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8:9 ~ 25)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9)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0)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1)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2)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3)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4)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5)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6)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7)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8)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19)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0)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1)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2)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24)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2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실로 이것은 복음을 위한 문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전혀 닫혀져 있었다고 생각될 수 있었던 하나의 장애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시몬의 요술에 매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넋을 잃게 하는 일이 이미 오랜 세월을 흘러왔기 때문에 점점 더 강하게 뿌리를 내렸다. 더구나 그러한 잘못이 오렌 기간을 거쳐 일단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뽑아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 이미 굳어져 버린 그들의 생활습관을 건전한 양식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일이 얼마나 곤란한 일인가를 겅험이 가르쳐 준다. 그들은 시 몬을 하나님의 예언자로만이 아니요, 거의 그를 하나님의 성령 자체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미신은 그 잘못에 있어서 그들을 일층 더 완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10절-11절" ; 왜냐하면 ‘큰 능력 ‘이라고 설명된 말은그러한 경향을 가리키고 있는 말인데 이를테면 아무리 신성한 것이 그 자체 (alioqui)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 큰것이 그것을 빛을 잃게 할 것이요, 무가치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립이 그 장애물을 깨뜨려버린 그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이 일층 더 분명하게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낮은 사람으로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그 마술에 놀랐다"고 말하여 이 사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현혹되어 있었고 또는 특히 그것은 범상한 사기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복음이 무슨 접근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경탄이 그들의 분별력을 전부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이 있는가 하는 일이 이로 인하여 명백해질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또한 빌립을 통하여 우리 앞에 제시된 견인불발의 한 실예로 보여진 것이다. 비록 그가 방법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대로의 그러한 성공을 기대하면서 변치않는 정신을 가지고 주의 일에 전력을 기울인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통털어서 우리의 노력이 헛되게 될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를 무엇이나 대담하계 시도하는 일이다. 더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인식하자. 즉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그러한 사단의 매혹은 불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어디에나 시몬이 있어서 그러한 사기행위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마술사들의 속임수로 현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대로는 만일에 사단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어두움 속에서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해도 그것온 기발하거나 진귀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빛으로써 지배되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두 모든 죄과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는 그들 모두가 차별없이 속임수에 넘어 갔다고 말했을 때에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갈이 각성시켜 준다. 즉 우리가 가진 아무리 예리한 분별력이나 무슨 판단력 혹은 지혜라고 하더라도 사단의 교활에서 우리는 우리를 수호하기에 넉넉하지는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확실히 이 세상이 두드러지게 영리하다고 여기는 바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바보스럽고 어리석온 과오에 휘말려 들었는가를 알고 있다.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그러므로 사단은 기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구실을 붙일만한 가치가 있기는 고사하고 가장 폐해가 큰 종류의 속임수인 것이다. 시몬이 하나님의 고유한 권능의 칭호를 스스로 사칭하였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된 일인데 그 것으로써 시몬은 마치 태양이 그 자체의 빛으로써 모든 별들을 흐릿하게 만들어 주듯이 다른 곳에서 모든 신성한 것을 억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악하고 수치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아무일도 생겨나지 않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아직도 날마다 아무일도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을 사단에게 양도해 주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실상 종교를 하나의 구실로 만들고 있지만 그러나 이 구실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얻은 이익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표명하시고 또 그것을 다른 데서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며 또 그가 그 자신의 지배아래 우리를 남아 있게 하시려고 기피되어야 할 사단의 거짓과 계략을 폭로하실 때에 우리는 축복을 받고 있 는 것이다.
"12 저희가 믿고……" ;이미 언급해 온 바와 같이 시몬의 환상에 의하여 자기들의 지각을 전적으로 박탈 당했던 사람들이 빌립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사실,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의 참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기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온 그런 방식으로 지옥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리워졌던 것이다. 세례가 신앙 이후에 왔다는 사실이 불신자들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와 일치한다(막 16 : 16). 왜냐하면 그들이 그 표적을 받기 전에 신앙에 의하여 교회의 집단에 가담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세례파가 이 귀절에서 유아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는 일은 전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남자나 여자가 공개적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없이는 세례롤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이 동시에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그러한 조건에서 그들도 세례받는 일이 허용됐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계약은 "내가 ~~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하신 말씁 안에 있기 때문이다.
