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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행13:11)

1. 성경 (행 13:1 ~12)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1)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2)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3)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4)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5)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6)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7)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8)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9)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0)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1)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1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절 " ; 여기에 전해 주어서 유익할뿐 아니라 알아서 유익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떻게 바울이 이방인의 교사로 임명받았는가 하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하늘 나라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데 사용한 열쇠와 같았다. 다들 아는 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언약은· 특별히 유대민족을 상대로 맺어졌으며 이국인(outsiders)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전혀 누릴 수 없었고 집안 사람들과 바깥 사람들을구별하는 담이 가로 질러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구원을 가져 오셨다는 사실 자체도 이 구별이 제거되고 교회의 출입구가 우리에게 열려지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사도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유대지역 테두리 안에 국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보냄을 받았을 때도 그것은 너무도 신기하고 이상한 상황이라서 그것이 기괴한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도 국소수의 사람에게만 특권으로 허용된 것 처럽 보이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 하심으로써 · 이방인을 유대 민족과 동동하게 만들고 있으며 그 결과 복음이 양자에게 구별없이 공동적인 것이 되기 시작하게 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구별의 담은 이제 무너졌으며, 그 결과 멀리 있던 자들과 가까이 있던 자들이 똑같이 하나님께 화해될 수 있게 되고 한 머리를 중심으로 모여 똑같이 한 몸을 이루어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엡 2 : 14 이하).

그러므로 바울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과거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되었던 구원이 오늘날 우리을 에게一곧 우리들이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속한다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바울은 여러 귀절에서 자신의 소명을 변호하느라 애쓰고 있는데 이것은 아방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가르침이 우연이나 저돌적인 인간의 결정에 의해 그들에게 온 것이 아니라 먼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둘째 그가 스스로 결정하셨던 사항을 인간들에게 알리면서 주신 명백한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계 하 고 있다(갈 I :_I5, 2 : 8). 

 

"안디옥 교회에~~~~"  ;  나는 에베소서 4장 11절과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 ‘교사'와 '선지자’의 차잇접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는 두 단어가 동의어로 쓰일 수있다. 그러므로 누가의 의미는그교회에 가르치는 면에 있어서 성령의 목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선지자들’을 예언에 있어서 뛰어난 자들로 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나는 오히려 성경에 대한 뛰어난 주석가들로 보고 싶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9철에서 우리에게 베푸는 가르침과 권고의 임무를 수행하곤 했다. 우리는 누가의 의도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일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교회에서 이들을 다론 곳으로 부르시고 있다. 이것을 보고 아무도 이 교회가 유능하고 적합한 일군들을 빼앗긴다거나,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회생시켜 가면서 다론 교회를 보살피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하는 뜻에서, 곧 이러한 사실을 미연에 방지하는 뜻에서 누가는 이 교회는 다른 교회를 보살피 면서도 개 교회에 인원이 충분할 정도로 일군이 많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물길이 흘러 넘칠 정도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교회에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쏟아졌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저 교회보다 더 부요하계 하셔서 그들이 복음 전파의 보모가 되게 해 주시는 것 이다. 마나엔온 헤롯과 함께 양육받은 사람이다. 그가 헤롯과 그처럼 친밀한 것을 보면 그는 어떤 귀족 출신이었음에 틀림없다(HI). 누가가 고의적으로 그의 신앙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것은 그가 세상의 영화를 싫다하고 그리스 도의 천하고 초라한 양무리와 함께 어울렸기 때문이다. 만약 야심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더라면 분명코 그는 궁중에서 요직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바치기 위해서 서슴없이 덧없는 영화를 수치와 모욕과 맞바꾸고 있다. 당시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던가를 생각할 때 그가 복음의 편을 드는 것은 스스로에게 일반의 멸시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의 본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업신여길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상을 용기백배하계 차버리는 습관을 기르게 하고 있다. 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온 사실 육신에게 위한 것 들을 해로운 방해거리로:같고 배척하는 것이다.

