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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행 12:22)

1. 성경 (행 12:20 ~ 25)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0)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1)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2)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3)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4)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25)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20 절”  이것은 교회의 원수들에게 기다리는 종말이 무엇이며 얼마나 하나님께서 교만을 싫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거울을 통해 보여 주듯이 잘 보여주고 있는 훌륭한 이야기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신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벤전 5 : 5), 하나님께서는 이 헤롯을 통해 우리에게 이 점을 명백히 묘사해 주시고 있다. 사실 인간이 올바른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날뛰다 보면 하나님과 맞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기 홀로 탁월하기 위해서 모든 육신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참 번성하는 그것으로 기고만장해 하던 이 왕의 교만을 그처럼 가혹하게 처벌하신다면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우습게 날뛰는 일반 사람들에게야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더우기 우리논 다음에 전개되는 이야기률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헤롯은 교회를 그처럼 잔인하게 괴롭힌 다음에도 만사 형통이었으며 배고파 죽어가는 이웃 도시들을 자기 수중에 잡아 끌어 들여 벌벌 떨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불경건한 분노에 대한 보상과도 같아 보였다. 이것은 신실한 자들에게 심각한 유혹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요 이들은 이미 헤롯의 독재와 횡포가 승승장구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 잡혀 있는 자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달랐다. 말하자면 그가 그의 교회의 압제자를 높이 들어 울리신 것은 그를 더 세차게 내던져버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므로 그가 그처럼 뻐기던 그립자같은 행복은 마치 잡아 먹으려고 살찌우게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오늘날도 교회의 흡혈귀 같은 원수들이 행운의 날개롤 타고 날아다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서 용기룬 빼앗아 갈 아무런 이 유가 될 수 없다. 그보다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 짐의 앞잡이니라"(잠 16 : 18)라고 하는 솔로몬의 격언을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겠다.

 

“헤롯이~~~~~ 대단히 노여워 하나”   ; 누가는 복합분사 ‘뒤모마콘’ (대단히 노여워하는)을 써서 적의와 증오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헤롯은 이 두 도시를 상대로 공공연한 전쟁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가 있는 금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야금 야금 옭아내고 있었다. 데모스쎄네스(Demosthenes)의 말대로, 자유도시와 군주는 사이가 좋을 수 없다. 게다가 헤롯은 과격한 성질, 지독한 오만, 그리고 만족을 모르는 탐욕의 소유자였다. 두로와 시돈은 본래 부유한 도시요 그의 멍에 밑에 들어 오지 않았던 도시인만큼 이 두 도시는 그의 과격한 행동을 제어하는 일종의 장애물과 같았음에 틀림없다. 영광스러운 과거를 생각하고서 이 두 도시는 더욱 으시댔을 것이다. 교만이 부(富)에서 생기는 것은 혼히 있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두 도시가 교만 투성이였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사야는 그 둘 중에 하나를 바다의 여왕(the Queen of the Sea)으로 부르 며(23:8) 그곳 상인을 임금으로 그곳 무역업자들을 총독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 시돈의 교만은 재물에 기인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 다(23 : 2). 그리고 그들은 처참한 재앙을 한 두번 당한 것이 아니지만 그들 의 유리한 입지 조건은 그들의 도시를 곧 이전 상태로 회복시켜 주곤 했다.

