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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7:50)

1. 성경 (행 7:44~53)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4)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5)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6)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7)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8)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49)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0)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1)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2)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 개역개정 사도행전 7:5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44 증거의 장막" ;스데반은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가 그 백성들의 고삐를 풀어 주어서 제멋대로 방황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처럼 유대인들의 각종 미신으로 인하여 스스로 타락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규정지어 주셨다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이 따른다. 즉 그들이 하나님께서 재정해 주신 형식을 따르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처럼 많은 과오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는 두 가지 이유로 그들을 책망하였다. 첫째로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을 위하여 무모하게 괴상한 의식을 고안해 냈다는 사실, 그리고 둘째로는 성전 자체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나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여러가지 의식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이 그들에게는 신령한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 있어야만 했던 것인데 그들의 관눙적인 견해 때문에 그듣은 단지 땅의 것과 육의 것만을 움켜 잡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체 대신에 그림자에 마음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자신의 조작을 따라서 그리로 끌려갔기 때문에 그들이 우선 책망을 받은 것은 그들의 주제넘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신령한 일 대신에 육적인 일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참되고 성설한 예배를 역용하고 난용한 사실에 책망이 떨어졌음을 우리는 본다. 그들에게는 ‘중거의 장막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 , 범죄의 길로 달려가게 된 것은 오직 그듣 자신의 음탕함과 무사려로 말미암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철저하게 가르침 받았음을 보게 되면 알지 못해서 그랬다는 구실은 그둘에게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주목을 끌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굴레를 씌워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때문에 이를테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수락한 다음에 딴 방향으로 발길을 돌이킨다면 그 죄책은 이중으로 지게되기 때문이다. 주인의 뜻을 안 종이 알면서도 그 뜻을 이행하지 않을 때 더욱 심하게 매를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눅 12 : 47).  이것은 모든 변질되고 타락한 의식과 참되고 성실한 예배를 성령께서 구별하시는 첫째 되는 특징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간단히 요약한다면 참된 예배와 우상숭배와의 사이에 있는 기초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즉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행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은 자는 자기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나 하도록 권리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뜻을 법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이 정해 놓으신 것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중거'라는 말은 또한 이것과 관계된다. 히브리어 '모―에드'는 미리 정해진 장소나 시간, 혹은 인간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모세의 기록에서 그 말을 사용한 방식은 그 이름에 대한 다른 근거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모세의 기록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주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리라" (출 29 : 42, 43, 30 : 6. 36) 고 하신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막'은 계약과 주의 말씀으로 성별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그의 음성이 끊임없이 거기서 울려 퍼쳤고 따라서 그 곳은 다론 보통 장소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저가 본 그 식대로" ;  이것은 내가 언급한 둘째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는 것 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의식만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외형의 의식이 하늘의 진리를 나타내 주는 상징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외적 의식에 마음을 쓸 여지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외형적인 모습에 애착을 느껴 거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고대의 장막 구조가 하늘 모형을 따라서 완성되도록 원하셨던.것이다. 더구나 출애굽기 25정 40절에서 모세가 언급한 ‘식양' (typum)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나의 히브리서 주석 (8:5) 에서 찾아낼 수 있을것이다. 단지 스데반은 여기서 간명하게 다음과 같이 경고할 뿐이다.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신 예베는 영적인 것이었 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육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그것을 나쁘게 또는 맘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해 온 바와 같이 어떠한 예배로 하나님의 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그 계명을 적절하게 시행하기 위해서는 영적 진리의 현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 한다.  이 논쟁할 여지가 없 는 사실과 유사한 문제가 바로 내가 말한 바, 그림자가 실체에 복종하여야만 하느냐 아니냐 하는 점인 것이다. 