 

"2 주를 섬겨~~~" :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 '레 이 두一르 군-토一온' 에는 거룩한 일에 종사한다는 뜻 외에 공적인 임무에 관여한다 는 뜻도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거룩한 의식은 침승의 제사와 희생제물이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이것온 제물을 드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많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바로 이 의미를 잡고 늘어지면서 사도들이 제사를 어느 정도 이용했다는 점을 입증하려 든다. 그러나 설령 그들의 전제를 우 리가 받아들인다해도 그들의 미사률 변호한다면서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이 제사를 드렸다는 점을 들고 나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이들느 의 견해를 따른다면 먼저 이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으므로 그돌 각자가· 각 각 따로 미사를 올렸다는 결론이 나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은 제쳐 두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게 우]임하신 제사가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창하고 싶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 리스도를 제물로 드리는 이는 제사장 직분이 그들에게 부여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는 것 뿐인 것으로 상상한다 성경에는 그려한 언급이 전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 직분을 자신의 것으로 자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는 것은 다른 제사장직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각자가 자신과 자신의 모 든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며 다론 한편 공적인 일군들이 복음이라는 영적검 율 들어 인간의 영혼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15 장 16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이다.

더우기 모든 경건한 자들의 기도는 그 입술위 송아지요(호 14 : 2; 託2)이것이 거룩한 제단으로부터, 곧 .그리 v 스도의 이름으로 봉헌될 때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신다(히 13 : 15). 그러므로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섭겼다'(min ... sitered)는 누가의 말을 나는 당시에 그들이 그들의 공적 임무를(in actione publica) 수행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 누가는 ‘금식 ’ 이 라는 단어 를 덧 붙임 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온갖 장애 물에 서 자유롭게 된 가운데 오직 예언에만 집착하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 려주고 있다. 그 외에는 이 금식이 공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들이 그 때 까지 금식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물론 이러한상 세한 내용이 여기에 열거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의 소명에 더욱 더 신 임을 두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사실온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령이 가라사대~~~~" ;  마케도니우스 (Macedonius) 와 그의 일 당이 무슨 말을 하든 이것은 성령의 신성한 본질을명확히 확증하는말씀이 아닐 수없다· 하 나님께서는 그의 능력과 권위로 교회를 홀로 다스리시며 성령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자기에게 따로 구별할것을 명령하며, 그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부 름 받았다는 접을 입중함으로써 이 권리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게만 특유한 것이다. 우리는 만약에 하나님께서 교회의 몸 울 당신의 뜻에 따라서 세우시며, 그 위에 교사들을 두시며, 그것의 발전과 질서를 감독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교회의 몸은 그 형대 가 뒤바뀌며 머리률 상실하고 만다는 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에 20장 28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 보면 모든 감독은 성령의 임명을 받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접이 지적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동일한 증인인 바 울의 견해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건에는 교회의 합 법적인 목사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유일한 증표는 당신께서 그들을 파송하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사들 선발에 있어서 성령의 권위만으로 충분했으며 그의 지 시 (imperium) 가 그들을 임 명 하는데 (creandis) 있 어 서 핵 심 이 었 다는 점 을 생 각할 때 성령이 참으로 하나님이시타는 추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보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타"(사 48 : 16) 하는 이사야의 말로도 확증된다. 더우기 우리는 이 말에서 성령이 참으로 하나님 안에 촌 재하는 한 인격이타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성령’이라는 명칭이 본질적인 실체(hypostasis)를 대표하는것이 아니라한 낱 호칭에 불과하다는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조작을 인정할 경우 "성령께 서 가라사대"라는 표현온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무 맹랑한 소리에 지나지 않 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의 사명을 성령에게 돌리는 이사야의 말도 우스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다.

