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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행 10 :20)

1. 성경 (행10:9~23)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9)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0)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1)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2)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3)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4)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5)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6)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7)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8)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19)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0)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1)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2)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23 상)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 누가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데려 오라는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기록하고 나서 베드로가 그에게 갈 것을 지시받는 환상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더욱더 확실하게 되는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고넬료에게 순응하도록 마련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욕망과 열성을 불붙여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반대로 베드로의 마음을 준비시켜 그 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 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누가가 엮어가는 이야기 줄거리에 관심을 기울여 보도록 하자. 베드로는 혼자서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지만 혼자서 기도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모든' 어지러운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에게 더 잘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건축 양식은 오늘날 우리들의 것과 달랐다. 곧 그들의 지붕은 걸어 다닐 수 있게 평평했다. 그 당시 ‘제6시'란 정오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가 그 시각에 기도한 것은 그의 습관에 따른 행동이었음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 재갈을 무는 가운데 억제하지 않는다면 거의 온종일 우리는 숱한 일거리에 정신을 빼앗기며 줄곧 부산하게 돌아다니기 마련이므로 기도할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 것이 유익하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시간에 얽매인다는 뜻이 아니고 기도가 우리의 모든 관심보다` 우선권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 취하는 행동이다. 마지막으로, 그와 동시에 우리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장소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하는 데 이 양자는 우리의 연약성을 보조하는 처방책이다. 사도들이 이 시간과 장소를 구별해서 기도할 정도였다면 굼뜨고 게으른 우리들에게 있어서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10 비몽 사몽 간에" ; (정신이 나감;excessus mentis). 우리의 정신은 말하자면 땅에 박혀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말씀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신이 말하자면 제 자리에서 옮겨져 위로 데려감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가 비상한 방법으로 세상에서 들리워졌을 때 그는 그 말씀을 받을 준비를 갖춘 셈이다.

 

"11절" ; 내 생각에는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열림’은제7장(7:56)의 그것과 다르다. 거기서는 하늘이 스데반에게 열리고 그 결과 그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경우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이 갈라졌으며 그 결과 거기서부터 보자기가 내려온 것 같다.

 

"12절" ; 어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한꺼번에 모든 짐승의 무더기를 볼 수 있었느냐 하는 질문을 하겠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각색'이란 서로 다론 종류가 뒤섞여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첫 번 종류부터 마지막 종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짐승을 이야기하려 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은 황홀경에 빠진 베드로에게는 다른 눈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가기 전에 우리는 이 환상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겠다. 더러는 본문의 의도 이상의 것을 교묘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규정하셨던 구별이 이제 제거되었다는 일반적인 사실이 베드로에게 보여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동물을 구별하셨듯이 선민을 따로 구별하시는 가운데 다른 모든 민족은 불결하고 속된 것으로 취급하셨었다. 이제 동물들의 구별이 제거됨과 동시에 그는 그 결과 인간들도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구별되지 않으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는 후에 이방인들을 불결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그들에게서 움추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고낼료에게 나아갈 것을 격려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려나 과거에는 그는 다른 민족들로부터 한 민족을 자신에게 구별하셨으니 이것은 모세가 그의 노래에서 "지존자께서 민족들을 구분하실 때 그는 야곱으로 그의 소유 (託5)를 삼으셨 다"고 말한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소유를 자신의 기업과 자신의 사유 재산(pecuUum)으로 부르곤 하셨다. 이 순서에 따르자면 베드로가 구원의 언약을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들이고 유대교로 개종하기 전에 그들에게 전한다는 것은_'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 (마 15 : 26)과 같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위의 말씀의 취지는 그런 방식으로 굴복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 따라서 사도들은 맨 먼저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받았을 때 곁길로 빠쳐 이방인들에게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를 받았었다(마 10 : 5). 그러나 복음 전파는 가장 성스러운 문제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경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거나 흔들리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소명을 확신시켜 주시는 뜻에서 마치 그림을 통해 보여 주시듯 율법적인 정결 및 불결의 구별이 폐지되었다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사실에서 베드로는 과거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로막고 있던 담이 이제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엡 2 :, 14).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일한 구원에 동참하게 되고 접붙임을 받아 한 몸이 되는 이것을 가리켜 만대에 걸쳐 숨겨졌던 비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엡 3 : 6, 9).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손수 이 담을 허시고 모두에게 명백한 길과 출입구를 열어 젖혀 보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방인들에게 하늘의 문을 감히 열어 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 지적한 바 있지만 과거에 이방인들이 할레만 받는다면 그들이 하나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던 때가 없었으나 그들이 할례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을 경우에는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금까지 마치 숨겨진 보화마냥 한 민족에게 보관시켜 두셨던 생명의 언약을 온 세상 공통의 것으로 만드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 환상이 우리에게 결코 적잖은 가치를 지닌다는 결론을 내린다. 말하자면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구별이 다만 잠정적인 것뿐이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가 이제 온 세상 만민을 자기 은혜 속으로 이끌어 들이고 계시며 그 결과 그는 만민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점을 하늘로부터 선포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우리를 영생의 소망으로 부르는 하늘의 명백한 선포이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전에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와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무지했거나 아니면 이 환상이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이 소명은 너무도 새롭고 신기한 것이라서 그들이 당장 거기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실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과 최근에 있은 복음을 통한 이방인의 부름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령을 이해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 당면하게 되자 그들은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 때문에 주저하게 되고 당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명한 상징을 통해  베드로를 확신시켜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설명될 것이다•

