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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12:7)

1. 성경 (행 12:1 ~ 19)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1)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2)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3)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4)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5)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6)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7)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8)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9)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0)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1)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2)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3)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4)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5)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6)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7)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8)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19)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절 “  ;  여기에 새로운 박해가 헤롯의 조종에 다타 아어지고 있다. 우리가 본 대로 교회에 짧은 기간의 휴전이 허용된 것은 잠깐 숨을 둘리고 기력을 얻은 후 다음 날 싸움에 임하는 군인들처럼 교회가 장래 일에 대한 새로운 용기를 회복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실한 자들 역시 한 두 전투를 마쳤다 해서 영원한 평화를 스스로 기대하거나, 퇴역 군인들처럼 스스로 면제를 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기력을 회복할 잠깐 동안의 시간을 허용하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이 헤롯은 부친에 의해서 살해당한 아리스토볼루스{Aristobulus)의 아들, 아그립바1세였다. 요세푸스(Josephus)는 아무 데서고 그를 헤롯으로 부르지 않는데 아마 그 이유는 그의 형제, 칼시스(Chalcis)의 왕이 헤롯으로 불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이 교회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종교에 대한 관심 때문에서가 아니 라 이러한 공공연한(public spectacle) 구경거리를 통해서 평민의 환심을 사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그러기 전에는 그들이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것은 독재자의 횡포에서 나온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독재자들은 항상 평민들이 그들의 평화로운 지배를 교란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그가 무고한 피를 쏟은 것은 혼히 교활한 왕들이 그러하듯이 백성들의 광기를 달래기 위 해서 한 짓인지도 모론다. 이것을 우리는 그럴듯한 구경거리를 위해서 베드로를 옥에 가뒀다는 사실을 누가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2. 야고보를 ~~~~~~죽이니”  ; . 여기서 의심할 수 없는 점은 이 미친 사람의 횡포가 하나님의 은밀한 능력에 따라 뒤로 미루어지고 제지되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의 양무리를 보호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사람은 한 두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나머지 사람을 박해하는 것울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순교자의 더미를 쌓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수들이 살기가 등등하지만 그들이 무서 운 학살을 감행하지 않을 경우 그들의 자제력이나 너그러움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의 양을 아끼시며 그 사람들 멋대로 행하는 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야겠다. 물론 이 헤롯도 수백 사람, 아니 그 이상의 고문을 통해서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을 주저할 정도로 인간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격정이 더 큰 권위에 의해서 제지되었으며 그 결과 그가 교회를 너무 과격하게 박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야고보의 죽음은 어떤 반란이 일어날 때 그 주동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에게 겁울 주는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죽음이다. 그와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인내심을 제공하신 다음에 그가 죽음을 당하게 히용하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죽음에 있어서 용감하고 무적의 승리자로 나타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독재자들이 무슨 계략을 꾸미든 주님께서는 그것을 향내 나는 제사로 받으셔서 그의 복음의 신앙을 확증하신다. 누가는 이 야고보를 ‘요한의 형제 ’로 말함으로써 그를 알패오의 아들과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제3자, 곧 그리스도의 친척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에 불과 했으므로 나는 두 사람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본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면 칼라디아서 제2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사도와 알패오의 아들은 동일한 인물이요 그를 유대인들이 성전 꼭대기에서 밀쳐 떨어뜨렸으며(許1) 그의 죽음이 그처럼 크게 영향을 받온 것은 그의 성결에 대한 평판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  여기서 헤롯이 미칠듯이 교회를 박해하게 된 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열성이나 복음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였다는 것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말하자면 백성들의 환심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그는 끈기에 그의 횡포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데는 그 이유가 다양하다는 점 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비뚤어진 열성때문에 불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미신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덤비며 무고한 피를 쏟으면서 그들의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은 허다 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득에 끌리는 수가 많다. 예를 들자면 오래 전에 네로는 도시에 불이 나자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으며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수천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는 교활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아니 최소한 그들의 비난과 불평을 틀어 막으려 했다.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충성할 리 없는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끌기 위해서 헤롯온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그들의 환심을 다시 사는 값이라도 되는 양 그들을 죽음에 내어 주고 있다. 오늘날도 결코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상대로 횡포를 부리지만 정작 미신에 홀린 사람은 극소수요, 더러는 로마 가톨릭이란  적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쓸만한 노예로서 바치기도 하고 또는 수도사들과 일반 백성들의 맹렬한 환호성에 `굴복하고 그것을 만족시켜 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가련한 머리를 그들의 조소 앞에서 조아린다 해도 우리에게는 한가지 위로가 있으니 그것은 세상이 그처럼 수치스럽게 남용하는 우리의 피가 하나님에게는 귀한 것이요, 더우기 우리가 불경건한 자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할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4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말겨 지키고~~~~”  ; 이것은 베드로가 마치 무덤에 갇힌 사람이나 다름없이 혼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그들은 밤낮을 4등분 해서 각각 3시간으로 나누었으므로 헤롯은 군인들이 4명씩 4교대로 경계를 서도록 했다. 그가 당장 처형하지 않은 것은 유월절 잔첫날 사람을 죽이는 것이 종교적인 범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롯이 기다린 것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기회 를 노리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의 죽음의 광경이 더욱 더 장관이게끔 시간을 맞추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 무수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 잔치를 위해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5  교회는~~~~~ 간절하~~~~ 빌더라” ; . 이것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신실한 자들은 그둘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베드로는 사실 전투가 치열한 최전방에 홀로 서 있었지만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그 시각에 기도로 싸움으로써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지원을 그에게 내고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가 목숨을 내걸고 고난을 받고 있는 명분을 변호 하는데 있어서 최선율 다하고 있다는 점을 기도로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영혼이 절망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알수 있다.

