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10:23 하 ~ 33)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3 하)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4)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5)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6)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7)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8)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29)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0)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1)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2)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 심부름군들이 저녁 때에 도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정오에 아직 그 도시에 도착해 있지 않았으며 그 환상도 세 번이나 되풀이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이 단지 순간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룻밤 쉬면서 피로를 푼 다음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 더욱이 신자들 가운데 몇 명이 생각건대 이들은 전체 교회의 파송을 받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베드로와 함께 여행울 하면서 가이사랴까지 그를 수행한 것은 참으로 친절하고 예의바른 행동이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베드로에 대한 존경심과 우의를 생각해서 여행하 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은 그의 은혜에 대한 중거자로 삼기 위해서 동반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지배가 이방인들에게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후에 이 감사하는 마음을 전체 교회에 전하고 있다.
"24 고넬료가~~~~ 기다리더니" ; 누가가 고넬료의 태도를 칭찬하는 것은 그가 간절히 베드로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친구들과 친척들을 모아 그 신앙을 자기와 함께 나뉘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여러 사람을 불러 자기 종교를 믿게 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상황을 야기시키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자화자찬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은 그는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는 명령을 받지도 않았으며 , 아니 그들은 그냥 지나친 사람들이었지만 자기 혼자만 이 큰 축복의 소유자로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형제들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생각했다· 그는 각자가 자기 개인의 일만 생각하고 남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부당하고 무례한 일이라는 점올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복음이라는 보화를 땅 속에 묻어 두는 것 을 수치스러운 태만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께서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그의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점, 곧 각 개인은 형제들의 손을 잡아 끌어 초청하며 믿도록 격려 하라는 점을 성취한 셈이다. 우리는 고넬료의 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경우 우리는 태만이나 공포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그의 지식의 빛을 꺼버릴 것 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빛으로 하여금 남들에게 길을 보여 주는 안내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야겠다. 말하자면 하늘나라의 상속이란 비록 그 양이 적을지라도 여기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 경우 우리의 몫이 그만큼 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동료 상속인들의 증대는 우리의 영광을 증가시킬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그가 얼마나 모든 허세와 거리가 먼 사람인가 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기 자신만 배울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불러들여 동료 생도들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의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정직성에 열성이 결부될 때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신앙에 대한 진정한 욕망이라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야심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겠다고 덤벼들며 어리석은 장광설을 통해서 자신들의 부족을 드러 내면서 꼭 격정적인 말을 내뱉으며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강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스스로와 온 세상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가운데 그분만이 홀로 탁월하게 되어지고 인간은 진실로 겸비한 자세를 취하도록 하는 것을 유일한 각오로 삼아야 마땅하다. 이것은 가르치는 수완과 은혜가 풍부한 사람이 자기 형제들에게 교사노릇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랑하는 일과 우월성에 대한 기만된 욕망이 없어야겠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로 부름 받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지키도록 해야겠다. 쌍방 간에 어느 쪽이고 야고보가 경고하듯이 지배권(mastery ; 訪6)을 노려서는 안된다(약 3 : 1) 사실 배운자나 못 배운 자가 각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안 는 방향으로 쌍방이 서로 뭉쳐져 있어야겠다. 하지만 ‘‘그는 유대 땅에 외국인으로서 잠깐 동안 군대 복무상 와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에게 친척이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나 역시 비록 내가 무엇에든 독단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중대에 친척이 어느 정도 끼어 있었다는 것을 가장 근사한 해결책으로 받아듣일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친척들 및 서로 아는 사람들이 한 부대에 근무하는 것은 당시 관습이었다. 그리고 고넬로의 친척들이 그의 부대에서 너도 나도 근무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백부장이었기 때문이다. 누가가 절친한 친구들을 가리켜 '아냥카이 우스' (필 요 불가결 한, 절친한)라고 부르는 것은 라틴어에서 서로 보다 더 긴밀한 관계로 함께 묶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필수적인' (necessarli)으로 부르는 것과 마 찬가지이다.
