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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11:26)

1. 성경 (행 11:19 ~ 31)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9)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0)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1)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2)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3)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4)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5)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6)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7)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8)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29)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3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9 흩어진 자들이" ; 누가는 이전 문맥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 다시 맡 해서 그는 스데반의 죽음과 더불어 불경건한 자들의 잔학성이 확대되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겁에 질름 나머지 사방으로 뿔뿔이 훈어쳤다는 점을 앞에 서 언급한 바 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사도들 분이었 다. 교회가 당시 이처럼 갈기 감기 찢어졌으며 자신들의 공포심이나 바깥 사람들의 모욕에 못이겨 도망자들에게 침묵이 강요되고 있던 당지였지만 누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다음 사건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말하자런 씨앗을 뿌리면 열매가 맺히듯이 그들의 도주와 분산의 컬과는 과거에 한 도 시의 성벽 속에 국한되어 있던 복음이 머나먼 치역에까지 널리 전파된 것이 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은 산을 넘고 바다률 건너 세상 구 석 구석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처럼, ‘‘파멸이 넘쳐 흘러 의가 된 것이다" (사 10:22). 무수한 숫자의 신자들이 예루살렘 으로부터 쫓겨나지 않았던돌 구브로와~베니게가 그리스도에 대한-이야기풍 듈을 리 없었으며 그 보다 더 멀리있는 이태리와 스페인이 무슨 소식을 들었 울 리 없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박살이 난 지체를 동해서 더 많온 몸이 대 어나게금 착용하셨다. 소수의 도망자들이 복음을 가져가지 않았던둘 로마와 보디올(puteoli)에 교회가 어떻게 생겼겠는가? 그러나 여호와께서 당시에 사단의 노력을 기적적으로 막아 내셨듯이 오늘날 우리는 그가 십자가와 박해로부터 자신에게 승리를 확보하실 것을, 그 결과 교회가 그 분산을 통해서 더 성장하계 될 것을 의심치 말아야겠다. 베니게(phoenicia)는 수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나라요 안디옥은 시실 리 쪽에 위치한 수리아의 가장 유명한 도시이다.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이방인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박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듣의 어리석은 종교적 옹고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 그듣온 자너의 따운 개에게 던지는 것을 못마땅해 한 것이다. 그러나 사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에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타는 건반적인 명령을 내리셨다.

 

"20절"  누가는 마침내 그들 가운데 이 보화를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하는사 람들이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멜라인들' (Greeks)을 누가는 헬라 사람들 (''EAArJvcS; 헬 레 -네 스) 이 아니라 헬라주의자들 ('Ellr;veO' 1ras-; 헬레-니 스타이 ; 往2)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후손이었지만 그리스에 살고 있던 자들이라는 견해롤 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게 보려면 그가 앞에서 (19절)언급하는 유대인들도 그숫자 속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 가운데는 구브로(Cypru.s)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구브로를 그리스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는 그가 다음 문장(20철)에서 헬라주의자('Ellr;veu굽as-)로 부르는 자들을 이 둘과 구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씀이 처음에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었다고 말해 놓고 후에, 마치 이 말을 정정하는 것처럼,· 본도를 떠나 구브로와 베니게 (phoenicia)에서 유랑민으로 살고 있는 자들을 지목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그의 의미는 헬라인들이 그들의 일부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연한 대조를 파악할 때 우리는 그 단어를 이방인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누가의 의미는 소수의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더욱 더 자유롭게 전파한 것은 이방인의 부름 사건이 그들에게 미지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접어 두더라도 그들 모두의 인내가 큰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것은· 그들은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온 사람들인데도 위험한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도록 허용되는 의의와 범위를 알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나머지 생에 걸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도록 하는데 있다. 혹 도착한지 얼마 안되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의 의심을 받고 있으며,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방문객들이 어떻게 그런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 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확신의 근원이 하나님의 비상한 감화력에 의해서 조성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기회가 자기들에게 주어지자마자 당장 자기들의 마음을 결정한 것으로 대답하겠다.  이러한 결정은 혈육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21. 주의 손이~~~~~" ; 이어지는 성공적인 결과를 통해서 누가는 구브로와 구레네에서은 형제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제시한 것은 무모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수고가 유익했으며 풍성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하나님의 명령과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생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부름받은 사건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는 귀절이 다음에 이어지고 있다. 모두 아는 대로 '손'이란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누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직접 도와주심으로써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온혜를 누리도록 부름받은 것은 자신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울 증거해 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 축복은 그들 모두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그런데 이 귀절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무슨 일에 무슨 노력을 쏟든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그들의 노력을 축복해 주시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며 허사가 되고 만다는 점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듯이 심고 물주는 것은 우리의 일이지만 자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요(고전 3 : 6), 그의 손에 인간의 마음이 달려 있으며 그의 뜻에 따라 그것을 움직이고 다스리실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위태롭게 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자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으며 그의 ‘손'으로, 곧 성령의 은밀한 감화로 그들의 가 르침이 효과를 가져오게 하셨다는 이 귀절의 말씀을 명심하도록하자. 따라서 사역자는 자신의 능력이나 근면성을 믿고 무슨 일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의 은혜로 성과를 가져오시는 하나님께 각자의 일을 위임하도록 하자.

