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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7:36)

1. 성경 (행 7: 17 ~ 3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7)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8)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19)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0)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1)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22)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3)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24)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5)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6)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7)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8)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29)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0)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1)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2)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3)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4)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5)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6)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7)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7장 “ ; 스데만은 그 백성들의 해방 이야기로 옮겨간다. 그많은수효의 자손들, 단시일 안에 그처럼 비정상적으로 불어난 사건은 이를테면 해방의 서곡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백성의 불어난 일이 하나님의 특이한 은시요, 그래서 그런 일은 통상적인 수단이나 정상적인 자연 질서에 의해서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도록 가정하는 것이다. 실상 다른면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로부터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신 것처럼 보인다. 바로는 .그들을 폭군의 가혹성으로 괴롭혔고 날마다 그들의 노예상태는 더욱 비참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내아이는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에 그들 전체 민족은 이제 멸망이 다가왔다고 보았다. 모세가 나타났을 때에 다른 하나의 구제의 표적이 주어졌었으나 바로 얼마 뒤에 그가 거절당하고 망명의 길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오직 실망 뿐,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기억하셨고 때가 되어 그 백성들을 불어나게 하셨다.  그래서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바를 수행하시려 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배은망덕하고 사악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문(은혜의 문—역자 주)을 스스로 닫아버린 과오를 범한 것이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의 기회의 순간이 자신의 행동과 부합되게 하시려고 때의 흐름과 변천을 조절하실 때에 그분의 섭리를 인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말해오고 있는 그 조절에 대하여 단순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들의 요구로 인하여 무질서하게 조급해져서 그로 인해 하나님이 그 손을 보여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조용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기쁜 증표를 가지고 빛을 발하시게 될 때에는 언제나 그 자녀들의 신앙을 훈련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소망을 갑자기 끊어 버리는 다른 것들을 대신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내앙들은 죽여 없애라는 왕의 칙령이 전해졌을 때에 히브리이늗은 완전히 끝장이 났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명상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더울 더 필요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죽이시고 또 다시 살피시며 깊은 곳으로 끌어 내리시고 다시 끌어 올리신다는 사실이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 벌계이트 (Vulgate) 역에서는 이를 속여 넘기나' (circumvenire)로 번 역 했다. 그것은 잘된 번역 이다. 왜냐하면 애굽 왕이 유대 백성들 위에 한충 더 무거운 일을 부담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술책과 음험한 구실을 교활하계 생각해냈다고 스데반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폭군들이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부정하계 그들의 백성들을 학대한다 하더라도 어떤 구실을 찾아내는 데에 극히 교묘한 것이다· 그래서 바로가 표면상 가장 정당하다고 보았던 바를 악용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즉 기류자(寄留者)인 유대인들이 자기 왕국 안에서 자유로운 환대를 받는 일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며 또 그들은 많은 특권을 향유하고 있으면서 책임에서는 면제되는 일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활하게도 그들을 자유인으로부터 경멸 할만한 노예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스데반이 이 폭군은 요셉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을 때 인간들은 얼마나 쉽게  그 은의 (恩諒)를 잊어 버리는가가 분명해진다. 