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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행8:29)

1. 성경 (행8:26 ~ 40)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6)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7)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8)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29)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0)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1)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2)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3)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4)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5)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6)(없음) (37)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8)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39)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4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6 주의 사자가" ; 누가는 어떻게 해서 복음이 에디오피아인돌에게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여기서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오직 한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이 그 나라에서 차지하는 큰 권위와 권세를 생각하면 그의 신앙은 그 향기를 곳곳에 내뿜었을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복음은 아주 가냘픈데서 부터 시작했지만 하나의 씨앗이 짧온 기간에 넓은 지역에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성령의 능력이 보다 명백하게 드러났다. 먼저 천사는 빌립에게 남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거기에 대한 이 유와 목적은 밝히지 않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상대하시떤서 그둘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이처럼 행동하시는 경우가 많다. 그는 그들에게 할 일율 제시하시고 거기에 따르는 이런 저런 지시를 주시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자신의 수중에 두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의 이유나 우리의 순종의 결과가 당장 명백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단순한 명령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시 말해서 그 이유가 명백하계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는 우리가 그에게 순종하는 만큼 우리의 시도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것도 무모하게 시도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의 노력이 하나님의 인준을 받고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로 만 족하도록 하자.

 

그러나 천사들이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우리의 할 일을 뚜렷하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시 사항이 얼마든지 담겨 있으며 누구든지 하나님에게 상의하며 성령의 지도에 자신을 내말기는 사람에게는 결코 충고가 부족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준비와 열성을 가로막고 지연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태만과 소홀한 기도이다.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 모든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히브리어 '아자아'가 여기서 가자-(Gaza)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페르지아의 왕 캄비제 (Cambyses)가 이집트를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이곳에 보물을 보관했기 때문에 그가 이곳의 지명을 그렇게 불렀다는 식으로 말하는· 폼포니우스 벨라(Pomponius Mela)의 말은 틀리다. 물론 ‘가자'·(gaza)라는 말이 페르시아 말로는 보물 또는 재물을 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누가 역시 이 내시가 간다게의 보물을 책임말고 있었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駐2). 그러나 히브리의 명칭이 캄비제 출생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만큼 나는 후대에 와서 ,그 말이 변화된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아인(y)이 G로 바뀌는 일은(E:3) 다론 모든 예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이다.

 

‘광야'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알렉산더 대제 (Alexander the Great) 가 옛 가자(Gaza)를 황폐하계 만들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탄(Constantine (A.D. 274―323)J을 두 번째 새로운 가자의 건설자로 보는 사람들은 누가의 반박을 받고 있는 샘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는 콘스탄틴 150년 전에 이 가자가 있었다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추측컨대 콘스탄민은 이미 건설되어 있는 이 도시를 더 아름답게 만들고 확장했단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도시가 ‘해안지방'이었으며 옛 도시 로마 자리에서 2.5마일 가량 떨어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들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27 에디오피아 사람" ; 그는 곧 이어서 그를 내시라고 부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를 남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동방의 왕과 여왕들은 내시에게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말기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나중에 가서는 대신들(overseers)도, 그들 역시 남자들이었지만, 무분별하게 ‘내시’로 불리게 되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지막에 가서야 빌립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이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고 그가 명령하시는 곳으로 전전하는 자는그의 명령과 주관하에 시도된 모든 일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간다게'라는 명칭은 한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로마의 황제들에게 공동적으로 사용된 ‘씨이저'와 같은 이름이다. 따라서 에디오피아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여왕을  ‘간다게'로 불렀다. 이것은 플리니(pliny)의 주장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역사가들은 이 내시의 위풍당당한 모습에서 에디오피아가 당시 화려하고 부유한 나라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나라의 수도는 머로이 (Meroe) 였다. 세속사가들 역시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지배하는 것이 상례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가의 증거를 지지하는 것이다.

