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행7:1)

1. 성경 (행 7:1 ~16)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1)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2)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3)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4)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5)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6)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7)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8)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9)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10)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1)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2)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3)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4)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15)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1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 절" ; 지금까지 대제사장이나 모든 의회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공정성 비슷한 것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에는 가장 불공정한 편견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스데반에게 어떠한 이유에서 그렇게 가르쳐야만 했는가를 물으려고 하지 않고 또는 법(法)이 마련하고 있는 바대로 변호가 중요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았으며, 다만 간단하게 스데반의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그런 말을 했는가 어떤가 하는 것만을 그에게 심문하였기 때문이다. 그와 유사하게 오늘의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 그 성격을 탐사(探査)하는 일에 과감하지 못하고 혹은 그것이 성경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는가 아닌가를 추구하지 못하고 단지 그들은 누구라도 자기들의 미신에 대해서 감히 불평을 말하고 있는가의 여부만을 추구하며 그렇게 해서 그런자를 유죄로 판결하면 즉시 화형에 처하는 것이다. 더우기 스데반의 답변은 처음에 모호하고 부적당한 것으로 보일 수가 있었다. 우선 그는 아주 엣 시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긴 이야기를 설파했는데 그 속에는 거의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의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말을 많이 함으로써 사건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것 이상으로 큰 잘못은 없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장황한 연설 속에는 불필요한 말은 아무것도 없고 그 사태가 요구하는 대로 요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종교와 하나님 예배를 뒤엎으려고 시도한 배교자로 고소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조상들이 언제나 예배하였던 그 동일한 하나님을 보유 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용의주도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사악한 변절의 죄에 대한 고소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자기의 적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그렇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온 하나님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일 이외에는 염두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거짓된 거만을 때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온 언제나 조상들의 이름을 입에 올렸고 또 그 국민의 영광을 너무나도 뽑내고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은 역시 그들이 그런 것들을 자랑할 만한 바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의 조상들의 잘못이 너무도 많고 커서 그들은 부끄러워하고 비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요 문제인 사건의 핵심에 와 있다. 문제는 성전과 의식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성전이 세위지기 전에 또는 모세가 출생 하기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댁된 것이었다고 그들에게 생각나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설의 첫 부분은 좀 더 면밀히 관찰해 보면 이러한 견해를 지니고있는것이다.  둘째 부분에서 그를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신 모든 외부적 의례는 하늘의 모형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로써 의식의 법이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기 보다는 다론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진리를 무시하고 표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게 또는 실제로 잘못 행동하고 있다는결론이 된다. 만일에 독 자들이 스데만의 연설 전체롤 이 두 가지 주요한 문제점에 관련된 것으로생각 한다면 내가 끝에 가서 다시 한번 간단히 반복하려 고 하는 바와 같이 (莊1) 그들은 거기서 그 상황에 너무도 잘 맞지 않는 사실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그 연설 자체의 목적 (scopum) 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만한 점을 일일히 점검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2 여러분 부형들이여~~~~~~" ;스데반은 그 의회에 앉아 있는 이들이 복음의 불구대천의 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민중의 법에 따론 지배권은 여전히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또 그들이 교회를 통판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칙 그 일을 거절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는 예절을 따라서 그들을 ‘부형들'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그는 그 사람둘의 호감을 사려고 아첨군처럼 비유를 맞추지 않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지배권에 대해서 그 제도가 변경되어서 그들에게서 권위가 탈취될 때까지 그러한 경의를 표한 것이다. 동시에 그러면서도 그들이 점유하고있는지에 대해서 존경을 하였지만 그것이 그의 일을 방해하거나 그의 입을 막는 일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좋지 못하고 공허한 거짓된 직함에 대해서 우리를 거기 얽어 매려고 시도하며 또한 그들의 견해가 아무리 불신앙적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동의를 강요하는 일은 얼마나 우스광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 디그리스와 유브라데스 두 강사이에 놓여 있는 이 지방에 그 이름이 주어진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그가 "하만에 있기 전"이라고 말한 것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갈대아에 저 하란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그 곳은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한 성읍인 데플리니 (Pliny) 는그것을 아라비아의 성읍으로 지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크라서스 (Crassus) 와 로마군의 패전으로 유명해전 곳이다. 그리고 갈대아가 여기서는 메소보타미아의 이름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유브라데스와 디그리스 두 강에 둘러싸여 있는 이 지역은 엄격하게 말한다면 ‘두 강 사이의 땅이기는 하지만 그럽에도 불구하고 지리학자들은 보통 이 이름을 앗수리아와 갈대아에 부여하여 있기 때문이다.