"13 시몬도 믿고" ; 자기의 속임수로써 성중 전체를 매혹시켰던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빌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을 최고의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자랑하던 그 사람이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복음의 지식으로 밝아졌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요, 전체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무지한 사람들을 방해할 수 있었던 그 장애물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가 나중에 그가 표적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와 관계된 일이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생각한 그 사람을 격파하여 승리하시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헛된 자랑이 뽑혀지게 될 때 또는 그가 참된 기적에 대해서 영광을 둘리지 않을 수 없을 때에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그는 성실하고 마음으로부터 사랑 (affectu)을 가지고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의 부당한 야심이나 또는 그의 불신앙적인 행동이나 또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즉시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가 믿지는 않았으면서도 단지 믿는 체 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과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다. 누가는 분명히 그가 믿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그는 감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그 이유를 첨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그는 조금 후에 위선자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배신하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신앙과 단순한 가장 사이에는 어떤 중간 위치가 있다는 말이다. 에피큐리안(Epicureans)들이나 루시안의 제자들은(Lucianists) 내심으로는 웃고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란 자기들을 위해서는 하나의 지어낸 이야기요, 그래서 결국에 그들온 개나 돼지 이상의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온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많은 사람들이 비록 양자되게 하는 영에 의하여 중생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또는 그 마음으로부터의 순전한 사랑으로써 스스로 하나님께 복종하지는 아니할지라도 그러면서도 말씀의 능력으로 정복을 당하며 또는 가르침 받은 바가 진리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두려워하는 심정을 느끼게 되어 그로 인하여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온 구원의 창시자도 되시며 이세상의 심판자도 되시는 하나님께 귀롤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눈 앞에서 존재하지 않는 신앙을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자기들은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가복음 4 장에서 (녹 8 : 13) 말씀하신 일시적인 신앙이다. 즉 마음에 뿌려전 말씀의 씨가 즉시 여러가지 세상의 걱정이나 나쁜 욕망으로 인하여 질식되어서 결코 성숙한데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차라리 쓸데없는 잡초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시몬의 신앙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복음의 가르침이 참되다고 느끼며 또 그의 양심의 자각으로 인하여 그것을 부득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즉 자기부정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그의 마음은 조금 후에 그가 나타낸 위장 속에 싸여 있었다는 결론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위선은 자기가 자신을 속인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고 에피큐리안(Epicureans)들이나 그 동류들이 자랑하는 것 갈은 그런 거창한 위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있었음을 감히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후에"; 세례 안에 나타난 은혜는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시몬의 예로 매우 분명하게 되었다· 교황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누구나가 죽음을 면치 못할 죄의 장에를 나타내는 일만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 표적(세례)으로써 진리와 그 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신앙이 없이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듯이 성례전에 마술적인 잠재력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있어서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한다. 즉 주께서는 성례전을 통하여 거기 동반되는 일체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데 쓸데없이 혹은 아무 목적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지시를 받아서 우리는 성례전이 약속한 바를 무엇이나 그리스도에게서 구하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룔 받온 일이 당시에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러면서도 만일 회개가 나중에 따랐다고 하면 혹자가 생각하는 것같이 그 이점은 소멸되거나 없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렌시간 후에 하나님의 성령이 마침내 역사하셔서 그로 인하여 성례전이 그 효험을 나타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빌립을 따라 다니며~~~" ; 빌립이 그를 수용했다는 사실에서 위선자를 적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가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인내심의 시금석인 것이다. 이리하여 데마는 한때 바울의 동반자였으나 나중에는 수치스러운 이탈자가 되었던 것이다(딤후 4 : 10). 요컨대 우리는 사악하고 간교한 자들이 때때로 스스로를 우리에게 가담하는 그 불행한 경험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악한 자들이 남몰래 우리들 안으로 잠입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마치 우리가 그들의 모든 죄과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처럼 거만한 혹평가들이 부정하게 우리를 탓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에 대한 불명예의 오점을 가끔 실어오는 능란한 솜씨를 엄격하게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이 속임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아무 선택없이 허용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의 태도에 일충 더 각별한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그 표적의 위대함으로 인하여 놀랐다고 누가는 말했는데 그로써 우리는 그가 자랑하고 있었던 그 위대한 능력이라는 것이 흐릿한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일은 단순한 감탄만이 아니요, 사람을 자신의 몸밖으로 이송시켜 주는 황홀경이기 때문이다.