    이 귀절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형제들이 그들의 복음 증거 때문에 불경건한 자들의 공격을 받는 것을 볼 때마다 어떠한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하는가롤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우리들이 그들의 위험을 보고도 속수무책이거나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의 사랑의 본분을 기만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 고백을 반역적으로 포기하고 마는 셈이나. 우리의 명분이 그들의 것과 동일할 경우, 더우기 그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해 싸우고 있을 경우 우리가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실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를 실족시키고 있는 셈이 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취급받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보통 이상의 적극적인 마음 가짐으로 기도에 착수하는 것이다.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는 유배생활을 하며 더없이 고생을 하는가 하면, 창고에 채워쳐 더러운 구덩이에 처 박혀 있는 사람도 있으며, 수많은 사람은 질질 끌려 장작더미의 불길로 사라지기도 한다. 아니 날마다 더 장기간에 걸쳐서 모전 고문을 가하는 새로운 도구가 계속 고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판국에 최소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기도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교회가 베드로의 생명에 대해서 더욱 더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교회가 당할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가는 그들의 기도가 간절했다고, 곧 계속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신실한 자들이 무관심하게 되는 대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전투를 하고 있는 동안 내내 그들도 낙심하지 않고 최대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성경에 기도가 언급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히 따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기도가 오직 하나님께만 지향한다는 사실은 신앙의 기초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나름 부르라"(시 50 : 15)하는 말씀으로 이 특별한 예배의 행위를 자신의 것으로 요청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밤에”   ; 베드로의 처형 날자가 이미 확정되었으며 그것도 단 하루 밤을 앞에 두고 있었다는 점율 생각할 때 교회의 기도는 얼핏 결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도움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실 경우 그들에게는 가장 절박한 시간을 택하셔서 구출하는 여러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신실한 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이처럼 기도를 쏟온 것은· 베드로의 생명을 생각해서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복음의 영광에 대한 무적의\ 용기를 부어'주실 것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의 못된 짓에 그의 아들의 복음을 매도(賣渡)하지 말아 주실 것율 간철히 바랐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누워 자는데”   ;  이 모든 상세한 내용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올 더욱 더 완전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느 누가 베드로는 이미 죽음에 삼킨 바 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가 비록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는 자기 목숨을 끊으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무수한 사람들 름에 끼워 있었으 며 도망갈 구멍온 커녕 갈라전 듬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음의 벌판에 서, 그의 처형자들을 옆에 두고 고스란히 빠져 나오며, 그의 쇠고당이 저절 로 녹아 버리며 쇠창문이 저절로 열리는 이 모든 사건온 이 구충의 기원이 참으로 신적인 것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베드로가 칭 조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에게 시기적절한 것이었으니 후에 그는 이런 방법으로 알려지게 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들에게 더욱 더 확실하계 전파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엄격한 감금은 혜롯에게 베드로를 살 터 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접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7  광채가 조요하며 ~~~~” ;  추측컨대 이 광채는 베드로 혼자만 보았으며 군인돌은 잠들어 있거나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던것 같다.   하나님께서 광채를 빛나게 하신데는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 베드로가 그 빛을 이용해서 어둠 속율 헤쳐 나가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이 그에게 하늘의 영광에 대한 상징의 역할율 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햇빛이 쟁쩡 내리비치고 있는 대낮에도 광채를 입고 나타나는 것으로 성경에 기목되는 경우가 많다. 틀림없이 베드로는 이 비상한 광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어야 하며 그와 동시에 이것을 자신에게 유익하게 선용했어야 한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툭툭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백성이 잠자고 있는 동안 지켜 보시며 그들이 나론할 때 정신을 차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속적인 기도 때문에 우리를 지켜 보실 뿐이라면 이보다 우리에게 더 비참한 노릇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육신때문에 한사코 넘어지며 우리의 마음이 다른 데가 있으며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올 바로 그 때 우리에게는 그분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면이 단 일종의 죽음의 모습으로서 이것은 우리의 감각을 둔하계 한다. 우리가 장들어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률 둘보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신자들은 그들이 잠들기 전에 하나님께 그들의 안전을 위임하기 때문에 그들의 수면 역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their sleep also calls on God) .