 

"13 또 소리가 있으되~~~" ; 보자기와 마찬가지로 한 음성이 하늘에서부터 들려오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양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지금까지 불결했던 이것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그 모습만으로는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잡다' (to kill)는 말에 대한 하나님의 의미는 인간들이 복음의 영적 칼에 의해서 그에게 제물로 바쳐진다는 뜻이라는 식의 풍유적 해석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여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단순한 견해를 받아들인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짐승의 구별에 대한 율법을 폐지함으로써 그와 동시에 그는 어느 민족도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싶다. (잡다'는 말이 제사를 뜻한다면 다음에 나오는 ·'먹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는가?

 

"14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의 말씨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에 금지된 것으로 아는 것을 손대지 않고 두려워하는 행동 자체는 옳다. 그러므로 그는 그 율법을 저돌적으로 범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소개하신 율법을 열거하고 있다. 요컨대 이 환상과 율법 사이에는 얼핏 보기에 어느 정도 모순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성급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율법 준수에서 이탈하기 전에 자신의 거리끼는 마음을 재거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베드로는 이 음식을 놓고 자기 아들을 살해하는 아브라함보다 더 저항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문제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에게 더 많았었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인간들에게 아주 혼한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났다고, 곧 그들이 율법의 핵심 문제가 외형적이요 하찮은 문제를 추구한 것이라고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철저한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모든 장애물을 고상하고 영웅적인 용기로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의 성령의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베드로의 경우에 있어서는 성령이 천천히 작용했다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제 아무리 하찮은 문제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포증을 이길 수 있는 결단력과 인내심을 허용하시기 전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불안을 초래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생각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지만 어느 길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점 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시도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경건하고 성실한 사람다운 것이다. 이 귀절 의 '혼한' (common) 이 란 속되 다는 뜻이 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을 그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속된 민족들과 구별하는 이 종교적 습관과 생활방식을 규정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방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모든 것을 ‘속된' 것으로, 곧 율법의 규정에 어긋난 것으로 이야기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사용하도록 지정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거룩하거나 깨끗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5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 이것은 분명히 음식에 관한 말씀이지만 생활의 모든 방면에 확대 적용되는 것이 마땅하다. 글자 그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너는 더럽혀서는 안된다"이지만, 그 의미는, “우리에게는 무엇이든 인정하거나 정죄할 권한이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서만 일어서고 넘어지는 만큼 그가 만사의 심판관이다" (몸 14 : 4)하는 뜻이다. 음식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율법 철폐 이후부터 모든 것이 정결하고 깨끗한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유한한 인간이 일어나서 새로 구별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특정한 음식을 먹지 못하 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권리와 권위를 오만하게 휘어잡고 흔드는 신성 모독자이다.  몬타누스 (Montanus) , 프리스킬 리안 (Priscillian)., 도나두스파 (Donatists) , 타티우스파 (Tatians) , 그리고 모든 엔크라티스파 (Encratites) 가 모두 그러한 이단들이다· 후에 교황은 이 모든 불신앙적인 집단을 '하나로 묶는 뜻에서 음식에 관한 법을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신앙의 변호자들은 그들이 결코 음식의 불결 유무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억제하는 뜻에서 특정한 날에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있을 뿐이라는 잘못된 말을 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서 가장 푸짐한 음식을, 그것도 쾌락과 방탕한 생활에 가장 적합한 음식만 골라 먹는 그들이 무슨 가장 큰 죄라도 범하는 것인 양 베이컨 덩이 (bacon fat)를 만지려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우상의 법이 금하는 것이 더럽혀지고 불결하게 된 것이라는 그들의 상상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교황의 횡포는 생활 전반에 걸쳐서 동일한 교만과 함께 만연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가련한 양심들을 사로 잡기 위해서 그의 올가미를 던지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 려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의 이 모든 금지 규정을 일축하도록 하자. 우리가 연제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낸 다음에 거기에 따라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하며 자유롭게 행해도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이유는 베드로마저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합법적인 것을 ‘속되게 만드는'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즐기게 하는 뻔뻔 스러움을 제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거의 모두가 타 인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좋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래 심술 꾸러기요 짓궂은 사람들인 우리는 불리한 쪽을 택하려 들며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소관 사항을 낚아채려 한다. 이것저것을 불결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이 권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이 한마디는 그러 한 종류의 오만을 교정하는 데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신의 입양의 은혜에 따라 구별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언약을 누리도록 그들을 받아들이신 이후로는 모두가 동동한 권리를 갖고 있다.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 이 환상의 반복은 마음에 아무런 주저나 불안 또는 거리낌이 남아 있지 않도록 확증하는데 주효 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 준수가 얼마나 베드로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뒤에 이어지는 사건으로부터 이 환상의 동기롤 배우기까지 그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 이유로서는 그가 당황한 중에 이것의 의미를 제시 해 주실 것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후에 곧 도착한 심부름군들이 그것을 곧 해석한 것은 아주 시기 적절했었다. 마지막으로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간 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더욱더 확 실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17절"  ;베드로는 환상뿐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지만 성령께서 그에게 설명해 주시기까지 그는 그가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우리는 베드로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이것은 우리 자신의 갑갑한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가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즉각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는 제 아무리 많은 -주석을 들어도 그것으로 만족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베드로가 당황한 마음에서 깨어나자마자 이 환상을 골똘히 생각했다는 누가의 기록 을 주목해야겠다· 그가 이 환상을 소홀하게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은 경건한 경외심의 징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문을 두드릴 때 그에게 문을 열 어 주신 샘이다 (마 7 : 7) . 그러나 우리의 경우 우리의 태만에 대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은 우리가 탐구하는 면에 있어서 너무 무관심한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있어서 더 나온 발전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 문이다.