"14절" ;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은사로써 끊임없이 신도들을 풍부하게 하시는 그의 관례를 따라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신 은혜의 진보를 서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빌립의 주선에 의하여 사마리아에서 그 역사를 시 작하신 하나님 자신의 영감에 의하지 않고는 사도들이 누가가 말하고 있는 그 계획을 구성했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따라서. 그의 과업의 여러가지 국면을 위하여 다론 방법으로 그의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빌립의 활동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셨다. 이제 그는 성령을 주시려고 베드로와 요한을 성직자로 임명하신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손을 서로 뻗칠 때 그의 교회의 일치를 촉진시키시며 또 그는 차례로 사람들을 상호 결속시키실뿐 아니라 역시 전체 교회를 서로 결속시키시는 것이다. 실상 하나님은 자신이 이미 시작하신 과업을 빌립을 통하여 완성하실 수 있엇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사마리아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그 처음 교회와 더불어 형제적인 결합을 연마하게 되도록 하나님은 그들을 마치 사슬로 묶듯이 결속시키기를 원하신 것이다. 둘째로 전세계에 복음을 공포할 명령이 주어진 사도들에게(막 16 : 15)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 하나의 복음 신앙안으로 함께 더욱 밀접하게 성장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특권으로 그들에개 포상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기질에 있어서나 풍습에 있어서 피차 오랫동안 다르게 살아왔기 때문에 더우기 그처럼 갈라진 그들은 그리스도를 갈라 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자기들만으로 갈라친 새 교회를 형성하계 될 위험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와 동시에 사도들은 형제들을 돕는 일에 얼마나 열심으로 전력하였는가를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청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였고 자진해서 이 책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사도들은 마치 빌립이 자기의 임무를 충분히 이행하지 못하지나 않는가 의심하고 있었던 것처럼 불신감에서 이것울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빌립이 하는 일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 사역자가 되려고 해서만 온 것이 아니요, 그 수고에 대해서 그들이 인정해 주기 위하여 온 것이다. 한편 빌립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세우기 시작한 건물에 다른 사람들이 마무리를 짓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모양으로나 멸시를 당하고 있다고 불평하지 아니하고.오히려 그들은 예의 바르계 공동의 순수한 신앙안에서 각자를 위해 자기들의 노력을 다 기울인 것이다. 거룩한 교제의 문을 닫는 것은 야심일 뿐이라는 사실이 의심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누가가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다른 동료들 위에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고, 그가 그 단체에 예속되고 거기 복종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서 뛰어 났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추단(推斷) 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모든 사도들이 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뜻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리 저리로 떠나갔을 때에 몇 사람들이 거기 남아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차라리 후자를 더 좋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몇몇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각종 사명을 따라 행동하였을 것이요, 또 그밖의 부대들은 사령본부에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있었을 것으로 그들 사이에 합의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어느 기간 동안 자기의 특별한 사명을 띤 여행을 한 후에 거기에 함께 모이는 관습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 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려 있는 동안에 안일 무위하게 시간올 보내지 않았으며 또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명령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테면 둥지를 틀고 앉아 있지는 못하였을 것이 확실하다(막 16 : 15)
"15 그들이 ~~~ 저희를 위하여~~~기도하니" ; 그들은 우선 가르치는 자의 직책을 수행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는그들이 병아리 배우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는 그들과 빌립이 공동으로 가졌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다만 그들의 옴으로 인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가져온 새로운 일, 즉 이제 마침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뿐이다.