 

"예배하러~~~~~갔다가" ; 당시 이처럼 먼 지역에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이름이 넓게 퍼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동족과 다론 예배 행위를 공공연하게 시행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이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비밀리에 유대에 울 수는 없었으며 그에게 큰 많은 수행원이 따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지식의 향기가 이방 민족 세계에 퍼지게 되었으며 이 백성들의 유랑은 참 신앙심 (.piety)에 대한 일종의 전파 구실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 동방 지역에 걸쳐서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로마인들은 유대종교를 잔인한 칙령으로 정죄했지만 그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전향하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오심의 광채로 율법의 그림자를 홀으심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제거하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림으로써 도처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함께 모으시기 이전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한 서막(序墓;preludes)이었다(엡 2:14).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것을 미신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그는 분명히 자기 나라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독실한 사람은 하나님 경배자들에게 규정된 여러가지 관습을 소홀히 취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마음 속 깊이 은밀하계 간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것을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고백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동족과의 인연을 끊음으로써 그가 많은 사람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알기로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신앙의 외형적인 고백이 사람들의 평가보다 더 귀했다. 생각해 보자. 그가 율법의 지식에 대한 희미한 섬광을 보고서 그 정도로 깨달았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배신적인 침묵으로 복음의 환한 빛을 꺼버린다면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이겠는가?  여기서, 그 때는 이미 제사가 폐기된 때요 지금은 하나님께서 지역의 구별에 상관없이 온 사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원하시는 때가 아닌가 하는 질문기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곧 복음의 잔리에 대해서 아직 계시받지 않은자들이 율법의 그림자를 지킨것온 미신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의식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폐기되고 있다는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는 곳에서는 그가 안계셨던 동안에 그를 대표하던 옛 의식온 사라진다는 의미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주님께서 내시에게 한 교사를 보내시기 전에 그를 예루살렘까지 오게 하신 이유는 아직 율법의 초보적인 단계를 통해서 준비를 갖추는 것이 그에게 유익했으며 그 결과 후에 그가 복음의 가르침을 더욱 더 기꺼이 받아들이는 적격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지적은 믿을 만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몇몇 사도들을 대면시켜 주시지 않은 이유는 그의 은밀한 섭리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혹시 내시가 자기에게 제시되고 자신의 생각을 능가하는 한 보화에 대해서 더 큰 비중을 두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아니면 그가 외형적으로 화려한 의식과 성전의 모습에서 따로 떨어져서 혼자 조용하계 구원의 방법을 구한 다음에 그리스도를 그에게 제시하는 편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8.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 ·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읽고 있었다는 사실온 그가 자신의 생각에 따라 굴을 읽고 고안해 낸 하나의 신(a god)이 야니라 그가 율법의 가르침을 통해서 알게 된 유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사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한다는 것은 껍질뿐인 의식만 잡고 늘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고 그와 동시에 말씀을 더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경솔과 혼란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속에서 그의 말씀에 의해서 비치시지 않는다면 율법 속에 규정되고 있는 예배 양식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장에서 (in His school) 교육을 받은 그의 제자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그저 읽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교사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이 선지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나의 대답온 이것이다. 곧 그는 배우겠다는 욕망으로 이 선지서를 읽고 있었던 만큼 그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사실 그는 그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러면 왜 그는 그가 읽고 있는 귀절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는가? 그것은 그가 보다 더 애매한 귀절들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신앙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는 뜻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없는 귀절이 이사야서에는 많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책을 읽어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할 정도로 미개하거나 원시적일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매(每) 10절씩을 제대로 충분하고 완전히 다 이해하고 넘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시의 이사야서 읽기는 마치 이와 같았다. 요컨대 자신의 교육에 도움이 되는 문제에 있어서, 물론 이것이 그의 역량에 한정된 것이긴 했지만, 그의 공부는 틀림없이 그에게 유익을 끼쳤다. 바뀌 말하자면 그에게 숨겨진 내용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러한 성가심 때문에 그는 그 책을 내동맹이치지는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성경 읽는 방법이어야 한다. 곧 우리는 명백한 문제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제쳐주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간절하고 즉각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보호한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더 선명한 빛이 비춰 울 때까지 그냥 넘어 가는 것이 옳다. 그러나 우리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고 한결같이 계속해서 읽는다면 끝내는 성경에 익숙하게 되고 말 것이다.