 

20 내려가 의심치 말고~~~~" ; 성경은 신앙의 순종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나타내고자 할 때, “아무도 의심치 말고 가라, 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 4장 19절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찬하면서. “그는 후손이 없었으며 또 이미 후손을 볼 나이도 지났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기를 약속하실 때 주저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14장 23절에서 그는 음식 문제를 다루면서 주저하는 마음을 비난하고 있다. 물론 서로 상반되는 이유를 판가름해야 할 입장에 처하거나 이리저리 당황할 경우에는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 이쪽저쪽을 다 고려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려나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심하거나 동요하는 마음이 아니라 안정되고 확고한 마음의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할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 왈부하거나 시행하라는 그의 명령에 대해서 의심하는 일이 없이 단호한 결 정을 대립 정도로 모든 것을 그에게 일임해 줄 것을 원하신다. 그렇다, 그 의 뜻은 모든 구름이 걷힌 다음에 우리의 길을 인도하며 모든 논쟁이 종지부를 찍을 때 우리의 온 마음이 거기에 즉각 순종하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빛이다. 우리는 그다음에 나오는 말에서 더 잘 알 수 있다` 곧 베드로로 하여금 더 이상 의심스러운 문제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지 않은 이유가 덧붙 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그의 명령을 순종하려면 그의 신호만 가지고도 만족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한 이 구절에서 인간의 마음이란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을 때만 안전한 행동을 할 수는 있는 평안을 누리게 되며 그의 안내와 명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시행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21 내가 곧 너희의 찾는사람이니~~~~~" ; 누가는 이제 어느 정도로 베드로가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 어떻게 심부름군을 통해서 환상이 그에게 보여진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사람으로 말하면 만약에 "너는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부르시는 것을 속된 것으로 여기지 말아라”고 하는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판단이 교정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울타리 바깥사람으로 여겼을 것이요 함께 친근하게 어울릴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을 사람이다• 우리에게서 우리의 모든 자만심이 제거되고 우리의 오만이 교정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이 규정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이 우리의 온 마음을 휘어잡을 때에만 전정한 지혜는 가능하다.

 

"22 고넬료는 의인이요~~~~"  ; 하인들이 고넬료를 칭찬하는 것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나 야심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를 만나는 데 있어서 덜 거리끼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유대인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가 결코 진실되고 순수한 신앙에 이국인(stranger)이 아니라는 점을 베드로에게 알려주고 있다. 물론 미신적인 사람들마저 실상은 우상을 섬기면서 자기들이 하나님 예배자라고 떠들어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넬료의 경우 그가 유대인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을 이미 고백하지 않았던들 그는 결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리 혼한 예가 아니었으므로 베드로는 여기서 크게 감동받았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하인들은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이 한 가지 변론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베드로를 확신시키고 있다. 맡하자면 그들은, "당신이 부름을 받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당신의 천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요"라고 맡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23절" ;. 베드로는 하나님의 권위에 압도된 나머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그들과 같이 여행을 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 그들을 친절 하게 맞아들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 뜻이 알려지게 될 경우· 우리에게 남은 문제란 재빨리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뿐이다. 나머지 문제는 별로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