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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20)

1. 성경 (행9:19하~31)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19)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0)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1)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2)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3)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4)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5)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6)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7)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8)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29)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0)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0 절" ; 누가는 이어서 바울의 회심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당장 공중 앞에 나타나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한 제자라는 점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단호하계 복음을 번호하면서 자신을 이 복음의 원수들의 증오와 분노에 내어맡기고 있다. 따라서 얼마 전까지 만 해도 그리스도에게 맹렬한 공격으로 돌진하던 사람이 말없이 그의 지배에 굴복할 뿐 아니라 마치 선발대 처럼 그의 영광을 변호하기 위해 가장 위험 한 지역까지 돌진하고 있다. 물론 그가 아나니아라는 대리인을 통해 그처럼 쉽사리 개조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기초적인 것을 받아 먹을 때 하나님을 통해 더 고차원적인 것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이 그의 전도의 요점이다. 갈은 의도에서 곧 이어서 그는 "이 분이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비울은 율법과 선자자로부터 메시아의 참된 직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온 메시아에 대해서 약속되고 기다리기로 되어 있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의 전도의 내용은 바로 이런 뜻이다.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구속자가 하나님의 파송을 받을 것인데 그가 만물을 행복한 상태로 회복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철칙이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가 바로 이 구속자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가르치자면 그들이 메시아의 지상 왕국에 대해서 품고 있던 업청난 오류를 그들의 머리 속에서 뽑아 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율법에 약속되었는가 하는 점을 다루었음에 틀림없다. 그려나 모든 것이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하는 바로 그분이라는 이 한 가지 목표들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는 이 한 단어로써 만족하고 있다.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뜻에서 덧붙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복음에 대한 반대는 곳곳에 소문이 나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러한 급작스런 변화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적의 한가지 결과는 그들이 갑작스럽게 새롭게 된 사람을 보고 모두들 당황하계 된 것이요 그 결과 그의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에 더 크계 작용하계 된 것이다. 그들온 이 기적을 강조하는 뜻에서 그가 야수와 같이 잔인하게 날뛰고 있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계획을 실천하려고 다메색에 내려 온 사람이었다는 상황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모든 구원의 확신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방향에서 그의 이름울 고백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요 "혹은 병거를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 : 7)라고 하는 귀절과 같은 내용이다. 사실 성경이 하나님을 두고 부르는 이름은 뭐든지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다.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  여기서 누가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바울의 정열을 칭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강력한 논리로 유대인들을 반박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힘을 더 얻어'라는 말은 그가 성경의 여러가지 증언과 성령의 다른 도움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말하자면 그의 모든 적대자들을 능가했기 때문에 그는 논쟁에 있어서 승자였으며 그의 고백에는 위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가 사용하는 ‘굴복시키니라'라는 말은그들이 바울에게 쫓겨 정신을 잃을 정도로 대경실색하게 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굴복시키는 방법은 바울이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 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해 봤지만 패배하고 혼란하계 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온 성경이 논박하는 데 있어서 유익하다는 자신의 말의 전실성을 체험으로 입증한 셈이다(딤후 3 : 16).  그는또한 전리를 옹호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감독과 교사들에 대해서 요구하는 바를 실제로 보여 준 셈 이다(딛1 : 17). 