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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1. 성경 (행7:54~60)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4)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5)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6)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7)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8)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59)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개역개정 사도행전 7:60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들의 진행이 어느 정도의 공정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에 와서는 재판관둘이 자기들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의 연설이 처음에는 의견불일치로 인하여 생겨난 소란과 두덜거림으로 방해롤 받았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듣온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적개심의 큰 소동을 일으켜 아무 소리도 그들의 귀에 듣려지지 않게 되었다. 그 후에 그들은 이 성자를 살해한 것이다. 이제 누가는 사단이 어떻게 말씀의 적대자들을 움직이는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훌륭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저희가 마음에 찔렀다”고 그가 말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분노에 불타 있었다고 하는 의미만이 아니요 광포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분노는 ‘이를 갈" 만큼 격동되어 불꽃을 일으키는 맹렬한 불길과 같았던 것이다.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필연적으로 그런 식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성질은 조금 전까저 부드러운 외양을 나타내 줄 수 있었던 위선자들을 마친 듯이 달려들게 해주는 것이다. 마치 술주정뱅이가 잠을 자려고 지도했을 때에 갑자기 깨어나계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시므온은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게 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특성에 속하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눅 2.: 35}. 그러면서도 이것을 구원의 도리의 탓이타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도리는 차라리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고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변화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사탄의 손아귀에 잡히게 될 때 그들이 말씀으로 깊이 영향을 받는다 해도 불 신앙이 겉으로 터져 나오개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우연히 발생되는 악이다(accid.en_tale malu.m').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예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을 건전한 마음으로 돌려놓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견인불발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이 가르침이 매우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가르침의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들과 날카로운 충돌이 있을 것을 각오함이 없이는 그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존엄을 가법계 만드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스데반의 격정과 같은 그러한 열렬함에 의뢰하는 일은 흔히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영예가 하나님에게서 빼앗겨 지게 될 때에 우리가 눈을 감을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불신앙은 더욱 더 불길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말이 진행됨을 따라서 우리는 그 불길 위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야 어떻게 되든지간에 역시 우리는 그 악인을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비록 온갖 지옥의 광포를 토해내는 일에 열중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강력하게 억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기분 좋은 말로써 악한 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위험의 두려움 때문에 약해지는 일로 인하여 성공할 수 있는 안목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위하여 비록 그 결과가 언제나 바람직한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견실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 달아야 한다.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사방에서 미쳐 날뛰는 적들에게 둘러 싸여 그의 주장의 우월성이 한편으로는 중상과 악의에 의하여, 한편으로는 '폭력과 격앙된 고성(高聲)' 에 의하여 파괴되는 것을 보았을 때, 냉혹한 얼굴들이 사방에서 그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자신이 무섭고 잔인한 즉음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아무데도 도움이 되거나 이를 완화시켜 줄 아무 징조도 보이지 아니함을 알았을 때 얼마나 큰 곤경이 이 하나님의 종에게 강요되었는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그가 인간의 도움에서 끊어져 그런 식으로 완전히 버려졌을 때에 그는하나님께로 향한 것이다. 우리는 우선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스데반이 모든 일의 절망적인 마지막 지점에 다다라 얼론 보기에 오직 죽음만이 그를 노려보고 있을 때에 그는 인간과 세상으로부터 얼굴을 돌려 생사의 결재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신속하계 눈길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둘째로는 그와 동시에 다음의 사실을 우리가 첨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의 희망은 좌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즉시 그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누가는 그가 정복할 수 없는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그로 인하여 그가 보는 하늘의 환상을 막을 자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환상을 신뢰하떤서 그 결과로서 자신을 안정시키고 그래서 죽음에 직면하여 죽음을 극복하는 빛나는 승리를 구가하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이 너무도 강하게 땅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지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 결과로 죽음에 직면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모든 위험의 소문이 가냘프게 들려오기만 해도 우리의 용기는 떨어져 버린다. 또는 나무 잎새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에도 우리는 기가 꺾인다. 그런데 그 사실은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 우리의 용기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마치 우리를 도와주는 유일한 가능성이 이 세상에 있다는 듯이 하늘을 저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생태적으로 이 땅으로 기울어지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과오가 고쳐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높이 올리어 주셔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가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그가 성령이 충만하 였다는 말인 것이다. 우리도 또한 가끔 재난의 습격을 받을 때마다 우리의 안내자시요 인도자이신 그 분과 함께 영적으로(animis) 하늘에 올라가야만 한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우리에게 비추어 주실 때까지는 우리의 눈이 하늘에 다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날카로운 시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의 육체의 눈은 너무도 무디어서 하늘을 탐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것을 보고" ;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스데반이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즉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누가는 지적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미리부터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그에게는 육안과는 다른 눈이 주어져서 그 눈의 두시력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전체 도정을 날아 올라가게 된다는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용기를 얻게 된다. 즉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뒤로 포기하고 우리의 전신전력(sensus)을 다 기울여 힘써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에게 하셨던 것처럼 외적인 시각의 수단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참으로 그의 임재를 느낄 (sentiamus) 수 있도록 우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과 은혜로씨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중거해 주시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의 ‘보이는 일’이 우리에게 충분하다고 해야 한다.