 

"따로 세우라"  ; 하나님께서는 교회 의 투표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그가 정 한 곳으로 파송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목사의 선택이란 결코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께서 목사와 감독이 교회의 선택을 받도록 명령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일 의장(moderator)이 되셔서 회의를 ,주재 하는 일을 포기할 정도로 모든권한을 인간들에게 내맡기신 것은 아니기 때 문이다. 사실 일반 목사들의 선택은 이 바울과 바나바의 임명과 달랐다. 곧 그들은 이방인의 사도가 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늘의 신탁에 의해서 임명되는 것이 적합했지만 그 신탁이 목사들을 안수할 때마다 나타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의 결정에 따라 복음 전 파하기로 이미 임명되었다는 점을 알려 주셨듯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어떠한 모양으로든 자신을 위해 선택해 놓으신 자들 이외의 사람에게 가르치는 직분을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 점에 있어서 양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보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하늘에서 직접 성령께서 우리에게 소리쳐 외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온사로 무장시켜 주신 자들을 받아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따라 다스려지고 준비 된 사람들인 만큼 우리는 그들이 마치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 손으로 건네진 사람이나 다름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표결에 따라 임명되었다는 누가의 말온 자신이 사람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바울의 주장과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갈 1 : 1).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온 이것이다. 곧 그는 그가 이방인돌에게 보냄율 받기 훨씬 이전에, 그것도 인간들의 표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사도로 세움을 받았으며 그가 수년 간에 걸쳐 사도직분을 이미 수행하고있을 때 그는 새로운 신탁에 따라 이방인들에게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다.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을 당신의 사도직의 저자로 삼는 뜻에서 인간을 배제한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명이 인간의 판단에 의존하도 록 하려는 뜻에서 교회에게 그의 임명을 지시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당시에 국소수에게만 알려져 있던 당신의 결정을 공공연하게 선포 하시며 그것이 교회의 엄숙한 인준에 따라 비준될 것을 명령하고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이것이다. 곧 바울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고 이제 담이 무너졌으므로,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 있던 어방인들에게서 교회를 모을 시기가 왔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의 봉사를 안디옥과 기타 다른 곳에서 이용하셨지만 이제 그에게 이 특별한 임무를더하심으로써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동일한 기업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당신의 뜻을 밝힌 셈이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교회의 교사로 임명되었더라면 그는 이 기회에 특별히 사림을의 인준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가 당신의 부름을 받았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는데 교회의 할 일이란 거기에 순종하며 인준하는 것 이외에 남은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판단이란 결코 애매한 상황이나 그들이 자유롭게 표결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 진행된 것온 결코 아니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서야 마침 내 교사의 반열 Un ordine docotorum) 에 낀 사람으로 확증되 고 있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곳의 이방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하는 특별한 임무가 그들에게 부여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을 위하여……따로 세우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일이자 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나바가 지금까지 가르치는 직분을 수행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으며 뿐만 아니라 그는 바울에게 대변자의 역할을 항상 양보하고 침묵을 지켰는데 어떻게 그가 바울의 동역자로 연관지어지고 있는가? 나는 바울의 부재 중에 말할 기회가 그에계 여러번 제공되었으며 따라서 양자는 서로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해냈다고 대답하겠다. 한 사람이_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는 노릇이타는 점을 생각해 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임무를충실하계 수행했을것이요, 그가 결코 벙어 리 방관자가 아니었을것이타는 점에 대해서는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없다. 누가는 바울의 수천개의 연섣 가운데 하나도 완벽하게 반복하지 않고 있는 데 그가 바나바의 연설을 명백히 보고하지 않는 것이 왜 그처럼 이상해 보 이는 것일까?

 

"3 이에 금식하며~~~~" ; 말씀에 순종하는 뜻에서 그둘은 바로 바울과 바나바률 파송할 뿐 아니라 임숙한 절차를 통해서 그들을 이방인들의 사도로 임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금식은 공개적인 관례였음에 틀림없다. 누가는 앞에서 그들이 각자의 임무게 전념하면서 금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기에 나오는 금식의 이유는 전혀 다르다. 곧 그들은 통상 고난을 받거나 극히 난처한 상황에서 시행하던 공중 금식을 정함으로써 자선들과 통하도록 자극하고 있다. 타인들이 전지하고 열성껏 기 성경에서는 이것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바 기도를 조력하는 면에서 자주 난 과제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안디옥 교회 교사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에게 그 짐을 있는 어깨를 허용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은 어디로 보나 정당화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취할 선택에 있어서 지혜와 분별의 성령을 통해 그들의 판단을 지도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데 있지 않았다.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었다 그들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위해 선택해 놓으신 자들에게 지혜와 용기의 영을 허락하시며, 그의 능력을 통해 그들이 사단과 세상의 모든 공격에 직면해서 무패의 사람들이 되며 그가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셔서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며, 그가 복음의 새로운 전파를 위해 문을 열어 주실 것을 바라는데 있었다.  