  천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베드로의 ‘쇠 사슬' 이 벗어지고 있는데 , 여기서 우리는 모든 길이 완전 봉쇄되어 있는 것만 갈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면 그 어떠한 장애물도 제거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무장을 갖추고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전쟁의 소용들이를 잔잔케 하실 의사가 있으시다면 즉각 모든 창검이 그들의 손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 전쟁으로 보복하시고자 하신다면 전에 평화에 전념하던 자들도 순식간에 마음이 돌변해서 마음이 강팍해지고 칼을 잡을 것이다.

  누가는 천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와 거기에 따르는 사건 하나 하나름 기록함으로써 이 이야기의 확실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 결과 어느 모로 보나 베드로가 하나님에게 구출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 

 

“9 베드로가~~~~참인줄 알지 못하고~~~” ;  여기서 베드로는 물론 그것을 사단이 인간을 속이는 그러한 환영과 같온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여기서 ‘참' 이라는 말은 자연스립고 인간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실제적인 사건과 환상을 구별 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그것이 비록 환상이지만 즉각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가 천사의 명령만 듣고도 거기에 이의를· 제시함이 없이 천사의 명령을 따랐다는 점에서 그의 순종이 업중되고 있다.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률 단숨에 구해내실 수도 있었지만 차례 차례로 그 많온 난관을 제거함으로써 그 기적의 영광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신 것온 그에게 그만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일을 곰곰히 생각해보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의 행동하시는 방법을 우리의 수준과 우리의 신앙의 발전에 맞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만약 감옥에서 형제들이 함께 모여 있던 집으로 단번에 옮겨졌다 해도 단번의 구출이 당시에 인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가 열 번도 더 구출되었다는 점을—-마치 우리 눈으로 직접 보듯이—-이해 하고 있다.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 이것은 그가 예상 밖의 돌발 사건으로 ‘정신이 나갔었는데' 이제 ‘제 정신이 들었다’는 말이다. 그는 마침내 일종의 황홀경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그가 죽음에서 낚아채내어졌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누가가 기록하는 그의 말에는 일종의 감사의 행위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다론 중거를 찾기 전에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축복을 스스로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천사가 하나님의 파송을 받았다는 사실울 경건한 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 자신들의 안전율 돌보는 종인 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러한 확신이 그의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천사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천사들이 은총의 임자로 말하지 않고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만 둘리고 있다. 사실 천사가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 경우 결코 하나님의 영광의 가장 작은 부분일망정 자신들의 것으로 취하려는 의사가 그듈에게는 없다. 베드로는 그가 ‘헤롯의 손에서’ 구출되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의  원수의 능력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원수익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그의 종에 대한 은총은 그만큼 뛰어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펀들어 주시기 때문에 온 세상의 적의와 악의가 완전히 무(無)로 들아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12 마리아의 집에 가니~~~~”   ;  분명히 이 여자는 특출한 신양을 가진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녀의 집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전과 같았으며 그곳에서 형제들의 집회가 열리곤 했다. 그런데 누가가 그곳에 ‘여러 사람이 모여'라고 기록하는 것은 그들이 한 시간에 모두 모이려면 거기에는 시끄러운 문제가 따랐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편리한 대로 그 도시의 여러 곳에서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도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을 의심 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는데, 사도돌도 같은 임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한 집에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원수들이 살기 등등해 하고 있었는데도 경건한 자들은 여전히 함께 모이고 있었다는 점을 항상 명심하 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단련이 평상시에도 유익하지만 무서운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더욱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   베드로의 도착을 알리는 소녀를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들이 베드로의 구출을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믿음 없이 기도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다른 결과였기 때문이다. 바뀌 말하자면 그들은 베드로가 하늘의 능력으로 무장되어 살거나 죽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각오를 갖추며 양때들이 갑작스런 이리메들의 돌격에 놀라 뿔뿔이 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연약한 자들이 넘어지지 않으며, 주님께서 박해의 폭풍을 가라 앉혀 주실 것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에 따라서 그들의 기도를 능가하셨으니 그들이 바라던 바 이상의 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사실 그 일은 그들에게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서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께 찬양을 둘리고 있다.