 

"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  스데반이 기적이 자기에게 허용된 사실을 공공연하게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적들을 용감하게 격동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에 대한 개별적인 호감을 보이려고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적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혀 주시려고도 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어떻게 열렸느냐고 어떤이는 묻는다. 내 나름대로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다· 즉 하늘의 성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의 새로운 예리한 시력이 스데반에계 주어져서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의 영광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하늘에 어느 정도의 갈라침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해도 사람의 눈은 결코 그런 높이까지 울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광은 홀로 스데반에게만 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장소에서 있었던 불신앙자들에게는 그러한 광경이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내심이 어두워져서 전리의 밝은 빛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늘이 자신에게 열렸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에 그를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그 결과는 기적이 하늘에 서 생겨난 것이 아니요 차라리 그의 눈에서 생겨났던 것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물리적인 시각에 대해서 지나친 논의를 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인 이치에서 혹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요 새로운 독자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의 육안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자극할 무슨 빛깔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 환상 안에는 신령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결론을 짓는 일이 바론 길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광이 스데반에게 그 구성 내용 전체 (in solidum qualis erat)로 다 나타난 것이 아니요 인간으로서의 그의 능력이 도달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나타났다고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무한성은 피조물의 용량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승리는 확실히 이 한 사람, 그리스도에게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스데반은 그리스도께서 몸을 낮추셨던 그 육체대로의 모습으로 군림하고 계신 것을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일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역시 그분을 ‘인자(人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즉 "당신들이 죽음으로씨 파멸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은 하늘에 오르시어 지배권을 장악하고 계신 것을 나는 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원하는 대로 야유를 하시오. 나는 최후의 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그를 위하여 싸우기를 주저할 만한 아무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소. 왜냐하면 그는 그 분 자신의 이유와 또 나의 안전을 다 수호해 주시는 분이 되 실 것이기 때 문이요"  그러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그가 앉아 계신다고 이야기 되었는데 어찌하여 스데반은 그가 ‘서신 것'올 보았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어거스틴은 때로 필요 이상으로 예리해서 이렇게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제판관으로 앉아 계시지만 이 경우에는 변호인으로 서 계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 용구(慣用句)들은 여러가지겠지만 그러나 의미하는 바는 모두 동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앉아 계신다든지 서 계신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의 권력과 통치 왕국에 관계가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 안에 충만해 계시기 때문에 그의 우편이라는 어떤 장소로(nullus locus) 생각해서는 안되는 만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수 있는 법정(法庭)의 자리를 우리가 어디에 설정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거나 서거나 하셨다고 이야기될 때에 그 전체의 문맥은 하나의 은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단순히 모든 권력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그가 자신을 낮추신 육체 대로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대리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며 그의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그의 권력이 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곳에 확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사람들은그리스도께서 인간성 그대로 어디에든지 계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특정한 장소 (certo loco continetur)에 한정되어 계신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그의 임재를 그의 은혜의 효력에 의하여 감지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를 하늘에 추구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서 그가 하늘에서 스데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또한 이 귀절에서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논점을 끌어 내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가 스데반에게 보일 수 있도록 그를 가까 이끌어 내리워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말해 온 바와 같이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스데반의 눈의 신앙으로 그처럼 높이 울리워져서 어떠한 공간적 거리도 그의 시력의 날카로움을 깨뜨리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나는 진실로 이렇게 생각한다. 즉 적절하계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하늘의 위에는 아무런 공간 (nullum locum)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늘 이외의 어느 다른 곳이나 또는 이 세상의 요소들 위에 자리 배치를 하는 일은 그릇된 착란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넉넉하다.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 이것은 하나님의 열심의 과시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허영심은 거의 속에 끓게 만들어 주는 것이 언제나 위선자들을 극단적인 홍분 속에 끓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마치 그리스도께서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5 : 62 이하)고 말씀하셨을 때에 가야바가 마치 그 말이 용납 할 수 없는 불경죄라도 되는 듯이 분노의 표시로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응수해온 응수해 온것과 마찬가지다. 또 하나의 설명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증언이 그들에게 그처럼 심하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저 광란을 폭발케 하였 던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 둘째번의 견해가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조금 후에 누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자신들을 억제하지 못하는 저들이 돌발적으로 또는 난폭하게 극단을 향하여 달려가는 습성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격정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

