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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1. 성경 (행6:8~ 15)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8)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9)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0)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1)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2)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3)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4)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1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8 스데반이.~~~~~~~” ; 누가는 여기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싸움의 이야기를한다. 이로써 복음의 영광은 언제나 십자가와 그리고 여러가지 고통과 더불어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요점은 교회가 한 사람의 인간이 대표로 되어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생겨난 사실온 그들의 적이 훨씬 더 큰 용기를 지니게 되었고 또 무고한 피로 흠뻑 젖었으며 평상 시 보다 더욱 잔인하게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일 이전에는 그 들이 투옥한다든지 매를 때리는 일 이상으로 더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는 스데반의 생전에나 죽음에서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이 름이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스데반이 "믿음과 (莊1) 능력이 충만했다”고 말함으로써 말문을 연것이다. 그말로써 그가 뜻 하는바는 그의 신앙이 뛰어났으며 또 기적을 행할 만한 능력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가 "믿음이 충만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이 완벽하였다고 상상하여서는 안된다. 다만 성서는 언제나하나님의 은사를 풍성하게 받은 사람들을 부를 때에 그러한 은사가 ‘충만하다’는 표현을 한것 뿐이다. 이 ‘능력'이라는말을 나는 문제없이 기적을 행할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은 지혜의 은사만이 아니요, 뜨거운 열심도 포함하는 말이다. 이처럼 그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이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 결과는 그 사악한 군중들이 이를테면 한꺼번에 그에게 반항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등장하여 나타나게 될 때에는 흔히 그와 동시에 사단의 광포가 격발되는 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으로 볼때 스데반은 복음의 가르침을 퍼치는 일에 쉴사이 없었고 대담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그 일에 대해서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게으르게 쉬고 있을 수 없었 던 그의 신앙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만족한 것이다.

 

“9 어떤 자들이 일어나~~~” ; 이것은 핍박의 시초였다. 왜냐하면 그 불신앙인들이 논쟁으로써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헛된 시도를한 다음에 그 첫 시도가 아무런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음을 발견했을 때에 그들은 중상과 소란에 호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폭력을 구사하여 살인까지도 범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일어나' 라는 동사로써 자기가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말로써 공격했다는 사실, 그들이 처음부타 스데반을 재판자리에 끌어내지 아니하고 먼처 반대의 논쟁으로 그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더우기 그는 그들이 사업상의 관계로 또는 배우려는 의욕 때문에 유대에 와서 있었던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구레네에서, 더러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더러는 길리기아에서,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상기하는것이다.  그사람들은 모두 리버디노 (Libertines)의 회당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짐작컨대 로마의 시민들인 자유민들은 자비로 회당을 건립하도록 되었던 것 같다. 그 회당은 특히 각 지방으로부터 자주 예루살렘에 오는 습관을 가졌던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하도록 자극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어야만 했는데 먼저 그리스도를 반대하여 마치 나팔을 불어댄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격발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그 다음의 많은 귀절에서 각 지방의 유대인들이 특히 건전한 가르침에 대한 적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가장 악의에 차서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다수라는 것을 지목해서 말한다. 여러 지역에서 모여온 많은 사람들이 단 한 사람에게 능가되어 그들이 부끄러워 입을 다물 수밖에 도리가 없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단념하게 되었으므로 진리의 승리가 더욱 더 선명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스데반은 이미 자기의 신앙과 기적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호의를 샀으며 자신의 기반을 굳혔다. 이제 그는 논쟁을 걸어온 자들에게 자신이 그들보다훨 씬 우수하계 보이는 방식으로 반박하였다. 스데반의 적들이 당하지 못했다 고 그가 말한 그 ‘지혜와성령’을 누가는 별개의 다른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은 이렇게 해석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하는 뜻이다.