"25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이것은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숙이거나 기타 다론 몸짓으로 경의를 나타낸다는 의미의 '프로세퀴내一센' 이다 그런데, 이 경의를 사양하는 것은 단지 그의 겸손 때문인가? 아니면 그는 그 행위를 금지된 것으로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된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하는 베드로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고넬료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 같다. 말하자면 고넬료는 하나님 홀로 받으셔야 하는 경의를 유한한 인간에게 양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경의에는 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우리는 베드로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하나님으로 대치한 것으로 믿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영예를 인간에게 양도했다면 앞에서 칭찬받은 바 있는 그의 경건과 신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그가 결코 하나님에게서 당신에게 합당한 경배를 빼앗아 인간에게 주려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선지자요 사도인 그에게 특별한 존경을 표하려는 마음에서 잘못 과도한 경의에 빠졌으며 그 결과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돌리는 영예 가운데 신에게 돌아갈 경배가 티끌만 한 모습이라도 드러난다면 그것이 쉽사리 미신으로 탈바꿈하고 만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부지 불식간에 전혀 생각지 않던 문제에 쉽게 빠지고 만다. 세상의 왕이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런 위험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탄원자로서의 지상적인 영예의 입장에서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은 공인으로서의 지상적인 영예의 범위를 지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군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른 것은 그들의 직무란 영적인 것인데 누가 그들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한다면 경의 (敬意)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국민들 스스로 바치는 정중한 경의 (c:un Worship) 와 종교의 바탕이자 하나님의 영예와 직결되는 경의 사이에는 엄연한 구별이 있어야 마땅하나 이것은 잠정적인 법과 양심을 어거하는 법 사이에 구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무릎 꿇고 절하는 그 자체가 정죄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종합하자면 이것이다. 곧 고넬료는 여기서 정치적 의식에 따라 자기 총독이나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경탄에 빠진 나머지 자기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을 때나 표할 경의를 베드로에게 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자기를 망각한 사람 마냥 합법적인 것 이상의 것을 인간에게 바치고 있는 셈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아다가 그 노략물로 인간을 치장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인간이 표하는 경의에 하나님께 드리는 경의가 뒤섞일 경우 곧장 상상을 불허하는 죄가 아무도 몰래 끼어들어 오며 그 결과 하나님께 드리는 영예를 받는 인간은 인간적인 수준 이상으로 높여지고 만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구벌을 무시한 채 그것의 일부를 쥐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사회에서는 종교적인 숭배만 취급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피조물에게 이것의 일부를 적용하는 구실을 그럴듯하게 꾸며대기 위해서 이것을 ‘라트리 아' (!atria) , '둘리 아' (dulia) 그리 고.. '하이 퍼 둘리 아' (kyperdulia) • 로 구분한다. '라트리 아' 란 하나님께 만 사용하는 숭배를 뜻한다• ‘둘리 아' 란 죽은 자들, 그들의 유골, 동상 및 초상화에 대한 숭배이다. 그리고 ‘하 이퍼둘리아’는 동정녀 마리아와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에 대한 숭배이다. 그들이 유치한 무지에서 이런 잘못된 말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 중에 몇 명이나 이 거북한 구별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이것은 평신도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지도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 의 모든 행태의 숭배가 못된 미신으로 망쳐지고 더럽계 될 수 밖에 없는 것 온 그들이 무모하게 피 조물을 하나님 과 동동하게 취 급하기 때 문이 다. 그러 나 여기서 누가는 고넬료가 하나님에게 마땅한 영예를 베드로에게 보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 (adoration)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 하지만 그가 인간을 마땅한 수준 이상으로 잘못 격앙시킨 더1 대한꾸중을 받 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분명히 둘리아'숭배에 대한 새 교의가 필 요했더라면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둘리아’를 넘어서지 말 것을 경고했었을 것임에 들림없다: 그러나 종교 및 신의 영에에 대한 경의와 관계된 숭배는 하나님의 영예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그냥 놔둘 수 없으므로, 그것이 결국 무슨 이름으로 변장하든 베드로는 그가 사람이라는 이 한가지 이유만을 계 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에게 물어 볼 말이 있는 데,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소위 말하는 ‘타트리아’를 취해서 천사에게 바칠 정도로 무지했던가? 그가 천사에게 숭배한 것온 결코 과도하고 망측한 겅 의가 아니타 천사에게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경의를 표 하는데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비난을 받고 있다(계 22:.8. 9).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려면 종교의 기조가 되는 영적 숭배를 손상치 말고 하나님 당신율 위해 남겨 두도록 해야겠다.