 

"58 돌로 칠새~~~~~" ;. 신명기 13장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하여 이러한 형벌을 가하도록 율법에 제정해 놓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거기에 누가 그 수에 포함되는 자들인가를 밝혀 주셨다. 즉 그것은 백성들을 이방 신들에게로 이끌어 이반시키려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스데반을 둘로 친 일은 불공정하고 흉악한 일이었다. 그것은 거짓된 유죄 판결로 정죄받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은 범죄자처럼 동일한 형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원인만이 그 둘의 차이를 구별 지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목전에서 순교자들에 의하여 받는 능욕이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의 가치를 능가 할 정도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즉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이 허용 되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경우에서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요18 : 31)라고 대답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일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그들은 반항적인 폭동으로그 일을 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총독이 왜 이 무도한 행위를 처벌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그 백성들이 거칠고 또 거의 굴복시킬 수 없는백성들임을 알고 그는 은밀히 많은 일을 너그럽게 보아주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이 수난당하는 일에 대한 비난을 자기 자신이 걸머지지 않으려고 해서 그랬을 것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특히 로마의 총독들은 그 백성들의 자기들끼리의 싸움을 계획적으로 눈감아 줌으로써 양쪽이 모두 기전맥진할 때 그들은 더욱 빨리 그들을 진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이다.

 

"증인들이~~~~" 그러한 소란 속에서도 그러면서도 어떤 재판의 형식이 유지 되었다는 것을 누가는 말하고 있는 셈이다. 첫 돌은 반드시 증인들에 의하여 던져져야 한다는 계율은 까닭없이 만들어전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들의 손으로 살인을 한다는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망설여지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기들의 거짓된 맹세로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자르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미 자기들의 혀를 가지고 살인을 범한 이들은 이 무고한 사람에게도 자기들의 피 묻온 손을 대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이 증인들의 불신앙이 얼마나 맹목적이요 잔인하였는가를 우리가 추찰(推察)할 수 있다.

 

그들의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고 그가 말한 것은 사울이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가 보여주는 일이다. 즉 하나님께 버려진 그런 마음에 사로잡혀져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따위의 개시로씨 이미 자신의 청춘올 더럽힌 사람을 어느 누가 희망이 없는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그를 위하여 수고하는 어떤 무지한 사람들 식으로 그의 범과에 대한 정상을 참작하기 위해 그의 나이가 표시되지 않온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가 그의 범과의 핑계로 호소될 수 없을 만큼의 나이에 그는 이미 도달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는 조금 뒤에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기록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동기를 벗어난 자요 또 그래서 이제 그는 성인 중에 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청년이라고 호칭되었을까? 그래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빨리 그를 저지하시지 않았더면 그가 얼마나 크게 교회에 대하여 손상을 주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각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사실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현처한 귀감이 빛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장 맹렬하계 날뛰는 맹수를 순간적으로 길들이셨으며 또 그의 죄과로 말미암아 이미 그가 거의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 고약한 하수인을 영예에로 이끌어 울리셨다는 사실이다.

 

"59 부르짖어 가로되" ;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할 말을 다 해버릿기 때문에 의당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사건의 결말을 잘 끌고 가기 위하여 기도로써 든든히 무장하는 것이다. 전쟁과 다름없는 우리의 전체 생활 과정에서 매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가 의뢰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힘든 최후의 결전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은 가장 크계 필요한 일이다. 누가는 다시 한번 그들이 참으로 어떻게 무모한 격분에 사로잡혀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그리스도의 종이 겸비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 모양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잔인성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과는 별도로 스데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첫 부분에서 그는 자기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부탁하는데 거기서 그는 자기 신앙의 확고함을 '보여 주고 있다. 자기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둘째 부분에서 그는 인간들에 대한 그의 사랑(caritatem)을 중거해 주고 있다. 우리의 종교의 전정한 완전성온 이러한 두 방면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에서 한 인간이 고상하고 성스럽게 죽어가는 비범한 예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다론 많은 말을 했을 것 을 믿을 수 있겠지만 그 모든 말이 모두 여기에 귀착된다.