왜냐하면 누가는 두 면으로 그것을 표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순한 인간들로써 싸운것이 아니라는 사실, 복음의 적들이 패하게 된 이유가 그들이 스데반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령과 맞서 싸운 때문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든 종들에게  동일한 성령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논 오직 전리를 위하여 성실하게 싸우자. 그리고 입과 지혜를 주께 구하자. 그렇게 하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장비를 갖추게 될 것이요, 따라서 우리 적들의 약삭빠름도 수다함도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처럼 성령은 오늘도 화형장으로 끌려간 순교자들의 입을 통하여 큰 효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 날마다 여전히 동일한 활동을 하고 계시므로 비록 무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듣의 음성만을 가지고도 마치 벼락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파의 우두머리 신학자들을 놀라게 해 줄 것이다

 

“11절~~~” ; 성령의 능력으로 타도되어 그들은 논쟁을 단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중상으로 그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싸웠다는 것은 이로써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들을 변호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추잡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란 어떤 다른 점에서 나무랄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거짓 증거로 누르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열심을 구실로 해서 예사롭게 그 일을 제멋대로 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오늘에도 우리에게 대하여 거짓되게 증거를 틀어 넣고자 할 때에 성경의 명백한 귀절들을 고의적으로 더럽히고 있는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그것은 주로 무지를 통해서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을 평판 나쁘게 만들기 위하여 성경의 의미와 말을 모두 제 멋대로 의곡시키지 않는자는 그들 중에 단 한사람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대해서 비인도적인 중상을 강단에서(pro sugges(u) 날조하기까지 한다. 만일 이들 랍비들에게 사람을 중상하는 일이 옳은가 아닌가를 묻게 된다면 그들은 확실히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안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될때에는 선량한 열심이 그들을 변명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의 주장을 괴롭혀 줄 수 있는 일이 아무런 불법도 아니라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짓말과 불성실과 파렴치한 뻔뻔스러움을 자행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위선은 또한 누가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서 거짓 중거를 난용하고 있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왜냐하면 사단이 자기의 주권을 주장하고 나설 때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잔인한 행위로 몰아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을 멀게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원하는 대로 무엇이나 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이 실예로 인하여 좋은 열심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만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위험한 구실이 되는가를 배우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별안간 격렬한 열광으로 달려가며 동시에 일체의 범죄를 은폐하는 훌륭한 가면도 되기 때문이다.

 

“14 이 나사렛 예수가~~~~” ; 그들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말할 때에 마치 그에 대한 추억이 몹시 싫은 듯이 경멸하는 어조로 말한다. 동시에 그들의 중상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온 스데반이 율법의 폐기를 말했지만 그것은 그림자(shadows)에 대한 실체 (reality; corpus)를, 외형 (forms)에 대한 본체(substance)를 대비시킨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의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페지된다고 해도 그 의식의 참된 본질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의식들을 영원히 지속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유형한 것, 물질적인 것, 현세적인 것, 그리고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 이외의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만일에 의식의 관용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외형적인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요, 따라서 아무런 본질적인 것이 그 밀에 깔려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덧없이 지나가서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참된 영존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그것이 폐기될 때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 때로부터 그. 의식의 가치와 목적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다는 일이 따르기 때문이다.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  이로써 스데반은 율법의 의식의 아주 일부분만을 의미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란 흔히 외부적인 과장된 표현에 애착을 두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스데반이 한 말을 그가 율법을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깎아내린 것처럼 해석한 것이다. 율법의 주요한 계명은 확실히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와 신앙과 의와 그리고 공정한 재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외부적인 의례를 훨씬 높이 존중시하기 때문에 특히 희생에 관해서 정해전 의식절차를 각별히 뛰어난(par excellence) 모세의 규례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인간의 본성 안에 있어온 일이요 또는 끝까지 그럴 것이다. 예를 든다면 오늘에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가면 (larvi~)을 쓰지 않고는 하나님 예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규례 대신에 인간이 만들어낸 시시한 것들 밖에는 아무것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들 유대인과는 크게 다르다.  