 

 요점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확한 명령을 받아 실천에 옮겨 자기의 고향 땅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쪽으로 보면 그가 고향 집에 있었을 때에 그에게 주어진 바를 찾아 나섰으므로 하나님의 성실 하신 자애가 그를 인도한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는 여호수아서 마지막 장올 보라 (24 : 2-3).  그러나 여기의 모세가 한 이야기는 그것과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1 장 끝 부분 (11 : 31) 에서 아브라함이 고향 집을 떠나 그 조국을 바꾸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는 12장 첫 부분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고 첨가한 것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 나중의 귀절에서 아브라함이 집을 떠난 후에 생겨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데 경솔하고 생각없는 사람들이 가끔하는 습성처럼 아브라함이 타국 땅을 방랑하려는 무모한 생각을 가지고 집을 버린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아브라함의 출발의 이유를 내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다른 땅에 가서 이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가 외국 땅에서 하나의 방랑자였더라면 하나님은 그에게 자기 친족과 아비의 집을 버리고 고향 땅을 떠나 이주하도록 명령하 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모세의 말과 매우 훌륭하계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게 된다. 그것은 모세가 이 여행길이 인간적인 가벼운 심정에서 취해전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된 것임을 관련 시킨 다음에 그는 나중에 앞에서 생략한 것을첨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일을 적절하게 처리하는 일반적인 히브리식의 방식인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 ; 이 서론에서 그는 자기가 조상들로부터 또는 조상들이 지켜온 진실된 종교로부터 추호라도 이탈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모든 것, 하나님께 예배,  율법의 가르침,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이루신 그 약속에 의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고백할 때에 그는 그 최초의 계시로부터 샘물과 같이 흘러 나오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분을 거짓되고 가공적안 신들과 구벌하여 홀로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으로 여긴 것이다.

 

"3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 자기의 고향 땅에서 떠나 유랑하계 되는 일이 그 자체가 그다지 괴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고봉을 더하시려고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다른 시험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가 거주할 만한 땅에 대한 아무런 편의를 그에게 제공하지 아니하셨고 얼마동안 그를 미결상대와 호의 속에 두셨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더욱 더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고향 땅의 쾌적함도 다 버리고 그가 유랑과 다름없는 길을 자진해서 떠났기 때문이요, 또 그가 몸을 안착시킬 만한 확실한 땅도 발견하지 못한 채로 오히려 얼마동안 이 곳 저 곳으로 방황하도록 명령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에 대한 설명이 그에게 연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속임 (Jrustratlone) 을 당하는 일과 거의 비등하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그러한 기본적인 것들로 (tt2) 훈련을받았다는것이 얼마나 그에게 유익하였던가 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바이다. 자신의 일상 경험을 통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큰 일을 떠맡기 열성을 지니게 되지만 그들의 열심이 식어질 때는 즉시 위해서는 거룩한 개원상태로 되돌아오기 그일을 후회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들을 다시 회상함으로써 그의 행로의 귀에 버리고 온 것 도중에 용기가 떨어지는 일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출발시부터 그의 마음을 엄격하게 시험하셔서 그로 하여금 무슨 일에나 경솔하거나 무분별하계 착수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탑을 세우는 일에 관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그 비유가 이 일과 부합된다(눅 14 : 28). 왜냐하면 그가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 건축물이 완성되지 못한 채 남겨지는 부끄러움에 몰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 의 고향 땅을 떠나 먼 나라로 여행하도록 명령을 받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여 러 방향으로 돌아다니 게 하신 것 이 그의 특수한 사항이 었 다고는 하더 라도 그 동일한 말씀 속에는 우리 모두의 소명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이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명백하게 우리의 고향 땅을 떠나타고명령을받은것 ➔:; 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도 자신을 부인하도록 동일한 명령을 받고 있는 것 · 이다. 우리가 아비의 집을 떠나가도록 명령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자신의 의 지와 육체의 욕망을 포기하도록 명령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부모와 처자가 ,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계 한다면 그들을 모두 단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참고 마 16 : 24 이하, 10 : 37 그리고 병행귀절). 아브라 > < 황에게는 떠나라’는단순한 명령이 주어졌지만 우리는 같온 일을 어떤 조건 ; 부로서 하도록 분부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어느특정한장 - 소에서는 하나님을 섭길 수 없게 된다면 그때에는우리가집에서 풀이 죽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엎드려 있기 보다는 차라리 유랑의 길을택하여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눈 앞에 아브라함의 시범 울놓아두어야한다. 그는믿는자들의 아버지요(몸 4:16, 17), 또모든면 으로 시험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의 고향 땅, 친족들, 그리고 자 기 자신을 잊어버렸다.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위탁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성질상 아브라함과 다 롤것이 없어야 한다. _\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우리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바 있었던 것을 유의 할 필요가 있다. 즉 아브라함은 그 의 인내가 시험 받게 되기 위하여 미결정 장태대로 놓여져 있었다는 사설이다. 그리고 T 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뢰하는 일을 배우기 위해서도 그것을 역시 우리 자신의 경험에 관계 가 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눈 앞에 아무것도보이지 않는 때에타도 확실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주요한 과제인 것이다. 실 로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에게 우리가 거주할 만한 땅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들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알맞고 영구적인 안주지는 없는 것이다. 결국 바울이 골로새서 장 절에 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생명온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 온 사람과 같아서 하늘에 감추어 져 있 는 보장율 (salutem) 바라는 것 이 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례자가 되 도록 명하셨을 때에 그는 우리를 오직 그의 약속을 의뢰하도록 만드신 것이 다. 그러한 유예 (猶豫)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양 의 일반적인 규율에 집착하여야 한다. 죽 하나닙께서 약속하신 일을 아직우 리에게 보여주시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곳을 향 하여 전전하여야 하는 것이다.

