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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13:16)

1. 성경 (행 13:13~41)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3)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4)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5)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6)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7)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8)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19)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0)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1)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2)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3)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4)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25)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6)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7)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8)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29)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0)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31)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2)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3)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4)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5)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6)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7)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8)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39)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0)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3절"   ; 이것온 바울의 두번째 도착지점(altera statio;証5)에 대한 설명이 다. 그는 바보를 떠나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이르러 유명한 연설을 했는데 이것이 곧 그 결과와· 함께 기록되고 있다. 그러기 전에 누가는 지나가는 말로 요한이 떠나간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후에 그가 좋지 못한 불화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출항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바울과 한 사람을 재외한 나머지 동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 사람의 약점을 지적함으로써 바울을 끈질기게 따르는 다론 사람들을 칭찬하고 있는 셈이다.

 

"14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 '여기서 안식일이 복수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들이 안식일이면 으례 함께 모임으로싸 무의미하고 나태한 안식이 되지 않게 했다는 말이다. 안식일 제정의 또 다론 의의는 신자들이 세상과 육신에 대해서 죽고 난 뒤에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개인의 일을 중단할 때 누리는 영적인 쉼에 대한 상징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이 상징의 전실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확증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 함께 매장되면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릴 때, 이 엣 상징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의 또 다른 일반적인 용법을 내다 보셨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다른 모든 관심과 업무를 벗어 버리고 거룩한 집회를 가짐으로써 지상적인 수고의 중지가 천상적인 단련의 기회를 제공하게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우리가 절기를 이용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만사를 제쳐 놓고 더 자유롭게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 여기에는 기도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생략되거나 소홀히 여겨지지 않았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누가의 주 목적은 바울이 그곳에서 행한 설교를 기록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가르침의 순서와 관계되는 사항만 열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귀절 역시 주목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여기서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 어떤 방법의 가르침(teaching)이 시행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율법과 선지자들이 먼저 제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원천에서 나오지 않은 무엇을 교회 앞에 제시하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극소수의 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차별 없이 들어와 그것의 낭독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낭독이 있은 다음에 가르침과 권면의 은혜에 뛰어난 사람들이 두 번째 역할 곧 낭독된 성경에 대한 해설가의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누가는 방종에서 오는 혼란을 막는 뜻에서 아무에게나 말할 기회가 허용된 것이 아니라 권면의 직분이 회당의 지도자들, 또는 소승들에게 국한되 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는 당장 성급하게 일어서서 연설을 시작함으로써 통상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말할 기회가 허용될 때 까지, 그것도 일반이 동의해서 권위를 인정한 사람들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앉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당시 백성들은 얼마나 타락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누가는 마지막으로 본장 끝에 가서 이 안디옥 사람들이 너무 교만하게 굴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배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집회를 울바론 순서에 따라 진행할 정도의 선한 면온 아직 그들에게 남아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꼴사나운 혼란은 더욱 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로마 가톨릭은 그들의 성전에서 당당하계 울려 퍼지는 음성으로 성경을 낭송하지만 그러나, 그 언어는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교인들은 거기서 아무런 혜택을 얻지 못한다.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리고 불신앙적인 말다툼군들은 하나님 말씀 대신 자신들의 흉칙한 조작물을 내쏟아 놓으면서 그들의 불신앙의 오물로 거룩한 모든 것을 더럽히고 있는데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 이것은 ‘교회에 덕이 되는 은사를 보관하고 있거든, 다시 말해서: 백성들에게 적합하고 유익한 권고가 있거든' 하는 말과 같다. 물론 권면은 가르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그들 사이에서 주로 사용된 것은 교사에게 적합한 직분은 자기 머리에서 무슨 신기한 것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에 적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거기에 경건한 자들의 모든 지혜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듈이 직접 가르치기보다는 다른 출처에서 얻은 가르침울 교회의 덕육을 위해 적용하는 셈이다. 이것이 ‘권고' 의 의미이다.

 

"16절"    ;. 먼저 우리는 이 설교의 주제를 파악함으로써 이것이 쓸데 없이 하 공을 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겠다. 사실 바울은· 천지 창조까지 이야기를 거슬러 울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의 목적과 어긋나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의도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하는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는 그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서 한가지 장점이 있다는 것율 입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한 구주가 약속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그들의 (駐6)유일무이한 최대의 행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과거에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받았으며 그들이 제 아무리 자격이 없어도 그들에게 꿀낱까지 계속될 여러가지 축복이 내렸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은· 메시아의 약속에 종속적인 것이요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손으로 그들을 다스릴 목적으로 그것을 베푸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머리를 중심으로 모이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자랑할 건덕지가 전혀 없다논 점을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제시될 때 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겅우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을 상대로 맺은 생명의 언약은 무효화 되고 그들의 입양도 제기될 것이라 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의 설교의 첫째 부분의 의도는이것이다. 곧 율법의 핵심과 하나님의 언약의 바탕온 그돌이 그리스도를 인도자와 통치자로 모심으로써 그들 사회의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과 그분 없이는 신앙을 계속 할 수 없으며 그들은 비참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이라는 내용이다.

   바울은 여기서부터 둘째 부분, 곧 자기가 전파하는 그 예수가 백성들에게 구원울 가져오는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가 획득한 구속의 종류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그의 능력과 기눙율 설명함으로써 그들이 그로부터 기대할 좋온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알게하고 있다. 마지막 맺는 문장에는 견책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제꽁하며 율법과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전지하계 구하도록 강권하는 구원의 주인공(Author)을 그둘이 배척할 때 무시 무시한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대충 이런 식이다. 이제부터 순서에 따라 개별적인 요점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사람들과……사람들아"  ; 바울온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순수한 후손이 아닌 사람이 많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상대해서 말하고 있는 유대인돌을 두가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먼저 그는 그들의 뿌리가 공통된 점을 들어 형제들로 부르고 그와 동시에 그돌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경우에 한해서만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될 것이요, 오직 그렇게 될 경우에만 그들이 또한 올바른 청중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 온 '여호와에 대한 경외가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신 실한 자들에게 귀담아 들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그렇게 큰 영광에 대한 자격이 전혀 없는 데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처럼 허풍을 떠는 사람들이 많지만 너희들 역시 불순한 후손이 아니라는 점을 입 증해 보여라’ 하는 말과 같다. 오늘날도 성실하고 순수한 경배자들이 위선 t 자들과 함께 뒤섞여 있는 가下데 다같이 교회의 명칭을 사용하지만 이것이 꼭 한 세대에만 국한된 결점온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배울 수 있 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속과 겉이 동일하도록 유의하며 우리의 주장이 아니타 하나님께 대한 전정한 경외가 이 점을 보장하도록 하자.

 

"17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  이 서론은바울이 무슨 새로운 것을 도입해서 백성들을 모세의 율법에서 이탈하게 하고 있지 않다는 접을 입증한다. 용론 하나님온 모든 민족의 하나닙이시지만 그는 그를 가리켜 이 백성의 하 나님, c 고 자신이 그들과 일치하셨으며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서 예배를 방으신 하나님 으로 부르며 그둘 사회 에 서 만 전정 하고 순수한 신 앙이 살아있 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라는 말 역시 동일한 내용을 두고 언급하는 것이다. 말하자연 이 말로 그는 나따지 제상으로부터 기들을 구별해 주신 전정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이탈하는 것을 추호도 원치 않는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셔 그는 자기가 표들에게 전혀 생소하거나 새로운 하나님이 아니타 오래 전부터 자신을 그 둡의 조상에게 계시해 보여 주신 그 하나님을 전파하고 있다는 접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 이 다. 그러 므로 그는 율법 에 기 초한 하나님 에 관한 지 식 (the knowledge of God)을 모누 종합합으로써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그들 의 신앙이 확고하계 남아 있도록 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닙의 값없는 사랑을 추천하고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들만 하나님 의 교회 와 상속이 되 는 것 은· 하나님 께 서 그들을 다론 민족으로부터 구별하는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 인가? 말하자면 그들을 륙별히 구별할 장점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고하나님께서 아브라합을 감싸주신 사랑에서 이 구별이 유래한 것이다. 모세 도 종종유대인돌에게 신명기 4장 37절, 7장8절, 10장 15절, 14장 2절, 32장 8절이하에서와 기타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운 섭리를 똑똑하계 보여주 시 는 다른 귀 절 들에 서 그의 거 저 베 푸시 는 총애 (the gratuitious favour) 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천하고 비참한 우국} 숭배자에 불 과했던 아브라함에게서 아무런 장점도 발견하시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를 온 세상보다 더 택하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할례와 마찬가지로 이 선택이 온 )I내성에게 공통척이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아브라함 의 후손을 선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닙에게는 또 다론 보다 더 온 밀한 선택이 있는데 여기에 따라 그는 아브라합의 자손들의 국소수만율 자 신에게 구별하셨으며 육신으로 태어난 아브라함의 자손들 모두가 영적 후손 입 것으로 취급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셨다.

