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 5:17~32)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17)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18)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19)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20)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21)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22)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23)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24)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25)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26)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27)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29)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0)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1)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 개역개정 사도행전 5:3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요약본)
누가는 이미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즉 교회에는 신도들의 수효가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 각종의 은사가 훌륭하게 갖추어졌다는 사실, 기적에도 탁월해졌다는 사실 등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거기에 모든 면으로 번창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즉 그러한 일들 때문에 악한 자들의 분노가 다시 불붙어서 그 잔인성은 전보다 더욱 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어떻게 그들을 구사하여 맹목적인 격노를 일으켰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분명한 능력이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그래서 그 들이 더욱 더 뻔뻔스러워지고 격렬하계 덤벼들어 마치 자기들이 하는자체를 뒤집어 엎을 듯이 날뛰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단한 무분별은 일종의 하나님의 두려운 형벌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을 드리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모두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도 역시 단지 자기들이 대항하여 밀어 붙이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계 되도록 현기증으로 휩쓸럴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영적 은혜로써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괴롭혀지는 일도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오늘의 상태가 그들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거할 만한 하나님의 은사를 자인하는 일은 악한 자들의 열광과 완강으로 인하여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17 그와 함께 있는 사람" ; 그는 대제사장과 더욱 가까이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 대제사장은 그둘의 충고를 따르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를테면 전체 성직자 계급 가운데서 그가 선발한 사람들이었다. 실상 재판의 목적 때문에서가 아니요 그 파당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열광 때문에 뽑힌 사람들이다. 왜냐하떤 당시에 그들은 자기들 자체 안에서 서로 지독한 원수들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당시에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사두게파 사람들이었다고 다시 반복해서 말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하나의 분파가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회의 전체 정치가 무서운 황폐로 인하여 일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한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회당으로부터 분리시키신 이후로 그 회당을 그처럼 극단적인 치욕 속에 잠겨져 있도록 분명히 허용하셨다. 그것은 복음을 업신여기고 또는 그처럼 쓰레기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 핑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더우기 또 장차 올 생명의 일은 조금도 염려 하지 아니 하는 그들 욕심장이 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탈취 한 그 지배권에 대한 노출된 야심과 거기 매달리려는 욕망 이외에 무었이 있을 것인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 나는 이 헬라어 ( 젤一루- ; 시 기 ―특히 그 말이 다론 방식으로 너무 혼하계 사용되기 때문에)를 ‘경쟁' (emulation) 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차라리 원어대로 두는 것을 좋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선자들이 자기네들의 미신을 방위하기 위하여 정신이 없고 가슴을 테운 그 괴악하고 폭력적인 세력에 대해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열심(C~AOU라는 말을 ‘열심'이타고 번 역할 수도 있음一역자 주)이라는 것이 이성과 신중성으로 조종되지 않을 때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으로써 지도를 받지 않게 될 때에 하나님 보시기에 무슨 가치가 있는것이며 무슨 칭찬을 받을만한 것인가가 분명해진다. 사람들이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신앙적이라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면서 무고한 사람의 피를 홀리려는 잔인한 정열을 가지고 악마적인 광포로 흥분하고 있는 자들을 우리가 오늘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말한 것같이, 많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무분별한 열심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유의하여야 한다. 다만 우리는 차라리 열렬하고 난폭한 공세로 이해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이 고의적으로 참된 신앙을 박해하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아무리 많이 자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신기한 일은 반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잘못된 종류의 열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거의 모든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역시 자기들의 배를 위한 열광자이떤서도 단순히 그 열심에 근거해서 (solo zeli momine)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전실하다고 허용하더라도 그 무분벌이 그들을 몰아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무엇이나 복수를 감행하도록 놓아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것처럼 여기는 그 불타는 잔인성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겸손한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에 받아들겨지지 않는 일이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구별하는 일이야말로 해야할 첫째의 일이다.
