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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 10:45)

1. 성경 (행10:34 ~ 48)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4)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5)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6)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7)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8)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39)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0)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1)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2)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3)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45)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6)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7)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4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 이미 지적한 대로 성경온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연설이 다음에 이어질 경우 이런 표현법을 자주 사용한다. 마태복음 제 5 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셨을 때  ‘‘그의 입을 열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는 그것을, ‘‘말씀하실 내용을 이미 숙고하신 다음에 말을 꺼내기 시작하셨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참으로 ~~~~ 깨달았도다"  ; '카탈람바네 스다이' 는 여러가지 이유, 징조, 그리고 추론을 동해서 이해하거나 추측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며 그를 복음의 빛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시며 그를 위해 특별히 천사를 임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베드로는 경건하고 홈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각자의 외모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말하자면 그가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온해가 남들에게 미친다는 문제를 조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은 그는 유대인들만 모든 민족들 가운데 선택받은 사람이기에 그들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단지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경건과 홈없는 생활이 배척을 받고 정죄받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우매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하게 할례받지 않은 자들온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으며 속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가 무할례자의 겅우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순수한 예배와 거룩한 생활을 무시하시는 것으로 터무니 없는 잘못을 범하게 된 것은 무할례 한가지 때문에 유대인들은 나머지 모든 덕을 불미스러운 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올바른 판단을 막는 편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경계를 펴야 마땅한가를 강조하는 좋은 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 (perso::i) 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단어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예계는 우열이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펠라기우스(Pelagius)는 하나님은 사람을 구별하는 법이 없으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거나 버림을 받는 일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오래전에 내세웠다. 그러나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들 말하는 외형적인 상태나 외모, 곧 인간사회에서 한사람으로 하여금 평판을 받게 하기도하고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기도 하는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재물, 고귀한 가문, 종자(從者)들, 그리고 명예는 사람을 고귀 하게 만듣지만 빈곤, 천한 가문, 기타 등등은 그를 업신여기게 만든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바탕에 입각해서 사람을 취급하는 것을 줄곧 금하고 있는데 그것은 외적인 것은 심판관으로 하여금 소송 자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수가 많듯이, 그러한 곳에 올바론 판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귀절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인류를 두고 하는 말로서 그 의미는 무할례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방사람의 의를 보고 기뻐 하시지 않거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사람의 외모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방인들은 제쳐 두고 유대인들만 그의 선민으로 선택하신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나는 이 구별에 대한 이유를 사람들에게서 찾아서는 안되며 그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에 의존하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인둘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신에게 입양하시고 그와 자신의 언약을 맺으셨을 때 그는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외적 사례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전적인 이유는 그의 놀라운 목적에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들에게 매이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할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으며 그 결과 이 성결의 상징을 가진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셨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 난제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할례와 하나님의 은해를 비교할 때 할례는 은혜의 상징이었으므로 할례가 은혜보다 뒤에 오는 것이요 할례가 결코 은혜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리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라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실 경우에는 그 무할례가 그들을 동일한 구원에 참여 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사실온 그들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 거저 유인들에게 입양될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서로를 구별하는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서는 구별없이 온 세상을 기꺼이 받아 들이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특별한 국면이 아닐 수 없다(엡 2 : 14).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각 나라 중' 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거룩한 유산으로 남아있는 동안은 이방인들은 그의 나라에서 완전히 유배된 것처럼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의 빛’으로 계시되셨을 때 영생의 언약은 모두가 동일한 조건으로 누릴 수 있는 공동의 것이 되었다.

 