비록 배온망덕이 일반적으로 미움을 받는다 해도 그것보다 더 일반적인 죄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더 불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한글개역성경에는 없음)” ; 내 의견으로는 에라스므스가 이것을 적절하게 번역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헬라어 ‘조-오고네이스다이’라는 말은  ‘저들의 어린 아이들이 살지 못하게’라는 뜻 이상의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말이 한 민족의 생명이란 언제나 그들의 자손에서 존속하여 살아 남는다는 사실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데반은 그들의 학대의 모습을 다 열거한 것이 아니요, 극단적인 잔인성의 한 예를 든 데 불과하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쉽게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전자손이 얼마나가까이 파멸에 접근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로는 그 잔인한 명령으로써 일거에 마치 한 칼을 베듯이 그들을 모두 살해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려나 이러한 폭력적인 만행은 예기치 못한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실증해 준다. 왜냐하면 아무리 제 맘대로 모든 수단을 다하여 하나님을 저항한다 해도 바로는 결국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절 “ ; 스데반이 그 때의 사정을 염두에 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모세가 태어난 것은 왕이 모든 사내 아이듈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던 때였다. 그러므로 해방의 수행자로 태어나기 전에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인간의 도움이나 권고가 불가능했을 때에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가지시게 된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간의 약함 중에서 자신의 능력을 완전하게 나타내시는가가 역시 아주 분명해졌다(고후12:9). 모세는 3개월동안 보호되었다.그러나 그의 양친은 자기들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그를 강변에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단지 그들온 그가 빨리 죽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그만 상자 속에 그를 넣었을 뿐이다. 바로의 딸이 그를 구해 냈을때 그가 죽음을 모면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단절되어 다른 민족에게 속하게 될 뿐이다. 더우기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하루 아침에 자기 동족에 대한 가장 두려운 적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동족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우애의 표시를 보이게 되기까지 40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22절 “ ; 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웠다’고 누가가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모세의 뛰어난 점으로서 그뮬 칭찬하고 있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처럼 그는 세 속적 학문의 지식을 가지고 자만하는 자가 되어 평범한 백성들을 경멸하계 되는 일도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시러는 뜻을 굳히셨기 때문에 그러는 동안에 그는 모세의 마음도, 그밖의 모든 일도, 자기의 하실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준비시키신 것아다. 여기서 인간의 육체적인 심정이 이렇게 항의할런지도 모른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긴 세월 동안 그 백성내의 고뇌를 못본 채 눈을 감고 계시는가? 왜 그는 바로로 하여금 날마다 더 포악하고 잔인해지도록 허용하시는가? 왜 그는 모세로 하여금 자기 동족 가운데서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의 딸의 양자로 되게 함으로써 그를 이를테면 이스라엘 자손들로부터 유괴해 버리셨는가? 왜 하나님은 그가 40세가 되기까지 궁중에서의 쾌락 속에 남아있도록 바라셨으며 그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실재로 나타난 결과는 너무도 놀라운 것이어서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기 위하여 비상한 목적과 배려에 의하여 지배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밖에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이중적인 탁월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기량과 학식에 있어서 풍부한 한 사람이 동시에 또한 탁월한 일을 성취하기에 알맞을 때에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스데반온 모세가 회귀한 은사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주 비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처럼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만큼 그가 자기들의 구속(救讀)의 종이 되리라는 희망을 더욱 적게 가졌던 것이다