 

"백성을 높여"  ;  바울은 하나님께서 후대에 유대 민족에게 베푸신 축복온 모 부하나님께서 그둘의 조상을 품어 주셨던 그 거처 베푸시는 사랑으로부터 훌러 넘치고 있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따 하 구출받은 것과 그렇게 많은 민족을 이둘을위해 희생시켜 가면서 가나안 땅을 소유하계 인 도하신 것 은 모두 이 거 처 베 푸시 는 사랑 (that .gratuit ous favour of God) 때문이었다. 어느 지역 주민을 천수시키고 대신 나그네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교 혼한 일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태` 7하신 그 선택이 바로 바울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모든 축복의 원천이자 뿌리이다. 그들 자신이 사악으로 수천번이라도 자멸하고 말았을 이 반역적인 민족을 거절하지 않은 것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참으십 때문이었다. 마찬 가지 의미에서 성경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사멸을 받은 것도 하나닙 께서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나 그네'였율 적에 ‘높임을 받았다’는 말을 함으로써 바울은 자신들의 구출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장엄한 것이었나 하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18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  하나님께서 오만 불손한 줄 아시는 백성을 상대로 보여주신 참으십을 나타내는 헬라어 복합 동사에는 좀더 적극적이고 자발적 인 의 미 가 담겨 있 다 (frpon:orpbpr;qalJ : 에 트로포포래 -산 ; 참으셨 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백성돌의 사악을 상대로 씨름하시는 그의 선하십온 그의 선택 때문이라는뜻이다. 하지만우리는하나님께서 비록그의 뜻을굳 게 지키시려고 하시며 그의 선택된 백성에게 동정을 베푸시지만 그래도 반 역적이고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처단하고 있다는 점을 명십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백성율 완전히 쓸어 버리지 않는 범위에서 어느 정도 남겨 두셨지 만 그들의 죄과는 벌을 받지 않율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백성이 바다의 모 래 갈을지라도 남은 자만 둥아오리타"는 이사야의 말이 성취된 셈이다(사 10 : 22). 

 

"20 사사틀 주셨더니"  ; 이 말의 성경적인 의미는 지휘관과 통치자이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의 수많은 잘못을 용서해 주신 것은 이 백성에 대한 관용의 또 다론 중거 이 다; 말하자면 누가는 바울이 보다 상세 하고 명 확하게 강론한 것을 간략하계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 의 굽힐 줄 모르는 오만으로 그 멍에를 거듭거듭 내팽개쳐 버린 그 모든 기 간에 있어서 그듄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종종그 들의 무시무시한 재앙을 받고서 뉘우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곧 그들을 그 들의 원수들의 독재로부터 구해주시곤 했다. 그러므로 그는 4백 50년에 걸 친 수천 번의 죽음의 고비에서 이 민족의 무리를 구원해 주셨다. 여기서 만 약에 그들의 선택의 지속성의 승리하지 않았던들 그들온 그처럼 기피하고 배척한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명백 하커l 드러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수백 번 계약을 파기하는 자들 울 지겨워하지 않고 그돌과 신의를 지켜 주신 것은 그가 그의 구리스도에게 눈을 둘리면서 그에게 기초를 두고 있는 이 계약의 파기되는 것을 허용치 않 으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 었는가?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 이 변화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 우신 정부를 사실상 공공연하게 배척한 셈이나 마찬가지요 하나님께서도 이 정을 사무엘에게 털어 놓고 있다(삼상 8 : 5, 7). 그러나 그들의 선덱의 확고 성과 지속성이 있기에 그들의 광기가 받아 마땅한 처벌을 그들온 받지 않고 있다. 아니 이 백성의 악하고 불법적인 욕망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께서 대를 이으실 한 왕국을 세우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그리고 홀이 유 다 족속에게 온 것은(창 49 : 10) 이 백성의 왕을 두고자하는 욕망율 품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백성들은 분명히 잘못 행동했지만 그러나 악 한 것을 선하계 이용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이 과오를 그들의 구원으 로 바꾸셨다. 사울의 폐위는 백성둘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처럽 보였지만 이 왕국이 곧 다윗의 가문에서 기반을 잡게 되자 야곱의 예언에 대한 신뢰는 그 대로 유지되 었다(창 49 : 10).

 

"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 바울이 이 귀철을 인용하는 것 온 다윗을 칭찬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유대인들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그리 스도를 받아듣이계 하는데 그 뜻이 있었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마음이 전적 으로 다윗 에 게 합한 것 은 결 코 시 시 한 이 유 때 문이 아니 라는 점 을 밝히 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를 높이 칭찬함으로써 신실한 자들이 그룬 통해서 그 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데 의의가 있었다. 이 귀절은· 시편 89편(20절)의 인 용이다. '다윗이 이새의 아들'이었다는말은바울이 하나님의 온혜를 더욱더 두릿하게 나타내는 의미에서 삽입한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가축을 기 르는 이새의 집에서 가장 어린 아이를 취해서 그 나라 왕좌에 앉혀 주신 것 은 기적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만나다' (발견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서 원하던 사람을 찾게 되었다. 또는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온 다윗이 자신의 노력이나 근면으로 하나님을 만나는데 적합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 인간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 하는 표현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처럼 형편 없이 넘어전 다윗을 왜 하나님은 그가 계속해서 순 종한 것으로 증거해 주시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 여기에 대한 대답온 두 가 지이다. 먼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행동 하나하나룬 보신 것이 아니라그의 전체 생애문 보셨으며 둘째, 그는 다윗 자신의 무슨 공로를 보고 이처럼 칭 찬하신 것이 아니타 당신의 그리스도를 보고 그처럼 칭찬하신 것이다. 물론 그논 이 한가지 죄악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영원한 파멸을 받아 마 땅했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의 축복의 길이 끊긴 나머지 그는 밧세 바를 통해서 독사의 자식둘을 길러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눔 타운 십리에 따로 우리아의 죽음 같은 추악한 죄악도 정반대 방향의 결과를 낳고 말았으니 그것온 비록 불길하고 배역적이요, 얼룩두성이인 이 결합융 통해서 송로몬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윗이 가장 추악한 죄를 범했지만 그 러나 그는 일생에 걸쳐서 하나님을 따랐으며,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 종적인 자신임을 입증했기 때문에, 철저한 칭찬을 받고 있다. 물론 성령께 서는 우리를 더 높은 수준으로 이끄셨지만 머리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 든 신실한 자들의 일반적인 부르십이 여기에 우리를 위해 묘사되고 있다.