 

"31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 내시는 일개 평민인 빌립의 질문을 허용할 뿐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거침없이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겸손은 아주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독 차 있는 자라면 이렇게 유순하게 나울리 만무하다.

 

 오늘날 성경 읽기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결실을 맺는 것은 기꺼이 배우려는 사람이 백에 하나도 찾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지에 대한 의식 때문에 수치를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남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무지를 그대로 간직하려 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방지게 남을 가르치려고 덤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내시는 자신의 무지를 어찌나 철저하게 의식했던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제자가 되어 성경을 읽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지능을 초월하는 지 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성경에 대한 참된 존경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싫어하지 않고 부지런히 읽는 가운데 성경의 계시에 의존하며 해설자를 우리에게 주실 것을 갈망하는 것이 마땅하다·

 

"빌립을 청하여" ; 내시가 자신을 위한 해설자와 교사를 청했다는 점은 또 다른 그의 겸손의 예이다. 그는 부자에계 공동된 오만심으로 빌립을 배척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금 읽고 있는 말을 이해하겠읍니까?"하는 빌립의 말에는 내시의 무지에 대한 일종의 말없는 핀잔이 포함되어 있다. 부자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함부로 말할 경우 그걸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그들은 ‘그래 그게 어떻다는거야?'' 아니면 ‘당신같은 사람이 나와 무슨 불일이 있어 ?'  하는 말을 금방 내벨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내시는 말없이 빌립을 맞아들여 가르침을 청하고 있다. 우리도 하나님을 우리의 교사로 모시려면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나님의 영은 겸손하고 말없는 자에게 임하신다(사 66 : 2).

 

 오늘날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결점을 알고 배우려 든다면, 이 경우 주님께서는 우리가 헛되이 고생하게 내버려 두시기보다는 차라리 천사들을 하늘에서 보내어 우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내시의 본을 따르는 가운데 주님께서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사용 하도록 제시하시는 방법을 총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광신자들은 하늘로부터 영감 (靈感: E.1,1fJOu{Ja{JµouS') 을 구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종을 무시하지만 그들은 이 하나님의 종의 지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가 하면 자신들의 통찰력을 의지하는 가운대 아무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하고 어떤 참고서 적도 읽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사용하도록 정하시는 보조 수단이 무시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이것에 대한 경멸을 벌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시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는 성경뿐 아니라 우리를 돕는 교사들과 해설자들이 허용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내시에게 천사를 보내기보다는 빌립을 선택하셨던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간접적으로 천사의 음성을 통해서 빌립을 부르시고 천사를 직접 보내시지 않은 것은 우리가 사람들의 말을 듣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겠는가? 천사들은 침묵을 지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사람들의 입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은 외적인 전파에 대한 비상한 추천이 아닐 수 없다. 이점에 대해서는 9장과 10장에서 좀더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32 읽는 성경 귀절은~~~~" ; 엄격히 말하자면 그것온 하나의 연속적인 것 내지는 짧은 절(節)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은 점은 내가 이 절을 읽게 된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따라 된 일이요 결과적으로 빌립은 기독교의 전체 본질을 적절하계 유도할 수 있는 하나의 주제 내지는 기본적인 원칙을 갖게 된 셈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먼저 성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철저한 교훈을 위한 자료가 그의 손에 쥐어지고 다음에 그 방법이 사람의 사역을 통해 명백하계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유명한 예언이다. 이것이 특별히 다른 것에 비해 특이한 것은 이 예언에서 이사야는 교회가 구속(救lll)받을 방법을 꾸밈없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그 방법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죽음에 의해서 인간에게 생명을 획득하고, 그가 자신울 인간의 죄악의 속죄를 위한 회생제물로 바치며, 우리가 파멸에서 건져냄울 받은 다음에 곧장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서 그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고난을 받고 바로 지옥에 내려가신다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 귀절은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들이 어떻게 의를 획득하며, 어떻게 사단의 횡포와 죄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계 되는가 하는 점을, 곧 구원의 모든 면의 원천을 뚜렷하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가가 인용하고 있는 부분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속량해서 거기에 생명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는 아예 잃어진 것으로 포기될 정도나 다름없는 사람처럼 완전히 박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그의 죽음온 생명을 주는 것이며 이 절망의 구덩이에서 유일 무이한 승리가 나올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도살당하기 위해 고분고분히 꿀려가는 ‘수양'과 또 털을 자르도록 말없이 복종하는 ‘양에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자발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순종하신 사실온 틀림 없이 하나님을 달래 드리는 그 방 법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것~ (요 18 : 34, 36) 그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바침으로써 우리를 기다리던 그 처벌을 자신이 뒤집어쓰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죽으실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자신의 순종으로 인간의 고의적인 불순종을 멸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이 두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가르치고 있듯이 고난을 이겨내는 격려를 얻도록 하자(밴전 2 : 18이하). 그러나 내가 취급한 바 있는 신앙에 대한 가르침에, 우선을 두는 것이 마땅하다.