모세가 그 식양 (forman)을 보았다고 한 사실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대로 형상들을 만들도록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의 성령은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감각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형상에 골뚤히 기울여져야 할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 전체가 그것에 따라 형성되게 될 것이다. '식양' (typus) 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기본적인 모형을 의미한다. 그것은 영적 진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45 우라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 이 사실로 인하여 그 백성들의 완강함이 더 한층 나타났다. 즉 이 장막은 그들과 함께 존속되었고 또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지고 갔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중거의 범위 안에 머물려 있을 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반역적인 속 편한 마음으로써 괴상하고도 모독적인 의식을 되풀이 했다· 하나님이 저들 가운데 확실히 거하신다고 공언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처럼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유산에서 하나님을 추방했던 것이다. 이에 덧붙여서 하나님께서는 각종 많은 기적으로써 그 장막을 영예롭게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의 많은 부분에서 분명한 바와 같이 장막의 진가는 유대인들이 획득한 많은 승리에 의하여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러가지 많은 방법으로 인정된 예배 방식에서 후퇴하는 습성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굉장한 옹고집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 주의 법궤가 오랫동안 실로에 휴식처를 정하고 있기는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다윗의 통치시대까지는 안정된 거처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모세가 매우 빈번히 그 일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주께서 지시하시는 장소에 그것은 안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상 다윗은 그것을 적에게서 탈환한 이후에도 주께서 그 천사를 통하여 그 장소가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었음을 하늘로부터 알려 주시기 까지는(삼하 24 : 16) 자신이 감히 아라우나 (Araunah) 의 타작마당으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에게 그 장소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곳으로 보여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하선 은총이라고 스데반은 자못 옳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편에서 (122 : 1, 2) 그 일을 매우 크게 평가할 만한 일로 여겨 기뻐하고 있다. "사람이 내게 말 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제사장과 왕의 직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법궤의 설치 (statione) 는 다윗의 통치의 확고 부동성을 과시해 준다. 그것이 바로 그가 한 서약으로써 자기는 자신의 집에 먼저 들어 가지 아니하며 자기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자기 눈꺼풀로 쉬게 하지 아니 하기를 자기가 주의 거하실 곳,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고 그처럼 안타깝게 자기 소원을 표명하여 말하기까지 한 까닭인 것이다(시 132 : 3-5 참고) .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장소가 다윗에게 보여졌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솔로몬에게 허락된 것 이었다(왕상5 : 5).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 스데반은 여기서 솔로몬이 그 성전을 건축할 때에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간접적으로 솔로몬을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그 일이 완수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곳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증언하신 하나의 약속이 또한 첨가되었다. 그 일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스데반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온 성전안에 거하시지 아니 하신다고 말했을 때에 그것은 솔로몬을 향한 말이 아닌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추구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인간의 마음은 믿음으로써 하늘에까지 올리워져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역시 그가 드린 저 장엄한 기도의 서두에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 : 27) 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러나 데반이 비난한 것은 마치 하나님이 성전안에 묶여 있는 것처럼 성전을 잘못 사용한 그 백성들의 어리석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여기서 덧붙여 인용한 이사야의 증언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사 66 :1 이하).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 의하여 자신을 위한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종류의 건물안에 이를테면 밀폐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 백성들이 자신을 어떠한 장소에 한정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러한 그릇된 방식으로 자기를 대하고 있다고 탄식하시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라고 한 것이다.

 

요컨대 이 예언자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통렬하계 비난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신성을 성전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여 미신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였기 때문만이 아니요, 또한 그들은 사물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견해를 따라서 하나님을 측정하고 또 자기들의 희생제물과 하나님앞에 나아가 보이기 (outward show) 를 다한 다음에 하나님은 자기들과 화해되었으며 심지어는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은공을 베풀었다고 생각한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과오는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사람들에게 공통된 일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싸늘한 많은 의식으로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이유는그들 자신이 육감적이요, 이 세상에 열중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들과 같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이 어리석음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만물에 충만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49절" ; 하나님께서 하늘은 자기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선언이 마치 그가 사람처럼 몸을 가지셨다든지 혹은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가 어떤 공간적인 재한 속에 담겨질 수는 없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ullis locorum spatiis) .