한편 가르침이 결과를 낳음에 따라 믿게 된 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하나님의 덕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 오더라"고 하는 누가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여기서 믿음의 능력과 성격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냉담하고 쓸모없는 지식이 아니라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자들을 그의 주권 밑에 복권시키며 그들을 그의 의에 동여매는 그 러한 것이었다.

 

"22 소문을 듣고~~~~~" ; 만약에 이 보고가 베드로의 변명 이전에 들어왔더라면 비록 하나님께서 이 훌륭한 사람들의 사역을 그의 영의 은혜로 날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한 상징을 통해서 더 이상 어느 민족이든 속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점을 입증해 보이셨기 때문에 이러한 미신은 이제 그들의 마음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이 방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해서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서 그것이 무모하다는 말을 더 이 상하지 않고 있다.  반대로 그들은 도움을 보내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한 인준을 선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 라 바나바의 파송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그 당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모든 가르침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 곳에 교회를 형성하고 곳곳에서 모든 신자들이 순결하고 거룩한 신앙으로 만장일치를 이루게 하며 어느정도의 신자들이 모이는 곳에서마다 사역자와 목사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었다‘ 사단의 간계는 다들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이 사단은· 복음의 문이 열려지는 것을 보는 순간 온 수단을 강구해서 순수한 것을 더럽히려 하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곧장 무수한 이단이 확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개교회가 받은 은사가 뛰어나면 뛰어 날수록 그 만큼 그 교회는 더욱 큰 관심을 가짐으로서 사단이 무지하거나 아직 올바론 신앙에 충분한 기반을 닦지 못한자들을 선동하거나 그들을 혼란 속에 내던지지 않도록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곡식이 가장 상처를 받기 쉬운 시기는 초기 단계이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바나바가 파송된 것은· 신앙의 기초를 더 닦고 일의 질서를· 어느 정도 바로 잡아주며 미 완성인 교회에 어 느정도 형태를 갖추게 함으로써 교회가 올바론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누가의 이 말은 먼저 그들이 받은 것이 순수한 복음이었다는 점, 둘째 바나바가 그리스도의 영광 이외에 전혀 다론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으며 그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했다는 누가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둘이 올바론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기쁨’은 진실한 경건에 대한 틀림없는 증거이다. 야심이란 언제나 시기와 악의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을 헐뜯음으로써 자신을 추겨 세우려 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에 더욱 더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결국에 누구를 불러 쓰시든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들은 바나바의 본을 따르는 가운데 복음의 성과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인간들이 각자의 노력을 함께 모으는 가운데 거기서 무슨 성과가 나오는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인정하게 될 때 각자는 서로를 시기하거나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하는 일이 없이 한 마음 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또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개별적인 인간들의 칭찬거리를 열거할 수도 있었지만 그 교회 안에 있던 모든 장점을 ‘은혜'라는 한 마디로 묶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나바의 권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바나바는 그들이 받아들인 가르침을 맨 먼저 인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이 흐지부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계속적인 권면을 통해 신자들의 마음에 그것을 철저하계 새겨 두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한편으로 우리는 수 없이 많고 강력한 원수들을 상대로 계속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매끄러운 것이라서 각자가 자신의 방어에 철저한 신중을 기하지 않을 경우 이 전쟁온 당장 패배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부지기수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이탈함으로써 이것이 너무도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을 날마다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인내의 비결을 ‘마음 의 뜻을'모아 계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란 마음에 바탕을 둘 때만이 그 뿌리가 튼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뜻과 선한 의지의 의미롤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이 옆에 하나도 없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 바나바에 대한 이 칭찬은 분명히 성령의 발연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그 사람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발설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겠다. 말하자면 타인의 수고를 시기하며 그들의 성공을 보고 당황해하는 자들 모두의 악의와 악질성이 여기서 정죄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누가는 바나바를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말 하고 나서 이 선함의 구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나바는 육신의 욕망을 뿌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해 경 건을 개발하는데 힘쓴 사람이었다. 그러나 왜 누가는 믿음은 성령의 은사 인데 이것을 성령과 구별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믿음 자체가 전혀 다론 무엇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했다는 사실을 특별한 예를 통해서 보여 주려는 뜻에서 그렇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이미 믿는 자의 숫자가 풍성했지만 누가는 그 숫자가 바나바가 온 이후로 더 불어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서로 한 마음으로 돕고 타인이 시작한 일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교회의 건축(the .building ·of the Church)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25절"  ; 바나바의 소박성이 두번씩이나 칭찬되고 있는 것은 그가 안디옥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었지만 바울이 자기부다 낫다는 점을 알고 길리기아에 가서 그를 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망각한 채 오직 그리스도께서 윗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일과 교회의 중대에 온 마음을 쏟으며 복음의 번영과 성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바울이 와서 자신의 것을 모두 빼앗아 간다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26절"  ; 누가는 이러한 경건한 협력에 하나님의 축복이 따르고 있다는 점올 기록하고 있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룩한 명칭이 그곳에서 유래되어 온 세상에 퍼지계 된 것은 결코 평범한 영예에서 그치고 말 일이 아니라, 사도들이 비록 에루살렘에서 그처럼 오래 가르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있는 교회가 이 뛰어난 그의 아들의 명칭을 받을 자격이 있는것으로 생각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이 이 명칭을 받게 된 것은 많은 숫자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안디옥에서 한몸을 이루었거나,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허용되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용기가 그들에게 있었거나 세가지 이유 중에서 하나일것이다.  