그리고 사실 누가는 바울이 그의 논쟁에 있어서 얼마나 승리를 거두었던지 유대인들을 쓰러 넘어뜨릴 정도였다는 점과 그들의 오만은 아직도 전리에 굴복할 정도로 박살이 나거나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의 양심은 아직도 내부에서 저항을 그치지 않으며, 그들의 헛된 견해에 대한 터전을 상실해 놓고도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천은 성경이 그에게 검(劍)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이단자들이 들고 일어나 참된 전리를 반대하며 싸우거나, 불경건한 자들이 모든 신앙심을 뒤엎으려고 분부하거나, 버림받은 자들이 끈질기게 저항을 해 오거나, 우리는 이 원천에서 우리의 무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경에서 아무런 무기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불리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은 이단자들과의 논쟁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성경을 통해서 확정될 수 없다는 비참한 도피성에서 그들의 은신처를 찾는다. 그러나 사단 자신도 말씀의 검으로(託 5) 굴복된다면 왜 그것이 이단자들을 도망가게 할 수 없겠는가?  물론 이것은 그들이 항복한다거나 성가신 존재로서의 역할을 그만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란을 피하려면 하나님께 반기를 선동하지 말고 침착하고 온순한 마음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평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23. 여러 날이 지나매~~~" ; 이 ‘여러 날'이타는 표현은 바울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온 비록 처음부터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일단 좋게 시작하신 과정이 그처럼 빨리 중단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으며 그가 복음 전파에 전전을 볼 때까지 그의 놀타운 섭리에 따라서 그의 원수들의 의도를 방해하고 그들의 노력을 제지하며 그들의 악의와 분노를 견제하셨다는 뜻이다. 요컨대 불겅건한 자들은 그들이 싸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기를 쓰고 발광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기꺼이 멸시하려 하지만 그들은 좋건 싫건 그 말씀의 능력을 억지로라도 깨닫게 되므로 그들은 마치 미친 야수나 마찬가지로 곤두박질하며 달려드는 것이다.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에 굴복하기 전에는 그들의 무분별한 열정은 거의 언제나 그러한 잔인성으로 발전하고 만다. 이러한 맹목은 사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 무시한 것이다. 그들의 양심에 와 닿는 상처가 주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면  왜 그들은 이처럼 노발 대발 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도  건전한 종교를 증오하는 자둘의 위선을 처벌하시는 것은 그들이 혹암의 친구요 빚올 기피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사단이 일단 비뚤어전 열광자들에게 전리를 박해하도록 넘주하고나면 그들은 제멋대로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들게 되고 만다· 말하자떤 그들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극악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그러한 계획을 서슴없이 실천하려 하는 것은 그들의 열성이 그들에게 변명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나 마찬가지로 오늘날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말살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온다. 그들은 대담하계 이 검(劍)을 승격할 뿐 아니라 우리를 파멸하기 위한 여러가지 음모, 상상을 불허 하는 갖가지 계략에 몰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이러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먼처 나쁜 명분(causes)을 변호하는 데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하고 다음으로 선한 명분에 대해서는 만족스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추측컨대 첫째 그둘은 은밀하게 바울에 대한 매복을 시도했으며, 둘째 그런 방법이 아무런 효과를 맺지 못하자, 그 도시의 지도자에게 접근했으며, 세째 그둘이 어떻게 해서든 그를 가로막기 위해서 성문에 파수병을 배치했던 것 같다. 요컨대 바울은 누가가 여기서 유대인들이 한 짓으로 돌리는 사건을 아레다 왕(King Aretas)의 방백의 (駐6)일로 예기하고 있다.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 여기서 제자들이 바울을 이런 방법으로 구출한 것이 합법적이며 바울로서도 그런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한 것이 정당한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법(法)은 성벽(城壁)을 성스러운(sanctos)것 으로 성문(城門)을 불가침의(sanctas) 것으로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을 위해 공공 질서를 소란하계 하기보다는 죽었어야 옳지 않았는가 하는 예기가 나울 법도 하다. 나의 대답은, 우리는 처벌을 부과함으로써 (sanctione interposlta) 당을 넘는 것을 금하는 법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 의도는 성이 도둑돌에게 침해당하지 않고 시민들이 배역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을 구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 이유는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바울을 이처럼 바구니에 담아 내려 보낸 것은 원수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는 개인이 담을 뛰어 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처사였다. 키게로(cicero)는 후자의 경우를 들고 말하면서, 바록 법은 낯선 사람이 담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그가 한 도시를 구출하려는 목적으로 담을 넘을 경우 그에게 잘못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법은 언제나 공평하게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옳은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남 모르게 피했다 해서 비난을 받을 수 없는 것온 아 사건이 성민의 아우성을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바울이 안전하계 도망하려면 이처럼 성문지기를 몰래 도망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가운데 당신의 백성을 겸손하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울 여기서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그의 연약성의 한가지 실예로 말하고 있다(고후 11 : 32). 이러한 체험을 필두로 그는 재빨리 십자가? 를 젊어지는 데 익숙하게 되었다.