 

“23 나이 사십이 되매~~~~~” ;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에서 모세는 자기의 동족을 위한 어떤 생각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스데만의 말은 차라리 그 반대의 견해로 기울어진다. 즉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침내 그의 마음을 일깨워 주셔서 오랫동안 자기가 무관심해 왔던 형제돌을 찾아서 가도록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실상 그가 자기의 출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그것은그 가자기 몸에 출신에 관한 표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 만일에 그의 출처가 알려지지 않았다면 왕의 공주는 그롤 양자로 삼았을 때에 불명예스러운 추문의 의심을 받지 않고는그렇게 할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궁정안에서 그의 출신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렌 세월에 걸쳐서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람을 감히 공공연하계 표명할 만한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었다. 모세가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왕의 궁전에서 무위로 세월을 보낸 사실온 하나님의 영광을 더하계 하는 일에 크게 공헌한 일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가 모든 사람둘의 희망과 자기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돌연히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 일어난, 자기 형제들에 대한 이 새로운 관심은 성령의 새로운 그리고 신기한 감동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었다.


“24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이러한 광경은 우연하게 모세에게 부딪쳐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기 백성을 해방할 자로 지명하셨을 때에 그는 이런 표적, 이를데면 모세의 손에 의한 이런 전주곡이 생겨나도록 하신 것이다. 모세는 아무 분별 없이 일에 대처한 것이 아니요 자기의 사명을 의식하고 그 백성의 옹호자로서의 합당한일울 한 것에 불과 하다고 스데반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고무하시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리 악하고 불법한 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사람을 살해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악한자들에게 저항하고 그들의 포학을 제지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저들의 위해 (危害)에서 수호하는 일은 거룩한 일이요 크계 찬양할 만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자신을 위하여 보복을 자행하는 개인의 권한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세 는 자기의 권한에 의하여 자기 손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칼이 주어지기까지는 애굽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영웅적인 성격의 위대성온 성령의 역사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임명한 사람듈에게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목 거기 합당한 그의 능력을 효과 있게 발휘하시기 때문이다. 요컨대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계약을 따라서 그 날이 가까와 오고 있기 때문에 모세는 이미 그 시절에 해방의 수행자로 백성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며 그러나 그 백성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있었다는 것이다.

 

“26 이튿날......모세가 와서.....” ; .스데반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단순히 조상들에 의하여 무시되었을 뿐 아니요 악의로써 거절되었다 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떤 그가 설명하고 있는 그 악한 행위가 비록 단 한 사람에게서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바로 그 죄를 그들 모두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었다면 다 함께 그의 건방진 언행을 제지했어야 하였을 것이기 때문아다. 그러나 그들은 다 입을 다물었고 또 모세가 그들을 위하여 행한 선행으로 인하여 책망을 받는 일을 허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걸고 보호 하여야 할 그사람을 가장 큰 가능한 위험 속으로 내던져 버리고만 것이 그들이 할수 있는 모든 일이었다.  이 연설의 취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죽 그들이 조속하게 구원을 얻지 얻지 못하게 된 경험이 그 백성 자신들의 허물이요 다른 아무의 허물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사악이 하나님을 지연시키는 원인이 되는 사실은 흔히 생겨난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자기 백성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베푸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가지 방해로서 그의 손길이 우리에게서 멀어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우리가 그의 더디심 (His slowness)에 대해서 잘못된 불평을 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배은망덕한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너무도 큰 무례를 보이는 일이요 또 모세에게 대해서는 너무도 심한 잔혹함을 보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궁중에서 그러한 충실한 옹호자를 그들에게 주신 일에 대해서 그 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들의 모든 사랑과 존경으로써 영예를 받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는 치욕과 협박이라는 매우 가련하고 매우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결국 그 사건이 왕에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그 백성들의 배신행위로 볼 수 있는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나중에 가서 그 백성둘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자기들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 거기 들어가는 일을 막는 일이 생겨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들이 한 사람에 의하여 (in the person of one man) 하나님의 은혜률 거절했을 때에 40년 간이나 그들의 해방의 시기를 지연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결정하셨다고 할지라도 그러면서도 그 지연의 죄가 바로 그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모세를 방해하고 그를 괴롭혀 준 자들의 탓으로 돌려지기 때문이다.

 

