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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행9:43)

1. 성경 (행 9:32 ~ 43)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2)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33)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4)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35)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6)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7)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8)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39)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0)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1)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2)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43)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32 절” ; 누가는 기적을 통해서 교회가 받은 도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적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8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 온 사람이 갑자기 치료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죽어 있는 여자를 살린 것이다. 먼처 누가는 베드로가 ‘사방으로' 돌아 다니다가 롯다에 도착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방' (all)은 교회들이 아니라 신자들로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이것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헬라어로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일정한 장소가 지정되지 않았던 때인만큼 그들이 기회 닿는대로 이곳 처곳 돌아다니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따라서 사도들 각자가 서로 다른 임무에 집착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이 임무를 맡았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베드로의 순방의 권한 에서 그의 우위성을· 어리석게 주장하는데 여기서 그것이 거짓이라는점이 드러난다. 이것은 베드로가 교회를 순방하고 있을 때 나머지 사도들은 사인(私 人)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물론 베드로가 핵심 사도였다는 점을 성경도 자주 언급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가 세상의 지도자였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우리의 바램이 있다면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받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로마의 감독께서 이 베드로의 본을 받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형제들을 격려하고 본인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그 사도라는 점을 사방에서 입증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높온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교회를 횡포하다 못해 악독한 통치로 압박하는 장본인께서는 베드로가 여러 교회를 순방한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룻다에 사는" ; ‘룻다’는 후에 디오스폴리스(Diospolis)로 ·불리우고 있는 지명(地名)오로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쾌적한 면에서 유명한 도시로 지중해에서 얼마 멀지 않는 곳에 위치에 있었다. 그 근방에는 바위가 많았지만 유명한 항구를 가전 욥바가 있었다· 그 도시는 큰 암석 위에 세워져 있었으미 그 곳에서 보면 예루살렘까지 내다 볼 수 있었다. 현재로서는 사람들이 흔히 야펫 (Japhet)으로 부르는 항구만 남아 있을 뿐 이 옛 도시의 폐허만 이곳 저곳에서 보일 뿐이 다. 아사론 (Assaron)을 누가는 일종의 도시명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럽 보인다. 제롬(Jerome)은 이것을 사로나 (샤론)로 읽으며 가이사랴와 욥바 사이의 온 평야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롬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독법 (讀法)을 바꾸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으므로 나는 그곳이 이웃 도시인 것으로 말하는 누가의 본문을 그대로 따르겠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평판을 내세우는 뜻에서 쓸데 없는 자랑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이것울 문제시 하지는 않겠다. 경건한 독자들로서는 누가의 의도에 적절한 것만을 아는 것으로 족할 줄 안다.

 

"34 예수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 틀림없이 사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이미 서 있기 전에는 결코 기적을 베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기적의 결과가 이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 그들은 아무 병자나 마음대로 치료할 수 있는 그러한 성령의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적에 제한을 두셔서 당신께서 유익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사도들에게 허용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생각없이 이 말을 불쑥 내뱉온 것이 아닌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미 자신에게 명백하게 드러나기 전에 이런 말을 할 경우 그는 웃음 거리가 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는 혼자서 기도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기적의 주인이 되시며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신 성령께서 그 순간 그의 혀를 조종하시며 은밀한 영감을 그의 마음에 불어 넣어 주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이 말로써 자기는 이 기적을 행하는 대리인에 불과할 뿐 그 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중함으 로써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고 있다.

 

"네 자리를 정돈하라" ; 지금까지 어느 사지 (四股)하나 까딱할 수 없던 사람이 일어날 기운을 되찾을 뿐 아니라 자신의 침상을 정돈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은 이 기적의 영광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 병의 장기간 역시 마찬가지로 이 기적의 영광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8년간이나 앓은 중풍병이 쉽게 낫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갈은 이유에서 그가 간이 침대 (pallet bed)에 누워 있었다는 말이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온통 사지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들이 낮잠이나 자는 작은 소파와 같은 것이었다. 애니아는 자신의 사지롤 사용할 각오가 서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신앙의 순종을 입증했다. 요컨대 그에게 회복된 능력을느끼는 쪽온 그였지만 그에게 일어나도록 강력하게 작용한 것은 그 음성의 효과적인 능력이 있다.