 

"23 약속하신 대로~~~~~"  ; 이 귀절 역시 수차에 걸쳐 이미 지적된 사항,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오직 그의 신실성과 선하심을 생각 했기 때문이라는 접을 확증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가 그를 보낸 것은 그가 그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이 약속은 구원이 거처 오는 것이라는점 울 증거하듯이 그와 동시에 복음에 대한 비상한 신뢰성을제공하고 있다. 왜 냐하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불시에, 전혀 듄어 본 일이 없는 데도 오신 것 이 아니라 대초부터 약속된 분이 자신의 시간에 자신을 이제 제시하셨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누가가 여기서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는 이 약속온 너무도 잘듈 알고 있는 그대로아다. 그러나 특별히 유대 인돌 사회에서는 이 약속이 일상 생활의 대화에 날마다 오르 내리고 있었으 며 어디서나그들은그리스도를바로다윗의 아들로불렀다(마22:42). 에 수께서 ‘이스라엘에게 오셨다’고 말하는 것은 비록 구원은· 온 세상에 속하는 것이지만 먼저 그는 할례의 한 종이 되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셨 기 때 문이 다(몸 15 : 8). ‘예수’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그는 ‘구주' 라는 헬 라어 (qwr~p ; 소-데 -르) 로 반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똑같° 亡말을 두번 반복하는 셈이다d 그러 나 이것이 결교 무의미한 중복일 수 없는 거 入온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천사의 말을 통해 그에게 주신 이름이 의미하는 장본인이요 또 이것을 성취하시 고 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24절"  ; 우리가 아는대로 요한의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 러므로 바울은-~그의 증거를 빌려서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허구적인 그리스도 를 전파하고 있는 것아 아니라 선구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이미 추천 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다는 접을 입증하고 있다• 이 것은· 그처럼 중요한 문제를 입증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증거로 충분하다는 뜻 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확신하고.-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어떤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하늘에서 파송된 선구자가 그리 스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서 이 증거의 권위가 서는것이다 .. 그. 리고 바울은· 요한이「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접 과그가 자발적으로 메시아의 명칭과 명예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에게 양보했 다는 접을 간략하게 지적하고 있다•

 

"회개의 세례 "  ;  제례는율법의 의식과 관습에 반대 되는것이었으며 크나큰 변화의 징조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오십 이전에 무엇을 변경한다는 것 온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동해서 자 신들의 세례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회개의 단련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오 렌 동안에 걸쳐서 바라고 대망해 온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는데 있어서 전 적으로 새로운 세례를 창시한 사람, 아니 그것의 시행자였다. '회개의 세례' 타는 말로 그는 사죄의 여지를 제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타 당시 상황을 고 러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왜냐하면 세례는 그리스도의 신양에 대한 예비 단계였기 때문이다.

 

"요한이~~~·세례를~~~~전파하니라"  ; 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눈에 보이 논상징에 가르침이 덧붙혀질 경우에 한해서만~올바론 성례를 집행하는 것이라. 는 점을이 사실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말하자면 세례자위 입이 침 묵율 지키는것이 옳지 않온 것은, 가르침이 없는상징은무익하기 때문이다.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 바울의 중거의 두번째 부분은 요한이 그의 마지막에 가서 그리스도에게 그의 제자들을 보냈다는 점을 말 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세례라는 첫 단계를 통해서 그들을 준비시킨 나 음에 그들을 마치 손에서 손으로 넘겨 주듯, 그리스도에게 인계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은 의심하는 사람위 질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직분을 잘못 자신에 게 적용하는 있다는 점을 들어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너희 듈이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식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전 자가 머 자연스러우며 잘못을 반박하는데 있어서 무개가 머 있다. 더우기 그 의 증거가 머 믿을 만한 것온 그가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제공되는 직분을. 곧 그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던 그 직분을 거절하고 타안에게 양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말의 신빙성을 앗아갈 만한 사리추구 나 야십이 전혀 없다.

 

"오시는 이가 있으니"  ; 또는 그가 오실 것이다• 이 유대주의는 신약 곳곳에 혼하게 나오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다는 표현은 져언 적인 것으로 그는 이 말을 통해서 최대한으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그의 자신 의 위대성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말하 자면 그는 자신에게 위임된 임무를 충실하계 수행합으로써 그리스도만 홀로 뛰어 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타 해 도 자기는 결코 그리스도에게 비길 사람이 못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그들의 장점이 있겠지만 그것을 그리스도 와 비길 경우 그들온 전부 완전무(無)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리스도 만 홀로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양이 솟아오를때 그 광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모든 별들이 사라지는 것과 갈은 이치이다.

 

"26  형제들~~~~ 사칼들아~~~~"  ;  이제 남은 문제는 그들 자신의 구원 뿐이요 바울 역시 그돌에게 구원의 사신으로 오 근바르게 임명된 사람이라는사실을그 둘이 깨닫게 되자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률 그가 그들을 ‘아브타합의 후예 ' 로 H 영접할 것을 권하고 있다. 뿐 아니라 그들이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들이 一르는 것은 그들을 존경하는 뜻에서 일 라는 점 을 그들에 게 깨 닫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리고 그가 이처럼 열정적으로 그돌에게 권하는 것은 그. 려,걸도를 모셔 들여야 하는 필요성이그들에게 절실하기는 해도 그들이 그들 의 촌경하는 대제사장과서기관들과의 관계를끊는다는 것이 몹시 어렵기 때 문이다. 더우기 우리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늘 나라의 문이 비록 이방인 둡에게 열려져 있다 해도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위치를 빼앗기는 것은 아 니요 하나님의 가족 중에 맡아들로 취급되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그러 므로 ‘구원이' 그들에게 ‘보내어졌다’는 말은 그들에게 서열상 우선권이 있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신적인 계승 :::L.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으며, 술한 사람들의 불신앙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목별히 참된 하 나님 경배자들에게 그들 마음에 이 말씀을 받아듈이고 또 받아들인 이 말씀 올 귀중하계 간직하게 하는 하나님 경외가 없을 경우에는 이 말씀이 쓸모 없 게 된다는 겁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복음을 ‘구원의 말씀'으로 말 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환회에 이꿀리지 않는 사람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비록 복음의 성격이 그렇다해도, 그것은 우연하계도, 버립 받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 게 하는 향기 ”이 다(고후 2 : 16)..

 

"27절"  ;. 그는 그들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가로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을 미연 에 방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시기적절하고 현명한 처사이다. 왜냐하면 예 루살렘 으로 말하면 그곳은 하나님 의 성 소요, 왕좌요, 전리 의 근원이 요, 온 세상의 및이었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쫓겨난 사람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가르침 올 하나님께서 손수 지정해 주신 장소가 아닌 다론 곳에서 구한다는 것보다 더 모순되는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교회에 하 나의 분열이 생기는 것처립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당신은 거룩한 민 족의 지도자들이 정죄한 사람을 우리에게 강요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 을 핑계로 내세우는거요?" 하는 말은 바울의 이론을 반발하는데 있어서 강 력한 근거가 되었다. 바울온 이 장애물윤 재거함으로써 그것이 복음의 과칭 올 지연시키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뿐 아니타 그는 이것을 아예 돌려치고 있다. 곧 바울온 최소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안디옥 사람들만이라도 더욱 며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을 권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27절의 원인절은, "예루살렘은 자신의 혜택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당신들온 동일한 배은망덕과 사악이 당신듈에게서 발견되지 않도록 더욱 더 눈을 부 룹 드고 경계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옵니다" 하는 말과 같다.

   그러나 그는 이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또 다론 논리률 적용하고 있 는데 그것은, 그들의 고자세 (impietas)가 그리스도의 신성한 우월성을 조금 이라도 앗아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것을 입증하고 확립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율법과 선지자에 예언된 모든 사항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 취되었다는 사실 보다 그리스도를 더 잘 입증하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눅 24 : 25, 26)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수듈이 깨달은 것은 성 경의 뛰어 난 전리가 그에게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 무엇이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그가 손수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것온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 깨끗하계 하려는 뜻에서였으며, 우리의 죄악이 그에게 전가(轉隊)된것은 그가 우리문 위해 이 죄를 속하려는 뜻에서였으며,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 온 율법 의 상징 적 인 회 생 제 물에 종지 부룬 찍 으려 는 뜻에 서 였 다. 이 러 한 대 용 에 대한 성구를 우리는 이사야 53장 4절이하와 다니엘서 9장 26철에서 읽 울 수 있다. 그러므로 유대 민족의 지도자듈이 그리스도를 더욱 더 횡포하게 멸절하려면 할수록 사실 그들은 그가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입증한 셈이요여 호와께서는 그들의 오만불손한 불순종이 경건한 자들의 신앙을 파괴하기보 다는 그것을 확립하심으로써 그들을 좌절시키고 마셨다.