 

"4 아브라함이·~~~~ 땅을 떠나" ; 이 말 속에서 그의 기꺼이 하려는 신앙의 반옹 (The ready response of his faith) 이 찬양되 고 있 다. 왜냐하면 한번 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지체하지 아니하고 즉시 서둘러서 자기 감정의 우 제를 하나님의 명령의 밑으로 이꿀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가 하만 에 머물렀었는지는확실치 않다. 어쨌든그의 부친의 쇠약이그로하여금거 기서의 충발을 늦계한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서 얼마 후에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 다면 하나님께서 앞길을 분명하계 보여주시기까지 더 멀리 이주하는 모험을 하지 않았기 때 문일 것 이 다. 내 생 각으로는 그 아버지의 노쇠함과 질병으로 인하여 거기에 얼마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훨씬 있음직한 일처럼 보인 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분명히 그가 그의 부친이 죽은 후에 거기를 떠났다 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5절 " ; 여기서 세 가지 일을 유의하여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 종의 인내를 시험하셨다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고향 땅에 서 꿀어 내셔서 가나안 땅에서 타국인으로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은자신을 위해 매장지로 산 땅 이외에는 발을 뻗칠 만한 땅도 소유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현실생활에 유용하지 않는 것은 무엇 이든지 재산으로 생각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 특정한 땅은 얼마간의 돈 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주신 것이 없었 다고 스데반이 말한 것은 옳은 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그 약속에서 기 대하였던 것은 돈이나 그 밖의 무슨 인간적인 수단으로써 획득할 수가 없었 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관찰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아직 그것을 아브 타함에 게 보여 주시 지 않았지 만 그럽 에 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으로써 그를 붙들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도 아직 손에 쥐지 않은 것을 하나 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직해 두셨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그것은 우리를 굳 제게 해 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것 자체, 다시 말해서 토지의 소유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의지가 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었 으며 그 약속만으로 만족하여 그는 가니 안 땅에 서 하나의 유랑자의 불안 .. .:.;__ ;.•,_ f' .;:_ 정한 거주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f1ra77E..<.. 다' (promittr3re) 는 뜻이 기 때 문에 에 타스므스가 그랬듯이 왜 그것 을 ‘하나 "':-",, _: 님이 다시 약속하셨다• (repromisisse) 로 여기서 번역하였는지 나는 그 이 : , . 유를 알 수 없다. 나는 그것을 반대의 의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지만'으 ,·, < 로 이해한다. 그래서 속임수의 현상이 (speciesfrustrationis) 부수적으로 드 ,-~ _:; . 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누군가가 혹시 그것을 차라리 자주 반복된 약속 t~·: , ;;: ;· '--~J;'•{ 라고 해석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각자의 견해에 맡겨 두고 \>' :., :~로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것은 이 약속은 단순한 조롱과 그다지 멀지 l 않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80 세였고그의 아내 는 불임 며 (不姓女) 였으며 그래서 그는 자며룔 낳을 희망을 가 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것은 극 도로 바보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타라자손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하시又 왜냐하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차 문도 하지 않았고 자세히 1 않는 것일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질 캐어묻는 논쟁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입에 서 나오는 말씀을 듈은 그것을 조용히 또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뚜렷한 신앙의 시련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사설을 염두에 두자. 