"16절" ;.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요 그래서 그들온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누가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면 세례란 아무런 능력이나 은해도 없는 하나의 공허한 일일 수밖에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세례가 소유하고 있는 일체의 효력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일 것이다. 세례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씻김을 받는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씻김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가르친다(딛 3 : 5). 세례의 물은 그리스도의 피의 표상이나 그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씻김을 받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고 있다(밴전 1 : 2). 세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의 새로움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게되는 것이다(롬 6 : 6). 그러나 성령의 성화(聖化)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이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만일 세례가 성령에서 분리된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상 세례에서 그리스도를 옷입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역시 성령으로도 옷입힘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또 확실히 누가는 여기서 성령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중생 시키시는 그 성령의 일반적 은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께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영예를 주시기 위하여 복음의 초창기에 관여한 몇몇 사람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아직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제자들에게 버리지 않았다고 한 요한의 말(7 : 39)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그들이 그에 계서 믿음과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거룩한 의욕을 받았으므로 완전히 성령없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나중에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광이 그 안에서 더욱 완전하게 비친 그 비상한 은사가 아직 풍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요약해 말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계 주신 양자되게 하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특출한 은사가 최고의 상태로 첨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때 그의 교회에 대하여 눈으로 봉 수 있 는 성령의 임재 (quasi visibilem spirtus sui praesentiam) 를 보여 주셨다. 그것은 영원토록 그의 복음의 권위를 수립하고 또 동시에 성령께서 언제나 믿는 자들의 통치자와 안내자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 이것은 세례를 경홀히 여겨서 말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다만 누가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당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것은세례를 통하여 모든 신도들에게 부여되는 양자됨과 신생의 일반적인 은혜였다는 것이다. 실상 그리스도의 왕국과 복음의 영광의 광채가 첨가된 성령의 온사가 그들중 어떤이들에게 주어전 사실온 특이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의 가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재능의 정도를 따라서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가공적인 견신례 (c~nfirmation)를 찬양하고자 할 때 아직 안수식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반 크리스찬 (half-Christian_) 이라는 그러한 신성을 더럽히는 주장을 큰 소리로 내뱉는 일을 주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일이 이제는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잠정적인 표적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그들은 마치 성령이 자기들의 자유재량에 있는 것처럼 (illisad manum) 그것을교회의 영구적인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중거와 보증이 실재성이 없이 공허하게 진열될 때에 그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웃음거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역시 그러한 은사는 잠시 동안만 교회에 주어졌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이 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사도들이 시행했던 안수는 그 목적이 달성되었을때 끝나 버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그들이 안수할 때에 기름도 사용한다는 일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도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사용하던 것을 (막 6 : 13) 일반적인 성례전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실재성 자체가 없어전 뒤에도 그 표적은 영원히 지속되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영구적인 법을 과하는 일은 극단적인 횡포였던 것이다. 실로 더욱 가증스러운 모독이 더해 쳤는데 그것은 그들이 말하기를 죄는 오직 세례에 의하여 용서를 받으며 또 신생의 성령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감히 내놓는 그 더러운 기름을 통하여 주어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성서가 증언하는 바로는 우리가 세례 로씨 그리스도를 옷입고 그의 몸에 접목되며 그래서 우리의 엣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의로써 새로와전다는 것이다. 저들 신성을 모독하는 강탈자듣은 세례에서 탈취한 약탈물둘을 그들 자신의 성례전이라는 남을 현혹시키는 가면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의 거짓말이 아니 요 그들의 모든 학교에서 날마다 지껄여대는 한 총회의의 사령이 된 것이다.
"17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메~~~~" ;. 안수는 기도이후에 행해졌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겸손하기 위하여 기도한 그 성령의 은혜가 외적인 의식의 일부이거나 그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는 그들이 그 의식을 결코 경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것이요 또 그들은 그것을 부주의해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효과도 동시에 거기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표적의 이익과 효력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며 또 그러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든지 간에 그가 유일한 은혜의 부여자시며 자신의 권한의 힘으로 인한 심판자로 남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수라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적절한 때에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해를 주시게 될 경우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실제로 그러한 은사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 행위는 단지 헛된 형식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8 시몬이~~~ 을 보고~~~~" : 여기서 시몬의 위선이 백일하에 드러나고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전에 거짓으로 믿었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던 그는 확신을 받고서 진지하게 그리스도에게 굴복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 부정 뒤에 곧 참 신앙이 이어져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지 않는 범위에서만 복음에 굴복할 뿐-자신들의 예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말이지 가르침이 마음속에 숨겨진 생각을 파헤치지 못하고 내면적인 불결이 그대로 묻혀 있듯이 거기에 남아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와 사단을 혼합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시몬에게 있는 이 겉치레를 제거하고 있는데 이것온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함으로써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을 더 이상 속이지 못하계 하려는 뜻에 서이다· 요컨대 숨겨져 있던 야심이 사도들과 동등하계 되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에서 이제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한 가지 잘못은 이미 드러났고 다 론 하나는 물론 그가 하나님의 은혜률 사고 파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이익을 받고 비열하계 팔아 먹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 해서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을 뿐 아니타 하나님의 일군이 된다는 것이 무 엇을 뜻하는가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이 사람이야말로 참 신앙의 핵십에 대해서 어렴풋한 지식마저 없는 세속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 다. 전에 마술로 돈을 번 사람이기에 그는 자기도 하나님의 이런 처런 은해 를 수여할 수 있다면 목독히 재미를 볼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계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추구하는 것은 튤립 없이 이제상 눈으로 보는 재물과 영 광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 하늘의 능력을 자신의 요술과 다를 바 없 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권리를 심각하계 침해하고 있다. 여 기서 간략하게 시몬의 죄와 그 종류를 종합해 보자· 그는 성 령의 여러 은사 롤 통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하지도 않고 거기에 경의를 표하지도 않고 있다. 그는사도들에게 하늘의 영광이 허락된 것은 그들의 사역을 동해서 그 리스도의 영광을 뚜렷하계 드러내려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야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을 뒷전으로 물리치 고 자신을 앞제우려 하며 제상을 자기 손아귀에 잡아 보려 하고 있다. 그리 고 그는 마치 성령에게 무슨 값을 매길 수 있다는 듯이 그를 돈으로 샀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하고 있다.