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에 대한 예배를 자기들 자신의 성질을 표준해서 측정하는 자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예언자는 위선자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단순히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요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인 간과는 전혀 다르며 또 인간처럼 이 세상의 허영(虛榮)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다음의 문제가 제기된다. 왜 이 예언자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휴식처가 없다고 말하는것인가? 성령께서는 분명히 다른곳에서, 즉 시편 132 편 14 철에서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라고 전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 또 이사야도 똑같은 설명으로 교회롤 영화봅게 했는데 물론 성전에 언급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안식처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자신의 임재의 표적을 성전과 그 희생제물 안에 세우셨을 때에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능력을 그런 것듈에 얽어매려고 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돌이 이러한 상징물에 자기들의 관심을 고착시키고 또 자신들을 위한 땅 위의 신을 만들어낸 것은 그 생각이 잘못돼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마치 공허한 여러가지 의식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달랠 수 있는 즉각적이고 용이한 방법을 준 것처럼 그런 구실 아래 죄를 범하는 면허라도 받은 것 갈은· 잘못을 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상습적으로 하나님을 우롱하는 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외적인 상징에 의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임재하실 것이요 그래서 그들 가운데 계시겠다고 증언하실 때에 그는 저들로 하여금 신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위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몰두해 있는 위선자들은 차라리 하나님을 하늘로부터 끌어 내리기를 원한다. 또 그들은 공허한 형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둔한 배짱만이 가득하여 태연하계 죄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오늘의 교황제도주의자들은 공상에 잠겨 그리스도를 떡과 포도주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 앞에서 예배 행위를 하면서 마치 거기에는 천사와 같은 고결함이 자기들을 통어하는 것처럼 거만하게 머리를 높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죄과를 자세히 유의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인간들이 세속적이고 육감적인 신을 자신들을 위하여 미신적으로 만들어 내는데 그 신은 그들이 이 땅에 확고하게 묶여 있어서 하늘을 동경하계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로 내려오는 그런 신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무가치한 예배 행위로도 달랠 수 있다고 그들이 몽상하는 일이다. 그러한 일들의 결과는 바로 그들이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씨 얼이 빠지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는 신앙심은 무시하면서 유치한 방법과 무가치한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달래려고 대소란을 피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예언자가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아무 데에도 쉬실 곳을 찾고 계시지 않는다고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롤 알게 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그의 임재의 증표와 보증이 되기를 의도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으로 하늘에 오르며 또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자들에게 대해서 뿐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들의 어리석은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 세상의 자연력에 얽어매거나 혹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위한 속세적인 의식을 설정하는 미신자들 가운데에 계시치 않는다. 또 하나님은 위선자들 가운데에도 안식처를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어리석은 짓 가운데서 스스로 재미를 본 뒤에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훌륭한 대우를 받은 것처럼 헛된 자신감에 취해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약속으로 인하여 마치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 것과 같이 그가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며 성례전에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써 그에게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이 쉽게 나온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때에 그들이 하나님을 영적으로 하늘에서 추구하는 한, 하나님은 결코 땅에 고착되시지도 않으며 어떤 장소에 포함되시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50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이 에언자는 이러한 여러 말로써 하나님은 금이나 성전의 값진 장식이나 혹은 희생제물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결론은 하나님께 대한 전정한 예배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게 드리는 것들 중의 아무것도 그 자신을 위해서는 그가 조금도 원하시는 것이 없다. 다만 ·신앙심을 추구하는 일에 그가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필요할 따름이나 이 주제는 시편 50 편에 길게 다루어지고 있다. 희생제물로써 하나님을 공양하려고 하는 일이 비록 어리석고 형오할 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일 위선자들이 그 속에 빠져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자기들의 놀음 놀이에 그처럼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령한 예배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협오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유물이란 하나님의 은총 (procarlo ab eo) 으로 인하여서만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와 동시에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참된 종교라는 것이 인간의 육감적인 조작품과 얼마나 크계 다르냐 하는 것이다

 