죽 하나님께서는 설제로 그것을 그의 종에계 주 시는 일을 연기하실 뿐 0 니요,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를 조롱하시는 것처 럽 보일런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말씀으로써 그의 종을 격려하고 위로하신다 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어느 정도로 역시 우리를 다루사는 일이기도 하 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이 제상의 상속자로 부르셨지만(社3) 그는 가끔 우 리에계 실낱 같은 생활기준이 될 만한 것조차 제공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도 주시지 않은 채 우리를 버려두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꺼]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 육체를 가전 자의 지혜를 공허화하 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적절한 존경의 심정을 가지계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6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아 애굽에 있을 때 그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치욕적이었던가를 상 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억압 받은 노예상대는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예언하셨던 일이었기 때문에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었다는것 울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쪽으로는 그들의 사나운 기질 윤 길들이고 극기 (克己)를 훈련하기 위해서, 한 쪽으로는 하나님께서 언제 나 그 백성들을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돌에 대한 하나님의 온혜를 찬양 하기 위해서 효과있는 일이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이 마치 죽음 에서 살아난 것처럼 기적적인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온하나의 비상한온 총인 것이댜 동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 (the Church of God) 가 그 들이 살고 있었던 이외의 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는 그들의 조상들 이 성전이 세위지기 이전에 은 율법 의 외적 의례가 제정되기 이전에 독벌  한 백성으로 선택되었고 하나님의 성실성과 지도로써 보호되었었다는 사실 을 불가분 회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요점들은 그 연설의 일반적 주제에 속해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유 용한 훈계를 얻을 수가 있다· 노예상태 그 자체는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더구나 주인들이 가혹할 때에는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로 보인다. 그러므 로 이 거룩한 사람이 자기의 자손들이 노예가 되어 수치스럽고 잔인하게 다 루어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심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약속되어 있는 가나안 땅의 상속과 타국 땅에서 의 노예상태는 그 상황이 정반대로 보였다는 사실온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 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비참한 노예 장래에 두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에, 이룰데면 하나님이 처음에 하선 약속을 잊어버리선 것이타고 누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시리라고 처음에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한 자람의 자손도 없었다. 그것은 고사하고 자너를 가질 희망은 이제 다 자라 쳤다. 결국 언제 그것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지는 것인가? 그가 죽은 후인 가? 하나님은 바로 다음에 계속해서 그의 후손들이 · 타국으로 꿀려가서 타 국인의 노예가 될 것이타고 말씀하신 기록이 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랜 세 월 동안이라는 말인가? 백년 동안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시지 않으려고 손을 메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인가? •: ..:_: 이런 일은 단 한번만 되어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님은 가끔 스스로 모순되신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이 우리롤 다루시기 때 문이다.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취소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방식으로 그 며 ,,;:;_ •. ·::- 는 말씀하시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 모 ii'. ·;-,/~.: 낱`국 : 순이라고 결론 짓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서 'f--~·:'.,, ~ 훌륭하계 일치하고 있으며 그의 하시는 일과도 일치한다는 사실온 믿기 ~:Ji~f;< 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들의 신앙의 눈을 더 멀 ".t~>)~- 까지 확대지키기 위하여 마치 양자 사이에 큰 거리가 끼어 있는 것처럼 t;~ 뇨 약속을 먼 곳에서 보여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수한 곡절을 통하 깊閔’》 臨전.- -~ , 각종 장애를 통하여, 큰 거리를 통하여, 심연의 복판을 동하여, 그리고 .~ ·¥'vI;' r\ 설••; . . : 1 • 침내는 죽음 자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을 향해서 길을 재촉하 ~-다;., . 낡 애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 } !6. 백 성 이 애 굽인의 노예 가 되 어 잔혹한 고동을 받은 것 을 볼 때 에 우리 도 ,.-,---,·",, . 늘에 같은 상태가 우리에게 임한다 해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폭군 히는 일은 새로운 밑에 억압되고 또 말하자면 0 - 일이거나 희귀한 일이 O 才한 자들의 발 밑에 밟 }니기 때문이다.