   연약하고 가날폰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리하는 모든 방해거리는 대 동소이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일의 전체 과정을 더욱 더 면밀하 게 생각해 볼 경우 그들에게 더욱 힘이 되는 근거가 많이 있지만 그들은 넘 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경솔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문제들을 건성으 로, 아니 절반쯤 눈을 감고 바라보고서는 흰 것을 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어느 것 하나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무엇이 전실인 카 하는 접을 곧 그리스도께서 알반평민들뿐 아니라 지도자들의 배척을 받 으셨다는 접과· 그가 극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온 민족의 악한 음모 때문에 둘 아가셨다는 접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처음 말문율 여는 말치고 는 격한 어조였지만 바울은 더 강력한 무기,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의지와 정반대로 이용하셔서 그의 아돌됨을 입증하셨다는 점을 재시하고 있 다.

   오늘날 복음의 상황도 이 와 비 슷하다. 따라서 우리 를 바울처 럼 세 상의 교만한 지도자들과 교회의 우두머리들이 그리스도의 치명적인 원수타는 접 울 고백하는데 있어서 부끄러워하지 말자.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결코 수치 가 아니라 그의 영광에 도움의 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이런 방법을 통해 서 성취되고 있다.

 

"관원들이~~~~을 알지 못하므로"  ; 정 작 그리 스도를 파괴 한 것 은 지 도자들의 고의적인 악의였지만 바울은·이것을 그들의 무지로못박고 있는데 이것은정 당한 일이다. 이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복음의 지혜가 이 세상 지도자·들에 게서 숨겨져 있다고 말한 것과· 갈은· 내용이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듄 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전 2 : 8). 불경 건한 자듄의 악의는광기와 같은 것으로서 보기는· 보되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서슴없이 하나님께 전쟁을 걸었다가 스스로 파멸하는 자들에게 건전한 마음 과 성령의 조명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는 그들이 또한 성경에 무식했다는 접 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가 무슨 생소한 이야기를 그렇게 하 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론율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자기가 매 안식일마다 다들 읽고 있는 바로 그 예언을 두고 말하고 있다는 접을 곧 덧 불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삼척동자라도 알수 있는뚜렷한 성경의 예언을이 지도자돌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바울은 그들의 불신앙의 부자 연성을 경고합으로써 그의 청중에게 그것을 멀리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주 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지만 모두가 그를 뵙 논 것은 아니라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후에 가서 이 백성들의 우매는 머욱 너 짙어졌으니 이것은 바울이 휘장이 그들의 눈에 가리워져 있어서 그돋이 모세를 알아 보지 못했다고 말한 그대로이다(고후 3 : 15). 그와 동시에 우 리논 우리 스스로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그래서 위대한 사람들의 권위 때문 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경고를 여기서 알고 있다는 접을명심해야겠다. 남을의 그릇된 판단에 이꿀려 편견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 '그렇지 않은 것처 럽 생각하는 것은 우둔한 짓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안디옥 사람들에게 성경을 보고 교회의 넋 나간 지도자들을 판단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성경 온 읽으라는 목적으로 주어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읽는 제 도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여기서 혜택을 입고 올바론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우셨다.

 

"응하게 하였도다"  ; 여기서 우리는 이해력이 없는 피조물 뿐 아니타 마귀와 모든 불경건한 자들까지도 하나님을 섭리 야래 있어서 그가 자신의 마음에 결정하신 점을 이들에게 시행하신다는 점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제 3장 17절이하와 4장 28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의 파멸에 전적으로 미 쳐 있 었지 만 그들온 그들의 소기 의 성 과를 성 취 한 것 이 아니 라 하나님 께서 자신의 의도에 다타 결정해 놓으셨던 일을 그들의 노력으로 성사시컸다는 말 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을 성취하실 뿐 아니라 그의 계획을무 산시키려고 발버둥치는 자들까지도 그들의 뜻에 반해서 이 계획을 달성하 는데 전력을 다한다는점에서 신령한 진리는다욱더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의 전리의 철천지 원수들까지도 ::L것을 성취하도록 강요를 받을 정도 이니 어떻게 그것이 굳굳이 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사단율 하나님 과 혼동하지 않으려 면 분별 력 이 필 요하다• 왜 냐하면 유대 인들 이 그들이 성경율 성취했다 해서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은 그 결과가 아니 라 그들의 타락한 의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견과로 말하면 사실, 그들 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 아니 기적과 같~ 행동 자체 만 놓고 본다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는 교묘하게 서로 상충되는 태양과 다론 혹성들의 진로를 조절하듯이 그는 자신의 온밀한 영향력으로 불경건한자들의 사악한 노력을 그들의 생각과의 도와 정반대 방향의 목적으로 돌려놓아 그들이 당신께서 뜻하신 것 이외의 것율 전혀 실천하지 못하계 하고 만다. 아 사람들 본인들로서는 분명히 하 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동율 하지만 그 결과는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 절차는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육신적인 지혜가 그 것을 볼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아것온 신앙의 눈으로만 파악 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것은 마땅히 경외와 홈모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려 나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잔소리를 퍼대는 개둘의 성급함 따위는 아예 무시 하도록 하자.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  그리스도께서 죽율 이유가없 는데도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야 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큰 차이문 가쳐 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가 자신의 비행 때문에 그 죽 음을 당했다면 그가 그 죽음을 봉해서 우리에게 의를 획득하게 할 수 없었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최를 속최하는 죽음의 장본인은 순진무 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빌라도가 자신의 재판관의 입장에서 그 리스도를 정최한 것이 아니타 이 민족의 과격한 요구에 압도된 나머지 그를 죽음에 내어 주는 것을 허용했을 뿐이라는 정과 유대인들이 이성이 아니라 악의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랬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음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그의 청중들이 다시는 그러한 칭그러운 최악에 공모자로 말려둘지 않게 하려면 경각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항상하는대로 누가는 당사 바울이 완벽한 연설 속에 담은 내용을 간략하게 몇 마디에 요약하고 있다.

 

"29 ~~~~~다 응하게 한 것이라"  ;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성취 되 도록 허락하신 일들을 다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성경의 예언이 하 나도 소홀한 취 급을 받지 않을 정 도로 그들이 그리 스도를 취 급했다는 말이 다. 이렇게 해서 육적인 마음이 십자가의 수치를 보고 상상하는 장애물이 재 거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원수들의 광적인 분노에 내 맡겨진 것이 아니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오태 전부터 그에게 어떠한 상황이 예정되었는가 하는 점이 성경에 분 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를 죽인 바로 그 자들이 그리스도를 매장했다는 누가의 말은 복음 이야 기와 모순되어 보이지만 누가는 매장이타는 단어를 그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을 이 동일한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해도 이것 온 대유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빌라도의 허락에 따라 매 장되었지만 한편 경비병들이 무덤에 배치된 것은제사장둘의 결정에 의한 것 이었다. 그러므로 정작 그리스도를 둘 무덤에 안치한 사람들은 요셉과 니고데모였지만 이 임무를 유대인들의 일로 돌려도 부정확하거나 모순되지 않는 것은 여기서 바울의 의도가 이 친절한 행위를 칭찬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 께서 그리스도의 원수둘이 그를 봉하고 경계를 폈던 바로 그 돌 무덤에서 .::z.. 를 꿀어내셨다는 접에서 그의 부활을 입증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은밀한 방법이나 도둑전율 동해서 옮겨진 것이 아 니라 그의 원수들이 자주 드나들며 경계를 폈지만 그 몸을 찾지 못했다는 점 올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부활의 확실성을 추론할 수 있다. 