"35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히는사람은 ~~~"  ; 전체 생활의 완전성이 이 두 설명적인 귀절에 요약되고 있다. '하나님 경외'란 바로 경건과 신양을 의미하며 ·의'란 인간들이 어느 누구건 해치려 하지 않고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려할 때 인간사회에서 시행되는 공정한 행동이다. 선한 생활의 규범인 하나님의 율법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어느 누구든 자기의 모든 행동을 그것과 상관시키며 그것의 지배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전체 생활이 하나님 경외에 기초를 두지 않을 경우 모든 봉사 활동온 순수성을 결여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얼핏 구원의 원인을 행위의 공로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행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준다면 그와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에 의존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확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신앙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점을 입증한답시고 ‘의' (義)라는 단어를 물고 늘어진다· 그러나 이 후자는 너무도 시시한 소리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이 단어는 율법의 전반적이요 완전한 준수에 대한 대명사로 여기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은 둘째 돌판과 사랑의 봉사에 국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인정을 받게하는 전반적인 의 (義)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몫을 받는 때 인간 사회에서 적용되는 정직과 성실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남은 질문은, 행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줄 수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데 있어서 두가지 면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사랑을 줄 만한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의 온 본성온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증오를 촉발하기 때문이다(엡2 : 3).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화해되기 전에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원수라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다(롬 5 : 6, 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헤 속으로 받아 들이는 사건은 어디까지나 무상적(無償的)이다.  인간의 행위가 온갖 잘못과 사악으로 가득하며 본래의 모습을 즐기는 한 행위에 대한 어떠한 어유도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로 입양해 주시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을 또한 자신의 영으로 중생시켜 주시며 그들 속에 자신의 형상을 재 창조시켜 주신다. 여기서 두번째 사항 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인간만을, 곧 모든 은혜가 텅비어 있고, 결핍되어 있는 자를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낱낱의 인간에게서 자신의 행위 (work)를 아니 자신을 발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을 가납(嘉納 ; accepted)한 존재로 여겨 주시는 것은 그들이 경건하고 의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자들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는 데 곧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예상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는 사실 미움밖에 받을 자격이 없으므로, 그는 먼처 은혜에서 오는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의 행위는 참작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야기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타고난 성품 그대로 내버려 둘 경우 그는 증오의 원인 이외에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는 만큼 그로서는 은혜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원인은 자신에게만 있으며 그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자신의 자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에 주목할 점은 신자들이 중생 이후에 선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계 해드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행위를 어여삐 보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행위의 공로 때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용서가 전혀 따르지 않고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계 해드릴 정도로 철두철미 순결한 행위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행위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완전이 뒤섞이기 마련이므로 배척을 받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행위 자체의 전가가 아니라 행위에 부족한 점을 그리스도에게서 빌려 오는 신앙이다.

 

"36 보내신 말씀~~~~~" ;(証11)에 관하여 : (conceringt thg t11ing), 헬라어 사본에는 문장이 끊겨져 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대격 (accusative) 을 주격 (nominative) 대신에 삽입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의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셨던 말씀이다" 라고 하는 식이 된다.  또 이것을 뒤에 나오는 ‘…너희도 알거니와'와 연결시키며 전환 문장 때문에 다론 단어가 덧붙여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즉 누가는 처음에는 로곤 (,<6ro)); 말씀)을, 다음에는 레마 ( 'p~µa; 그것 ) 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전치사를 보충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인 만큼 내가 제시한 의미가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문장의 조잡성에 대해서는 더 잘 다듬어질 여지가 있다는 점을 나는 솔직히 인정한다.

나는 그러므로, 서론식으로 얘기하자면, 이 귀절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를 선포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시행하신 그의 놀라운 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후에 설명이 나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그의 연설을 마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되셨던 목적을 보여 주고 있다.

더우기 그는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셨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는 ‘말씀' 이 ‘것 ' (thing) 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상대로 체결하신 영원한 언약에 대한 명성온 당시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한 구속주가 약속되어 오고 있으며 그가 오셔서 다 쓰러진 것들을 번영하고 복된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보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더 익히 알려진 것도 없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사람들 역시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신의 말의 신빙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그가 무슨 생소하고 신기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의존했으며 이제는 결코 모호하지 않은 방법으로 계시되었으며 모든 사람의 입에서 공공연하게 전파되고 있는 교회의 ' ·~회복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라는 말을 먼처 꺼내고 있다. ~-...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 여기서 베드로는 당시에 퍼져 있던 소문과 사실이 확실한 평화였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이 ‘화평'이라는 말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로 본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완전하고 전적인 구원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우리의 이별과 소외로부터는 처참한 혼란, 아니 무시 무시 한 ‘카오스' (hideous chaos) 가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비쳐오자마자 그는 그의 교회를 분산된 상태에서 모아 주시며 전정한 행복이 다시 솟아 나게 된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의미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는자신의 백성에계 은혜로운모습을 드러내셨으 며 그가 당분간 거절해 오셨던 것으로 보였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다시 한번 껴안아 주셔서 그들에게 번창하고 왕성한 상태롤 확립하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이 평화의 근원으로 삼듯이 그리스도를 그 평화의 보증으로 공개함으로써 그것이 신성불가침의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가 ‘평화'와 ‘전파하다’라는 말을 일부러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획득된 화해의 열매가 곧장 우리에게 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시다"라는 말을 한 다음에 곧 이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가까이 있는 자들과 멀리 있는 자들에게 평화룔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엡 2 : 14, 17) .