"28 유대인으로서~~~~~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그는 먼저 그들이 어찌나불결한사람으로여겨졌던지 그들은그들의 생활방식과 대화로 성도들을 더럽히고 있다는 심각한 모욕적인 발언을 필두로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비 우호적일 뿐 아니라 그들의 비위를 달래기는 커녕 건드리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온 베드로가 이런 식으로 말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여기 온 것은 조상들이 전해준 관습에 어긋나며 율법을 무시하는 자가 아닌가 하면서 그듣이 그를 나쁘계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점을 확증하자 그런 의구심은 말끔히 가시고 말았다· 더우기 그가 이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유대인과 이 방인에 대한 케케묵은 구별이 그들의 마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요.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 잘못을 제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서두는 더없이 적절했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까지 불결한 취급을 받아온 자들에게 정결의 은사가 허용되었으며 그 결과 이제는 그들과 성도들 사이에 상호 교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공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그의 견해는 율법이 아니라 조상들의 습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겠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들이 결혼이나 약혼으로 그들과 얽매이는 것을 분명히 금하고 있다(신 7 : 3).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항께 먹거나 일상 생활을 갈이 영위하는 일까지 금지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써 그들이 너무 자주 또는 너무 친밀하게 되어 금지된 사항을 하게끔 빠져 들지 않도록 하는 뜻에 서 그들은 조상들이 전해 준 습관을 준수했으며 그 결과 어떠한 사회적 관계 마저 맺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여기서 이 전통이 양심을 어거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은 베드로의 의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무엇이 합법적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것만 취급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하지 말라" ; 그는 음식에 대해서 지적된 사항을 인간에게 적용함으로써 그 환상의 본질과 의의를 보다 더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속되지 않다는 말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불신자 들온 양심의 불결에 의해 오염되어 있으며 그 결과 그들은 달리는 깨끗한 것들에 자신들의 손을 냄으로써 그것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의 자녀들 또한 믿음으로 깨끗하게 되기 전에는 더러 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전 7 : 14). 한 마디로 신앙만이 인간의 마음을 정결케 한다면 불 신양은 그것을 불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단지 유대인들을 이방인과 비교하는 가운데 담이 무너졌으며 양자가 이제는 생명과 구원의 언약을 동일하게 누랄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입양에 동참하는 자들을 이국인(outsider)으로 취급해 야 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29절" ;. 우리는 또한 그가 이 본을 제기하지 않고 왔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장애물 역할을 하지 않고 그가 무슨 명령을 내리든 그게 제 아무리 우리와 동떨어져 보이고 우리의 이성에 위배되어 보이는 일이라 해도, 그것을 말없이 시도하는 것이 신앙의 거룩한 침묵이다.
[고넬료의 이 답변에는 본 이야기의 반복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요점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베드로를 초청했다는 것이다.]
"30. 나는 금식하고 있었으며" ; ‘애멘' (7]仰)); 許9)곧 ‘나는 앉아 있었다'로 되어 있는 헬라어 사본이 많다. 벌게이트역에서는 '금식’ 이라는 말을 생략하는데 내가 이것을 실수나 무관심으로 생긴 결과로 보는 것은 이 단어가 모든 헬라어 사본에 나오기 때문이다(駐10).