 

"7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십판하리니" ; o 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1 십판은 그 백성의 해방과 관 of the Church) 이 심 으 자신 이 교회 의 해 방자 (the Deliverer 코 보이시려고 자신의 애굽인의 포학과 잔인에 대하여 가호 아래 두신 그 백성을 위해 리가 악한 자들에 나하여 ° 불법하계도 보복 하셨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 세상의 십판자시어서 괴로움을 당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이 타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자. 어떠한 포학도 벌하시지 않고 A 는 일은 없을 것이 “나는 이 세상의 심판자이 그리 고 각자가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하자. 위에 대해서 보복하시는 것이 신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위법행 하나님의 독성이기 때문에, 이제 나를 괴롭히 는 자들은 그의 손에서 도망칠 기 32 장 35 절에도 있는데 거기에서는 브 수가 없을 것이다. " 그와 유사한 귀절이 신명 기 수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 씀하셨다. 이로써 바울도 로마서 12 장 19 철에서 우리가 "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죽 ‘‘하나님이 복 수하실 것이타고 약속한 사실은 우리의 성급함을 고쳐주고 또 나쁜 감정을 억제하는 일에 들림없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보복하는자 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해 있는 그 기능윤그로부터 빼앗는 일이 되 기 때문이다. " 어쨌든 시편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같이 ‘‘나의 기름부 온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105 : 15) 고 한 말씀대로 하나님은 그 자며들에게 가해전 위해 (危害)에 보복하시기 위하여 목별한 관 십을 기웅이신다고 내가 이미 말한 바를 우리가 기억하여야 한다.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그러므로 구속 (redemp· tion) 이 성전이나 율법의 의식아 생겨나기 이전에 먼처 행해졌다. 여기서 하 나님의 은해는 의식에 속박받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와 동시에 스 데반은 그둘이 구충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지적해 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온 자기의 이름에 대한 순수한 예배가 시행되게 하기 위하여 특정한 백성과 특정한 장소를 택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관찰해야한다는사실을 얻어 넬 수 있다. 다론 국민들도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뜻은 가지고 있다. 그러 나 그듄의 예배 의식은 어디서나 타락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다른 국민들과 구벌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을 성실하고 적절하게 예배하도록 한 장소를 그들에게 지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절은 우리 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해 준다. 즉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인간이 하나님을 전십을 다하여 예배한다는 그 목적을 따라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사실이 다. 이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의 보화를 전 세계 어디에나 나누어 주셨 키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어디이든 간에 우리는 순결하고 거룩한 예 배 롤 그에 게 드립 으로써 그의 거 룩하심 (sanctificemus) 이 영 광을 받게 되 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할레 타는 것 이 하나의 신성한 계약임을 인식했을 때에 그는 자신에게 가해전 거짓된 중상에 대해 서 넉넉하계 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만일 유대인들이 자 기들의 구원의 기원을 외적인 표적에다 둔다면 그들은 잘못되어 있다는 것 을 그는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만일 할례를 받기 이전에 부르십을 받았고 또 그 땅과 구원이 그의 자손들에게 약속되었다면 그들 전체 국민의 영광이 할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도 로마서 장 11 절에서 동일한 사실을 논하고 있다. 왜냐하 면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울 때에 다 하십을 얻었으며 하나 II 님을 기쁘게 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으로써 할례가 의의 원인이 되지 않 " ··~· 는다고 추론하는 것 이 다. 그러 므로 유대 인들은 자기 들이 자기 조상들과 함 : \ 째 어떻게 하나님에 의하여 양자로 삼아졌는가를 상기하게 되는 일은 이 경 :~. 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기 때문에 스데반이 한 말은의 .: . f 심스럽 거 나 빗 나간 이 야기 가 아니 타는 것 을 우리 가 알게 된다. 그리 고 이 두 :: 가지 사항, 즉 할례가 하나님의 은혜의 표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정해 친 것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로 삼은 일이 할레보다 이미 앞 ;] 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스데반이 분명히 표명하였는데 그것은 있음직한 일 이다. 결국 여기서 례의 의미와 질에 대해서 더 이상 게 의할 요 는 없다. 다만 이것을 유의하여야 한다. 죽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할례로써 하시 는 그 사항을 에 게 우선 하신 것 인데 이 써 리 논 하 나님의 말씀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표적 은 공허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인 하계 된다는 사실이다. 또 우리는 이 ‘계약'이라는 말에는 하나의 매우 유 한 르침 이 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하나 께서 는 우티에게 대한 그의 사탕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례전에서 우리와 계약을 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만일 것이 타면 첫째로 성례전은 사람들 앞에서의 외적인 고백의 증표일 뿐만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의 내적 인 신앙의 확증케 하는 효과도 있는 것이요, 둘째로 성례전은진리이신 하냐 님께서는 자신이 성취하시지 않은 것들 안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내시지 않으­ 시는 까닭에 그것이 공허한 형식이 아닌 것이다.