 

"37 요한이 그 세례률 반포한 후에~~~~" ;  이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누가는 ‘세례'라는 말 속에 요한의 전체 사역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그것이 결코 무의미하고 가르침이 결여된 상징이 아니라는 점을 경고해 주고 있다. 모든 성례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그 속에 세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 빛을 발하고. 그 음성이 또렷또렷하게 울려 퍼지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말씀(preaching)을 묻어 버리고 성례를 단지 마술적인 중얼거림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들의 이 불신앙적인 모독 행위를 더욱 더 혐오하는 것이다. ’

 

"너희도 알거니와"  ;· 이 베드로의 말온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먼저 그는 과거 사건에 대한 내용을 반복하고 나서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의 기초이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으로 제공되는 유일한 길은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의 육신을 입고 인간 사회에 사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한 중거를 통해서보여 주셨으며 마침내 한나님의 능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였다는사실을 우리가 아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 건이 제 구실을 못하고 그것에 대한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그와 동시에 그가 왜 하늘의 영광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으며 왜 그가 인간보기에 그처럼 흉칙하고 하나님의 입으로 저주를 받온 그런 죽음을 십자가에서 당하셨는가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부활의 이유에 대해서도 배우지 않으떤 안되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부터 모든이 축복의 결과와 열매가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신 것은 잃어졌던 우리에게 완전한 복된 상태를 회복시켜 주시기 것은 그가 이런 방법으로 아버지에게 왕과 제자장으로 성별되었기 때문이다.  그결과 그는 우리의 육신을 입고서 우리에 대한 그의 형제애를 보여 주셨으며 우리의 연약성을 손수 담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서 이 연약성의 짐을 제거해 주셨으며 아버지로 하여금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의 회생적인 죽음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구속을 이루셨으며 죽음으로부터 승리자로 나타나시면서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셨으며, 자신이 하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그 문을 활짝 열어 제치셨으며 성령의 모든 능력이 그에게 부어짐으로 그가 그의 풍성한 데서 우리를 풍요 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베드로는 복음의 주제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순서에 입각해서 가르치고 있다.  물론 그는 후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내려 오심,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그는 나사렛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 뒤에 나오셨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한이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임명된 사람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면이 생략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특출한 선지자 취급을 받았으며 그러므로 그의 권위는 특별히 무식하고 배움이 없는 젊은 백성들 사이에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38. 나사렛 예수"  ; 여기서 그가 그리스도에게 나사렛'이라는 수식어를 쓰는 것은 그가 거기서 대어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그의 일을 실천하기 시작하셨으며 이 이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을 하면서 환치법 (hypallage)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뛰어났던 능력이 바로 이 성령을 그 원천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주실 때 그는 그의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그를 무장 시켜 주셨다. 곧 이어서 베드로는 이 능력이 기적을 동해서 -물론 그는 오직 한가지 종류만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다.  사실 그분에게서 나타나야 마땅한 것은 공포를 자아내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유쾌한 맛을 통해서 세상을 이끌어 들여 그를 사랑하고 그를 갈망하게 하는 그러한 능력이어야 했다.

 

"기름 붓듯"  ; 에 대한 은유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사용되는 것으로서 다 듈 충분히 알고있는그대로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에계 적용되고 있는 우리가 아는대로 율법시대에 있어서 기름은 성별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스도께서 ‘두루 다니셨다'는 표현은 그의 소명의 전 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가 미리 예정된 기간에 해당하는 그의 임무를 다 수행하셨다는 이야기나 같다. 이 비유는 목적지에 이르기 까지 여행 길 율 계속하는 여행자들에게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이야기 에는 그리스도께서 3년 동안 온 유대를 다 여행하셨으며 그 결과 어느 한 구 서도 그의 덕행의 범위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다.