더욱이 금식이 분명히 언급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고넬료가 그 당시에 형식적인 방식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또 한편으로는 이 환상이 덜 의심받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말하자면 금식을 하면서 온건하게 절제하는 사람의 머리 (brain)는 유령 모양의 환각 작용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넬료의 의미는 그가 제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있을 때 천사가 자기에게 나타났으며 당시 그의 마음 상태는 흔히 유령과 허깨비를 유발하는 모든 장애물과 무관했다는 이야기이다. 시간이 여 기에 기록된 것도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것 이 해지기 세 시간 전에, 아직 대낮일 때 일어났기 때문이다.
"홑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 그는 자신도 하나님의 한 천사로 알고 있는 상대를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형태의 이름을 하나님이나 천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모세는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자들을 묘사하면서 어떤 때는 사람으로 어떤 때는 천사로 이야기하고 있다. 휘황 찬란한 복장은 하늘의 영광에 대한 표시였으며 말하자면 바로 신의 위업의 상징이었다. 이것이 천사들에게서 빛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산에서 세 재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셨을 때 그의 복장에 그러한 광채가 있었다는 점을 중거 해주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거하러 파송된 천사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말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연약성을 감안하여 그의 천사들에게 우리의 육신의 모양으로 내려오게 명령하실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는 그들에게 그의 영광의 햇살을 어느 정도 선포하셔서 그들에게 증거 하도록 위임한 명령에 대한 경의와 확신을 불러일으켜 주신다.
여기서, 고넬료의 눈에 제시된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몸이었는가? 그 의복은 정말 순수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렇게 보인 것뿐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것을 특별히 알 필요도 없으며 그 어느 것도 확증될 수 없지만 추측컨대 만물의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천사에게 전정한 몸을 허락하셨으며 동시에 그에게 장엄하고 휘황찬란한 의복을 입혀 주셨던 것 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그 천사가 사신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마치는 순간 그 몸과 의복은 무로 돌아가고 천사는 자신의 본성으로 환원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떻든 그가 인간의 상태를 하고 있을 동안에 는 그에게는 인간적인 것이 전혀 결여되지 않았다.
"33 이제 우리는~~~~ 다~~~~ 있나이다" ; 베드로로 하여금 더욱 더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가르치도록 하는 뜻에서 고넬료는 여기서 그와 다른 사람들이 배울 각오와 하나님에게 순종할 자세가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교사란 자기 청중들로부터 확실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때 더욱 더 용기를 얻어 진지하게 가르치기 마련이다.
‘‘하나님 앞에"라는 구절은 일종의 서약의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넬료가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이듯이 이 집에 모인 것은 그들이 듣는 사 람의 음성을 바로 하나님 자신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 듣기 위해서라는 의 미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결국 그 의미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고낼료는 자신의 전실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더 불러일으키는 의미에서 본인은 결코 위장으로 조롱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있다는 점을 증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제시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상대가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 앞에 계셔서 우리를 부르 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지 그것을 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존경으로부터 말씀의 위엄과 그것은 무섭게 듣는 일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남들을 무모하게 그러한 전지한 문제에 얽어 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남의 신앙에 대한 보증을 설 자격 이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각자는 스스로 순종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이런 식으로 감동된 것으로 믿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전상이 밝히 드러날 때 듣는 말씀을 순종할 것을 이미 약속했으며 후에 그들 모두가 이 한 사람이 말한 것을 개별적으로 사실인 것으로 확증했음에 틀림없다.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절반쯤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거기에 굴복시킬 때 마침내 우리는 이 참 신앙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러한 완전하고 전반적인 신앙(full and universal faith)의 예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치 하나님과 무슨 계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그의 가르침이 자기들 비위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거기에 굴복하지 않거나 당장 그걸 무시하고 배척해 버리고 만다.
마지막으로 고넬료가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이 가르침의 저자로 여기고 인간에게는 사역자와 사신의 임무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는, “우리는 하 나님께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은 귀담아 듣고 순종하는 생도가 되겠읍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에게만 홀로 권위가 있고 당신은 오직 그의 일군이 되고 그분 혼자 말씀하시되 당신의 입을 동해서 말씀하시게 하소서"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동해서,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33 : 7)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모든 종들에 대한 이 지침을 규정해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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