"51절" 스데반은 자기를 고발하고 있는 그 조항들에 대해서 분명하계 답 번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는 그가 만일 소란으로 인하여 연설에 세찬 방해를 받지 않았다면 그는 더 많은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들어 있는데 나도 기쁜 마음으로 그 일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를 재판하고 있었던 그 의회가 무엇과 같은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라서 그들이 자기 들의 격분하는 소란과 함성으로써 그에게 침묵을 강요했더라도 이상히 여겨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 가 마치 그들이 야수이기나 한 것처럼 그들을 전정시키기 위하여 신중하게 교묘한 수법을 장황하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스데반이 다음과 같이 지적했을 때에 그 순간 그들의 분노에 불이 당겨졌다는 사실온 짐작이 간다. 즉 율법은 그들로 말미암아 매우 나쁘게 타락하였으며 성전은 그들의 미신 때문에 더럽혀졌고 또 그들이 예배의식을 하늘의 모형을 따르 도록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히한 형상에 매달릴 뿐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 중에서 망쳐지지 않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결국 스데반은 비록 자기의 사건에 대해서 곧 바로 이를 다루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격렬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논조는 자기에게 걸머지위전 죄책에 대해서 이를 변호하기에 적절했던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취조의 두 가지 주요점이란 이런 것이다. 즉 첫째는 스데반이 하나님과 성전을 모욕했다는 것이요둘째는 그가 율법을 페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상을 제거하키 위하여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다음의 사실을 보여준다. 즉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그들의 본성이나 그들 자신의 어떤 권리나 그들의 무슨 공적으로 인하여 우수한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인간 안에서 그들을 양자로 받아돌인 그 무상(無償)의 특권 때문에 우수하다는 것이다. 성전이나 예배의식이나 할례도 있기 이전에 구원의 계약이 아브라함과 체결되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그의 주제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그런 것들이 없이는 하나님 예배도 없고 거룩한 것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러한 것들을 매우 자랑하였다. 그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다양하였는가를 말했고 또 그 반대로 그 백성들이 얼마나 사악하게 또는 얼마나 심술 궂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였는가을 말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가치 때문으로 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들이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이 자전하여 자기를 위해서 그둔 을 택하신 때문이요 또는 그들이 배은망디하지만 그들에게 끊임없이 은혜 롤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것으로 확증되는 것이다. 그들의 거 만하고 당당한 정신이 온순해지고 겸손으로 낮추어질 수 있어서 마침내는그 들에게서 허영의 기풍이 압박을 받아 그들이 중보자에게 나아오도록되는것 이다. 세째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즉 율법이 주어지는 일에서 또는 백성 들이 속량받는 일에서 천사가 책임을 맡아 행사했다. 그리고 모세가 자기 자신의 직무를 이행하는 동안에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즉 자기 뒤에 다 론 예언자들이 을 것인데 그들 중에 어쨌든 두드러지계 뛰어 난 가장 위대하 신 한 분이 반드시 계실 것이요 그분은 모든 예언윤 종결시킬 것이며 또 완 전한 성취를 수행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사실에 함축된 의마는 다음 과 같다. 죽 율법에서 약속되고 찬미된 가르침과 또 그 율법의 저작자(author)를 함께 거부하고 있는 자들은 모세의 제자일 수7 卜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제시한다. 즈 기 모세에 의하여 규정 된 고대의 일체 예배는 그 자체만으로 평가되서는 안된다. 라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그것은 다른 굽 하늘의 원형을따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육적이여 타의 목적에 관련되어야 지상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율법의 잘못된 해석자가 되 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성전의 종말이요 또. 전리라고 꽁공연하게 주장하셨을 때에 성전에도 율법에도 아무런 손상이 생겨질 수없 다는 걷론이 나오는 것이다. 걷국 하나님 예배는 적절하게는 회생제물이나 그 밖의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요 따라서 모든 의식이란 그리스도의 예시에 불과하다는 그 록정한 점 에 문제의 초접이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의도는 만일 유대인돌이 그에게 허용하기만 했다면 주로 이 점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에 왔을 때에 그들이 분노의 불이 붙어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 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이제까지 해온 모든 사실을 주제에 적용시킬 수 없 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그들을 ‘목이 곧온 자돌' 이타고 날카로운 책망을 첨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돌연 히 그들을 향하여 거룩한 열심으로 불타고 있었음을 안다. 그러나 그는 자 기가 귀를 막고 있는 자들에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열번을 쏟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의 중거리를 끊고 말았다. 이재 이것은 말이나 소를 생 각하면서 한 하나의 은유인데 그것 은· 모제 가 고 백 성 들이 완강하고 하나님 께 복종치 아니하며 길들일 수조차 없다고 말하려고 했을 때 흔히 사용하던 은유이 다(출 32 : 9, 33 : 3, 5). 그 다음의 일어난 비난은 그들 가운데서 더욱 효과를 나타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만 자기들의 모든 과오를 덮어주는 보자기의 역할을· 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 들’이타고 불렀을 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반항하고 완강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요 더욱 그듄이 스스로 자랑하고 있었던 그 상징 자체 에서 그들은 반역적이었으며 계약을 파기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 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영광으로 여겨 자 항하고 있었던 바로 그 사실을 스데반은 가장 적절하게 그들을 부끄럽게 하 논 것 으로 그들에 게 돌려 주고 있 는 것 이 다. 왜 냐하면 그것 은 결 국 그가 다음 과 같이 말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주의 계약을 모독했고 따라 서 그들의 할레만 아무 효과도 없고 전부한 것이 되어버 렸다는 말인 것이다. 이계 이러한 이야기 방식은 율법과 예언자들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왜냐하 턴 하나님께서 그 상징을 제정하셨기 때문에 그 목적대로 그는 유대인들이 왜 자기들이 할례를 받아야 했는가도 이해하키를 원하셨다. 즉 그것은 "너 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회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타"(렘4: 4)고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이 자기들의 마음과 그 전체 타락된 생각을 다 주께 드려 할려]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이 ‘표면적 육 신의 할례'타고 말한 대로 그것은 하나의 공허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보시기 에 무가치한보자기에 불과한것이다(몸2:29). 