 

"마귀에게 눌란~~~~ 자" ;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이 일상적인 질병 (disease)을 치 료하실 뿐 아니타 절망적인 질병 (ills)까지 치료책을 강구하셨다는 점은 하 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더 명백하계 보여 주었다. 모든 질병은 사실 하나님께서 듣고 우리를 단련하시는 수많은 회초 리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로서의 다정함 때문에 우리를 더 가볍게 대하 실 경우 우리는 그가 그의 손으로 우리를 때리셨다는 말을 하고 반대로 더 심한 매질율 하실 경우에는 그가 자신의 전노의 일군, 아닌 집행자로 사단 율 사용하신다는 말을 한다. 이것을 잘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단순한 열 이 있거나 그와 비슷한 혼한 병을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마귀의 고문을 받프느싶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의 상실, 광기, 기타 비 정상적인 질병은 사단에게 돌리는 것이 타당한 것 들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미쳐 날뛰는 나머지 도처히 제어할 수 없으며 거의 야수나 다름 없이 되어 버린 자들을 가리켜 마귀들린 자듈(demoniacs)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 제시된 이 능력돋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을, 곧 하나님의 임재를 보는 사람들 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점을 간략하계 시사 하고 있다. 이미 여러번 지적된 바 있으며 후에도 이야기 되겠지만 이것이 사실 기적의 전정한가치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표적 윤 주어 구별하시는 자들을 우리가 우러러 보고 존겅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 의 위엄이 감소된다는 이 원칙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점을 그의 능력이 여실히 증거하고 있 는 접을 볼 때 그의 권위를 인간적인 판단의 우연한 결정에 내 맡긴다는 것 온 불가능한 일이다. 

 

"39 우리는 ~~~중인이라"  ; 베드로는 그들이 자신의 주장을 믿도록 하는 뜻 에서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타는 점을, 따타서 그들은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문 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다음에 그는 특별한 ‘중인' 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경우의 중인은 다론 의 미로 쓰이고 있다. 말하자면 이 경우의 의미는 사도들이 특별히 선발되어 그들에게 공적 임무가 부여되었으며 그들의 전파를 통해서 그들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꿀리듯, 인도받고 있 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중인으로 발견되리니"라 는 말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는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나의 중인들이 되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을 역사적인 증인으로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그가 이 사 건들의 한 관찰자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그의 죽음에 대해서 간 략하계 다루는 것은 당시 백성들이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는 더 의심의 여지가 많았고 신앙에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률 갖는 부활에 대 해서는 더 길게 말하고 있다.

 

"41절"  ; 혹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부활 후에 모두에게 공개 척으로 나타내 보여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율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나는, 설령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해도 온건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 에게는 하나님의 목적 그것으로 충분해야 마땅하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작 정하신 것이 최선의 것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최선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조절하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부활의 확실성이 확고하고 많은 증거에 의해서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경건한 자들의 신앙 단련에 가치가 있다. 불신자들과 그 리스도의 공공연한 원수들에 관한 한 그들은 수 없이 반박을 받았지만 하나 님 께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그리 스도께 서 그들에 게 그의 부활의 영 광을 보여 주지 않은 것온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들 역시 그돋이 무덤율 경비하도 록 고용한 군인들의 보고를 듣고 더 없이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론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생략하지만 독자들이 원한다면 나의 ‘공관 복 음 주석'에서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경윤에 따라 선택된 것은 그들의 그 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중거를 동해서 그 전리가 확고하게 서도록 하려는 뜻 에서라는 점은 기정 사실이다.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베드로가 여기서 추천하고 있는 하나님의 변경 불가능한 경운율 잡아 뽑아 망치려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만약 우리가 하나님 율 우리의 신앙의 확고한 근원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 중인들에게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그들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손수 선택하 셔서 자신의 때가 되자, 마치 자산의 손으로 이끌듯, 일반에게 내어 놓온 자들이다.

 

"음삭을 먹은 우리~~~~"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유 한한 인간으로서 먹고 마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셨다는 이 사실에서 그리스 도께서 우리의 무지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베푸셨는가 하는 점이 명백하계 드려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무슨 모호성이나 의 심이 있나 없나 하는 질문을 할 이유가 도무지 없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계 서 그의 제자들을 미련한 그대로 남겨 두어 믿기 어렵게 하신 것은 그들이 보다 머 충분한 확증을 받을 때 우리로부터 온갖 의심거리를 제거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편의 악의 (ill-will)와 ii~은망덕 이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에 대한 그 큰 관용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유 의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 외에도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장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여 기서 호기십 많은 사람듄온, “그 잡수신 음식은 어떻게 되었는가?"하는 질 문을 여기서 제기한다. 그러나 그 해답온 간단하다. 곧 그 음식은 원래 무 (無)에서 창조된 것인만큼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성한 능력에 의해서 무(無) 로 전락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우리 몸의 영양을 위해 취해진 음식은 소화된 다음에 배설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음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양을 위해 취하셨으며 그렇게 하는대 소모되었다. 그런데 여 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잡수시는 최하셨을 뿐이타는 생각을 하는 사람 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흉내口J-내봤자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 가? 나는 이 따위 핑계를 찾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잡수신 것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타 그의 백성을 생각해서 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의 하찮은 고안은 설자리를 잃기 마련이다.