"19 주의 사자가~~~~~" ; 주께서는 사도들이 적의 손아귀로부터 영원히 구원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감옥에서 데려 내오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얼마 후에 주는 그들이 다시 감옥으로 끌려 가는 것을 허용하셨고 또 채찍으로 맞게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적으로 인하여 주께서는 그들이 이 주의 복음에 대한 신앙을 수호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수중에 두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신 것이다. 한편으로는 교회가 그 사건을 봉하여 생기있는 용기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요, 또 한편으로는 악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핑계거리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주께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을 바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아야 하며 다만 우리들의 생명이 그의 손에 의하여 그럴 팔요가 있는데도 보호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의 목적을 위하여 주께서 천사를 사용하신 일에 관해서는 그의 관용적인 관례대로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여러 곳을 통하여 천사는 주의 은해를 우리에계 전달해 주는 자라는 것을 중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허한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 뿐이 아니요 또한 하늘의 영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유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유리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 우리의 안전을 돌보아 주도록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보통 언약이 아니다. 더구나 그 천사는 밤에 감옥 문을 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적이 행해전 뒤에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하시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불신자들이 그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0 가서 성전에 서서 ~~~~말하라" ; 그들을 석방시킨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불굴의 노력을 계 속하계 하려 함이요. 또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용감하계 그들의 적에게 도전하는 일을 계속하계 하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달려갈 길을 다가고 하나님의 손이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社6) 그들은 마침내 죽음으로 끌려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특정한 시기에 주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옥문을 여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임무를 자유롭게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 사실은 크게 유의할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박해로부터 모면하게 되면 자기들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의 의무를 지고 있지 않온 양, 그 후로는 자기들의 입을 다물고 마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도망 칠 길을 찾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유케 해 주시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시작한 진로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차라리 장래를 향하여 더욱 큰 열정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실상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이유를 들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위 험이 따르지 않고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단 한번의 모임 때문에 이렇게 잡혀서 갇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만일 우리가 고집스럽계 나오는 것을 안다면 이후에 적의 격노가 얼마나 더 크게 불타오를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을(롬 14 : 8)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위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의무를 관심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단순한 계명으로 만족하고 일의 결과를 그에게 맡기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용기를 약화시키는 많은 일들을 가끔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의 말씀을" ; 복음이 여기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생명 부여의 교리로 훌륭하게 설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 있으며"(롬 1.: 17) 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희생으로, 부활의 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양자로 하시는 보증으로, 그 복음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에거 분명히 이야기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영원한 구원의 사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복음 때문에 발생되는 모든 싸움에 더욱 더 대담하계 참여하계 된 것이다. 지시 형용사인 ‘이' 라는 글자가 모든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첨가되었다. 마치 천사가 자기의 손가락으로 그 생명을 지적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의 입에 또는 우리의 마음에 소유할 때에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고 분명히 멀리 가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과도 같다. 혹시 어떤 이들은 ‘이 말씀' 이라고 하는 대신에 환치법이 사용된 것처럼 ‘이 생명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가 있을지 모론다. 나는 그러한 견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가 내게는 더 좋게 보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시가 있으며 그 안에는 생명이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1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 이재 대제사장은 전체 회의를 소집한다. 그것은 만일에 그가 자기의 일파만의 명예에만 사로잡혀 다른 파롤 무시한다면 자기가 그러한 책임을 다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전체 의회를 소집하게 한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또는 정확하계 법의 형식을 유지하였다. 감독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장로들이 소집되었는데 그것은 의회의 결정과 권위에 의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회의에서 누가 온건한 결말을 희망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분명히 폭력이나 횡포로써 진리를 탄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대로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도들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사도들이 인간적인 어떤 기만행위로 감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적에 의해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들의 목적을 수행하려는 뜻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그들의 사악한 행동이나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만이 아니요, 역시 무서운 광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선자들은 아무리 공정한 것 같은 외관을 그럴싸하계 꾸밀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자기들 자신의 악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감옥 문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써 열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공연하계 하나님을 대항하여 날뛰기를 주저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들어 맞는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이 합법적인 교회 의회는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금언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다. 더구나 그들이 합법적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합법적으로 받아 들여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란 모든 외적인 형식이 완전하게 되어 있는 그러한 모든 의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누가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의회란 우리가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모인 그런 모임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제사장들이 제 아무리 부정수단에 의하여, 혹은 운동을 해서, 은밀히 직책 (honorem) 에 나아가서 다른 나쁜 계략이나 뇌물 수여 또는 피차의 살인행위 등 폭력수단에 의해서까지 자기들의 직권을 행사한다 해도, 그러면서도 제사장직의 직책 (dignitatem) 이란 그리스도께서 아직 나타나시기 전이기 때문에 여전히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장로들의 회의에 교회가 대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추구되지 않았으며 전체의·외양은 단순한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이 방패의 그늘 아래서 자기들의 추행을 온페하려고 시도한다 해도 헛 수고인 것이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면 교회의 지배권을 가진 자들이 회의를 소집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가 자신을 ‘빛의 천사, (고후11:14) 로 위장하는 것이 그의 전형적인 술책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의 칭호 밑에 악마가 바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숨을 곳을 그에게 제공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26 성전 맡은 자가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 우리가 앞서 성전 맡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말해왔다 (4 :1 에서).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성전 맡은 자를 자기들 마음에 드는 대로 임명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소속 된 지방의 총독이 결정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강제로 잡혀온 것이 아니고 연행되어 왔다고 그는 말한다. 즉 민중의 폭동이 발생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폭력으로 꿀어 온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도들의 행동의 분별력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즉 그돌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소란의 원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관속들이 꿀어가는 대로 자신들을 맡겨 두었다.