 

“우리가 들었노라” ; 그가 모세나 성전에 관해서 결코 존경의 생각을 갖지 않고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온 스데반의 변명에서 매우 분명해질 것이다. 그렇기는 하면서도 이러한 비난이 그에게 향해진 것은 전혀 구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의 페기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좋은 말로 또는 은혜롭게 (pie) 한 말을 고의로 의곡하였기 때문에 그 점에서 그 중거는 거짓이었으며 또 거짓말을 하도록 매수한 것이었다. 비슷하게도 그리스도는 자신이 율법을 파괴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강요당했었다.그 가 공공연하게 의식의 페기를 말씀하셨 을 때에 악한 자들은 그가 마치 율법 전체를 폐기하려고 했던 것처럼 곡해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적들은 또한 예수가 자신의 몸에 대해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시켜서 말씀하신 바를 악의로 곡해했다. 바울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롬 3:8)고 가르쳤을 때에 거기 대한 반대가 왜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성실하고 적절하며 유용한 일들이 짓궂게도 뒤집혀서 받아들여지고 썩어전 생각으로 곡해될 때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사실로 놀랄 것이 없다!  복음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잘못 해석되는 주제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고 온건한 방법으로는 결코 다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거짓의 아비인 사단은 언제나 그런일에 자신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육체의 분별에서 벗어나는 많은 일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만큼 중상을 받기 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중상이 가르침의 성실하고도 건전한 의미를 그릇되게 한다. 참으로 사단의 이러한 악의와 그 모든 책략은 우리를 더욱 신중하게 하고 더욱 조심하게 하여 일을 의곡시켜 말하든지 적절하거나 정당하지 않은 말을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말을 가지고서 그들은 우리를 대항하여 싸우려고 무장율 하계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한 자들이 갈망하는 그 기회를 단호히 거부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적절하게 또는 충실하게 마련한 그 가르침이 비뚤어전 곡해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의곡되고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을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시작한 것을 후회한다 든지 혹은 그후부터는 더욱 망설여야만 할 이유가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사단의 직위를 피할 수 없었는데 우리가 사단의 유독성에 물린 상처에서 안전하다거나 면제되어야 한다는 것온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가르침을 부정한 불명예로부터 수호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에 하나님의 진리가 방해받고 있는 그 거짓을 없애고 말살시키는것이 우리들의 책임인 것이다. 다만 그 특정한 비열함이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정신과 결의를 우리 속에서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란 모두 죄와 악한 의욕의 완전한 노예가 될 정도로 타락되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의 적들은 그것을 그롯 해석하여 우리가 인간이 자기들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범죄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어떤 다른 근거로 악을 행하계 되어 따라서 인간에게 조금도 죄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만들어 낸다. 그들은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욕망을 파괴한다는 비난까지를 하는 것이다. 성자들의 업적이란 언제나 그 속에 얼마간의 불완전함이 섞여있기 때문에 본질적인 가치의 면에서는 칭찬할 만한 것 이 되지 못한다고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발뺌한다. 즉 우리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구별을 전혀 배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만 있다는 사실, 신도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외에서는 아무 데서도 쉼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반대한다. 즉 그런 방식으로는 육의 제어(制御)가 이완되며 따라서 율법도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한 영예를 사냥한 짐승처럼 산산조각으로 찢어서 자기들 마음대로 이리처리 나누어 주고 있는데,  그 영예를 우리가 그리스도 에게 돌릴때에 그들은 우리를 거룩한 것들의 적이라고 당치 않게 생각하 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성령의 자유 대신에 육의 방종을 추구하고 있다고 거짓된 비난울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순수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일을 회복시키려고 할 때에 그들은 우리가 성만찬을 뒤집어 엎고 파괴하고 있다고 뻔뻔스럽게 떠들어대는 것이다.~~~~중략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 피 고소인이 변명하기를 사람들이 기다릴 때 그를 주목하게 되는 일은 재판정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이제 누가는 스데반이 천사처럼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상시 상태에서의 그의 얼굴 모습을 말한 것이 아니요, 그 순간에 그가 보여준 안색에 대해서 한 말이다. 왜냐하떤 피고인들의 얼굴 빛은 대체로 초체한 것이 보통이며 말은 더듬거리기가 일쑤고 또 그밖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누가는 스데반에게는 그런 일들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그에게는 어떤 장엄한 것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으므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때로 사무엘상 29장 9 절이나 사무엘하 14장 17절, 19장 27절 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의미로 천사들의 이야기를 유추법 (類推法; analogy)으로 차용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