 

"42 우리를 명하사~~~~~"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신 것은 온 세상을 단 번에 심판하려는 뜻에서라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지배에 대 해서 언급하기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일한 권리에 따라 천지간의 통치 와 교회의 영원한 정치가 그의 것으로 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산 자와 죽온 자의 재판장' 노릇을 하실 것으로 이야기 되는 것은· 죽은· 자들은다시 살아날 것이요 당시 살아 있는 자들은 또한 순간적으로 변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51절과 52절,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7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이다.

“중거하다”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본 래 부터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복음의 증인이라 는 점 을 강력 하게 확증하시 지 않을 경 우 단순한 복음 전파만으로는 효과와 효력이 덜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덫에 묶여 있는 우리의 마음을 들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것 뿐 아니라 자신들 변덕에 따라 이리 저리 휩쓸리지 않고 이것울 지속·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잘듈 알고 있다. , ' \내1111__I \\ __ '

 

"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 이미 지적한대로 누가는 베드로의 섣 교의 내용을 간략하계 요약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는 사건을 열거하 는데 있어서 그처럼 간략하게 말하고있다· 그러므는우리는 베드로가 사용한 말이 그대로 여기에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룬 문제를 간단히 재 시하는 데서 그치고 있다는 접을 깨달아야 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그리스도의 특별한 임무는 인간의 죄를 파괴하고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 시키는 것이요, 둘째 우리는 신앙으로 사최를 얻으며, 세째 이 가르침 은 생소한 것이거나 최근에 고안된 것이 아니라 유사 이래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이 이미 여기에 대해 증거하고 있었다.

먼저 첫째 문제를 생각해 보자. 만약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계 죄를 전가(轉隊)하지 않음으로써 화해된다면, 온 인류는 값 없는 용시 로 말미암아 용납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미움과 적대감의 대상이타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를 하나님의 전노에 굴복시키며 영원한 죽음의 죄책(罪責)의 쇠고랑으로 우리률 얽어 매는 죄의 확정 판결을 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는 의가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유일한 피난처로 알고 그리로 피신하타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신자들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에는 신자들과 하나님에 대한 대조 가 암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사죄를 받기 전에 하나님 편에 서 그 것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사죄가 주어 지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을 때만 하나님과 사이좋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의 죽음으로 단번에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 시키셨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오직 그리 스도의 중보에 의해서만 우리가 사죄를 얻는 것이지 그 밖에 다론 중보자는 도무지 필요없기 때문이다.

 