누가가 세번째로 기록하고있는 ‘안수는  6장에서 지적된 것처럼 일종의 성별 예식이었다. 말하자면 사도들온 신앙의 함양에 유용한 무릎 꿇는 기도와 여기에 비슷한 의식을 그대로 유지했듯이 율법의 옛날 습관과 일치하는 유대인들 사회의 의식을 그대로 지켰다 . 한 마디로 뱌울과 바나바에게 손을 얹은 것은 교회가 그들을 하나님께 바치며 그들이 이 직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 사람들에게 부여되고 있다는 점을 공공연하계 이구동성으로 증거한 다는 뜻 이외에 다론 의미가 없었다· 요컨대 이 소명은 올바론 출처는 하나님이었지만 다론 한편 외적인 안수는 교회에게, 그것도 하늘의 신탁에 입각해서 속한 일이었다.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여기에는 교회의 선택에 언급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소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오는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손으로 그들에게 제시된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들의 처음 도착지는 ‘실루기아'(Seleucia)였는데 이곳은수리아의 한 도시였다. 물론 이 나라에는 동일한 명칭을 가전 도 다론 도시가 있었지 만 누가는 구브로에서 가까운 쪽 도시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5 절 "  ; 누가는 그들이 ‘살라미 ' (Salamis) 에서 처음 가르치는 임무를 시작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곳은 구브로의 유명하고 인구가 많온 도시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잘못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보냄 받은 그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나는 그들이 유대인들은 아예 재쳐 놓고 모든 시간을 이방인들의 교사로서 보내야 할 정도로 이방인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았다고 대답하겠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인들의 교사로 지정하시면서 그들이 과거에 행사하던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의 수고를 바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타 본 장의 끝에 가서 보겠지만 유대안들을 상대로 시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누가는 지나가는 말로 그들이 요한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덧붙히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개인 자겨 으로 그들의 의식주를 도왔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그들의 복음 전파를 보조 하는데 있어서 보여준 그의 열성과 근면을 칭찬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그가 직분에 있어서 그들과 동동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일이 그들 모두에게 공동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그가 후에 이 거룩한 소명을 포기했을 때 그만큼 그에게 핑계가 있을 수 없었다.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 우리는 이 전도 여행에 결과가 전혀 없었다 고 볼 수는 없다. 누가는 물론 전반적인 냉대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는 그들이 예정 기간에 잠시도 가르치는 임무를 쉬지 않았다 는 집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다음에 전래되는 특이한 사건을 서둘러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타 산타미는 수리아 족올 바타보는 동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였기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반대편 연안에 있는 ‘바보' (Paphos)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섬을 가로 질러 여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섭 전체 가 비너스에게 바쳐진 섭이었지만 그 중에도 바보는 이 우상의 중심지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그의 복음의 빛이 그처럼 더럽고 가증스러운 소굴에까지 파고들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종교가 그 곳 주민들에게 모든 불결한 행동과 수치스러운 행위를 최대한으로 허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 도시의 정직성, 순결성, 그리고 온건성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하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 당시 유대인 종교는 완전히 타락해 있었으므로 그들이 여러가지 불경건한 미신에 빠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당시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낸 어떤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며 이 낯선 하나님의 이름을 거침 없이 핑계로 내세웠으므로 그 종교는 백성을 기만하는 그럴듯한 구실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엘루마(Elymas)가 그처럼 진지하고 현명한 사람을 자신의 허황된 이야기로 속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이상한 문제가 아닐 수 없 다. 왜냐하면 다 아다시피 당시 유대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증오의 대상이었 으며 륙별히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에 대한 과격한 멸시와 증오가 손 올 맞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가 서기오의 분별력을 분명하게 칭찬하는 것온 아무도 그가 우매하거나 겅솔해서 이 마술사의 협잡에 걸려든 것으로 생각치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가 육신의 지혜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가치한가 하는 점을 똑똑히 보여 주고자 한 이유는 육신의 지혜란 사단의 엉성한 전략마처 되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전리가 비취지 않는 곳에서는 사람이 현명해 보일수록 그만큼 그들의 행동은 더 어리석고 수치스럽다. 우리가보는대로 더 없이 예리한 지성과 온갖 학식이 풍부한 이방인들이지만 그들 사회에서 얼 마나 추하고 더러운 미신이 횡포를 부리고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올 떠나서는 판단도 분별력도 없다. 모든 우상 숭배자들이 버려진 마음 상태에 내던져지고 그들이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다(롬 I : 28). 하지만 서기오 바울은 케케 묵은 숱한 미신에 전절머리가 나서 순수한 하나님을 찾고 있던 참에 마침 이 마술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걸려 넘어진 것 같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경건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사단의 치명적인 율무에 결혀 넘어지게끔 허용하신 것은 분명히 의외의 판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을 이런 식으로 훈련시켜 주신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무수한 오류의 채바퀴를 빙빙 돌게 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울바론 길로 들어서게 지도하시는 것이다.