"20 베드로가 가로되~~~~" ;베드로는 여 기 서 그를 가차 없이 통박하고 있다. 아니 책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몬이 그의 돈과 함께 망할지도 모든다는 무서운 처주를 더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천벌을 기원하고 있는 것 이 아니라 그에게 겁을 주는 뜻에서 하나님의 공정한 처벌이 가까이서 그룹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영을 흉칙 하게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그가 받아 마땅한 것이 무엇인 가를 베드로는 보여 주고 있다 ..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그처럼 모독하다니, 네 돈과 함께 패망할 소리를 하는구나 하는 말과 같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베드로가 시몬의 파멸보다는 그의 구원을 더 바라 고 있었다는 겁을 다음에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재 판관의 역할을 맡기라도 한 것처럼 시몬의 불경에 어떠한 처벌이 내려야 마 땅한가 하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시몬이 이 정도로 강경한 문책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래야 그가 그의 죄악의 국악성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 문이다. 그의 돈을 파멸에 내어 주는 것도 같은 뜻에서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그 돈이 그처럼 흉악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것 자체도 그 죄악 의 전엽을 받아 더럽계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그 자체에 있 어서 무익한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을 허용하기보다는 온 제상의 파멸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와 같이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사람을 저주할 경우 그. 사람보다는 그가 한 일을 안중에 두고 있다. 즉 우리는 사람들의 최과를 두고 분노하되 자비롭게 사람들을 건지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언도는 바로 이와 같다. 곧 이것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넘겨 주는 사람들은 간음자, 도둑, 주정 뱅 이 그리 고 악당이 다(고전 6 : 9, 10, 어~ 5 : 5). 정말이지 이들이 사람인 한 이 언도는 구원의 소망을 철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상대만을 두고 말하면서 그들이 계속 고집을 피울 경우 그들에 게 어떠한 종말이 대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선언할 뿐이다.
"21 네가 관계도 없고~~~~" ; 여기서, 시몬이 은해를 돈으로 따지기 때문 에 그는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하는 식으로 말의 순서를 다르게 엮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따르는 대로, 이 설명을 앞 귀절에 연관시키는 것 이 더 상례 이 다. 그리 고 ‘성 령 의 측량할 수 없 논 은사를 돈으로 바꿀 수 있 논 것으로 생각하다니, 돈과 함께 망할 사람이군'하는 식으로 읽는 것이 훨 씬 더 이해가 잘 간다. 벌게이트역의 ‘이 말씀에 있어서를, (駐1)에타스므 스는 ‘이 문제에 있어서’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이 머 저절하다. 즉 베드로 의 의도는그들이 전체 사역에 있어서 그것을 불순한 방법으로상품화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사람이 들어 섣 자리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더우기, 로마가톨릭과옛날신학자들은 ‘시모니'(simony)에 대해서 장황 한 설명을 늘어 놓고 있지만 로마 가톨릭에서 소위 말하는 ‘시모니'는 시몬 이 한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시몬은 성령의 은혜를 돈으로 사려했지만 로마 가톨릭에서는 못된 ‘시모니'를 자신들의 공허한 생활에 적용시킨다. 물론 나는 오늘날 로마 가톨릭 사회에 팽배'하고 있는 성칙 매매를 완화하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 따위 장사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과오는 이제 그 자체로서 충분히 추 악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시모니'의 정확한 정 의를 여기에 삽입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되지 못하게 팔아 먹는 것, 또는 이 온사를 야심이나 기 타 더러운 목적으로 남용하는 이 와 비슷한 일이다. 물론 나는 그릇된 수단으로교회의 통치에 참여하고자하 는 사람들은 모두 시 몬의 모방자들이 타는 점 을, 또 오늘날 도처 에 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치 그것이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이것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을, 그리고 전체 교황 칙제를 통틀어 볼 때 아무도 이러한 간접적인 수단 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들속에 파고 들어 갈수 없으므로 꽁공연한 성직매매 자(simoniac)가 아닌 사제가 하나도 없다는 접을 인정한다·. 물론 수치스러 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사이비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침없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시몬의 오염으로 더럽혀지치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 령의 여러 온사는 돈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타 하나님의 순수하고 거처 베푸시는 자비 (kh1dness)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과 교회의 덕육(德 育)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각자 자신 의 능력의 한계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자기 형제를 돕고 자기가 받은 은사를 주제넘지 않개 교회의 공동 해덱을 위해서 사용하면, 어느 누구고 개인의 우월성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홀로 모두 위에 서시는 것을 막는 일이 없어야 겠다.