 

"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社4)" ; 이것은 이 내시가 읽고 있던 두루마리가 헬라어로 된 것이었거나 누가가 기록한 것이었거나 둘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것은 당시 사용되던 사본이었다. 이사야는(社5) 그리스도께서 속박과 심판에서 벗어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낮추심 뒤에 곧 이어진 놀라운 승리를 송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압도되고 말았더라면 그에게서 바랄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아 죽음을 당하신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확증한 다음에 여기서는 그에게 새로운 역할을 돌림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망의 심연에서 승리자로서 출현하고 지옥 그 자체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창시자로 돌출하게 하고 있다.

 

 물론 나는 이 귀절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강제로 감옥에서 십자가로 끌려 가신 것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듈은 ‘제거되다' (tolli; to be taken away)를 무(無)로 전락된다는 의미와 똑같이 생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np,r-(락하크) 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aepeaOa, (아이레스다이)라는 헬라어의 의미나 마찬 가지로 애매하다. 그러나 누구든지 문맥을 보다 더 면밀하계 검토해 본다면 선지자가 지금까지 우리 앞에 제시한 우울하고 징그러운 광경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영광의 새로운 출현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나의 지적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어의 번역은 선지자의 말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수욕 내지는 배척에 있어서 그의 심판이 제거된 것은(sublatum est) 그가 박살난 모양을 하고 있어야 했을 때에 아버지께서 그의 사건을 변호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명판'이라는 말은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권리’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서는 그것이 ‘정죄'의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정죄받은 절망적인 사람처럼 진퇴양난의 기로에 처한 다음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일으켜 세움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그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 올려 주시기 전에 죽음에 내던져질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교회의 전체 몸에 적용되어야 마땅한 것은 모든 경건한 자들이 사망의 밥이 되어 마땅히 하나님의 손길에 이끌려 기적적으로 일으켜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변호자로 나타나시게 되면 그는 그들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수 많온 죽음에서 그들을 이꿀어내어 그돌에게 혁혁한 승리를 안겨 주신다. 이것은 골로새서 제2장에 있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오신 것과 같온 이치이다.

 