 

"7절"  ;. 그런데 서기오 바울로 말하면 그는 그가 유년시절부터 배워 온것과 다론 무엇을 갈망하고 있었지만, 불행하계도 여러가지 다론 미신에 이끌리고 말았던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나는 그가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바울과 바나바롤 불러 들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비록 참 하나님이 그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참 하나님에 대한 어느정도의 경외심을 이미 획득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유대인듈이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그의 말씀에서 순수하고 확실한 경건의 법칙을 베우고자 했으나 거짓 선지자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맛보고 당황하게 되었다. 비록 그가 당분간은 못된 친구의 꾀임에 빠져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의심하는 마음을 그에게 허용하신 것은 그가 헛된 것으로 완전히 만족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8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 이 협잡군이 빛을 가로 막으려 한 것 온 그의 어둠의 세계가 빛으로 무산되고 말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쓸데없는 약속을 무조건 퍼부으며 온갖 술책과 속임수로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가운데 그들이 의의 태양이 솟아 울라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말다툼 군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는 이러한 장애물을 상대로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마술사들이 도처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해도 사단은 수없이 많은 유혹거리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를 내 쫓게 하고 있으며, 우리의 육신은 이러한 유혹을 얼씨구 좋다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세상의 잡다한 유혹과 우라의 육신의 사악한 욕망은 사단이 끊임없이 신앙을 전복하려고 사용하는 수많은 유혹거리이다.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 누가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총독이 얽매여 있던 매듭울 어떻게 풀어 주시는가 하는 점울기록하고 있다. 마술사에게 너무 매여 있던 그가 독자적인 입장에서 참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온 마귀는 자기가 덫으로 옮아 맨 사람들의 마음울 교묘한 방법으로 완전히 자신에게 굴복시켜서제 아무리 뻔한 사실마저 똑바로 볼 수없게 만들어 버 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귀가 넘어지자 바울은 쉽게 총독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공격을 받을 경우 믿음이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란 말씀의 지원이 없이는 다가오는 멘 첫 공격을 받고도 휘청거릴 정도로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영적 건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0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 바울은 맹목적으로 그처럼 격렬하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가 부드럽고 온건한 방향으로 행동 했더라면 그는 아무런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언제고 가르침이 앞서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죽어도 말을 듣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경고, 격려 및 자극도 꼭 필요하다. 그리고 바울은 처음부터 무작정 이 마술사에게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의 가르침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악의적으로 싸움을 걸어 오는 것을 보고서 그를 사단의 노예로 취급하고 있다. 자기 고집만 피우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부음의 원수들이 남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한된다.