하지 만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서 바르지 못하다"는 이 유로 시 몬으로 하여금 특별한 은사에 관해서 성령에 참여하저 못하도록 배제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충격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요컨대 유다가 악하다고 해서 성령의 온사를 강하게 받지 않은 것이 아니며 고린도 교인돌의 경우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었더라면 성령의 여러 은사가 그처럼 못쓰게 되지 는 않았을 것이다(고전 14). 그러므로 베드로가 제시하는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마음이 불결한 사람 가운데 성령의 온사가 뛰어난 사람들도 아주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러 한 은혜를 받기에 합당치 않은 자에게 그러한 은혜를 주신다 해도 그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타는 것이다. 둘째로 베드로는 여기서 일반적인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 교회의 특징이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시몬은 하나님의 권속의 한 구성원의 입장에서 신실한 자들이 누리는 동일한 은혜를 나뉘 가질 수 없다 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덧붙여 말할 것은 과거에는 이러한 온사를 누리는 것을 비난했었으나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2 그러므로~~~ 회개하고~~" ; 베드로는시몬에계 회개하고기도할 것을 권합으로써 그에게 사죄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데 그것은 회십의 감정에 이끌리는 사람이타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타는 점을 확 신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절망에 사로잡히고 말면 그 사람은 뻔뻔스럽계 되 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성경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타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가 시몬 에제 청천벽력의 말을 한 뒤에 곧 이어서 구원의 확신을 불어 넣어 주고 있 지만 그러나 시몬의 죄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타는 점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물론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옥에 있는 사람이타도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모든 악한 사람들이 유기자가 되었다는 확실한 중거를 대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사죄의 여지를 보여 주지 않고 가혹하계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외고집과 오만 때문에 더 날카로운 질책을 받아 야 마땅한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한 손으로 쓰러뜨리고 다론 손으로는 일 으켜 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저주를 퍼부어 멸망케 하 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베드로는 혹' (si forte)이라는 말로서 공포와 의심을 제기하고 있 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귀절 및 그와 유사한 귀절 에서 기도는 불안하고 의섬스런 마음으로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접을 증 명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거기에 대한 이유로서 인간이 자신의 기도가 틀림 없이 행복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타는 점을 확신하는 것은 무모할 우려가 있 기 때문이타는 말을 내세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즉 EC lxpa (에 이 아라; 혹)는 하나님 께서 너 를 용서 하실지 도(si qua) 모론 다 (whether God may forgive you) 는 의 미 이 다. 베 드로가 이 것 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몬의 마음을 당황하계 내버려 두려는 뜻에서가 아니타 그에게 간절한 기도를 하계 하도록 보다 강력하계 권고하 려는 뜻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문제가 우리 손 안에 들어 울 경우에는 우리가 너무 무관심하거나 나태하지만 난제 그자체는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떤에 있어서 적찮은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시몬에게 두려운 마음 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은 그의 마음에서 사죄를 얻는 확신을 제거하거나 그 룔 초조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시몬이 겸손하계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기도를 드릴 경우 소망이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면서,· 그의 죄악 의 심각성 때문에 사죄가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 지 그의 열성을 복돋아 주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즉 믿음은 우리가 하나 님께 접근하는데 있어서 우리를 안내하는 빛, 아니 기도의 근원이어야 한다.
