후자는 20권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가  ‘‘그 후”라는 말은 “그 위에” 혹은 “한 편”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더구나 가말리엘이 자기의 견해를 입증하는 그 실예들까지도 현재의 주계 에 적절하계 해당되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다에 대해서 즉각적인 처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선동했던 폭동은 많은 재난을 가져오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군대의 세력에 의하여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드다는 쿠스피우스 파더스의 분투로써 재빨리 타도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큰 해를 입혔을 것이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단지 사람들이 결과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일을 추진할 때 모든 일이 좋지 못하게 뒤집힌다는 사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형벌에 의하여 행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불신앙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충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당황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갈 팡질팡함으로써 무가치한 이론과 함께 자기들의 이지를 박탈당하는 결과가 되고만것이다. 한 걸음더 나아가서 사도들이 매를맞은시기는그리스도 께서 죽으신 이후에 적어도 12년은 경과한 때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시간 을 계산해 봄으로써 추론하게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Tiberius) 치제의 남온 5년에 칼리굴타(Caligula)가 지배한 3년 반이 가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파머스 (Fadus)가 큘라우디우스 (Claudius)에 의하여 유대로 파견 된 것은 그의 재위 2년이나 3년 이내에는 아니었다. 가말리엘은 그 사건이 마치 어재나 그저께 생겨난 일처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 4-리~ 내가 지적한 그 시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도들의 끈기가 그만큼 더 훌륭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처럼 오랜 동안 참고 견디어 온 고생에 대해서 그처럼 가혹한 보상을 받았으면.서 도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또는 자기들이 가야 할 그 길을 쉬지 않고 계속하 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랑하매 어떤 사본에는 "자기가 상당한 인물이타고 말했다"고 되었다· 그러나 의미는 같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요단강을 마르게 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통과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하였기 때문 이다. 동시에 우리는 가말리엘이 얼마나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 던가를알수있다. 왜냐하면그가나중에자기의말을누그러뜨리고또좀 더 호의적인 견해로 기울어지면서 이 사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단언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짓지 못한 채 남겨두기는 하였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칙자들을 협잡군들과 약탈자들과 비교하였기 때문이다. 그 러면서도 그는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좀더 사건을 조사하도록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은 그가 악한 자들로 하여금 불신 앙적인 무모합에서 기가 꺾어지계 한 일이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보다 머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 하며~~~~” ; 가말리엘의 충 고가 받아들여졌다고 누가는 말한다· 그렇지만 사도들온 채찍에 맞고 또 가 르치는 일을 금지당했다. 아로써 우림는 그들의 적이 얼마나 크게 격분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하계 된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이제는 가라앉혀졌거나 혹은 적어도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이처럽 과격한 방법으로 행동하였 기 때문이다. 동시에 거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전리는 무시되고 인간에게만 관십울 기울였던 그러한 불명확한 권고가 얼마나 불행한 결과률 가져왔는가 가 분명하다. 가말리엘은 확실히 사도들의 생명을 아끼는 일을 생각한 것이 다. 그럽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한 사람들의 수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수치 률당한것이다. 복음의 진리는그들의 원수들에 관한한. 영원한침묵 속 에 매장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이처럽 그의 말씀을 기적 적으 로 선포하시는데 그러나 그 복음이 끊임없이 의곡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이 일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 의 가르침 때문에 위험 속에 빠진 사람들의 생명을 아꺼주기만 한다면, 혹 온그렇지 않으떤피를홀릴수있는형편에서 약간부드러운 방식으로둘 아선 적이 된다면 자기둘이 적지않게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불명예스럽게도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을 두려움없이 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 에는·모든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귀한 일이다. 그러나 참된 신앙에 대한 관 십을 버리고 인간적인 선행의 의무로써 하나님 앞에서 죄 속함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온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41. 사도들은...기뻐하면서” ;  사도들은 자기들이 부당하게 다루어졌을 때에 그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고 고통조차도 느까지 않았다 고 할 정도로 그렇게 무감각하였다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성을 완전히 버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원인을 생각했을 때에 기쁨이 우위몰 차지했던 것아다. 그래서 신도들은 자기둔 이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게 될 때마다 언제나 두가지 방면으로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 비록 그들이 확실히 형벌의 아품으로 인하여 시달립을 받는 다 하더라도 영적 기쁨으로 인하여 그 술품을 타고 넘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기쁩에서 생겨나는 열정이 그들에제 새로운 힘을 주지 않는다면 그 들은 성급한 후퇴를 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에 있어서 죽음 이 쓴것이 될 것이라고주께서 선언하셨지만역시 죽음어 왔을 때에 그가 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했을 것이타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등에 십자가가 지워질 때에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서 (ad obe- undam crucem) 계속 지고 가도록 고난과 불안과 더불어 싸워야만 할 것을 배워야 한다. “그이름을위하여 능욕받는일에 합당한자로여기십을"이타는말은누가 가 불명예스러웠던 것을 영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얼론 보아서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의 상이성 (相異性)으 로 하여 인간들사이에서는최고의 치욕으로 생각되는 사항이 하나님과· 그. 의 천사들 앞에서는 큰 존엄과 영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저 견며 내신 그런 종류의 죽음은무엇보다도가장불명예스러운 것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고상한 승리를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 순응하게 될 때에 (참고 ; 빌 3 : 10, 롬8:29) 제상의 눈으로볼때에는치욕의 대상이 된다해도 설상온우리 가 뛰어남의 표시가 되고 있음을 훌륭하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공공연하게 그 그리스도의 흔적을 이야기하였다(갈 6 : 17).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는 일의 근거에 대하여 우리의 관 싱을기울여보아야한다·그는이 제상의치욕을자기의 영광으로홉수 할 뿐 아니요, 모욕과 불명예와조소를 최고의 영예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 다. 이리하여 비록 십자가를 지는 일에 용감하고 민첩한 사람이 그처럼 소수라고 할지타도 우리가 거의 모두 육체의 감각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실을· 그다지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은 없다. 설상 백 사 람 중의 한 사람이 될까 말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수치가 이 제성의 모. 는 승리보다 훨씬 뛰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것이 유일한 위로 의 기초가 됨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의 영광의 동참자­ 또는 동반자가 되기 위하여 현재 그리스도의 고난에 순응하게 된다는 이 문 구에대해서좀더 진지하계생각해보지 않으면안된다(참고;롬8:17,벤전 4:13). 


42절 저희가 날마다.•수1지 아니하니라 그들의 기쁨과함께 또한변함없 논 견지성 (堅持性)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승리의 결과를 앞질러 지기 마 읍에 가지려고 또 치구력을 야기시키기 위하여 아무도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로이꿀어 울리지 않는다는그사실이 우리를 약하계 하고 우리의 마음을 교만시켜 주는 박해의 원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기가 그리 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에 스스로 축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괴로 운 싸움을 싸워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탈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죽음을 향해 용감히 진군하기 위하여 채찍맞는 일로 무장울 한 것이다. 정말 우리의 길이란 미묘한 길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극히 사소한 박해를 통과해 왔으면서 우리는 마치 이미 퇴역군인이 된 것 처럼 다론 사람들에게 즉시 그 횃불을 넘겨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