  그리고 아무도 바울의 성미가 너무 과격한 것으로생각하는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누가는 성령께서 그의 안내자로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점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열성온 결코 비난을 받을 수 없다. 아니 서슴없이 그의 말씀에 반기를 드는 하나님 멸시자들은 이러한 심판이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바울의 입술을 동한 성령에 의해서 그들 모두에게 쏟아지고 있다는 접을 깨닫고서 크게 무서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사울이 총독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본문의 단어는 이러한 잘못을 충분히 반박하고 있다. 여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유를 댈수 있지만 누가의 본문은 총독이 믿기 전에 그에게 이름이 둘이었다는 점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그가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음에 룰림없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을 가전 사람들 가운데 이대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예사 였다. 누가는 '궤계' (craftinnes)와 ‘악행' (guile; 음흉한 꼬l)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것은 전실성의 반대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교활한 사람들이 그들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여러 모양으로 바꾸는 것을 뜻하며 그 결과 아무런 일관성이나 단순성을 찾아 볼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누가가 사용하는 헬라어에는 남에게 해를 끼치기 쉬운 오만의 의미가 담겨 있지만 그대로 전자의 의미가 더 잘 어울린다. "마귀의 자식"이란 가망이 없을 정도로 타락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올바론 것을 대항해서 악의적으로 싸우는 자들은 모두 마귀의 자식이다 . 그러므로 바울은 이 마술사가 ‘모든 의의 원수’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틀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 여기서 그가 말하는 ‘주의 길'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에게 데려오는대 있어서 사용하는 방법을 뜻한다. 그는 이 길이 똑바르게 보이지만 이 마술사는 그의 속임수와 술책으로 이것을 꾸불꾸불하게 비틀어 버리고 말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쉬운 노선을 동해서 주님께 나가지 않는 것온 마귀의 흉계 때문이라는 사실아 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결코 울퉁불둥하지 않온 수월한 길율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덩이나 가시덤불로 우리의 길을 가로 막거나 우리의 길을 어렵게 만드는 협잡군들을 항상 겅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앞서 말한 사항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온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종들이 건전한 교훈의 공공연한 원수들에 대해 서 과격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온 성령에게 온건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처사나 다름 없다. 사실 우리는 이 면에 있어서 너무 쉽게 실수를 범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경건한 교 사들온, 첫째, 열성을핑계로 육신의 감정에 굴복하지 않고, 둘째, 온건하게 나갈 여지가 아직 있윤 때 무모하계 성급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며, 세째, 추잡하고 어울리지 않는 욕을 삼가며, 오직 심각한 말로 업청난 상황을 보 여 주는데서 그치도록항상 경계를 퍼지 않으면 안된다. 선지자들에게 있어 서 거룩한 열성과 성령의 격렬함온 바로 이와 같온 것이었다. 그러나 유약 하고 겁많은 사람들온 이것마저 과겨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온 하나 닙의 전리가 얼마나 그에게 귀하고 값진 것을 모르는 소리이다.