 

"9절" ; 이제 다음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의 가장 수치즈러웃 행동 올 보여준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무고한 동생을 끝장내려고 악하고 잔인한 흉계를 꾸민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찬인성은 비인도적인 처사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것이 소수의 사람들이 저지론 개인적인 법죄였다고 t 변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단 한 사람 베냐민을 제외한 모든 족장들은 1 비열한 처사에 동시에 자신들윤 더럽혔으므로 그 불명예는 그 백성 전체에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그들에게 하나의 영예로운 칭호의 체 민을 세워주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욱 모든 국민의 망산거리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찬양하였다. 그런데 그들 중 의 족장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그들은 아주 철저하게 동생 살해범이었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 왜냐하면 노예라는 것이 일종의 죽% 이 타는 사실을 떠 나서 라도 우리 는 그들이 먼처 음모한 사실이 라든지 그리 고 나서 요셉이 그 잔인한 학대를 견디어 낸 일이라든지 그러한 일들의 모든 죄 책이 그 형듄에계 있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분명해전 것 온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려 저항했을 때에 그들은자신들을경멸하였다고하 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하여 부드러우시고 너그러우셨다는 사실이 다. 왜 냐하면 그들은 자기 들을 구원하는 집 행 자 (the means of their deliverance) 가 될 바로 그 사람을 죽이고 파멸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포기하게 된 일이 다른 아무의 허물도 아 니요, 그들자신의 허물인 것이다. 그와 비슷한 일로 모세를 그 백성들의 구 원자로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데려왔을 때에 모세도 거절당했다고 스데반은 조금 후에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혈족의 우월성에 대 해서 자랑할 만한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해야할 남온일 이란 부끄러움과 당황함으로 자선들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오칙 하나님의 자 비의 덕덱으로 알고 강조하는 일이요, 또그것을빛나계 하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돕는 데 있어서 자신의 능력 을 분명 히 나타내 보이 는 그런 방식 으로 그와 함께 하신 것 은 아니 었 다. 왜냐하면 시편 105 편 18 절에서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타고 한 말씀이 하찮은 일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자기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었을 때 그리고 또한 쇠사슬에 얽매인 굴욕으 로 고통을 받고 동시에 파렴치한 사람에 의하여 형벌을 받게 되 었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술품으로 충격을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하나님께서는 가 끔 당분간 숨어 계시는 방식으로 그의 자너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더구나 요셉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부르젖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멀 티 애굽에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속 엽두에 두어야만 한다 . . 