 

"30  하나님이~~~ 저틀 살리신지라"  ;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 히 경 건한 자 들의 구원이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언제고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 러므로 바울은 이 둘째 면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바운 온 그리스도를 살리논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명백하게 되지 않을 겅 우 그의 죽음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청중들에게 확신시킬 수 없었 던 것이다.

 

"31절"  ; 바울은 그리스도께 서 그의 원수들에 게 고용된 하수인돌의 감시 를 받 고 있던 무덤에서 나오셨다는 점을 밝힌 다음에 그가 그의 제자돌에게 보이 셨으며 그들은 또 이 정을 충선하게 백성돌에게 증거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가 이들을 ‘중인’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의 칙분을 생각해서, 곧 재 1장 8절에서 언급된 대로 그들이 이 목적을 위해서 선택받았다는 겁을 생 각해서이거나 아니면 그돋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꽁공연하게 거침 없이 선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이 사건이 온 예루살렘에 알려 쳤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이런 식으로 입증하는 것이 결코 쉬 운 일일 수 없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율 꽁꽁연하게 주장하면서 또한 이 사건의 목격자라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언제고 이 사 실을 배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돌맹이 하나 뒤집어 보지 않고는 적성이 풀리지 않던 원수들의 위세가 막강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다론 반박이 당시에 사용되었더라면 기독자듈은 이것을 빠뜨리지 않았 운 것이다.

 

"32. 우리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 바울은 이재사도의 사명과 직분 으로 돌아와 자기를 하나님의 합법적인 일군으로 받아들이계 하고 있다. 그 려고 그는 하나님께서 오태 전에 약속하셨던 것이 이제 자신들의 세대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이 자신의 사신(embassy)의 본질이라는 점을지적하고 있 다. 그러나 그는 많은 중요한 문제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먼처 그는 자신이 전혀 새롭거나 율법과 선지자들과 다른 무엇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타 그들 자신의 판단과 확신에 일치하는 그대로의 사실, 곧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해 주신 가르침의 성취를 가르켜 보여 주고 있율 뿐이타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걸과 그들은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폐기하 키 건에는 그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그 논 이제 마침내 오래 전에 만들어전 약속이 전혀 허무 맹랑한 것이 아니었 다는 사실이 명백한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신실성율 칭 송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계시된 은해의·광대합율 극찬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이 조상들에게 약속 된 것을 얻었다는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그둘 당시 사람들과 조상들의 차이 겁을 관찰하지 않으연 안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더욱 더 풍성하게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들이 이 귀한 선율 깔보거나 멸시한다면 그들의 배은망너온 더욱 더 수치스럽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들에게 받 으라고 내 뻗혀준, 아니 그들의 입에 처 넣어 준 보화를, 곧 그들의 조상들 온 먼 발치서 바라보면서 동경하고 일생에 걸쳐서 소중히 간직했던 이 보화 를 발로 짓밟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율법 시대에 살고있던 자들온 또한 이 약속율 누린자들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된다. 나는, 우리들이 같은 온혜를 누린다 해서 우 리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여 기서 바울의 의미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예와 아멘이신 그리스도께서 나 타나시기 전에는 그들의 신앙은 말하자면,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고란도후서 1장 19, 20절에서 가르치고있는그대로이다. 그러 므로 우리논 하나님께서 그의 자며들에게 제공하는 동일한 하늘 나타의 상속 자요, 그 동일한 축복의 참여 자요, 하나님 께 서 는 또한 그들에 게 오늘날 우리 가 누리는 그의 사랑의 맛을 이미 보여 주셨다. 그러 나 영원한 생명과· 모든 축복의 본질이 되는 그리스도로 말하면 그둘에게는 약속되었을 뿐이지만 우 니둘에게는 실제로 허용되었으며 그들은 멀리 계시는 그를 대망하는 것으로 .J..쳤지만 우리에게는 그의 임재가 있다. 

 

"33 절"  ; 예수를 일으키사 내 생각에 여기에 나오는 ‘일으킨다'논 단어는 곧이어지는 귀철의 그것보다 더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 떤 그는그리스도께서 죽온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임명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손에 이꿀리어 공중앞에 나타나서 메시아 의 역할율 성취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들과 선지자 듈이 여호와에게 일으켜 세움을 받고 있다고 여러 성경에서 말하는 그대로 이다. a).)aq-rijqac(아나스태-사이; 일으키사)라는 동사는 종종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고픈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 에 보내심으로써 오래 전에 그의 종들에게 주신 약속을 실제적인 성취를 통 해서 계속 유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자녀들에게(그들의 자손 곧 우리듈에게)~~~~~"  ; 바울온 불림없이 거 룩한 조상들에게서 태어난 혈육의 자손들을 두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우 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뭐든지 비유적으로 해석하는광신자들온 이것을꼭 믿음의 후손들로 보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허구를 동해서,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닙이 되리타"(창 17 : 7)는 하나님의 성스런 언약 율 무의미하게 만들 뿐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것은 믿 음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정 반대로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 도 그들이 자신들의 불성실로 스스로 끊어져 나가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말하자면 가지가 본성상(本成上) 거 룩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과오로 더러워지기까지는 거룩한 뿌리에서 나온 자 듈이기 때문이다(롬 11 : 16). 그리고 바울의 의도는 확실히 유대인둘을 그 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들 온 먼처 득권을 동해서 일반적인 반열에서 구별되고 제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저 미친 사람들이 처주하는대로 육적인 후 손에게만 국한된다는 결론이 따르지 않는 것은, 비록 생명의 약속을 아브라 함의 후손들이 상속받았다 해도 자신들의 불신앙 때문에 이것을 상실하고만 사람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손 으로 취급되는 사람아 거의 없는 것온 산앙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별하시는 기준은 신앙이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지적한 선택의 이 중성 (the twofold election)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첫번 입양에는 아브라 함의 온 가문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온 민족 전체에게 공통적으로 미치는 일 반적 인 선 택 (the common election) 이 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의 계 희 에 따 타 최종져인 믿음으로 확증되어 인간의 확실한 소유가 되는 한정되고 있는  선 대 (the one which is limited) 이 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성 심되었다는 바울의 주장온 아주 타당하다. 왜냐하면, ”곧 우리 조상 아브라 합에케 맹세하신 맹세타.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도 다"(이 후반부는한굴개역 성경엔없읍;눅1:73)라고하는사가랴의 노태 처럼 이 약속은 이미 그들과 맺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민족의 가치 성이 그리스도의 온혜가 갈온 시간에 온 세상에 퍼지는 것을 가로 막을 수 없는 것은 장자가 제일가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다음 자리 는 그의 형제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옛날 백성이 상속을 받지 못하고 교회의 소유가 낯선 사람들 몫으로 비어 있게되자이방인으로부터 교 회를 모으는 새로운 기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설령 이 신앙 예 계속 머물려 있었다 해도 이방인들이 불러 모아져 이 영예를 함께 누리 게 되었을 것이다.

 

"시편 둘째 편에"  ; 헬라어 사본에서는 이 숫자에 대해서 모두 동일하지만 옛 낱 저 술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제 1 시 편 을 읽 었 다는 에 라스므스 (Erasm us)의 지적을 간과할 수없다. 그리고추측컨대 누가도 이것을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제 2시편으로 취급되고 있는 시편이 당시에는 제 1시편으 로 불리워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제 1시편이란 시편을 하나로 모온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서문 대신 덧붙인 것 같다. 그 이유로는 거기에 는처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으며 그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라는권 고밖에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 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울이 시편의 증거를 얼마나 적절하게, 그리 고 어떤 방식으로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물론 그 시편에는 다윗이 사방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어서 자기가 이 강력한 원수들에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서 자기를 왕좌 우l에 올려 놓으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이들 모두를 내 맡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 나.