 

"26 사울이~~~~~~" ; ; 아직 초년병인 바울이 가까스로 원수들의 손을 빠져 나왔는데 제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것 은· 힘겹고 난처한 시작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마치 우스게거리 마냥 이리 저리 발길질만 당하고 아무 데서고 쉴 곳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보였을 수도 있다. 그가 그의 온 백성의 적개심을 산것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마저 배척을 받고 있다. 그가 어찌 마치 인간사회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치럼 절망하지 않울 수 있었겠는가? 먼저 이러한 배척이 있는 이상 그에게는 교회롤 배척하는 일 외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과거의 자신의 생활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무서워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형제들이 그에게 간격을 두는 것을 정당한 공포로 인정하고 있다. 과거에는 횡포하게 날뛰었지만 이제는 노도같은 박해를 담대하게 받아 들이는 거기에서 우리는 그의 순수한 회심을 엿볼 수 있 다. 그와 동시에 그는 신자들 사회에서 배척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에게 다시 화해시켜 주실 때까지 참율성있게 기다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점을, 곧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특별히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뒤흔드는 야심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타락하고 배도적인 회당의 모든 책임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낮온 자리에 속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교육이 꼭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이 낮은 자리에서부터 최상의 영예의 자리에 울라 세상 끝날까지 교회의 핵심교사의 노릇을 하고 있다. 사실 아무도 먼저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남들과 동료가 되지 않고서는 교회에서 가르칠 자격이 없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  제자들이 바울을 이 정도로 피한 것은 과격한 소심증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사도들 자신을 두고 사용된 것이다. 물론 체험을 통해서 그처럼 치명적인 원수라는 점이 드러난 그였다는 점에서 그를 두고 미심적어 한 것은 어느 정도 비난이 완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너무 고분 고분하게 달려 들었다가는 무모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을 수도 있다. 그러므 로 나는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에 입각한 공포를 그들의 책임으로 들리거나 그들에게 형의를 두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만약 그들이 그들의 신앙을 입증하라는 부름을 받았더라면 그들은 용감하게 바울 뿐 아니라 지옥의 모든 맹위에 대해서도 맞서 싸웠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이탈하계 강요하지 않는 공포를 무조건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뒤이어 덧붙이는 누가의 기록온 바나바와 누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바울이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사도들에게 재 설명 했을 가능성이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특별히 바울의 담력에 관계되는 대목에 대해서는 바나바의 얘기로 돌리는 것이 머 적절한 것 같다.

 

"28절" :  그 후에 누가는 바울이 제자들과 함께 '출입한'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보다 더 친밀한 사교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가령 어떤 성의 주민들이 성문율 ‘출입'한다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단 바나바의 추천을 받고 난 다음부터 양 무리의 하나로 취급을 받고 있으며 그 결과 온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누가는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다(egisse)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복음을 증거하는 그의 용기를 칭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숱한 장애물 가운데 있는 그에게 확고부동한 마음이 없었머라면 그는 감히 그의 입을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여기서 모두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각자의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지적받고 있다. 요컨대 모두가 바울은 아니라 해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우리에게 있다면 말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경우 그것은 우리가 완전히 벙어리가 되지 않을정도의 확신은 불러 일으켜야 당연하다. 나는 '주의 이름'을 바울이 그리스도의 명분을 강력하게 변호했다는 뜻에서 말하는 복음의 고백으로 받아 들인다.

 

"29.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 여기서 말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헬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당시 세계 도처에 흩어진 유대인들로 보는 에라스므스의 견해는 옳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각자의 지역으로부터 함께 모여서 예루살렘에 순례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본토인들이 아니라 외국인이나 낯선 사람들과 토론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자의 경우는 그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요 그 역시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에 그를 알아오던 사람들은 제쳐놓고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전진을 볼 거리가 있는가를 타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불요 불굴의 용기를 잃지 않는 가운데 한 용사에게 맡겨진 모든 임무를 성취했다.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 우리는 여기서 또 열성 대신에 들어서는 격분을 본다. 어쩌면 위선과 미신은 광포하고 잔인한 것 이상의 것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가 거짓 유사 교의에 의해 침해를 받을 경우 거룩한 분노로 불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상황을 잘 판단함이 없이 결정을 내리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방황하는 자들을 제길로 이끌어 들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열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지막으로 그 들이 절망적인 오만을 대한다 하더라도 그 칼을 자신의 손에 쥐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수하는 권위를 허용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선자들은 그 이유를 캐묻지 않고 무작정 피를 훌리는 데만 여념이 없으며 미신도 역시 맹목적인 광기에 이끌려 피에 갈증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까지 경건한 자들을 괴롭히느라 이리저리 날뛰던 사람이었으므로 이제 발딛을 곳이 없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곳곳에서 신자들을 그들의 집에서 이꿀어 내어 거의 끝장을 내는 등의 만행을 일삼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더 나온 상황이었다.