그와마찬가지로오늘도우 리가 받는 세례의 전리논 영적 씻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우리를전 정하계 세례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바로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 서 염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과 영이 불결한 것들로 머 럽혀져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 처음 스데반이 연설을 시작했을 때에 그 사람들을 부형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합당하계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는 그들을 이처럼 통렬하계 비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유순하게 되도록 감동 받율 희망이 보였을 동안에는 그가 그들을 우호적으로 대했을 뿐 아니요 존경하는 태도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강직성을 그가 알게 되고서는 그들을 더 이상 존경하지 않을 뿐 아니타 그들과는 아 무런 관계도 없게 되는 것처럼 이를데떤 그들이 다른 족속의 후손들이기나 한 듯이 그들을 책망하였다. "너희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려 배반하였던 너희 조상들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스데반 자신도 역시 갈은 조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 합하기 위하여 마치 그것이 무엇인가 저주받온 일인 것처럼 자기 혈족에 관 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들이 말한대로그들을 모두 도매금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 특정한 군중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동하여 말씀하신 바를 완강하계 거여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성령을 거스렸다는 소리를 듣게 된것이다. 그리고여 기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비밀한 내적 계시가 문재 나님께서 대한 외적인 봉사직무가 문제되고 있는 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얀 된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모든 변명의 구실을 일소하려고 의도한다. 그러 므로 그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요 이를데떤 전지하게 또는 의도저 으로 하나님을 거스려 배반하였다고 그는 체망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 께서는 얼마나 그의 말씀을 고귀하계 여기시며 또 얼마나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 기 를 원하시 는가가 분명 히 나타난다. 그러 므로 우 리가 거인들과 같이 하나님과 싸우지 않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7 l-르치시는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조용히 귀를 기울이도록 우리는 배워야 한다. 

 

"52 선지자 중에 누구를 ~~~";  그들이 자기 조상둘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스데반이 그것을 자기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최상에 포함시키는 일은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신성한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계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 앞에서 그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일은 필요한 수고였다. 마치 그것 온 그들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사악한 사람들의 후손이타고 할 때에 자기들 의 혈통을 자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스데반이 말한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언자들이 쓴 굴 속에 더욱 분명하계 기록되어 있 는 사실을, 곧 그들온 예언자들의 자손이 아니요 타락하고 불법적으로 태어 난 후손들이며 가나안의 자손들이요 그런 등속의 혈통을 가전 자들이라는 것 울 간단하계 또는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교황제도주의 자들이 자기들의 조상들을 자랑스럽계 치켜울릴 때에 그들에 대해서도 똑같 온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다음에는 진리에 대한 그들의 반항이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타고 그. 는 말한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일종의 유산으로 이러한 좋지 못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선언은 그가 말한 사실 을 확대시켜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더구나 그들이 스데반을 비난하고 있 었던 바로. 그· 교회의 가장(_larvam)은 그듈에게서 벗겨버려 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가르침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교회라고 자부하는 그들의 자만으로 인하여 또는 그들이 대대에 걸쳐서 오랫동안 이 칭 호률 사칭하는 일로 인하여 가혹하계 손상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스데만은 다론 쪽율 제시하여 이렇게 증거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조상 들온 그들 못지 않게 건전한 가르침에 대한 불경한 모욕과 증오로써 예언자 들을 거스려 날원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성경에서는 자손들이 동일한 죄 과를 범했을 때에 그들을 죄책의 선고에 있어서 그 조상들과 하나로 연결시 켜 주는 일이 끊임없는 통례로 되어 있는 일이다. 그리고 처 유명한 그리스 도의 말씀,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 바 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타"(마 23 :32, 35)고 한 말씀이 거기에 해당된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추찰(推察)할 수 있다. 즉 모든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동족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미리 말해준 그 모든 예언을 다 열거하는 일은너무도 장황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갈은 일반적 원칙으로써 만족하자. 즉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약속하는 공통된 직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의 결백을 나타내는 일 때문만이 아니요 또한 그가 끼쳐주는 영향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세상에 정의를 확립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특이한 역할이기 때문이나, 어쨋든 스데반은 이 귀절에서 유대인들은 전혀 구속의 은총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있게 논파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알려진 것들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사신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자손들은 자기들에게 제공된 의와 구원의 창시자룹 멸하려고 노력하였 기 때문이다. 이 비교로 말미암아그리스도는::L.의 적들의 수치스러운음모가 그들의 모든 불신앙적인 행위의 장겁이타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셈이다.