 이 결과 그들은 아그립바를 우습게 여기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무시받던 사람이요 이름없던 사람이며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는 그의 신하들을 잔인하계 다스렸기 때문에 그의 이웃에 괴로운 존재였다.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헤롯은 두로와 시돈을 상대로 공공연한 전쟁을 해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왕국에서 식량을 수입해가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군대의 무력을 쓰지 않고도 그들의 목을 서서히 조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두 도시의 영토는 좁았으며 그곳 땅은 박토였지만 인구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고픔에 시달리계 되자 그들은 고분고분하게 평화를 청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틀림없이 여러가지 조건이 부과되었을 것이요 누가가 언급하는 볼라스도 역시 상당한 뇌물을 받아 먹고 평화 협상의 중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에라스므스는 이 귀절을 단어의 의미와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데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 누가는 두로와 시돈 백성들에게 평화가 허용 되었다는 점을 보고하고 있다. 여기에 힘입어 헤롯은 그들을 다음부터 그의 신하로 삼는 뜻에서 일장 연설을 할 기회를 잡고 있다. 동일한 설명이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 (Antiquities) 제 19권에도 나온다. 다만 틀린 정이 있다면 누가는 그를 헤롯으로 부르지만 그는 아그립바로 부르고 있다는 점 뿐이다. 추측컨대 아그립바가 그의 본명이었고 그의 사생활 기간에는 바로 이 이름밖에 없었으나 왕권을 잡고나서부터 조부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왕족의 권위를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요세푸스와 누가는 실제 사건과 기타 상세한 내용에 있어서까지 놀랍게도 동일한 말을 하고 있다. 먼저 장소에 대해서 그들은 일치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의복이 황금으로 덧입혀 있어서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부시게 했으며 이것 때문에 그의 신하들은· 그를 하나의 신으로 칭송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그에게 상처가 가해졌으며 그 뿐 아니라 재앙의 전조인 을빼미가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끈에 앉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신성모독적인 오만이 이러한 처벌을 자초했다는 점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왕이 공공연하게 , "당신들이 신으로 존경 하는 내 꼴을 보시오. 나의 비참한 맡로를 ! "하고 부르짖은 소리를 기록함으로써 그가 처참한 고통을 당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그가 이 오락을 씨이저(Caesar)의 이름으로 한 것으로 그는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대로 이러한 오락은 평화가 체결될 경우에 행해지는 습관이었다.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 호칭되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자기를 망각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자신에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신성모독에 대한 정죄를 받고 있다. 이러한 칭찬은 바벨론왕에게도 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려 했다는이유를 들어 그를 비난하고있다(사 14:13,14). 따라서 신성모독 죄는 교만한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허용 범위 이상으로 스스로를 추켜 올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마치 거인들처럼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그의 보좌에서 이끌어 내려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그돋이 신들이라는 호언 장담을 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횡령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같은 수준으로 이끌어 내린다는 것은 자산들이 신이 되고자 하며 신처럼 취급 받고자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머우기 이사야 선지자는 느부가넷살의  "내가 하늘에 올라 가겠다"(사 14 : 13)는 말을 소개함으로써 이 악의 근원을 한마디로 꼬집어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유일한 처방책은 각자가 현재 놓여진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맨 위에 있는 왕들과 남들을 지배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 역시 유한한 인간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들의 오만을 겸손하게 하나님께 종속지키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데 인간들이 오직 절반의 영광만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완전한 겸손을 요구하시는데 일부분만 그에게 드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온 인간의 지혜, 덕, 그리고 의에 대한 모든 공로를 모조리 부정하고 있으므로 이 영광의 가장 미미한 점 하나라도 자신의 것으로 횡령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신성모독자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겅온 자기를 추켜 울리는 모든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싸움을 거는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 이런 일은 우리의 파멸을 가져 올뿐이라는 점을 모두 인정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인간들이 광포한 오만으로 스스로의 파멸의 길을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말하자면 각자의 상황을 생 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손을 대지 않고 고스만히 그대로 남겨 두는 자는 백에 하나도 없다.

