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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11:18)

1. 성경 (행 11:1 ~ 18)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1)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2)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3)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4)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5)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6)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7)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8)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9)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0)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1)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2)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3)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4)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5)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6)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7)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유대에 있는 ~~~~~형제들이 ~~~들었더니" ;  한 권속의 회심이 온 사방 형제들에게 알려졌다는 누가의 설명에는 일종의 칭찬이 담겨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자기들에게 덧붙혀지는것을 마치 돌에서 사람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로 망칙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민족에 대한 과격한 자부심 (love)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깨달율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가 이러한 야심과 교만으로 소란하게 되었던것은 그들이 동등성 ----이것은 그들의 권위를 감소하는 것이었다----을 견딜 수 없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방인들과 갈은 멍에를 매는 문제를 두고 그처럼 고집을 피우며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오심 어후 모든민족으로부터 교회가 성립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선지자들의 그 많은 예언과 온 제상윤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령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국소수의 회심 사건을 보고 그것이 마치 생소한 것인 양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마치 극악 무도한 짓이라도 되는 것인 양 기겁율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그들이 이방인둘의 부르심에 대한 모든 예언을 해석하되 이방인들이 교회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에 굴복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의 눈에 비치기 시작한 부르심의 양식은 그들에게 생소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이치에 어긋나 보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여러 의식이 철폐되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병합되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에 크나 큰 손상을 입히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으로 상상한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이 구별을 상징하는 중간에 막힌 담의 구실을 하는데 있지 않았던가?  둘째, 그둘은 이러한 구별에 대해서 일생에 걸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예기치 않던 사건의 새로운 국면을 대하계 되자 대겅실색하며 자제심을 상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창세 이래로. 천사들에게 마저 감추어전 것으로 바울이 이야기하는 신비를 당장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엡 3 : 9).

 

"2 힐난하여 가로되~~~~" ; 고집은 대개 오류와 손을 맞잡고 있다· 그들이 동일한 신앙의 성령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연합된 이방인들을 다정하계 맞아 들이지 않은 것만해도우매한 무지 때문에 저지론 실수였다. 그러나 그들온 옴추려 드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끈질기계 싸움을 하면서 가장 큰 찬사를 받아 마땅한 그가 무슨 수치스런 일이라도 한 것처럼 대들고 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 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저들을 받아 들여 한 하나님의 주권 밑에서 교제를 나누지 않는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보다도 더 거룩한 연대성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아를 자기들의 머리로 인정하는 자들이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율법의 외적인 형식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마치 하늘과 땅이 뒤범벅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사도들과 형제들은 이무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마치 새로운 분파인 양 소개하고 있다. "형제들이… 들었더니" 이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울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들은 전자와 다른 사람들임에 틀림 없다.  둘째 여기에 나오는 '페리토매-스' (할례자들)는 단지 유대인들이 아니라 율법의 의식을 과도하게 고집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 스도의 양무리 가운데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사람들을 누구와 구별하고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사도들과 신자들의 온건파들이 이 논쟁을 벌였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설령 그들이 이 문제들에 대해서 언짢아했다 해도 그들은 베드로를 은밀히 불러서 사건의 전모를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에서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들' 울 고지식할 정도로 할례에 집착했던 자들로 본다. 이들은 여기에 얼마나 집착했던지 이 성스러운 의식에 의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이 율법을 고백하고 불결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율 허용하지 않았다.

 

"3.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할께 먹었다 하니"  ;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금하는 규정이 아니라 조상대대로 내려오는전통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문제로 자기가 너무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거나 자기가 필요없이 인간의 약점에 얽매이고 있다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러한 반론을 아예 생략하고 이들이 자기에게 먼저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자기에게 온 것이나 다름 없다는 점을 말할 뿐이다. 그외에도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특이한 자제의 본을 대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사건의 정당성에 입각해서 말썽을 일으키는 초보자들온 얼마든지 배척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정중하는 그돌에게 그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정이다. 사실 하나님께 충실하계 순종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이처럼 수치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하찮온 공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각 개인은 자신의 교의와 생활에 대한 설명을 전체 교회에 기꺼이 제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원칙을 익히 안고 있었으며, 자기도 이 양무리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질서에 순응할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교회의 판단에 굴복하고 있다. 사실 교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인간의 판단의 위험에 종속될 수 없지만 여호와께서는 예언을 평가해 볼 것을 원하고 계시므로 주의 종들이 그들이 인정 받고자 하는데 합당한 사람들인가 하는 점을 입증하려떤 이러한 조건을 거절해서는 안된다(고전 14 : 29, 32).