  오늘날 엘루마처럼 신앙을 뒤깊어 엎으려고 일어서는 사람이, 아니 그보 다 더 악독한 사람이 부지 기 수이 다. 신성 모독적 인 뻔맨스러 움으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벗겨 버리는 저 무리들, 지긋지긋한 타락으로 온 종교계를 속 되게 하는 저 무리들, 비참한 뭇영혼들을 잔인하계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저 무리들, 주제 넘게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저 무리들, 하나님 예배를 동채 로 변형시켜 못쓰게 만들고 마는 저 무리들, 비열한 욕설로 하나님의 성스 러운 전리를 산산 조각나게 하는 저 무리들, 하나님의 교회를 야만적인 독재로 황페하게 만들어 놓고 만 처 무리들, 한마디르 하나님을 자기들 발로 짓밟고 있는 저 무리들의 꼬락서니를 보시라 ! 거기다가 저 미치광이들에게 아침을 퍼붓는 웃기는 학자닙네들의 숫자를 더 해 보시라 ! 그러나 그들은 "주의 집을위하는 열성이 나를삼켰나이다"(시 69:9) 하는 말씀의 뜻을체 험하지 못한 자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냉담, 아니 그들의 테만에 관여하지 말고 목청껏 소리치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윤 진지하계 변호하도록 하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 여기서 ‘손'이 일격을 가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는 오직 대리인에 불과하고 이 처벌을 칙접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타 이 능력 (ability)은 바울이 말하 논 ouvaµ,r (뒤나미스; 능력)인 것 같다(柱3),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적으로 신자들을 치유할 능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반역적이요 목이 곧은 사람들을 길듈이는 회초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베드로는 아나 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런 처벌을사용했다(행 5_: 5). 그. 러나 이러한 기적은· 가능한 한 철두칠미하게 인정많고(humanus), 친절하시며 (suavis), 인자하신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데 사용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는 사도들이 이러한 반대되는 능력의 예를 아주 희귀하게 드러 내게 하신 것이다. 그려나 사도들에게 이런 능력이 부여된 것은· 생각나는 대 로 아무에게나 보복하도록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다. 그들을 이런 방법으로 무장하신 하나님의 동일한 영이 그들을 지도해서 그 눙력을 올바르고 적합 하게 사용하도록 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우리는 바울이 성령의 영갑 으로 말했다는 접을 명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분만 아니라 이러한 처벌은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태양물 흐리게 합으로써 남들에게 그 빛의 혜택을 보지 못하계 하려던 마술사였으므로 그가 무시 무시한 혹암에 던져 지는 것온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불신앙의 도에 있어서 이 마술사를 눙가하는 로마 가돌릭 사람들이 많온데도 그들의 뻔뻔스러움이 벌을 받지 않고 그냥지나치는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론다. 곧 하나님의 그 손은 백이 빠지기 시작한 것인 가? 그는 자신의 영광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는 복 옴울 고수하려는 자신의 열성을 포기해 버리셨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온 이것이다. 곧, 과거에 이 마술사에게 내려진 이 눈 에 보이는 처벌과 그와 비슷한 처벌은 복음의 순수한 가르침을 더럽히고 흐리게 하거나 거기에 중상 모략을 퍼붓는 모든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영 원한 전노에 대한 본보기이다.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기적이 베풀어진 것은 그 기적이 영원히 존중되며 우리 눈 앞에 남아 있어서 우리 눈에 .그렇게 뚜렷 하게~ 보이지 않는\하나님의 십판올 바라보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하나님에게 그의 원수들을 이렇게 저렇게 처벌하도록 규정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서기오 바울로 말하면 그는 성인이 되기까지 참 신앙 을 모르고 자란 사람이요, 소년 시절부터 여러가지 서로 다론 미신에 젖은 나머지· 참 신양을 가로 막는 장애물 속에 갇혀 있던 사람이요, 그리고 마술 사의 못된 말에 흘린 나머지 참 신앙을 받아 들일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이었다 .. 이런 그였으므로 결코 하찮온 도움을 갖고는 그를 건져낼 수 없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하늘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손을 내 리 뻗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도와 주셨 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 권위를 확증 받은 동일한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우리가 하나님의 십판을 자세히 살피는데 있어서 (駐4)우리의 눈이 멀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원수들을 상대로 그의 거대한 능력을 다양하게 제시하지 않을 정도로 무력한 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 앞서 지적한 대로 엘루마를 단단히 조이고 있던 울무가 이제 끊어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그가 기적을 통해 믿게 된 것은 가르침에 대한 촌경이 믿음의 시작이요 준비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선명한 예를 목격하고서 바운 이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사람이 라는 접을 깨 달았으며 지 금까지 주저하던 그의 가르침을 받아 듈이기 시작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수많은 사람돌의 마음 속에 기적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복음의 신앙이 도처에서 수없이 많은 강력한 전쟁 무기에 의해서 요동을 받거나, 아니면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신앙의 과정이 수천의 장애물을 능가하계 하시거나 우리는 당신의 이 은총 하냐로 만족하도록 하자· 그렇지 않고 새로운 기적이 날마다 우리의 요청대로 베풀어지지 않을 경우 우리의 상황이 갈수록 초라하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상대로 중얼거리거나 따지려 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