 

"10절 " ; 스데반은하나님께서그를바로의 눈에 들게 하셨다는그방식을첨 ''· ;· • 가한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 그를 도와주실 수도 있었을 ." .k · ’ .k'`t' 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훨씬 먼 곳에 있었다. 즉 요셉은 그 왕국 의 제상이 되어 그의 아버지와 그의 전 가족을 인수하계 된다는 사실이다. 어제 은총’과 ‘지혜'라는 두 말에 대해서는 그 ' 속에 환치법(換置法; pallage) 이 있다. 왜냐하면 요셉이 지녔던 지혜가 그가 총애를 받은원인 이었기 때문이다. 그 두 말이 각각 다론 은사였음을 나도 인정하기는 한다. 비록 요셉이 충실한 꿈 해몽자였고 거룩한 지혜를 풍성하계 소유하였다 하 더타도 만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어떤 비상한 사랑으로 향하도록 감 · 동하시지 않았다면 그 거만스러운 전제군주는 그롤 그처럼 영예스러운 높은 : 자리에 올려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총애를 베푸 .' 신 그 일의 양식에 대해서 세심한 고찰을 할 필요가 있다. 지해라는 것은 : 뭉올 해몽하기 위한 예언의 온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훌륭한 조언을  주는 신중성도 뜻한다. 모세는 이 둘을(駐4)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스 데반이 여기서 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항은 모든 사람에게 연 장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소유하는 재능은 무엇이거나 불평등의 칙 도로 생각될 성질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사 가운데서 실상 그의 특별한 온사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온사를 주시기를 기뻐하신 그 목적에 봉사하기 위하여 자기가 기뻐하시는 대로 성 공적인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분도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요 셉이 바로에 의하여 애굽 전국을 지배하는 자리를 맡았다 하더라도 더욱 적 절하계 말한다면 하나님의 손만에 의해서 그가 영예의 지리에 울리워진 것 이라고 하겠다. 

 