교의와 행동의 번호의 한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곧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베드로가 그의 행동이 지탄을 받자 기꺼이 자신의 사건을 진술하는데 동의하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그런데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면 왜 그는 이 동일한 원칙의 규제를 받으려 하지 않는가? 물론 이것이 자발적인 굴복이었다지만 왜 그의 후계자는 자기에게 제시되고 있는 이 자제의 본을 본 받지 않는가? 하지만 여기서 길게 돌려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교황들이 그들의 신성 모독적인 칙령을 봉해 말한 것이 참이라면 베드로는 그의 보좌의 득권율 포 기한 셈이요 로마 교황청의 반역자가 된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황을 온 세상의 제판관으로 세워 놓아 어떠한 인간적인 판단에도 굴하지 않게 하 는가 하만 그를 구름 위로 높이 추켜 울려 놓고 그의 말이타면 이유를 묻 지 못하게 하며 그의 개인적인 뜻을 법으로 만들어 놓는 등의 수단을 동해 그를 사도들의 수호자로 세워 놓고 그 특권을 끈질기계 옹호하려 하고 있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산 권리를 그처럼 쉽게 내팽개쳐 버린 것이라면 그.는 얼마나 겁장이로 지탄을 받아 마땅한가? 왜 그.는 최소한 자기는 법의 지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요 일반적인 질서에서 재의된 사람이라는 항변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이 따위 문제는 아 예 처음부터 다루지도 않고 자신의 겅위를 곧장 설명하고 있다. 우리 모두 저 우상을 저 주하는데 조금도 두려 워 하는 마음율 갖지 않도록 하자. 그는 이미 그처럼 무절제 한 횡포를 자칭함으로써 스스로 감독단(監督團)으로부터 자신을 제외시키고 있다. 

 

"4 베드로가 ~~~~. 설명하여 가로되"  ; 이것은 우리가 앞 장에서 검토한 내용 그대로요 거의 그대로 반복되고 있으므로 설명이 필요하다면 독자들은 그곳 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실 베드로의 이 연설의 의도와 핵심은 결론 부분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무엇 때문에 복 음 전파가 구원의 원인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간략하계 생각해 보도록 하자. 14절 하나님께서, "너는 네 구원을 얻을 말을 들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는 것은 구원이 인간의 말에 국한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그의 아듈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제중하고 계시며 그와 동시에 믿음 으로 그롤 소유하계(enjoy)하지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선하십이 놀라 운 것은 죽음의 소지밖에 없으며 스스로 죽어 마땅한 자들이자, 남에게도 죽 음만 가져다 주는 자들인 인간듈이지만 이들을 생명의 일군으로 상아 주시 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제상온 그들 앞에 제시되고 있는 참되고 확실한 구원을 무시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발밑에 짓밟아 버리면서 스스로 쓸데 없는 여러가자 구원을 고안해 내며 이것을 좇는 나머지 바로 눈 앞에 있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해로 만족하기 보다는 그들의 허기전 입을 그대로 매달아 놓고 있다는 접에서 二듄의 배은망덕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16  내가~~~~생각났노라" ; 우리는 이미 제 1장(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두 세례를 비교하는 뜻에서가 아니타 자신이 요한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 보여 주려는 뜻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그의 실체 (reality)와 상징 (sign)을 구별하듯이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독차지 하지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사역자와 원저자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은 다만 상정일 뿐이요 정작 씻어 주며 중생시켜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률 구할 때 그들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물 한 방울도 그들에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의 차이는 이것이다. 곧 사역 자들은 물이라는 외적인 상징을 수여하지만, 당신의 영의 능력을 동해서 그 상징의 효과에 대한 책체임을 지시며. 그것을 성취하는 쪽은 그리스도이시다. 독자들에게 이 점을 여기 서 다시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자수신만의 소유 로 말씀하고 요한에게는 물 밖에 남겨 주시지 않는 것을 보고 요한의 세례가 우리의 세례와 다르다는 식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증거에 따라 세례를 무의미한 구경거리요 성령의 은해가 결여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큰 잘못을 범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다론 곳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성경은 언제고 성례를 두 가지 의미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약속으로 우리를 속이는 일이 없듯이 그가 제정하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은 정결과 중생의 능력을 세례의 속성으로 말하면서 이 전체를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으며 (딛3 : 5, 6)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대리 활동과 눈에 보이는 상징을 통해서 그의 영에 의해서 일하시고 있다는 겁울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사역자와 연합되고 성령의 효력이 상칭과 연합될 경우 나머지 필요한 모든 것은 성례 뿐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마음이 유한하고 썩어질 것, 자기들과 비슷한 것, 이 제상 저인 요소들만 바라보는 나머지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한 구원을 그에게서 찾지 않고 그의 영의 능력을 바라보지 않게 되는 방향으로 이 양자의 결합올 혼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성령을 떠나 상징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앙의 목표에서 방황하는 자요,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긁어내서 그것으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성모독 죄를 범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라는 단어를 방언 및 이와 바슷한 은사에 대해서 만이 아니 라 우리의 갱신(更新)의 전반적인 은해에 대해서도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려한 은사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뛰어난 중거이므로 이 문장을 거기에 국한시키는 것은 적철한 일이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혜를 사도들에게 부여하심으로써 그 성령이 자기 수중에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셨듯이 그는 같은 방법으로 자기가 정결, 의, 및 전적인 중생의 유일무이 (唯一無二)한 원천이심을 입증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을 그의 행동에 다음과 같이 적용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시면서 세례의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 주셨으므로 그는 이 물이라는 외형적인 상징의 보조 수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그는 설명하고 있나.