물론 예루살램과 사마리아에 이전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예루살램은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흘러 나온 실제적인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의 실제 모습이 공공연하계 호칭되기 시작함으로써 이 명칭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데 공헌하게 된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이 전체 종교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위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디옥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깃발처럼 휘날리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모시고 살며 그의 명칭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안디옥 시에 큰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로마에 그처럼 뽐낼 만한 구실이 있다 하더라도 교황과 그의 하수 인들의 오만불손한 허풍을 누가 참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로마가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우두머리라고 호동을 칠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모든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자화자찬하는 그들이지만 속속들이 파보면 완전히 텅비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안디옥시 자체는 한 곳의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점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설령 우리가 로마 교황청의 ‘우리는 과거 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는 (fuimus aliquando; 駐3)그럴듯한 주장을 인정 한다 하자. 그러나 그들온 그들에게 안디옥 도시 에 있던 것이 절반이라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유래되었다 해서 그 도시가 오늘날 더 나온 점이 하나라도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그 도시는 하나님의 무시 무시한 처벌을 보여주는 깨끗한 거울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오늘날 흉칙한 페허 밖에 더 볼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막강한 손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것을 배위야 하며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칠 정도로 면허장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27절"  ;. 안디옥 교인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교회의 궁핍율 덜어 주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정성껏 사용했으며 그것도 아무런 청탁이 없이 그랬다는 사실온 안디옥 교회의 신앙에 대한 칭찬이다. 형제들에 대한 그들의 그처럼 간절한 관심은 그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모두의 머리로 경외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유명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그곳에 찾아 왔다는 말로서 누가는 안디옥 교회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4)에서 알 수 있듯이 신약에 나오는 ‘선지자'라는 단어는 여러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 귀절에 나오는 선지자라는 사람들도 후에 똑같은 명칭으로 나오는 빌립의 네 딸과 마찬가지로(행 21 : 9)앞을 내다 보는 온사를 부여받은 사람들이었다.  장차 일에 대한 예언이 여기서는 아가보 한 사람에게만 있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 온사가 어느 정도 그들 각자에게 허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28 성령으로 말하되"  ; 누가는 하나님의 영이 이 예언의 원천이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것이 별이나 기타 자연의 징조를 보고 추측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가보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추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영감에 따라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 하신 사항을 공포한 것이다. 물론 별의 위치를 보고 기근을 점칠 수 있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언에 확실성이 없는 것은 더러는 모순된 배열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별을 보고 추론할 수 있는 이상의 수준의 자기 뜻에 따라 지상 생활을 지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하시는 것은 별을 보고 그릇 판단하는 일을 버리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예언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 가는 경우가 있다 해도 성령의 예언은 이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근에 대한 예언은 아주 절망적인 것이요 바람직하지 않온 것처림 보인다. 아직 때가 되기도 전에 흉칙한 사건울 예언함으로써 백성들을 비참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죄악에 대한 응당한 보응의 위협이 있을 경우 인간들이 사전에 그것에 대한 경고를 받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유익하다고 대답하겠다· 그 밖에 다론 이유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들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릴 기회를 허용함으 로써 그의 전노를 자초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하도록 하며, 둘째, 신실한 자들에게 사전에 경고를 주어 그들이 인내하는 자세를 갖추게 하며, 셋째, 불경건한 자들의 악의가 꺾이며, 네째, 악한 자와 마찬가지로 선한자들 역시 재앙과 불행은 우연히 닥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에 보복하실 때 내리는 처벌이라는 점을 알게 하며,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기고만장해 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무감각증에서 일어나도록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예언의 가치는 문맥에 여실히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안디옥 교인돌로 하여금 그들의 궁핍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자극하는 데 있었다.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 수에토니우스(Suetonius)도 이 기근을 언급하면서 (許5)공공연한 장소에서 굴라우디오의 머리에 빵조각이 날라 들어왔으며 그는 돌에 맞아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때문에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식량 공급에 지대한 관십을 가쳤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의 ‘고대사’ 〈Antiquities〉제15권에서 유대지 방에 심한 기근이 든것은 계속적인 가뭄 때문이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29절" ;.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불행을 당하기는 모두 마찬가지 였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제쳐두고 한 곳의 사람에게만 도움을 베풀었을까?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첫째, 유대나라는 무수한 전쟁과 기타 여러가지 재앙을 통해서 고갈될 대로 고갈되어 있었으므로 안디옥 사람들은 그곳 형제들의 불행에 더 아픔을 느꼈다.  둘째, 그곳에 있는`원수들이 그들에게 더욱 더 가혹하게 공격을 펴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은 날로 어렵게 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인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특별히 유대인들이 궁핍하게 되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나머지 모든 교회가 진지한 관심율 표했 으며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고있다(注6)-그러나 안디옥 사람돌은 그돌에게 복음을 전해 준 형제돌이 자기들의 노력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돌의 감사하는 마음은 크계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사실 영적인 씨앗을 뿌린 자들이 물질적 축복을 수확으로 거두는 것보다 더 공정한 것도 없다. 각자는 자신의 공급에 급급하기 마련이므로 이런 경우 그들 각자는 "왜 내가 나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라고 하는 질문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온 그들이 형제들에게 신세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서 그러한 무절제한 불안을 물리치고 그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안디옥 교인들은 궁핍한 형제들에게 사랑의 의무를 수행했을 뿐 아니라 복음의 본원지에 영예를 돌림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대해 가지는 큰 가치성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이 구호에는 두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각각 그 힘대로" ; 여기서 우리는 안디옥 교회가 바울의 규정율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후 8 : 3). 물론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 그들이 그의 지시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한가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온 그가 두 곳에서 다 철처하게 가르쳤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각자가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자세히 살피고, 마치 결산 보고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제들과 친절하게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가난한 사람도 후한 마음으로 주게되며 조그만 선물이라도 풍요하고 호화로운 희생으로 보일 것이다.