"11 그 때에~~~~온 땅에 흉년들어" ; 이로써 요셉의 구충이 야곱의 전 가 족이 공동으로 참여하게 된 하나의 축복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흉 년이 닥쳐오계 되었을 때에 요셉은 알맞은 시기에 앞서 보냄을 받아서 굶주­ 린 자들을 위한 식량을 손에 넣계 된 것이요, 또 그 자신도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의 놀타우신 목적을 달았기 때문이다(창 45:5-8). 요셉이 바로그 의 형들의 음식을 공급해 중 심부름을맡게 되고, 그들이 돈을 받고 그를 팔 았으며 그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꿀려 갔고 그래서 그가 이 땅 위어l 서는 완전히 흔적이 없어졌다고 생각되어졌을 때, 그러한 당연한 순서를 밟 아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자애가 요셉의 인간 속에서 더욱 분명하계 빛을 발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구덩이에 던지고 자기들이 모두 호흡하였던 공기 마처도 그에게서 박탈하였던 자들의 입에 양식을 공급하였다. 이를데떤 그` 는 자기의 생명을 탈취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생명을 키우고 소 중히 한 것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스데반은 다음과 같온 사실을 유대 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즉 그들의 족장들은 자기들에게 유업으로 주` 어전 그 땅으로부터 불가불 떠나야만 했고 그래서 그들이 다론 땅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온 그 땅에서 나그너]였었기 때문 에 결국에는 멀리서 망명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14절 " ; 야곱이 75명의 가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왔다고 말한 일에 대해서 스 데만은 모세의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모세는 70 명으로만 말했을 뿐이다. 여기 대해서 제롬 (Jerome) 은 이렇게 생각한다• 즉 누가는 스데반이 말한 바 의 정확한 숫자를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만 가 말한 숫자(창 46 : 27) 냐하면 의 70 그가 인경 (the Septuagint) 에 서 그 숫자를 가져 왔다는 것 이 다. 그것 은 왜 떤 헬라어의 개종자였으므로 읽기 히브리어를 잘 몰랐기 때문이거나 그렇지 않으 가 (reading) 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양보하기를그 의도적으로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헬라어 역자들이 그 숫자를 되었는지 번역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나중에 그것이 잘못되어서 끼어들게 각된다. 헬라인들은 어떤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가 물론 쉽게 생 다. 어거스탄의 숫자를 알파베트 문자로 표시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 포함되어 〈하나님의 도성〉 26권에서는 요셉의 손자들과 증손자들이 있다고어거스탄은생각한다. 는말은야곱이 따라서이 ‘애굽으로내려가,(駐5) 라 생촌했던 그시절에 전체 가족을의미하는것으로생각한것 족장들에서도 이다. 그러나 그런 그 기간에 추측은 어떤 형편에서도 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론 70 인경 번역자들이 많은 자너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 있음직한 일로 모세가 기록해 놓은 것을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하는 말 말할 보인다. 왜냐하면 그 역자들의 마음이 갈팡질팡했었다고 22절에 수는 반복되어 없기 때문이다. 이 특정한 숫자가 (70 인-역자 주) 신명기 10 장 귀절이 적어도 있는데 모세의 것과 일치하며 제롬 (Jerome) 시절에는 이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런 논란이 없이 읽혀졌음을 고려한다면 그 타당성을 알 \ 러므로 나는 그러한 오늘에 인쇄된 사본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6). 그 •. , ·: 고 결론을 짓는다. 불일치는 책을 복사한 사람들의 잘못에서 생겨난 것이라 . <:·.:: . 누가가 그 그러나 그들이 헬라어를 읽는 것으로 습관을 삼았던 때에 ~/:' .,] 일은 아니었다. 일로 이방인들을 또 혼란시켜 주어야만 했던 사실온 그다-~l 중요한 ~i~ 귀절에서 그것을 잘못 그 변경해서 자신온 전실한 숫자를 기록했는데 누가가 모세의 그 옮겨놓았다는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J;:. •· {. ;.:1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대로신약성서는히브리어를전혀 : , . ' 타어를 철저히 알지 못하고 다만헬 ~ . ' 므로 스데만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 1. ' '广 에 있는 모세의 기록인 귀절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의 헬라어역 :, ' . ,; 일 누구든지 잘못된 이 일에 숫자가 역시 이 곳에 전제되었다는 일이 가능해 보인다. 만 • ]해의 우월을 대하여 고집스럽게 논쟁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 ,' ,i 서 말썽을일으키고지나친 허용하여 버려두기로 하자. 우리는 바울이 족보 문제에 대해 호기심을가지는것을금한사실이(딛 t< .. ·,:::_.I,.: 미한 일이 아니라는 3_:9) 무 것을 기억하자. 결국 이러한 소수의 숫자가 의도적으로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다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은 동안에 그들 부족의 수효가 굉장히 크게 증· 가된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났음을 보이려는 때문이다.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백 50 년 내에 출애굽기예 보도된 바와 같은 그러한 큰 군중 이 인간의 생식수단만으로는 생겨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바꾸어전 숫자에 관한 단순한 문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난처해 하기보다는 차 타리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기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더 타당 한 일이다 . . 본문의 남은 부분에서 정말 해결하기 더욱 곤란한 다른 문제들 이 생겨난다. 

 

"16절 " ; 스데 반은 족장들이 죽은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옮겨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세는 요셉의 유골에 언급했을 뿐이다(충 13 : 19) . 또 여호수아 24 장 32 절에는 요셉의 유골이 장사된 사실 이외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그 일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즉 요셉은 자기 유골에 대해서 분명한 지시를 주었는데 나른 이들은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세는 경의를 표하려고 요셉의 이름만을 언급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 파울라 (Paula)의 여행에 관한 기록에서 제롬 (Jerome) 은(파울라는 제롬의 여제자(女第子)一역자 주) 그녀가 세겜을 통과했을 때에 거기서 12족장의 무덤을 보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요셉의 무덤 밖에는 언급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들을 위해서는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가능한 일이다. 내가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일부의 표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 (提輸法; synecdoche) 을 사용한 것이거나 혹은 누가가 말하고 있는 사항이 모세로부터 인용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유대인들에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듣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많은 사항들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에 전해진 전통(Jama)에서 얻은 것이거나 그 어느 쪽일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아브라함이 하몰 자손들에게서 사들인 묘소에 장사되었다고 그가 속 이야기 을 때에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잘못이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장사지내기 위하여 헷 족속 에브론으로부터  배의 동굴묘지를 구입했다(창 23 : 9). 그러나 요셉은 다른 장소에, 즉 그의 아버지 야곱 이 하문의 손들로부터 어란 양 백마리를(証 7) 주고 산 밭에 매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