"23 내가 보니 너는 악득이가득하며 ~~~~" ; 베드로는다시 시몬을 엄히 꾸 짖으며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듣어 절망감을 불어 넣고 있다. 이것이 이 럴 수밖에 없는 것은 시몬이 억지로라도 자신을 반성하게끔 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사람을 두고 오히려 그를 추켜 ~세우거나, 아니떤 상처 를 내 줘 야 할 사람을 두고 살짝 긁어 만 주는 데 서 그치 는 것 보다 그에 게 치명적인 것도 없다. 그러므로 죄인이 자신의 죄의식에 대해서 전정한 술품 과 고통을 체험하기까지는 이와같은 가혹성을 보여 주어 그의 마음에 상처 롤 주지 않으떤 안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속에서는 악성 종양이 자리를 잡 을것이요 그것은 정차적으로 그사람자신을 망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 리는 언제나 중용을 유지하는 가운데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 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베 드로의 말에 는 훌륭한 온유가 두 가지 들어 있 다. 그 하나는 우리 에 제 독 초와 쑥율 열매로 맺는 뿌리를 갖지 말라고 명령하는 모세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신 29:18). 이것은 일단 마음에 불경건의 독이 배대될 경우에 생기 는 내면적인 악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일단 이 독으로 전염되고 나 떤 거기서는 쓴 맛밖에 나을 것이 없다. '불의에 매인 바, (불의의 쇠고랑)라 는 표현 여시 동일한 내용으로 전체 마음이 사단의 손아귀에 곽 붙잡혀 있 는 경우륜 두고 하는 말이다. 요컨대 경건한 사람이라도 악한 행동에 휩쓸 려 듄어가는 수가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깊은 마음 속은 타락하지 않은 그대 르일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선은 인간성이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비춰 주시면 우리는 우리의 최악을 숨겨진 다발 그 대로 소중히 간직할 정도로 맹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베 드로의 의도는 시몬이 한가지 면에서만 빠져 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뿌리가 타락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한 가지 최 에 있어서만 사단의 올무에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의식이 꼼짝 달싹 할 수 없이 붙잡혀 있어서 통째로 사단에게 넘겨져 있다는, 말하자면 불의의 쇠고랑을 찬 노예라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여기서 우리는 죄의 심각 성온 눈에 나타나는 수치스런 행동이 아니타 마음의 자세에 따라 평가되어 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 셈이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와~~~~" ; 우리는 여기서 그가 베드로의 위협을 크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의 구원이 취급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을 안 수 있 다. 그리 고 여 기 서 말한 사람은 베 드로 한 사람 뿐이 지 만 그는 그들 모두를 상대로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그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후에 시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으로 상상해야 하 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성경은 추측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는 책망을 받아들이고, 죄의식에 사로 잡히며 하나님의 심판 욜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자비로 돌아와 자신을 교회의 기도에 위임하고 있 다. 이러한 모든 것은 회개에 대한 결코 사소한 표현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 가 회개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교부들온 한 가지로 후에 그 가 베드로의 십각한 대적이 되어 그와 로마에서 사흘간에 컬쳐 논쟁을 벌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쿨레멘트(Clement)의 이름이 나오는 논쟁 기록에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너무 구역질나는 미친 소리로 가득한 것이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귀담아들을수있었다는것이 오히려 이상할정도이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탄(Augustine)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당시에 로마에서 오고간 여러가지 믿을 수 없는 소문에 대해서 야누아리우스(Januarius)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가장 안전한 길온 우리에게 떠맡겨진 불확실한 여 러 견해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저 성경에 기록된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곳에 나오는 시몬 이야기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미심쩍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중거하야~~~~" ;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사마리안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계 했을 뿐 아니라 빌립이 가르친 바를 확증함으로써 그들이 이 미 받아듄인 믿 음에 그들이 화고히 서 도록 했 다는 이야기이다. 곧 ‘중거히다 ’는 말은 그들의 증거 덕분에 하나님 말씀에 대 한 완전하고 순수한 권위가 확립되었으며 이 전리가 정식으로 입증된 확실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특징은 자신들이나 남들이 조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에게 배웠던 것을 충실하계 선포했 다는 점이다. 누가는 그들이 이것을 한 도시뿐 아니타 여러 마을에 다니며 행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온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어찌나 불이 붙어 있었던지 그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그들의 입 술에 올 렸 다는 접 을 여 기 서 알 수 있 다. 이 렇 게 해 서 생 명 의 씨 앗이 한 도 시에서 시작해서 온 지역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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