 

"35 사람들이 다 ~~~~~" ; 이 말은 이기적의 소식이 사방에 퍼졌으며 그 온 도시가 떠들썩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모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그것은 어떠한 것에 대한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대다수, 또는 어떠한 군중을 가리 켜 ‘모두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그곳 신자들의 숫자가 적었는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들었다는 것이다. 바뀌 말하자면 이 결론적인 문장에 이 기적의 결과가, 곧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사람들의 손으로 베풀어지는 경이에 눌랄 뿐 그리스도의 능력과 온 혜에 대해서 알게 됨으로써 오직 그분에게만 매달리도록 하는 이 목표에 눈을 뜨지 못할 때 우리는 기적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허용하신 그의 신성한 능력에 대한 상징은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시작이자 준비였다.

 

"36절"  ;병든자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므로 이 기사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보다 더 탁월한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누가는 먼저 이 기적의 대상인 다비다를 청찬하면서 두 가지 장점을, 곧 그녀가 그리스도의 한 제자였으며 자신의 신앙을 선한 사업과 구제로 중거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미 수 차에 걸쳐서 그는 남자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제자’로 불러오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여자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은 기독교만 가르침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여기에 규정된 배움의 원칙은 그리스도만이 모두에게 유일한 교사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참 삶의 방법과 정의를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배워 아는 것만이 더없는 칭찬을 받는 길이요 성결한 생활의 터전이요 모든 덕의 뿌리이다. 이 후에 오는 선행의 열매는 신앙으로부터 나오는것이다.

그런데 나는 ‘선행'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랑의 자발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누가는 여기에 대한 특별한 예로서 구제를 들고 있다. 선행이 크게 칭찬을 받는 것은 성령의 증거에 따라 생각해 볼 때 그 자체에 경건하고 완전한 생활의 전모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비다에 대한 칭찬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 경외 내지는 신앙이 먼저 나오고 다음에 그녀가 형제들을 돕는 일에, 특별히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일에 바빴다는 점이 뒤따르고 있다. 요컨대 의연금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 행위란 갸난한 자와 비참한 자에게 베푸는 도움을 총칭해서 하는 것이다. 

 

‘다비다’는 히브리어라기보다는 수리아어이지만 누가는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해서 사실은 이 이름자가 이 거룩한 여자의 덕에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도르가’는 거친 염소 (c·aprea)라는 뜻이지만 그녀의 거룩한 생활은 이 흉칙한 이름자의 낙인을 십게 지워 버리고 말았다.

 

"37 그 때에 병들어" ;   누가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녀의 죽음을 잘 설명하는 뜻에서 그녀의 질병을 언급하고 있다. 그녀의 몸을 씻어 다락방에 안치했다는 기록 역시 마찬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기적에 대한 신앙을 충분히 불러 일으킬 만하다. 그들이 그녀를 곧장 무덤에 데려가지 않고 그 집의 윗층에 안치해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그녀가 살아날 소망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추측컨대 누가가 언급하는 정결 예식은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랜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죽음 그 자체가 주는 부활에 대한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상징을 동해서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좋은 소망을 불어 넣어 주는 뜻에서 거룩한 족장들에 의해 전수된 것임에 틀림 없다.  사실 영생에 대한 제시가 아직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으며 영생의 보증이자 본체인 그리스도께서 아직 계시되지 않았던 시기이므로 그러한 도움을 통해서 가르침의 보호성과 그리스도 자신의 부재를 보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그둘은 죽은 자들이 어느 때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깨끗하게 나타나도록 하려는 뜻에서 죽은 자들의 몸을 씻어왔다.  마지막으로 정결예식이란 죽은 자에게나 산 자에게나 동일한 의의를 갖는다. 산 자들이 날마다 행하는 정결은 각자가 자신의 모든 더러움을 씻음 받기 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장례 의식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언은 불결 때문에 이생을 더러운 몸 그대로 떠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물론 정결 그 자체는 매장이나 마찬가지로 죽은 자에게 아무런 혜택이 될 리 없고 생존자 들에게 교훈을 주는 뜻에서 시행되었다. 말하자면 사망은 멸절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그것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잃게 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사망에서 생명을 대표하는, 곧 멸절에 반대되어 보이는 무엇을 여기에 덧붙이는 것은 당연했다. 이방인들도 이 의식을 이용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에니우스(Ennius)는 “한 착한 여자가 타르키니우스(Tarquin)의 몸을 씻고 거기에 기름을 발랐다"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모방은 다른 모든 의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의곡된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경솔하게 이 본을 따랐는데 그것은 율법적인 형식의 준수가 영원하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필요성이 페지된 초대 교회에서마저 그것이 통용되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수도사들은 그 옛날 이방인들과 마찬 가지로 무분별하게 유대주의를 모방하고 있다. 곧 그들 사회에서는 아직도 아 정결예식이 지켜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무덤에 추방되었으며 다시는 부활되어서는 안되는 그림자 속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이끌어 들이는 처사이다.