 

"주 예수여~~~~" ; 이 기도는 그의 확고한 신념을 입증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말해 왔다. 그리고 구의 용기는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얼마 안돼서 자기를 돌 무더기 속에 묻어버릴 그 돌들이 날아들게 될 것을 보면서 그리고 사방으로부터 잔인한 저주와 모욕이 자기의 머리를 향하여 육박 해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안전하게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주께서는 분명히 그의 종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려지기를 원하시는 때가 가끔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그들의 구원이 한층 더 놀라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육신의 생각으로 실명하지 말고 믿음으로 설명하자. 그리고 스데반온 육신의 견해로 자신을 단념하지 아니하고 그 반대로 전멸 그 자체의 면전에서 자기가 구원 받을 것을 확신하고 조용히 죽음을 대면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마음 속에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 : 3) 고 한 말씀을 새겨놓고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육체에 대해서 더 이상 염려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지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현재의 삶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그것에 대한 모든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면 그가 한 것과 같은 방식의 기도를 진심으로 드릴 수는 없었 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우리는 언제나 수 천의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모든 위험에서 틀림없이 끌어내시게 되기 위하여 다윗과 함께 날마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는 일이 옳은 일이다(시 31 : 5).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죽음에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받아 주시도록 이러한 기도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산이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분명히 맡기셔서 그로 인하여 그는 우리의 영혼의 영원한 보호자가 되셨기 때문이다(눅 23 : 46). 만일 우리가 그의 손에 우리의 영혼을 말기기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에 아무렇게나 방황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안전한 보호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무상의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 신념은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조용히 죽음을 대하도록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렇다, 진지한 신뢰의 태도를 가지고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자는 누구나 반드시 그와 동시에 자신을 기쁜 마음으로 포기하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상 무엇이 더 있겠는가?

 

요컨대 이 귀절은 분명하게 다음의 사실을 증거해 준다. 즉 인간의 영혼이란 어떤 미치광이의 헛소리대로 사라져 버리는 하나의 숨결이 아니요, 이 생명이 끊어져도 살아남는 하나의 본질적인 영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즉 모든 권세가 아버지께로부터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일은 옳고 적절한 일이다. 그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의 보호(fidem) 안에 맡기게 되는 것이다.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이것은 그의 기도의 둘째 부분이 다. 이 부분에서 스데반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에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을 결합시켜 놓았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가담되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스데반은 자기의 원수들, 실로 불구대천의 원수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잔인성이 그로 하여금 복수를 열망하도록 격분시킬 수 있었던 그 가장 위급한 순간에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품고 있던 그려한 애정과 선의를 매우 밝히 드러낸 것이나 누가가 말하고 있는 이 스데만의 행한 일온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우리 모두에게도 행하도록 분부 있다· 그러나 저들에게 호의로 대할 만큼 무법침해를 용서한다는 것 이상으로 더 어려운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스데반을 우리의 모범으로 우리 눈앞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확실히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가 성실하게 또는 마음으로부터 말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중거해 주시게 된다는 일을 제외하고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나타내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원수들의 잔혹함을 완화시는 일에 소용되는 일은 무엇이나 무시하려고 하자 않는다는 듯이 그의 음성을 높인 것이다. 즉각적으로는 아무런 결과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헛되이 기 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바울이야말로 그 죄가 모든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았다는 명백한 중거인 것이다. 실상 나는 만일 스데반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바울이 라는 사람을 갖게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어거스틴과 같이 그렇게 따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온 너무도 강하계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 바울을 용서하셨다는 그 사실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무효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말이다.

 

스데반이 조금 전에 그들을 가리켜 성령을 거스려 반역한 자들이라고 말 한 일이 있으며 그것이 성령을 거스린 죄로 나타난 사실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데 어떻게 스데반이 그들을 위해 기도햇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그 대답은 용이하다. 즉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적용되는 일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로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그 백성들의 일단이 반역적이라고 말한 것온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떤 종류의 반역행위를 거기서 비난했는가 하는 것도 위에서 지적했다. 왜냐하면 한 때 성령을 거역한 자들이 곧 성령을 거스려 범죄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죄를 저들에게 둘리지 마옵소서"라고 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것은 그 죄의 선고가 그들에게 내려지저 않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이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이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그가 이 말을 자기의 마지막 숨길을 거두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그의 놀라운 지조의 한 중거이다. '잔다’ 는 말도 또한 그의 죽음의 평화로운 모습을 나타내 준다.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으면서 이 기도를 말했으므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용서를 초래하려는 희망으로나, 그렇게 해서 그 원수들을 유화시키려는 안타까운 생각에 몰려서 그렇게 할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니요 다만 그들이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와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다. '잔다’는 말이 성서에서 죽음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육체에 관련된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영혼도 마찬가지로 잔다는 어리석은 추측을 아무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