 

“곧 치니”   ; 천사가 베드로를 구출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종 노릇을 했듯이 여기서 이 천사는 헤롯에게 하나님의 재앙을 행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벌을 부과하는데 있어서 하늘의 천사둘을 이용하시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마귀들을 형 집행자로 임명해서 그들의 손으로 그의 심판을 수행하게 하시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선민이나 버림받은 자에게 상관없이 구별치 않고 적용된다. 사울이 사단에게 괴로움을 당한 적이 있는데(삼상16: 14) 바로 동일한 사건이 거룩한 욥에게도 일어났다(욥I : 11. 2 : 7).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을 징계하는데 사용하시는 재앙이 악한 천사들의 손에 맡겨지고 있지만(78 : 49), 교회의 안전을 보호하는 천사가 에집트의 장자들을 후려 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성경이 악령들을 하나님의 영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이 마지 못해서일망정 그의 뜻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처럼 '악'자(字)가 붙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로 보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요세푸스가 언급 하는 울대미의 상칭은 그가 하늘의 천사가 아니라 마귀라는 점을 잘 나타내 준다. 그리고 나는 이 질병의 종류에 대해서 억측을 부리고 싶지 않다. 누가의 표현올 보자면 해롯은 벌레물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병을 구데기의 감염 (lice infestation) 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그의 생명이 붙어 있을 때도 그의 몸은 썩고 있으며 악취를 풍기고 있어서 말하자면 산 송장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혹한 고통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한 인간의 광포를 말끔히 씻어 없애는데 있어서 아주 수치스러운 처벌을 선택하신 셈이다. 만약에 헤롯이 강력한 군대를 만나 쓰러져 그처럼 가련하게 되었더라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처럼 눈에 띠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왕에게 어울리는 영광스러운 처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와 같이 구더기가 들꿇고 그의 몸에서 악취가 풍기는 그려한 처벌을 통해서 그는 그의 당연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역시 하나님께 그처럼 수다하게 꺾이지 않는 교만으로 하나님께 대들었을때 왕에게 어울리는 인근왕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타 메뚜기와 뛰는 벌레들, (社4)이 하나님의 군졸이 그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말하자면 어떤 인간이 스스로 오만해잘수록 하나님은 그를 그만큼 수치스럽게 저 아래로 내동맹이치고 마신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신인 해롯이 구데기에게 먹한 바 되게 하며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신으로 존경하는 내 꼴을 보시오. 나의 비참한 이 말로를 ! '하는 고백을 실토하게 하고 있다. 우리도 감히 정도이상으로 오만을 부리지 않고 인간들의 독약과 같은 기만적인 칭찬과 아첨에 중독되지 않으려면 이 왕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무시무시한 처벌을 크게 두려워해야겠다.

 

“24 하나님의 말씀은~~~~~~~”   ; 이 독재자의 제거로 말미암아 교회는 예상밖으로 이리의 아가리에서 낚아 채내진 샘이었다. 그러므로신실한자들은 도살한 양 취급을 받지만(시 44 : 22, 롬 8 : 36) 교회는 항상 그 원수들을 능가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들의 악한 독재에 의해서 거듭거듭 짓밟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곧 되살아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누가는 헤롯이 죽은 뒤에 되어진 일을 알려 줄 뿐 아니라 이 본을 통해서 우리를 격려하려는 뜻에서 이 점을 기록하고,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 행하신 일을 만대에 걸쳐서 되풀이 하실 것이요, 복음의 최종 과정은 원수들의 모든 장애물을 타파하고 통과하는 것이요 교회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그것은 하늘의 축복을 받아 더 위대하계 된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고 있다.

 

“25  바나바와 사울이~~~~~” ;  바울과 바나바가 마쳤다는 봉사는 앞장에서 언급된 구제와 연관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아가보 선지자의 기근 예언에 따라 안디옥 교회 형제들이 예루살렘의 궁핍한 교회를 돕기 위해 돈을 모아서 바나바와 바울편에 보냈던 것이다. 이제 누가는 이들이 안디옥에 돌아 왔다는 점을 기록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 마가라는 명칭을 가전 요한이 동반자로 다녀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어머니는 앞에서 크게 칭찬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뒤에서 생각하겠지만 그는 후에 그 둘 사이에 심각하고 해를 끼치는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