"28절 " ; 대제사장은 사도들에게 두 가지의 죄를 씌웠다. 그것은 그들이 의 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관명 (官命)항거의 죄를 물온 것이다. 그의 선언의 둘째 부분에서 그는 그의 악의를 보여준다. 혹온 적어모 하나의 법정에서 그는 공적 사항을 다루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 의 개인적인 이에(利害)속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사도들이 그리 스도의 죽음의 오명 을 제 사장들과 율법 학자들에 게 전가하려고 하고 있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괴롭혀 주는 것온 사악한 살해의 복수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들의 가르침을 핑계삼아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을 보면 ::::z. 가 ::::z.처럼 염려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사도들을 폭동 교사죄 (敎陵 罪)로 비난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정당하계 사형을 받은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것으로 그는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고소의 주요점은 그들이 제사장들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그런데 전체의 명령을 일축하는 일은 얼마나 더 큰 죄일 것인가?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볼 때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자기의 걸머진 책임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기의 권력을 마치 그것이 모든 법의 구속을 받지 않은 권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폭군처럼 그 권력을 남용하였다. 오늘의 교황이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구속받지 않는 최고의 권력을 가로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명령이 우리로 인하여 거부당하는 것을 보자마자 우리를 종파분리자로 정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눅 10 : 16) 고 하는 말씀을 갖고 그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 러나 그가 만일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계 하려면 반 드지 그리 스도의 말씀을 가지 고 말해 야 하는 것 이 다 (ex Christi ore) . 이 제 그가 공개적으로 사단의 사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움도 없이 또는 허락도 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권위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제사장이 사용하는 말의 형식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제한없는 권력을 강탈해서 어떻게 영적 폭군이 되어 있는가를 증거 해 준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나 자유롭게 기탄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우리가••임금하였으되"라고 그는 말한다. 자기둘이 명하는 바는 무엇이나 이의 없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 아니라면 어디에 그러한 결정적인 단호함이 생겨났을 것인가?
“29 “ ; 이것이 바로 변호의 요건이다. 즉 사람은 인간보다도 하나님편을 택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상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우리를 참 잘하도록 명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한다"는 말이 타당하다는 이 선언에 관해서는 4장 19절에서 내가 설명한 바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범위 안에서 인간에게 권력을· 주어 우리를 지배하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가 침해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뜻을 이행해야 한다. 권력의 행사가 정당할 때에는 하나님과 사람과를 비교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어느 성실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무엇을 명하거나 혹은 금하거나 한다면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한다고 반대하고 나서도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이 들려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에 어떤 행정장관이 충실하게 그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누가 그를 하나님과 대립시키려고 조작한다 해도 그 행정장관은 하나님과의 불일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반대의 결과가 될 것 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법이 행해질 것이다. 즈 O위해서 그의 대행인 교직자에게 기 라가 하나님을 순종하기 순종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나 주 인의 경우에서 생겨나는 일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통치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복종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 즉시로 그들은 불경하고 완강하게 하나님과 충돌하계 되는 것이므로 그들은 제 위치를 지켜서 하나님과 그의 권위가 최고의 자리에 있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직무의 모든 영향력은 사라져 버럴 것이다. 왜냐하틴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영예로운 관직을 그들에게 주시려고는 생각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버지되는 자가 자기의 신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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