 

“15  그러면 그의 천사라 “  ;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수호자로 임명하셔서 그의 안건을 돌보게 하신 천사를 가리켜 ‘그의 천사’로 부르고·있다. ‘‘소자들의 천사들이 항상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느니라"(마 18 : 10)는 그리 스도의 말씀도 이런 의미로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각 개인에게 개별적인 천사가 할당되어 있어서 인간들을 돌보고 있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근거가 박약한 소리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한 민족을 상대로 한 천사가 허용되는가 하면(출 14 : 19) 또 어떤 경우에는 단 한 사람에게 부지기수의 천사들이 허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엘리사의 종의 눈이 열렸을 때 그는 이 선지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수 많은 불병거가 하늘에 정렬하고 있는것을 보았다(왕하6:17). 그런가하면 다니엘서에 보면 패르샤 민족과 헬라 민족 각자에게 하냐의 천사가 지명 되고 있다(10:13, 20). 그리고 성경은 각자에게 특유한 천사가 지목되어 있는 것으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천사들에게 각 신자들올 보호할 것과(시 91 : 11) 경건한 자들 주위에 장막을 칠 것을 명령하시는 것으로(시 34 : 7)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에게 요정이 둘씩 딸려 있다는 통념은 사악한 조작이다. 우리로서는 하늘의 전 대군이 교회의 안전율 보살피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한 천사나 여러 천사가 우리에게 그들의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는 이 사실로 만족하도록 하자. 신령한 광채의 햇산인 천사들이 우리의 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의 무한한 선하심 을 확신하계 된다. 

 

“17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울 전하라”   ; 나는 여기서 ‘형제들' 이라는 말을 교회의 일반 신도들 모두가 아니라 사도들과 장로들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물론 그 기적이 모두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었지만 베드로가 이 소식을 그의 동료들에게 전함으로써 그들을 특별히 존대하고자 한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었다. 유세비우스 이후 교회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고보'가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그를 교회의 세 기둥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에(갈 2:9) 나는 사도들이 뒤로 쳐지고 일개 제자가 그런 영광운 받은 것으로 생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이 사람이 그의 성결성 때문에 당시 유대인돌에게 큰 칭송의 대상이었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였다는 걷론윤 내린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즐거운 소식이 형제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그돌을 괴롭히고 있는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러한 하나님이 뛰어난 은총의 본보기를 통해서 그들이 더욱 더 확신을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난 이유를 나는 이렇게 본다. 곧 그 집은 신실한 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서 잘 알려쳐 있었으므로 다른 곳에서 덜 위헝하게 숨어 있을 생각으로 떠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물의 원수에게 들키지 않을 곳을 찾아 나섬으로씨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집 주인과 다른 사람 들까지 안전하게 지내는 길을 택하고 있다.

 

“18  날이 새매~~~~~~” ;  여기서 누가는 헤롯과 군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베드로가 폭력으로 그들에게서 낚아 채쳤다거나 그가 무슨 계략을 부려서 도망한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헤롯온 그 후에 심판관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조사한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자 그도 역시 하나님의 구출에 대한 중인이 되는 것을 말할 길이 없었다.

 

“19 절”   ; 헤롯은 군인들이 자기 눈에서 사라진 것을, 또는 감옥에 도로 집어 넣을 것을(駐2) 명령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충성과 근면이 입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에 근무 태만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거기에는 즉각 처벌이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그들을 풀어 주지 않은 것은 사악한 분노에 그의 독재자로서의 횡포 뿐 아니라 수치심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그듈을 당장 데려다가 처형하기를 (麟)바랐다는 식으로 다론 해석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화가 나서 그들을 처형자에게 넘겨주었건, 아니 면 그가 그들을 감옥에 집어 넣는 것으로 만족했 건 이것은 분명히 맹목성에 대한 뛰어난 예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마땅히 깨달았어야 옳을 때에 전혀 감동을 받거나 누그러지기는 고사하고 옹고집의 악의로 하나님께 저항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사단이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이해력을 박탈하는 좋은 예이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눈 뜬 장님이 되고 말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무시 무시한 무감각을 후려치심으로써 자신과 교회에 대한 보복을 정당하게 처리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