  그러나 그는 참 메 시 아의 한 모형 (figure) 이 었 으므로 오직 메 시 아에 게 서 전적으로 드러날 사항들이 그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그립자로 보여지고 있나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문맥은 거기에 다윗의 왕국에만 적 용되는 단순한 감사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십오한 예언이 담 겨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다들 잘 알고 있듯이 다윗온 그의 일생에 있어서 거기에 묘사되고 있는 영광의 백분의 일도 누리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제 4장에서 더 상제하게 논의한 바 있다.

  이제 내용을 좀더 검토해 보도록하자. 왕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둔 돋’로 불리위지고 있다(시 82 : 6). 그러나 다론 왕들보다 더 다윗을 덱하고 그를 그들의 서열에서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고로 이 영광의 명칭 은 다른 사람들보다 목충하게 (t.at"' eeox~v-; 맡 엑 쏘켄 -) 그에 게 적 용되 고 있 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그런 큰 영광(honor)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왜 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는 천사돌보다 머 우월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히 1 : 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일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치 그 의 독생자로 취급하실 정도로 그를 탁월하게 구별해 주신 것은 그가 상징 (image)으로 보여 주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께 서 왕국을 다윗의 손에 세우심으로써 그를 낳으신데서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 왕국이 그의 손에 쥐어전 것은 사람의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타 하나님 께서 하늘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의 손을 내리 뻗어 그가 하나님의 뜻 에 따라 통치하고 있다는 정을 공공연하게 확증해 보이셨기 때문이다._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낳으심은 인간의 이해와 지식에 맞추어 사용되고 있는 언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다시 말해서 그가 모든 사람의 기대와는 정반 대로 놀라운 방법으로 왕좌에 울라 하늘의 영의 능력으로 술한 음모를 모두 부셔버리게 되자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 는 사실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자기 혼자로서는 마치 세계를 정복하듯 인 근 모든 국가를 굴복시키지 않고서는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물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나님 의 아듣이라는 점을 입증할 증거가 없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다. 말하자 민 아버지의 독생자에게 어울리는 그의 영광이 드러났으며(요 1 : 14) 본인 도 하나님께서 이 영예의 증인이자 번호인이라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주장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낳으셔서 그에게 일정한 목 징을 새겨 두어 그것으로 그가 자신의 참되고 분명한 형상이요 자신의 아들 로 인정받도록 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영원한 아버지에게 태어난 말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냐 이것은 비밀한 출생 (the secret generation) 이 다. 그러 나 다윗 온 이 것 이 인 간들에 게 계 시 된 것으로 여기서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태어난다 는 표현을 하나님께가 아 니라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던 것이 인간들에게 명백하게 알려지게 마음 속에 감추1어져 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잘 선택된 모형 (figure)인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람묻 눈 앞에서 성제로 낳으신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명백하게 입증되고 확 립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을 ·'영원히'로 해석하는 어거스턴의 독창성에 애력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안다. 그라나 하나님의 영이 직접 자신 의 해석자가 되셔서 그가 다윗을 통해'말씀하셨던 것을 바울의 입을 통해 선명하고 있는 판에 또 다른 의미를 고안해 낼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더 우키, 동일한 증인인 바울(롬 1 : 4)의 말을 빌리자면,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듣로부터 일어 나셨 을 때 그는 능력 가운데 서 하나님 의 아들로 드러 나셨 으므 로(was manifested) 우리는 그것이 그의 천상적인 완전성에 대한 핵심적인 중거요, 아버지께서는지기적절하게 이때 그를'드러내심으로써 제상으로 하 여금 그가 자:l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점을 알게 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세상에 들어 오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기 시 작했지 만 부활이 말하자면 완벽 한 높임 (the perfect and complete raising) 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전에는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태를 취하셨지만 (빌 2 : 7) 이때 그는 사망의 전복자와 생명의 주(主)로서 나타나셨으며 그 걷과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 독생자에게 어울리는 위엄이 전혀 부족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4 다사 썩음을 당하지 않게~~~~"  ;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죽 으셨다가 일으켜 제움을 받은 것은 영원히 살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로마서 6장 9절 10절에, "그가 더 이상 죽지 않고 사망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f강을 것은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셨기 때문이다"하 는 말씀과 같다. 만약에 그에게 파멸이나 어떠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부할이 주는二보장은 아주 무의미하고 보잘것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논 하나님의 나타에 듈어 가셨으며 거기서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그의 백성들에게 또한 영원한 지복을 부여하실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수여하신 생명의 영속성이 우리 모두에 게 확대되고 있으며 우리의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률 너희에게 주리라"  ;  이 말씀(사 55 : 3)은 그리스도의 불멸성을 입증하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사실온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다윗에게 약속된 구속올 두고 말하떤서 이것이 확고하고 지속적일 것이라는 정율 주장하고 있는 고로  여기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나타가 불멸하다 는 점을 당연히 추론할 수 있 기 때 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정 십 일겅 (the septuagint)을 따라 자비 대신에 ‘거룩한 것들'이타는 단어을 사용하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동상 ‘인자하고 온유하며 자비로운의 뜻인 (기'an) 카시도 를 ‘거룩한'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그둘은 다윗의 'ianc카 스-데 ) 를 다윗 의 거 룩한 것 듣 (따a oq,a Jaulo 1:a 1e,q1:a ; 타호시. 아 다윗 타 피스타)로 번역하지만 사실 그 선지자는 차라리 다윗에게 약속된 은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이 헬라어 사본에 익숙해 있던 당시 사람들의 무지와 연약성 때문에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륙별히 그의 증거의 핵심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하 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주시마고 말씀하시는 은해가 영원 하다면 이 아 둘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영원하며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고후 1 : 20)이라는 사실을.우리가 고수 할진대 그가 이 약속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기 전에는 이 약속이 효과적 일 수 없을 것이다. 

 

"35  ~~~~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 이 귀절은 베드로가 그의 첫설교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제 2장 27철에서 이미 실명한바있다. 독자들은그곳을참 조하시기 바란다. 여기서 나는 단지 다윗이 무덤율 표시하는데 있어서r두단 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 가겠는데 이러한 반복 온 그에게 흔히 있는일이다. 멘 처음것(?iN업; 스울-무덤, 지옥)은무엇을 갈망한다는말에서 유래된것이다. 무덤이 마치 밀없는십연처럽 모든것을있 는대로다삼켜 버린다는이야기이다. 다른하나는실제로부패 (nh입좌카트; 구멍, 썩음, 무덤)에서 유래된 것이다. 다윗의 의미는 헬라어에 이 어원에 맞 게 잘 나타나 있다.

  사실 무덤의 성격을 논한다면 죽은 시체를 믿아 둘이고 그것을 삼켜버리며 마침내 거기서 써어 없었지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오칙 그리스도께서만 이 써음을 당하지 않은 분이타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것은 비록 그의 몸이 돌무덤에 매장되었지만 부활의 날까지 그것이 마치 침 대에 그냥 뉘어져 있듯이 아무 것에도 닿지 않고 있었으며 부패가 그 권리 를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6  다윗온 당시에~~~~~섬기다가"  ; 혹 여기서 취급되고 있는 사람은 다 윗이 아닌가 하는 반론이 제기되지 않을까 해서 바울은, 곧 이어서 이것이 모든 면에 있어서 다윗에게 맞는 것이 아니타는 점을 들어 이것을 미연에 무덤에서 써어 없어쳤기 때문이다. 그 방1-l하고 있다 .