"그 세대" ;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죽으심을 송축한 뒤에 여기서는 그의 승리가 짤막한 기간에 국한되지 않고 만대에 걸쳐서 확장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선지자의 탄식에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속성을 인간의 혀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주석가들은 이 귀절을 비참하게 곡해해 오고 있다. 교부들온 아리우스(Arius)와 논쟁하면서 이 귀절에서 하나님 말씀의 영원한 세대 (generation)를 입증하려 하는데 그것은 선지자의 의도예 매우 어긋나는 노릇이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세대에 적용하는데 이것 역시 사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그리고 선지자가 여기서 당시 세대의 인간들을 꾸중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 역시 선지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교회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가 더 낫다. 물론 이들이 ‘세대'라는 단어를 후손 또는 자손으로 보는 것온 잘못이다. 그러나 선지자가 사용하는 '도르' 라는 히브리어는 한 세대(an age) 또는 인간의 생명의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의 은총으로 사망에서 단번에 (once and for all) 구원 받게 될 경우 그의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의미에는 전혀 애매한 점이 없다. 물론 끝이 없는 이 생명이 전체 교회에 확대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머리의 것으로 돌린 이 승리의 열매와 성과를 이제 모든 지체를 통해서 송축하고 있다. 따라서 각 신자는 이 귀절에서 영생에 대한 확신을 받을 수 있으며 둘째로 교회의 영속성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증되고 있다.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멸망받았기 때문에 천상 천하에서 그처럼 장엄하게 지배한다는 사실은 정말 모순되어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파멸이 생명의 원인이라는 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지옥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울라가기 위한 계단이 되고 구원의 줄거운 광채가 저 십자가의 소름과 어둠에서 비쳐오며 복된 불멸 (不滅)이 저 사망의 심연에서부터 흘러 넘치게 된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그를 높여 주셨으며 그 결과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되었다(빌 2 : 10). 이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누릴 교제의 종류를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어느 누구도 동일한 길을 가는 것을 어려워 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 이것은 내시가 얼마나 진지하계 배우고자 했는가 하는 점을 잘 묘사하는 귀절이다. 그는 마치 불확실한 미로를 헤매듯 이사야의 여러 예언 가운데서 배회하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읽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결코 오만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기에 그는 그가 자신의 예리한 동찰력을 총동원해서 일생동안 수고했어도 얻지 못했을 예상 밖의 도움을 갑자기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의식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저버리지 않을 경우 주님께서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스승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일단 뿌려진 씨앗이 당분간은 떨어전 땅밑에 숨겨져 있듯이 주님께서는 그의 영의 조명(照明)을 통해서 지루하기 짝이없고 성과가 없는 독서에 밝은 이해의 빛을 발하실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성경에 있는 구원의 길이 그의 백성에게 꽉 닫혀지고 그들의 독서가 당장 무익하게 될 정도로 그들의 눈을 꽉 닫아 버리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종종 마치 장애물이 그들 앞에 놓여진 것처럼 그들을 꼼짝 달싹 못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그들의 무지를 상기시킴으로서 그들을 겸손하도록 단련하거나, 그들이 자신들의 무감각을 제쳐버리고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하거나,. 기도의 불이 붙게 하거나 그것을 사모하는 가운데 진리를 더욱 더 사랑하계 하거나, 아니면 때때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그의 하늘의 지혜의 우월성을 보다 더 잘 추천하기 위해서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이 당장에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해도, 그들이 ·오만한 경멸로 스스로 그 길을 봉쇄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그둘의 수고가 탕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언제나 깨달을 것이다. 완전한 계시의 시간이 올 때까지는 지식에 대한 아주 작은 분량의 시식(taste)만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분한 발전 속도인 줄로 알고 만족하도록 하자.

 