“너희는 형제라~~~~~” ; ~~그러나 모세는 자기의 권위의 힘을 의지하여 그롤 책망하지 않았고 단지 우호적인 방법으로 동등하게 그를 타일렀을 따름이었다. 혹은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우리에게 훈계를 할 의무를 가전 사람이 오직 재판관뿐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이 힘이나 권력에 의하여 그렇게 하도록 강요되지만 않는다면 아무전 권면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완강하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의 공통된 결함인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자기듈의 의사(醫 師)들을 향하여 맹렬하계 폭행을 하는 미쳐 날뛰는 환자들과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와 비슷하게 우리의 과오를 고쳐주기 원하는 사람들을 대항해서 맹목적인 분노를 터뜨리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격분을 억제하도록 수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 실예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즉 그처럼 악하계 행동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직분를 수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끊임없이 많은 상해롤 견디어 내며 많은 모욕을 참으며 위험 속에 빠지며 또 더구나 자신들이 잘 하고 있을 때에 자신들에 관한 좋지 못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그일을 감당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듈은 그러한 악한 자들의 모욕을 다 삼켜야만 하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위탁하셨고 또 그로써 하나님을기쁘시계 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바를 중단하는 원인이 되지않게 해야 한다. 모세는 스스로 지배자의 법적 권한을 부당하게 빼앗으려 한다는 잔인하고도 거짓된 비난을 여기서 결머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그는 대역죄를 범한 자라는 협박을 받은 것이다. 둘째로는 그가 애굽 사람을 살해 했다는 불명예스러운 비난이 그에게 부딪쳐 왔다. 이들이 다 극도로 모욕적인 것이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참으로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그 위험스러운 공격(tentatione)에 의하여 깜짝 놀라게도 타격을 받았는가 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옳게 행동한 일을 후회 할 정도로 추방 혹은 다론 어떤 괴로움으로써 놀림을 받지 않았음을 우리가 볼 때에 우리도 역시 사단의 그와 유사한 모든 술책에 대항 하여 확고하고 깨뜨릴 수 없는 용기를가져야 할 것을 이 사례를롱하여 배우는 것이다.

 

“30 사십년이 차매” ; 모세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떠올라서 그의 사명의 확신을 약하게 할수 있었을 것을 누구나가 쉽게 추단하게 된다. 사단은 교활한 계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나면서부터 의혹에 대한 현저한 경향을 지니고 있어 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우리의 마음에 스며든 의혹이 무엇이든간에 쉽게 문을 열어 준다. 궁중에서의 줄거움과 훌륭한 생활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초라하고 곤비한 일을 떠맡기 위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은 하나의 어려운 변화였다. 그리고 특히 모세는 광야로 추방되어서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 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의 공허한 조롱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무슨 다른 결론을 그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장인 집의 양떼를 돌보기로 약속되었던 때는 이미 80세의 나이였기 때문에 언제 자기의 임무가 그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에 유용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에 걸쳐서 어느 때 거나 우리를 불안정한 상태 속에 버려두시는 일이 흔히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심정이 의기소침하지 않게 되기 위하여 성도들의 그러
한 고투에 대해서, 그런 고투가 우리의 기억 속에 철처하계 새겨지기까지 늘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한편 모세는 그 기간 중에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으며, 말썽장이들이 흔히 하는 식으로 탁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무슨 모양으로든지 스스로 밀고 나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하나의 훌륭한 자세의 시범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어떠한 보다 큰 임무에 부르심을 받은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목자의 직무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때에 주께서 알맞은 때에 그에게 나타나셨다

 

“천사가 ~~~~그에게 보이거늘” ; 여기서 첫째의 질문은 "천사란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요 둘째는 "왜 그는 그러한 모습으로그에게 나타났는가?"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누가가 그롤 한 ‘천사'라고 부론 다음에 그를 소개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온 이렇게 대답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 사자들에게 특히 자신에게 속한 고유한 것들을 나누어 주시고 공유하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천사는 공공연하계 자기가 영원한 하나님이시요, 그의 존재가 자기 안에 있으며 만물이 자기 안에 존속하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이 증언은 반드시 하나님의 본질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이 어떤 면으로도 천사에게 해당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적절할 것 같다. 즉 천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위격(位格;personam)을 떠맡고 있는 것이요 마치 자기가 그 한 마디 한마디를 하 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 명령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방식으로 말한 일은 예언자들에게 매우 혼하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조금 후에 누가는 이 천사가 바로 모세가 그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 그 백성을 해방한 동일한 천사였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바울이 고런도전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가 바로 그 인도자였다고 표명하고 있기 때 문에, 이 천사가 홀로 하나님에계 속한 것은 자신이 부여 받았느냐 아니냐에 대해서 우리가 이상히 여겨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과의 어떠한 시귐도 이루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