   왜냐하면 그의 몸은 다윗이 성령안에서 그분에 대해서 그리스도만의 독권인고로 터므로 이것은 그와 동시에 우리는 머리와 지체의 유사성울 주 예언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언의 확실하고 철대저인 진실성이 머 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이 티되시는 그리스도에계서만 나타났듯이 그것은 각각 지체를 통해서 순서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 따라 일어~ -}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화 갈이 번케 하시려고"(빌 3 : 21)일어 나시므로 경건한자들 광의 몸의 형체 , 도 그들의 몸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무덤 (pit)에 내려간다· 구원에 대한 소망에 따라서 다윗이 자기가 썩지 않을 그러므로 닥아 오는 사실 보다 머 나七 ° 신 생 (renewal) 것이타는 겁을 선언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에게 있어서 써음이 완전할 것으로 생각할 수없는것은신 이 마련된 자들의 몸이 써는 것七 ° 그들이 그들의 때가 되어 축복된 썩지 아니함을 덧 그려나 이것 때문에 머리와 지체 입을 것이타는 조건하에서이기 때문이다. 의 상황이 아주 다르지 않거나 우리가 멀리서 천천히 하나님의 아들을 따라 자실 다윗과 나머지 신자들이, 그들의 머리와 가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일치하게 될 것이므로, 썩지 않을 것이라는 p 처과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만이 완전히 이 써음에서 해방되고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 온 둘다 옳은 이 야기 이 다. 다윗의 ‘자신의 세대’를 또는 그의 시대의 사람들을 ‘섬겼다’는 말에 우 벌 겔 역 은 여 기 에 다르게 부정 율 붙이 며 (駐7)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헬라어 사본들도 마찬가지로 동의한다. 곧 다윗이 자신의 날에 하나님의 뜻 것이다. 설령 이것이 가능한 독법이타 하더라 올 섭겼다 하는 식으로 보는 말하자면 이 의미는 다윗이 죽 도 나는 그 반대의 견해운 취할 수밖에 없다. 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언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이므로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갔다는 것온 무의미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야기는 말하 이 예언의 결과를 덧입을 때까지, 곧· 그리 자면 다윗의 몸이 다시 일어나서 스도의 때까지 무덤에 보류되어 있는것은 굴 }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 니라는 뜻이다. 이 겁을 인정한다면 ° 1 귀절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삼아야 마땅한가를, 곧 서 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는 셈이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서 삼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류는 성스러운 고리에 풍여배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법칙을 뒤엎지 않으려거든 우리가 競자신만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후손에 대해서도 관십울 가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경건한 자들의 봉사는 사실 후손에게 도 혜택을 끼친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보다 죽어있는 다윗이 우리에게 더 많은 혜택을 끼치고 있 다논 접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바울의 의미는 단순히 신자들이 일생에 걸쳐서 그들의 이웃에게 자신둘과 자신들의 봉사를 바치되 그들의 죽 음이 그 종점인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불러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 들은 침을 벗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먼처 우리는 우리자 신의 세대에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함께 생명을 누리는 형제들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또한 우리 의 봉사의 결실이 우리 뒤에 오는 자들에게까지 미치도록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그의 종들에게 이러한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므 로 죽은 자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이 살아 있을 때나 마 찬가지로 교회를 봉사하고 있는 것으로 꾸며대는 자들의 문지각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쫓아~~~~잠들어"  ; 바운온 단순히, 다윗이 죽었다라고 말할 수 도 있었다. 그려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타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우리 가 읽고 있는 시편이 이 선지자를 통해서 성취되지 않았다는 점율 알려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한 생사의 한계선이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냐 님께로부터 마지막에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것온,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듄아가게 하지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 가타" (시 90 : 3) 라고 하신 말씀 그대 로이 다. 플라토 (Plato) 마저 , 인 간들 율 각 초소에 당분간 세워주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지 않고 그들이 이 지상 에서 떠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J....러나 바울이 다윗의 죽음을-두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그가 썩은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망각하신 것이 아니 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는 뜻에 서이다.

  여기서 신실한 자들은 이 예언이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밖에 없 다는 겁을 알수 있을 것이다. ‘자다,' 또는 ‘조상둘에게로 돌아가다’는 표현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표 헌이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38 그러므로~~~~알것은"  바움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어지는구원의 방 법울 말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능력과 기능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에게 가져 오는 축복이 무엇이며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울 기대·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누가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혜택울 한 문장에 담아 말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런 위대한 문제는 보다 심각하 고 상세하게 거론되었음에 룰림없다. "너희가 알 것은" 이라는 표현은 다만 그들의 오만 때문에 이 명백한 문제 몰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를 동해서 계시 된 하나님의 이 축복이 신실한 자들에게 숨겨지는 것은 터무니 없는 노릇이 타는 뜻이다. 말하자면 바울은 쩡쩡 울리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으므로 우 리위 신앙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확실히 소유하려면 이 소식을 듣는 것이 마 탕하다는 말이다. ‘죄 사함'이 맨 만저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서 우리를 자신 에게 화해시키기 때문이다. 이 사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알려지기를 바타 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그는 보 여 주고 있다. 말하자면 바울은한 두 사람이 아니라 안디옥에 있는~모든유 대인울 상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처 우리논 우리 모두가 최 때문에 하나님께 적대시되고 있다는 접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골. 2 : 13).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처 베푸시는 사죄에 따라 그의 온혜로 받 아 듄여 주시기 전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나타 문 밖에 잠겨 있으며 영원한 축읍에 내 팽개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풍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호의롭게 나오시는 것은 이 중보자를 떠나 서논 어떠한 속죄도, 용서도, 죄책의 면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타는 사실을 밍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온 인류가 죄 때문에 정죄 받고 있으며 거기에 짓 눌러 있나는 사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화해할 의(義)가 전무하다는 사실 오직 당신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의 죄를 면죄하실 때만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 그의 자비 가운데 남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반대로, 그리스도에게 도망가서 그의 죽음속에서 속죄를 구하지 않는 모든 인간들은 정죄 아래 놓 여 있다는 이 사실, 이 모든 사항은 우리의 신앙의 기본상식이요, 철학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39 모든 일에도"  ; 그는 이제 자기의 말이 지금까지의 가르침과 얼핏 상충되어 보일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식이 제아 무리 많았어도 이 모든 것은 사최를 얻는 수 많은 절차였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유대인들로서는 쉽게, ”이 사람 혼자서만 죄를 철페하고 우리를 하나 님께 화해시킬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까지 율법의 겨1명에 따라 지 켜온 처 수 많은 정결 예식과 제사의 의의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식 때문에 유대인들이 뒤로 물러 서는 것을 막는 뜻에서 바울을 이 모든 예식과 제사가 성취할 수 없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다는 접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이 이처럼 간략하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에 대한 .:z.둘의 신뢰를 갑자기 포기하고 그 리스도에게 올 가망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가로서는 바울이 그 당시에 질서 정연하게 가르친 내용의 본절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하는 것 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 의미는, 유대인들이 그처럼 달라 붙어있어서 몸 짝달싹 할 수 없던 이 장애물이 중보자에 의해서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사 실 의식적인 율법은 그들의 손을 붙잡고 그리스도에게 데려 가는 가정 교寸 의 역할을 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마땅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의식 온 그둘의 신앙을 지지하고 증대하는데 도움으로 주어전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늘상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더럽힘으로써 그들은 의식만 가지고 스스로의 길을 가로 막고 믿 음의 문율 잠근 가운데 그리 스도에 게 나가는 것 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제사를 통해서 의를 소유한 것으로, 그 들이 정결예식 (haptismis)을 동해서 전정한 정결을 얻은 것으로, 그듈이 이 런 외형적인 전시효과를 다 거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반겨 주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들온 본질을 내팽개쳐 버린 채 빈 껍질만 매 만지고 있었냐 물론 하나님께서는 결코 율법에 무의미한 것을 제정하신 것 이 아니다. 따라서 의식은 사최에 대한 믿을 만하고 확실한 중거였다. 말하 자면, ”죄인온 제사를 드려서 그의 불의률 제거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 짓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요(몸 10 : 4),하늘의 장막의 모형 이 듯이 (히 8 : 5) 모든 의 식 의 의 미 와 효과는 그에 게 의 존 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논 그리스도를 떠날 경우 이 모든 의식은 덧 없는 그림자에 불과 하다는 추론을 내탈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에서 의 의 원인을 제거해서 그리스도에게 둘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바울의 의도 는 이것이냐 그가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거짓된 신뢰를 제거하려 한 것 온 그들이 공연하 고자세를 취하면서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없는것으로 생 각하거나 그에게서 형식적인 행복을 찾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 였다.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십을 얻지 못하던~~~~"  ; 이 귀절은 ‘칭의’의 의미 를 구원 받고 용서 받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죄에 대해서는 다론 곳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는데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 이외의 것으로 얻어 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마 명백히 지적한 바 있다. 혹 율법에서 무슨 대비책 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것을 뒤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거기에는 전혀 효과적인 것이 없는 것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인간이 율법 안에서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것은 율 법적인 위식은· 죄책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지불해야하는 올바론 속전도 적합 한 속전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율법의 의식은 의를 가져 오는데 있어서 무력할 뿐 아니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데 있어서 적합한 보 상도 아니다.