 

"17. 내가 누구관대~~~~~"  ; 여기서 우리는 하나닝께서 이 모든 일을 시작하신 분이자 주관자시라는 점울 증거하는 뜻에서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음식 문제가 더 중요해 보일지 모르지만 문제의 핵섬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이지 결코 질서에 어굿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해를 예탁해 놓으신 곳인 복음의 가르침을 심는 것이 결코 무모하거나 저돌적인 행동이 아니였다는 점을 보 여 주고 있다. 우리의 행동과 가르침, 이 모든 것에 대한 인준은 바로 이 표준에 입각해서 판단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서 수고하는 자에게는 번호가 충분할 뿐 아니라 남아 돌아가기 마련이다. 원간들아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사목한 의견에 머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우리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사역자들이 자기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에게 위탁되었다는 점을 증명해 보 일 때만 그들은 그 가르침의 신뢰성과 확실성을 제대로 설명하는 셈이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적대적인 사람들 과 변론할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자승자박의 길을 가게 내버려 두고 최후의 날에 호소하는 것 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그와 동시에 우리논 우리가 하나님에게 공공연한 반기를 듈 때만 하나님 율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무능력하계 우리의 소명을 수행하지 않는 것도 그 에게 저항하는 것이타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떤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세례와 형제의 교제를 부정했더라면 자기는 하 나님께 원수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물론 하나 님의 은혜에 명백히 반대되는 것을 실천할 그는 아니 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 데려 오는 자들을 받아 들이지 않거나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문을 닫 아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 로 오늘날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을 상대로 항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것은,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교회로 입양하는 자들을 교회로부터 잔인하게 배처할 뿐 아니타 하나님께서 자녀로 여겨 주시는 자 들에게서 외적인 상징을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서 그둘의 지위로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을 돕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들의 입 율 다물게 하고 그들의 자유를 억제하는 데만 혈안이 된 자들의 저항 역시 이와 같은 맥락(脈絡)속에서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전리가 그들에게 불 쾌하기 때문에 그들온 그것이 압제받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 이 견과는 베드로와 논쟁을 시작 한 자들의 동기가 악하지 않았다는 정율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대 해서 충분히 알게되자 그들이 즉시 논쟁을 중지한 것은 분명히 경건의 상칭 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분별한 열성 때문에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잘못 비평 하는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그냥 내버려 둘 것이 아니타 실수 때문에 동요받 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 말씀으로 달래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순응성의 시험에 관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 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의존해야 한다는 정율 배우게 된다. 그의 뜻은 언제고 우리에게 정의와 전리의 확실 하고 최상의 규범이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거기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주님께서는 이것을 우 리에게서 숨기시는 법이 없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올바론 순종에 익숙해지 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이것, 또는 저것이 그에게 기쁨이 된다는 식으로 간 략하계 말씀해 주시는 경우가 종종 있을 뿐이다. 여기서 더 이상 캐 묻거나 호기심의 날개를 사정없이 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악마적이요 뻔뻔스런 생각이 가져 오는 것은 자신의 츠 -,-락 뿐이 다· 누가는 분명 히 그들이 ‘참잠해 졌 을'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 서는 자신들 속에 있는 것이 창피하기 때문에 그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마음 에서 억제하며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순응이 아니라 거짓 겸 손의 표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자들은 당장 자신들의 주 창을 철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방인에게도"  ;  이 말로 누가는 복음의 내 용과 목표를 곧 인간들 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새롭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에게 화해시키 도록 하는데 그 의의가 있음을 간략하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여기에는 적 개'라는 단어가 ‘생명 어 C는'이타는 말과 함께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것이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뚜렷하계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있어서 올바론 전전을 보려는 사람온 누구든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생명 의 새로움에 대해서 상고해 파야 한다(엡 4 : 22). 그리고 그는 그가 공연히 회개하도록 부름받온 것이 아니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구원이 마련되 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는 구원의 확신은 오직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자비에 의존하계 된다는 점과 죄의 용서가 결코 태 만과 무관심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회개를 주셨도다" ; 는 두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이 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용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모세의 말대로, .:그가 그의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고(신 30 : 6)에스겔의 말대로, 그들의 돌 같은 마음에서 살갈이 부드러운 마음을 만들어 내신 것으로(11 : 19) 볼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을 다시 낳으시고 다시 만드시며 그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다. 그리고 이 둘째 의미 (al) 가 더 어울리며 성경의 용법과도 더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