 

"53 너희가~~~ 율법을 받고도~~~" ; 스데반을 향하여 그들이 품었던 맹렬 한 격분을 그들은 ‘율법에 대한 영심'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은 율법의 이탈자요 배신자며 그리고 다론 사람들을 동일한 변절로 이꿀어 가 고 있는 자인 것처럼 여긴 일이다. 비록 그가 그 거짓된 고소에 대해서 그 것을 꿀내려고 시도하기는 하였지만 자기의 답변을 완결짓지는 못했다. 왜 자기 말에 귀를 기웅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 냐하면 그들은 머거리에게 아무리 장광入길을 퍼부어도 소용이 없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 는 한두 마디로서 그들의 거젓된 구실을 끝내주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당신들은 율법의 열광자로 자처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인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들은 끊임없이 율법을 범하고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 고 앞 귀철에서 그가 빈 기 .여적인 살인행위로 의로운 분을 살해한 일에 대하여 그들을 비난한 것과 똑같이 이제는 윤법에 대한 그돌의 반역을 비난하는 것 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즉 ‘‘그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위반했다는스데반의 주장에 대해서 조금도 영향을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말해온 바와 같이 스데반이 그들을책망한것은그점에 있었던 것이 아 니요 그둘로 하여금 거짓된 자만심에 스스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가장 예민한 수호자로 여겨지기를 바타면서도 실 상은 아무런 가책없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있는 위선자들은 그런 식으로 대 해 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한 응답악질(應答樂節; antistrophe) 식 의 화법 이 있 다. 즉 그들은 자기 들에 게 위 탁된 율법 에 대 하여 복종하는 모양을 취해오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오만으로 율법을 경멸한 것이다. 천사의 전한(율법). 이 말은 문자대로는 ‘처분대로’의 뜻이다 (in dispostiones). 그러나 동일한 사실을 나타낸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은 "천 사들로 말미암아 배치되고 베풀어졌다"(갈 3: 19)고 가르쳐준 바울 이외에 이 귀절에 대한 다론 해석자를 우리가 찾으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는그 귀절에서 ocararft~(디아타게이스)라는 분사형(分詞型)의 말을사용 하고 있는데 그 말에서 ocarar~(디아타게)라는 명사가 나온 것이다. 그리 고 그 말에서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 율법의 권위가 확고하계 정립되게 하기 우]하여 율법을 공포함에 있어서 천사듈이 하나님의 중재자가 되고 그의 증 인이 되었다는 뜻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유대인에게 주실 때 에 그 천사들을 이를데떤 그 일에 대한 엄숙한 중인이 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동일한 천사들이 그들의 배신에 대한 중인도 되는 것이다. 그리 고 스데반아 여기서 천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유대인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율법의 범행자로 규탄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 7절 이하에서) 가르친 바와 갈이 복음은 율법보다 훨씬 뒤어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율법의 영광을 호리게 해주는 것인데 그· 복음을 겅홀히 여기는 자들에게 생겨날 일이 무엇인가를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