"35 빌립이 입을 옅어~~~~~" ; 성경에 나오는 ‘입을 열어'라는 표현에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러므로 누가의 의미는 빌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드디어 말하기 (quasi p/eno ore) 시작했다는 뜻이다. 빌립이 이 예언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이보다 더 예리하게 묘사하는 귀절이 따로 없으며 이 예언이 그때 마침 그의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립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떠하며, 거기서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다음에 현실 그 자체로 돌아와 내시로 하여금 성경에 약속되어 있던 그리스도께서 이제 나타나셨다는 점을 알게하고 그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소유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praedicasse)하는 식으로 번역하지만 누가는 ‘복음을 전파했다' (evangelizasse)로 말하고 있다. 그 의미는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후대에 전하도록 명령하신 내용을 가르쳤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경우 전체 복음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36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여기에 내시의 세례가 따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그 짧은 시간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내맡기고 굴복할 정도로 큰 발전을 보았다는 점을 알수 있다. 곧 그가 그처럼 정열적으로 외적인 고백을 하려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이미 원숙한 신앙이 어떤 형대로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직접 세례를 요청하지 않은 것은 그의 겸손 때문이라는 크리소스톱 (chrysostom)의 견해를 우리가 여기서 받아 들일 수 없는것은 이러한 식의 질문이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요'하는 말 보다 더 간절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우리는 여기서 내시는 세례가 자신 안에 있는 새 생명에 대한 상징이요, 따라서 그것은 말씀에 덧붙혀진 것이요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니 만큼 그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깨달을 정도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은 내용을 기꺼이 받아 들였듯이 그는 이제 열열한 마음으로·자신의 신앙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속으로만 믿을 뿐 자신이 그러스도인이라는 점을 사람들 앞에서 중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충분한 신앙이 아니다. 여왕의 마음과 모욕 그리고 그밖에 여러가지 생각이 그에게 떠올라서 세례받는 것을 저지했겠지만 그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계수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가 그서너 시간의 초보적인 단계를 통해 그만큼 전진할 수 있었다면 5년, 10년 아니 20년간의 가르침 을 통해 받은 신앙을 자기 속에만 감춰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의 태만이야말로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

 

"37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한글 개역성경에는 난외의 주에 있음)내시가 먼저 그의 신앙을 고백하고 나서야 세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의 일반적인 원칙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곧 지금까지 교회 밖에 있던 자들의 경우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점을 증거하기 전에는 교회로 받아 들여져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말하자면 신앙의 부록이요,  따라서 순서상 종속적이다.  둘째로 세례는 신앙의 서명 (seal)인데 신앙이 없이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불신앙적이요. 아주 터무니 없는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광신자들은 이런 핑계를 내세워 유아세레를 공격하는데 어리석고 그릇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왜 내시의 경우 신앙이 세례에 선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이 상징을 통해서 교회의 권속의 구성원들을 구별하시는 만큼 세례 받으려는자들은교회에 접붙임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돌이 신앙에 의해서 접붙여지듯이 경건한 자들의 자녀들이 교회의 타고 난 자손들이 되며 총생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성원으로 계수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또한 우리의 자녀들의 아버지라는 원칙 밑에서 우리를 입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경우에는 신앙이 필수적이지만 이것을 자녀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나쁜 것은 그들에 대한 양식 (ratio)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위대한 사람들은 신앙이 세례로부터 확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면서 이 증거를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내시는 세례 받기 전에 먼저 완전한 신앙을 제시할 것을 명령 받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더 이상 더 할 것이 있을 수 없다'하는 식으로 변론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온 마음’이란 ‘절실한'그리고 ‘거짓이 없는'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서'믿는 자들이 완전하게 믿는다고 상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의 믿음이 연약하고 가냘퍼도 그의 마음은 건전하고 위선이 전혀 없을 수 있다. 다윗이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 빌립은 물론 전에도 사마리아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나 그는 그들이 아직 목표에 훨씬 미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는 신앙이란 마음에 산 뿌리를 두고 있지만 아직 매일 매일 중대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신앙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 세례만 그리스도에게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세례의 눙력과 진실성이 그에게 있는 만큼 내시는 그리스도만을 자신 앞에 내세우고 있다. 요컨대 내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모세의 손에 율법을 맡기셨으며, 한 백성을 나머지 세계 민족과 구별하셨고 그리스도를 약속하셔서 그를 통해 세상에 대하여 자비로우실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점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께서 세상의 구속주요 하나님의 아돌이라는 점을, 곧 이 명칭에 성경이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이 간략하계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 다. 이것이 빌립이 언급하는 완전한 신앙이다. 이 신앙은 그리스도를 과거에 약속되었으며 마침내 계시된 분으로 그것도 아무런 위선이 없이 전지한 마음으로 받아 들인댜 이것은 바울이 요구하는 그대로이다. 성인으로서 이러한 신앙이 없이 자신의 유아세례를 시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헛된 자랑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유아들을 자신있게 받아들여 주시는 것온, 그들이 이해 할 나이와 능력에 도달하자마자 그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굴복하여 그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신앙의 분별력을 통해서 세례 속에 대표되고 있는 그의 능력을 알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이다