 

"38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 …몸을 씻은 그 자체는제자들이 앞으로 생길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매장을 준비하는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시체를 다락방에 안치해 두고 베드로를 데리러 보냈다는 것은 소망에 대한 상징이었다. 더우기 그들은 하나님께 이것이 부당한 처사가 아니냐는 식으로 대성동곡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도움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다비다가 불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아직 교회에 더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뜻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그녀의 생명이 연장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39 베드로가 일어나" ;  심부름 온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그들이 그를 데리려 온 이유를 설명했었는가 하는 점은 의심스럽지만 그들은 분명히 그에게 기적을 베풀 것을 요청한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그에게 하나님의 의도가 알려졌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말하자떤 만약에 이 기적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더라떤 그가 여행을 한 것은 무모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그는 주님의 의도를 직접 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가 형제들의 청을 들어준 것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가 가지 않으면 안될 또 다론 이유가 있었는데 그 것은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경건한 권면을 통해서 그들을 북돋아 줌으로써 그들이 한 여자의 죽음 때문에 상심하지 않도록 하며 아직 연약한. 아니 유아와 같은 교회를 든든하게 붙잡아 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자기 형제들이 그의 거절을 자기들에 대한 무시로 보지 않을까 하는 한가지 생각 만으로도 그가 거기에 가는·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명심할 점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기적에 자신의 능력을 제시하실 때마다 그는 그의 영의 은밀한 영향력을 이용 하신다는 사실이다. 설령 베드로가 다비다가 살아 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여행의 안내자와 지도자이시라는 점을 틀림 없이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비록 그는 그 성과에 대해서 초조해 하고 불안해 했더라도, 그가 떠나기로 작정한 것은 무분별한 행동이 아니었 다는 것이 드러났다.

 

"모든 과부가~~~~ 울며" ; 누가는 여기서 왜 다비다가 죽음에서 일으김율 받았는가 하는 이유를, 곧 하냐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거록한 여자의 생명에 대한 그들의 기도에 굴복하셨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밖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곱절의 생을 얻게 될 때 누가가 앞에서 칭찬한 여러 덕이 그녀를 통해서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요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욱 더 뚜렷하게 되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그냥 더 오래 살게 하실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경우 그의 계획을 변경하셔서 고 녀에게 억지로 생명을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던 것온 아니다. 아직 제자들의 대부분이 확증을 필요로 하는 초심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다비다의 제 2의 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재빨리 도와주어 그들의 마음에 그의 복음의 신앙을 확증하실 정도로 가난한 자들과 과부들을 보살피셨다. 다시 말해서 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발전율 보게 하는 충분한 자 료를 제공하신 셈이다.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 베드로는 기도할 시간을 갖고 있는데 그는 얼핏 여전히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미심 쩍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니아를 치료할 때는 지체없이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고쳐 주신다! "하고 자신만만한 이야기를 하던 그였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언제나 정확히 동일한 방법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 기적을 향해 접근했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그가 다락방에 있는 성도들을 목격자로 놔두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 그들을 내보낸 행위는 얼핏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주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능력율 제시하는 시간과 방법을 아직 그 에게 나타내 보여 주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기도하기에 더 적합하도록 혼자 남아 있는 쪽을 택하고 있다. 그가 이런 행동윤 취한 데 있어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온 다론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수도 있다. 성경온 엘리사가 동일하게 죽은 자의 어머니도 입회하지 않고 혼자 방에 들어가 죽은 자 위에 세 번 엎드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열왕기하 4장 32절의 인용이 다. 그러나 세번 엎드린 사람은 열왕기상 17장 21절에 나오듯이 엘리야였다 一영어번역자 주) 하나님의 영에게는 자신의 강력한 층격(impulse)(証 7)이 따로 다양하게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이 여러가지 충격을 일반적이요, 습관적인 인간의 표준에 따라 측량하려 하거 나 육신의 통찰력으로 판단하려 한다면 이것은 그릇되고 부당한 처사이다, 사실 우리는 베드로가 마치 주저하는 태도를 취한듯 하면서 혼자 있고자 한 것은 인간의 미신을 억제하는 뜻에서. 대라인에 불과한 자신을 그 일의 장본인으로 취급 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점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이 대리인은 구경군들과 목격자들율 제거하고 초조하계 기도하는 가운데 이 문제가 자신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기다림으로써 당신만이 홀로 그 일의 주인이라는 점을 고백하고 있다.