사단이 인간들의 마음에서 죄체(罪責)을 제거해 버리려고 몸부림 치지만 인간들이 하나님 으로 부터 사죄 를 요청 하고자 하는 불안감을 제 거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용서룬 받는 길과 방법이 있기는 있으므로 불쌍한 인간들은 사단의 기만에 속은 나머지 스스로 훌륭한 심연울 여러개 파면서 필요 없이 꾸불꾸불한 길을 가느라 고생하고 있다. 그들이 정도에서 벗어난 첫 과오는 거저 제공되 있으며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받아 들여질 수 있는 사면(敎免) 울 그들 스스로 쟁취하려고 노력했다는 데 있다. 그 후로 헤일 수 없이 수 많은 속죄 방법이 고안되었으며 이것을 가지고하나님의 노를 풀어 보겠다고 듈 애써왔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그는 족장 들에게 제사와 제물을 드리는 예식을 위임하셨을 때 그리스도를 가리위 놓 으(foreshadow)셨으므로 눈 멀고 불경건한 인간들은 그리스도를 제쳐 놓고 허망한 그립자만 추구하는 가운데 제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망쳐 놓고 말았다. 따라서 태초부터 이방인들이 실시한 모든 제사 의식과 아직도 터키족과 유대민족에 의해서 실시되고 있는 제사는 모두 그리스도와 완전히 배치되는 것돋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도 그들의 속죄의식에 있어서 그리스 으 흐뿌리지만 그것이 터무니 없는 것인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한 도의 보혈 '2. 'E.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온 사방에서 수천가지의 제사 양석을 꿀어 돌이기 때 문이 다. 따라서 죄 사함에 동참하려 는 자는 손가락만한 넓 이 라도 그리 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둘째, 사죄가 믿음' (believing)에 의해서 받아 돌여 진다는 말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 말하는믿음이탄 신앙의 능력과 성격을 뜻한다. 말하자면 베드 로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륜 길게 토 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동해서 우리에게 제시될 때 진실한마음으로그률모셔 들긴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하지 만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두가지 제시하셨지만 그는 오직 한 가지만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 인다. 말하자면 복음을 요약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회개와 새 생명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이야기이다. 그러나 해답은· 간단하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으로 인한 중생(重生)은 신앙의 결과인 만큼신앙 속에 성령님에 의한 중생이 내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한 편으로는 그 가 의의 값 없는 전가로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회복시키도록 하려는 뜻에 서요 또한 편으로는그가그의 영으로우리를성결하려는뜻에서이다. 그리고. 다 알고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영으로 지배한다는 조건하 에서 그의 자며로 입양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경우 본성적으로 하나 님으로 부터 소외된 자들이 어떻게 되돌아 와 그의 사랑율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세째 문제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화해시키기로 된 중보자로 제지하는 선지 자들의 모든 귀 절 을 다 살펴 볼 필 요는 없 다. 중보자 이 야기 를 할 경 우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닙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울 상기시켜 주는 것이 일반적인 교수 방법 내지는 그둘의 교수 원칙이 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은혜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오래 전부터 조상들에게 소망하도록 가르친 그것과 동일하다는 이 기본원리들 곡 이해하 지 않으면 안된다. 특별히 고넬료와 그의 동료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중시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주장된 것이 사실온 그리스 도안에서 시행되고 성취되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군들이 선지자들의 교수 방법과 일치하려면 그들의 전파에 있어서 그리스 도를 최대한으로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뀌 말하면 그들은 값 없는 사죄 위 기본인 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증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역사성온 로마 가톨릭에서 그리스도의 보혈 대신에 자신들의 썩어 빠전 속죄 방법을 무수하계 대치시키면서 허풍을 떨어 대는 역사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44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 " ;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방인들과 유대인 들이 똑같이 그의 복음의 가르침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새로운 기적으로 확 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 이방인들의 부름에 대한 특별한 상징인 것은(바로 이 사람들 또한 언약의 무리로 선택받지 않았더라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이들에개 그의 영의 은사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 가가 기록하는 이 은사는 중생의 은혜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가르침 뿐 아니라 거기에 같이 앉아 듣고 있던 자들의 신앙과 경건을 확증 하셨음에 튤립 없다. 앞에서 우리는 그들 모두가 배우고 순종하려는 욕망으로 고추]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 지만 누가는 여기서 그들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 눈에 나타나는 상징은 복음전파가 얼마나 신령한 능력의 도구로서 효과적인 가하는 점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쏟아 주심으로써 그가 빈 말로 허공을 치기 위해서 교사들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하는 바를 통해서 강력하게 역사 하시며 그의 영의 능력으로 그들의 말에 힘을 불어 넣으셔서 경건한 자들의 구원에 보댐이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올 보여 주시고 있다. 이런 이유 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들이 신앙을 들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점 율 지적하고 있으며 (3 : 2), 다른 곳에서는 그가 문자의 일군이 아니타 영의 일군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고후 3 : 6). 확실히 방언과 기 타 이와 비슷한 온사가 교회에서 중지된지 오래지만 이해와 중생의 영은 지금도 번창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복음의 외적 전파 와 일치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촌경하계 할 뿐 아니라 광신자들이

 