 

"30 절" ; 그가 다소로 간 것은 틀림없이 그곳에 복음의 가르침을 전파하려는 명백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곳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고향으로서 그는 그곳에서 어느 정도 인정과 권위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형제들에 의해서 음모자들의 손에서 빠져 나와 안내를 받고 있다.

 

"31 그리하여~~~~~. 교회가" ;  이 말은 바울의 존재가 복음의 원수들에게 큰 가시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떠나자마자 갑자기 교회가 평온하게 되었다는 말은 그의 모습 자체가 원수들의 광분을 불러 일으켰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가 마치 싸움군이었다는 식의 핀잔이 아니라 바울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불경건한 자들은 미칠듯이 날뛰었다는 점에서 그를 칭찬하는 의미로 지적된 말이다. 요컨대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영예와 많은 분쟁을 가져 오는 방향으로 그를 사용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론 사람이 아니라 불경건한 자들을 격분케 하 는 자들을 당장에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 셈이다. 이 경고는 결코 하찮온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너무 안일한 생활을 좋아하므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그리스도의 종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열성이 야인들에게 해를 꾸미도록 자극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경우 그들 모두에 대해서 화를 내는 우리이다. 그러나 이런 처사가 하나님의 영을 부당하계 대하는 일인 것온 그러한 불길을 불이는 쪽이 바로 그의 영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가 당시 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는 ‘평안'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분간 그의 종들에게 허용하신 휴식에 불과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연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계속적인 압박에 못이겨 꼼짝 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박해의 회오리와 돌풍을 억제하심으로써 우리의 연약성을 생각해 주시는 것이다. 이려한 교회의 평안의 축복은 결코 혼한 것이 아니며 무시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누가는 더 중요한 문제, 곧 교회가 든든히 서고'' 그들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했다는 점을 덧붙여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평화시에는 호화판 생활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이듯이 교회들은 그들이 바라는 더 없이 평온하고 유쾌한 시기를 즐길 때 보다는 수 없는 전쟁의 소란 속에 처해 있을 때 대부분 축복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령의 거룩한 회심과 위로가 그들의 생활을 번창하게 하기 마련인데 이것을 빼앗길 경우 그들은 그들의 행복을 상실할 뿐 아니라 그들은 무(無)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평화를 남용해서 쾌락과 태만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 원수들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안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을 정돈해서 신앙심에 더욱 더 정진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자.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에게 끈을 풀어 주어 우리를 괴롭히게 하시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위로로 만족하도록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평화시이건 전쟁시이건 우리의 과정을 감독하시는 그 분을 향해 언제고 매진하도록 하자. “든든히 서감’’이라는 말은 신자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이미 양무리 속에 있는 자들이 발전을 본다는 뜻, 곧 그들에게 새로운 은사가 쌓이며 그들의 신앙심이 더욱 강건해진다는 뜻일 수도 있다. 첫째 경우로 보면 그것은 사람에게 관계되며 둘째 경우로 보면 그것은 성령의 온사와 관계된다. 나는 이 양 견해를 다 받아 들이고 싶다. 곧 전에 교회 밖에 있던 자들이 계속 교회로 들어 왔으며 교회의 권속들의 신앙과 기타 덕이 증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더우기 건축의 비유를 여기에 사용하는 것이 아주 적정한 것온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과 집이요 신자들 또한 개별적으로볼때 성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에 이어지는 두 가지 사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며 그들이 성령의 위로로 충만해 있었다는 것은 이 건축의 일부이다(립전 3 : 15, 고전 3 : 16, 17). 그러므로 교회들이 평화롭게 지낼 때 그들은 쾌락이나 지상적인 기쁨에 빠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면에 있어서 더욱 더 자신만만하고 담대한 태도를 연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