‘작정 하고’ 라는 단어 를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부조가 자발적이었다는 뜻이다. 바울이 가르치고 있듯이 우리는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자들에게 우리의 손을 뻗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9 : 7). 누가는 각 개인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일정한 법칙을 부과하거나 자기들의 고집으로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각 개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내야할 것을 결정 했다는 뜻이다. 우리 는 또한 '디 아코니 아' (부조 또는 봉사)라는 단어에서 부자들에게 더 많은 재물이 허락된 것온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 임하신 청지기 직분에 따라서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봉사자가 되도록 하는 조건 밑에서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이 축복이 모든 백성들이 아니라 믿음의 권속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보내진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 불신자들은 항상 우리의 친철과 자비에서 예외여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온 인류에게 미치는 것 이 당연하다. 이것은 단지 하냐님께서 우리에게 보다 밀접하고 거룩한 띠로 묶어 주시는 자들에게 우선권을 두기 때문에 그렇다.

 

"30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여기서는 두가지 사항을 주목할 필 요가 있다. 먼저 안디옥 교회는 그들의 의연금을 가지고 가는데 있어서 신임할 만 하며 정직성이 입증된 자들을 선발했으며, 둘째 그들은 그것을 현명하계 분배할 ‘장로들’에게 보냈다. 만약 구호품이 오합지졸의 군종에게 내맡겨진다면 그래서 개인이 마치 거저 주워 담을 수 있는 노략물과 같이 된다면 가창 힘센 자들에 궁핍한 자는 밀리게 될 것이다. 아니 힘센 자들의 탐욕은 다 죽어가는 자들의 목을 자르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성과 신뢰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사람 선발과 전체 운영면에도 일정한 질서와 분별력이 요구된다는 이 귀절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자. ‘장로들'은 교회의 통치를 맡은 자들에 대한 명칭이요 사도들의 지위는 이들보다 앞섰다. 안디옥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은 돈을 그들의 판단을 보고 맡기고 있다. 그러나 혹 사도들이 그들은 동시에 식탁 봉사와 가르치는 수고를 다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 임무를 집사들에게 맡기지 않았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물론 집사들이 식탁 업무를 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장로들 밀에 있었으며 그들의 권위를 무시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