 

"무릎을 꿇고" ; 기도하는 것은 겸손에 대한 상징으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곧 우리의 모든 몸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며 몸의 외형적인 단련이 마음의 연약성을 돕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릎을 꿇을 때마다 속 마음의 굴복이 이 자세와 일치하도록 하는 가운데 가식적이요 효과없는 기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시체를 향하여" ; 그가 아무런 의식도 없는 시체를 상대로 말을 한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생명이 떠나간 시체를 상대로 말을 함으로써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이 그를 몰아쳐 세우는 강도의 일면울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이유를 굳이 댄다면 그저 삼인칭으로, ”이 몸에 다시 생기가 채워져 살아나기를 바란다"하는 식의 말보다 이려한 식의 말이 죽온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다 더 뚜렷하계 드러낸 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에스겔은 부활의 상징을 통해서 백성들의 해방을 이야기할 때, "너희 마론 뼈돌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 4)라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은자들이 하나님의 아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 : 25)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입에서 나와 다비다의 몸에 영혼율 회복시켜 준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사항들은기적을 확실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뜻에서 기록된 것들이다.

 

"41절"  ;  마지막으로 누가는 다바다가 제자들 앞에 나타나 보여졌다는 정을 반복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살아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을 부활의 날까지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생기 (abreath)로 보는 광신자들은 이 귀절을 자신들의 환상적인 사상의 중거로 잡고 늘어진다. 그들은, ‘‘다비다의 영혼이 저 복된 안식으로 받아들여졌더라면 수 많은 어려움과 불행과 싸워야 하는 육신의 감옥으로 그것을 다시 불려 들이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라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생사간에 자신의 영광을 돌볼 권리가 없으며.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바칠 경우 그는 우리가 죽거나 살거나 우리에게 유익이 아니라는(빌1 : 21)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주님깨서 다비다 자신보다 자신의 영광에 더 신경을 쓰신다 해서 거기에 결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신자들의 유익은 언제고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듯이 그녀에게 생명이 회복되어 신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한 보다 뚜렷한 도구 역 할을 한 것은 그녀 자신에게 더 큰 축복이었다.

 

"42 욥바 사람이~~~~믿더라"  ; 이 기적의 경과는 다양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건한 부인의 죽음으로 큰 손해를 당하고 있던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그녀를 교회에 되돌려 주셨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신앙으로 불러 주셨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이 큰 능력의 대리인이었지만 그는 이 사람들을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있다.

 

"43 절" ; 베드로가 ‘피혁상' (피장)과 함께 머물려 있었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당시 욥바 교회를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의 계층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만약 이 도시의 지도자급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더라면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틀림없이 베드로를 접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의 한 사도를 이런 방식으로 소홀히 하는 것은 아주 몰인정한 처사였을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 도시에서도 다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교만을 꺾는 뜻에서 평민을 동원해서 자신의 교회를 형성하셨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는 그러한 계급의 초청을 무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예절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 주인은 말단의 직공이 아니라 중산 계층의 상인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집에서 베드로에게 시중드는 사람이 있었다는 다음에 나오는 누가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베드로는 후한 대접율 받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