  이 칭의와 사죄의 관계를 말하자면 후자는 전자를 얻는 수단 과 근거이다. 말하자면 바울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덕분에 용서받는다는 접을 확증하는 뜻에서 여기에 반대되는 반론을 모두 제거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그는 율법의 계사나 모든 의식이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죽음의 최책과 십판으로 부터 거처 해방된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칭의를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전가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 시는 신앙의 의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우리가 용서와 자바로운 용납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성 (habitu) 과 주입 된 의 (infused righteousness) 에 의 해 서 의 롭다는 점 울 주 장하는데 앞에 서 말한 올바른 의 미 는 이 잘못된 말을 충분히 반박하고 남음 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본문이 추잡하게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을 용납할 수없다. 본문은 분명히 우리가 ‘모든일에…의몹다 하심을 얻는' 것 으로 말하고 있으며 여기에 따라서 사죄가 우리에게 보장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정온, 의를 획득하는데 있어서 제일가는 수단으로서, 혹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고 칠 경우, 율법과 그리스도 가 비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최를 속하고하나님의 전노를달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서 여러가지 의식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율법의 모든 의식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마치 새로 쓰여전 계약서마냥, 인간을 최책으 로 옴아 매지 않는 것이 없었다(골 2 : 14).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이 오로자 그의 아들의 죽으심에 의해 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다(고후 5:21). 여기서 인간들이 고 안해 내 는 모든 속죄 행 위 (satisfactions) 는` 그리 스도에 게 서 그의 영 광을 탈 취할 뿐이타는 결론이 나온다. ”율법 안에서"(許8)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히브리 숙어에서 볼 때 "율법에 의해서"와 “그리스도에 의해서"라는 말과 같다. 모든 일에 이 귀절은· 로마 가톨릭의 불신적인 착상, 곧 제례 이전의 원죄, 와 실제로 범한 죄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무조건적으로 거저 용서되고 나머 지 죄는 속죄 행위에 의해서 대속된다는 소리를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바 울은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로부터 의룹게 된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사실 여기서 명십해야 할 접은, 율법의 의식이 유대인들에게 위탁되어 있었으러 그 결과 그것의 호응성과 사용이 교회에서 날마다 살아 있었어야 했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뀌 말하자면 계속적인 속죄 양식과 정결 의식이 공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 계 깨닫도록 하려는 뜻에서 율법의 의식이 그들에게 위임되었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의 실제와 본질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면 죄를 파멸하는 재 사로서 그의 죽음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죽음과 옛날 상징과의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점(anaolgia)도 있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우리에게 참회와 교황권 (the keys) 을 강조하는데 이 것 은 옛 날 율법 적 인 여 러 의 식 이 사실 참회 에 대한 단련이 었으며, 하늘 문율 열고 닫는 능력도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는 접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의 신앙은 그러한 보조수단을 동 해서 오직 중보자의 온해만 바라 보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허용되 고 있는 의는 단 하루나 한 순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그 결과 그의 죽옵의 제사가 날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있다는 이 왼칙적인 것으로 고수하도록 하자.

 

"믿는 자마다"  ; 바울은 인간들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을 때만 그것 웅 되득할 수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이 획득하는 것을 우 려는 무슨 공로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직 신앙으로 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말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 하지만 로마 가 롭릭에서는 이것을 온갖 오만을 부리며 극구 반대한다. 그와 동시에 로마 가 물러에서 무지해서 싫어하는 ‘믿는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믿음을 동해서 얻는 그리스도의 다른 축복도 많다. 말하 자면 그는 그의 영으로 우리를 중생시키고 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the image of God)회복시켜 주시며 우리의 엣 사람의 십자가에 못박힐 때 우려릅 재로운 생명으로 재 창조하신다. 그러나 누가가 인간들이 최 때문에 소외되었던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떻게 되돌아 갈 수 있는가 하는 한 가지만 울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는 다론 문제로 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40. 삼가라" ; . 바울은완고한사람들을 상대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 니면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이 곧았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에 징계를 섞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그들의 고집을 망치로 두들겨 순응으로 바꾸겠다는 마 음에서 하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순종하려 했더라 면 그는 룰림없이 그들을 유쾌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에게 이꿀려고 했을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이처럼 열정적으로 나오게끔 강요한 것 온그들의 무감각 내지는 고집이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온해에 대해서 겅멸적인 사람은 모든 하나님의 심판대(審判臺)로 소환받아야 하며 영원한 죽음의 무서운 십판을 선고받지 않을 수 없다 .• 삼가라’는 말에는 아직도 그듄에게 회개의 여유가 있다는 말이지만 그들이 재빨리 경계하는 일에 힘 쓰지 않을까 파서 그는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이 멀지 않다는 점을 동시에 경고하고 있다.

 

"41. 일렀으되"   ;  이 귀절은 하박국 제 1장 5절의 인용이다. 그러나 모 든 선지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는 만큼 바울은 그것이 ‘선지서들'에 기목 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하박국의 말을 굴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있다. 본문은 대강 이와 같다 : "보라, 여러 민족들 가운데 있는 너희 돌올 보고 망연자실(잡E然自失)하거라.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이 이뒤질터인데 아무도 그 말을 듣고 믿지 않을 것이다" (社9)바울이 ‘보라 멸시 사람들아'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과거에 그들의 에게 부과된 처벌이 말씀의 멸시자들에게 공동적이타는 점을 알도록 ~ 하는 조상 하러 는 뜻에서이다. 이것은 마치, "당신의 말씀에 대한 경멸을 과거에 그처럼 가혹하계 처벌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그 말씀을 마찬가지로 높이 평가 하고 계신다"하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이 선지자의 경고는 모든 세대에 나 적용되는 것으로 과거의 멸시자들이 체험한 처벌을 오늘날의 멸시자들은 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치 말라는 말이다. 그들은 성전을 자랑으로 여겼으 며, 하나님의 백성됨을 과시했으며 불신적인 오만으로 부풀어 있었으며, 모 든 경고를 배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멸시자들을 위협하셨는가 하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는 자 둘은 당신의 따끔한 손길을 맛볼것이요, 마침내 처벌을 받고 나서야 당신께 서 전지한 말씀율 하셨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체험은 바 보들의 여왕"이라는 속담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엄연한 사실이타는 점을 불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뼈저리계 깨닫게 하시며 그결과 그들은 불행 으로 수그러진 다음에야 그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선언 하는 처벌의 종류는 무엇인가? "너희들이 나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나 는 아무도 믿지 않을 본을 너희들에게 보여 주겠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 것은 세상이 깜짝 놀랄 처벌율 그들에게 내리실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처럼 가중스러운 악행도 없는 만큼 거기서 수 많온 처벌의 악행이 새끼쳐 나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 한 신앙에 종지부를 찍을 경우 우리는 그의 강력한 손길을 각오해야 한다. 이 손길온 우리의 의식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요 온 세상을 아연 실 색하계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 무서워 말문이 막히게 되는 그 러한 손길이다. 하박국은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부과된 재앙을 두고 예언했 지만 여호와께서 그의 복음 멸시에 대해서 벌하시는 처벌은 훨씬 더 가혹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무서위하며 그의 말씀을 경건한 마음으 로 받아 듈이는 습관을 가져 이러한 불상사가 전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