 

"38 둘 다 물에 내려가~~~~" ; .여기서 우러는 옛날 사람들의 세례 의식을 보게 된다. 곧 그들온 온몸을 물속에 담갔다.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습관은 목사가 몸이나 머리에 물을 뿌리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의식상의 차이란 하찮은 것이요, 그것 때문에 교회를 가르거나 혼란하게 논쟁을 벌일 정도의 것은 아니다. 물론 세례 의식 자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이므로 그것이 사라지게 버려두기 보다는 그것을 백번이고 죽도록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물은 우리의 씻음(washing)과 새 생명을 상징하는 마치 거울을 동해 보여주듯, 우리에게 물로 그의 것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청결을 거기서 구하게 하심을 대신 보여 주셨으며, 우리가 그의 영으로 거듭나는 것은 우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가르쳐 주시고 있으므로 (밴전 2 : 24) 우리에게는 틀림없이 세례의 본질을 조성(助成)하는 모든 것이 있다. 그러한 이 본질을 그대로 두고 약간씩 다론 의식을 실천해 가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번 물에 잠기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직 한 번만 물에 잠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비본질적인 의식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단순한 제도를 더럽히지만 않는다떤 꼭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미주알 고주알 따지는 것은 우리의 본분이 아니다.

 

"39 둘이 물에서 올라 갈 새" ; 내시의 이야기를 맺는 대목에 이르러서 누가는 빌립이 그의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천사와 같이 파송을 받았다가 그의 수고에 대한 사의를 표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는 점,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사라진 데서 그가 접근해 온 것은 비위를 맞추어 돈을 뺏어 내기 위한 수작이 아니었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이것은 내시의 믿음을 확신 시키는데 있어서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빌립이 내시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은 이 방법을 보고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봉사를 드리도록 해야겠다. 아니 그들은 ·인간들에게 무보수로 봉사함으로써 하늘의 보상을 소망하도록 해야겠다. 물론 주님께서는 복음의 일군들에게 그들이 가르치는 자들에게서 상을 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만(고전 9 : 9) 그와 동시에 그는 그들이 돈만 바라고 이득을 위해 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요 10 : 12)._ 모름지기 그들의 목표는 인간들을 하나님 편으로 얻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

 

"혼연히" ;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지식은 언제나 이 열매를 동반한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자비의 보고를 활짝 열어 제칠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을 동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데서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쏟아 놓으심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완전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그 어느것도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하시는 이것보다 더 순수한 기쁨의 근원이 또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될 때 하늘은 청명하기 시작하고 땅은 평온하며, 이로써 양심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슬프고 무서운 의식에서 해방되고 사단의 횡포에서 벗어나며 사망의 혹암에서 헤어날 뿐 아니라 생명의 빛을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온 그리스도의 나라를 두고 이야기 할 때마다 오히려 우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환희에 넘치고 승리에 찬 찬송을 부를것을 당부하고있다· 그러나 세상의 여러가지 헛된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차 있는 자들은 이러한 영적인 기쁨올 바라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세상과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무시하는 법을 익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참으로 즐겁게 하실 수 있도록 해야겠다.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  여호수아 제11장에 보연 아소도 (Azotus)는 아낙 자손들을 내 쫓을 수 없었던 성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곳은 아스칼 론에서 25마일(2백 스타디아) 떨어전 곳이다. 히브리인들은 이곳을 '아쉬돋' 으로 부른다. 빌립은 당시 그곳까지 날리워 갔다가(carried away) 거기서부터는 정상적인 인간의 걸음걸이로 여행을 했는데 그는 지나가는 곳 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신앙의 명성을 전파한 것은 톨림없이 비상하고 놀라운 행동이었다. 누가는 빌립이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있는 모든 도시에서 전파했다는 말은 분명히 밝히지만. 그가 사마리아에 돌아 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가 가이사랴에서 얼마동안 머물러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는 미 해결의 장으로 남겨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