"45 신자둘이... 놀라나 " ; -누가는 여기서 아직 잘못된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을 가리 켜 ‘신자들’ 로 \..l T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닙께서는 자신의 백 성에게서 모든 무지의 구름을 단번에 추방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 는 여기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구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신앙이 칭찬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오류를 눈감아 주시고 그것이 순수하고 흐리지 않은 것처럼 사랑으로 그것을 받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접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있다 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그들이 크계 놀라고 있다는 접이다. 그들은 하나님 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여하 시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신기한 일이라도 된다는 식으로 당황하고 있다• 그 러나 이것은 갑작스런 변화 때문에 일어 나는 일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는 바로 그날까지 이방인들을 국외자로서 자기 백성으로 부터 구별하셨지만 이제 그들을 동일한 사랑 가운데 포옹해 주시며 크들을 동일한 영예의 자리 에 높여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온 또한 우리들이 한번 빠진 오류에서 목별히 그것이 오렌 세월에 걸쳐 계속될 경우? 탈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 려운가 하는 점을 경고하는 예이기도 하다.

 

"46 이는…둘음이러라" ; 누가는그들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의 내용과 그 것의 용법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여러 ‘방언’의 은 사를 받온 것은 여러 나라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 에 우리는 방언이 허용된 것은 복음이 서로 다론 나라 말로 외국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했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만 아니라 복음 자체의 장식과 영예 률 위한 것이었다는 접을 이 귀절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에 하늘의 지 해의 위대성을 증명하도록 받은 것을 야심에 이끌린 나머지 자기 과시와 허 영에 그릇 사용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일례로 바울은 이 문제로 고린도인들을호되게 책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얼마 안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가 과거에 허용 하셨던 것을 빼앗아 가시며 더 이상 그것이 남용 되지 못하계 하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

 

"47 이에 베드로가가로되 ..•.." ; 베드로논현설로부터 상징을 섣명하고 있 다. 말하자면 세례란 영적 은혜에 종속적인 것이므로 성령을 받는 사람은 그 와 동지에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보증과 증거를 통해서 자신의 자너로 입증하시는 자들에게 목사가 외적인 상징을 허 용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그러므로 가르침과 신앙이 주된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아는 세례를 받윤 수 없다는 추론을 내리는 무식 한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소리이다. 물론 교화 밖에 있는 자들이 입양의 상징을부여 받기 전에 먼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교회 안에서 태어나는 신자들의 자며는 모태부터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타는 집을 주장한다. 그 뿐 아니라 내가 그들의 우리에 대한 티무니 없는 이론을 베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자녀들이 태어나기 전 에 그들을 입양하시는데 그들에게 외적인 상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기만 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들에게 이 상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하신 것을 탈취해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처 사이냐 성령의 명백한 은사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적당 한 시기에 제례로 이어진다 해서 거기에 전혀 모순접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증거가 결코 그들의 오류에 대한 지지가 될 수 없듯이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마신을 강력하계 배격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령의 은혜 를 여러가지 상징에 결부시키떤서 이런 저런 ‘푸닥거리'(exorcisms)를통해 이 은해롤 하늘에서 흘려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옛날 여자 무당들이 주문을 외 위 달을 끌어 내 린 다고 생 각하던 것 과 같은 이 야기 이 다. 그 러나 누가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이야기릅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이 제례 속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 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제례를 베푸는 데 있어서 단지 물로 만족 했다는 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소박성이 후대에도 그대로 유지된다던 얼마나 좋겠는가 . ? 그리고 로마 가톨릭에서 세례에 덮어 씌우는 하고 많은 엉터리 수작들이 사방에서 채택되지 않는 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그들은 기 름, 소금, 깊 l 양초 따위로 제례의 권위가 더 높혀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순수하고 티 없는 제도를 망치는 오물 찌꺼기들이다

 

"48절"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표현은 우리가 3장 6절에서 생각한 말 의 형식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제례의 적합한 목표이므로 이 것 이 곧 우리 가 그의 이 름으로 세 례 를 받는 이 유라고 말하는 것 이 다. 마지 막으로 누가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친쳐들에게 며칠간 더 머물러 있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더 발전을 보려 는 욕망에 대한 칭찬이다 물론 그들은 성령을 받았지만 더 이상 확신이 필 요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의 본을 받는 가운데 기회가 을 때마다 그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발전을 보도록 해야 겠 다. 그러지 않고 우리가 교만에 부풀어 있다면 이 교만은 가르침의 출입구 를 봉쇄하기 때문이다

 

"세례를 주라 하니라" ; 꼭 베드로가 손수 세례를 베풀 필요가 없었던 것은 다른 일군들이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가 고린도에서 제례 베푼 일이 없다고 증거하는 그대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