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 10 : 1 ~ 8)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1)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2)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3)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4)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5)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6)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7)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절 " ; 누가는 여기서 특이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유대인들 앞에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특별히 높여 주신 사건이다. 이것이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천사를 임명하시고 그에게 복음의 초보를 가르치기위해 베드로를 가이사랴로 데려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처 누가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말씀하게 된 인물인 고넬로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태리 보병대(cohort) 소속의 백부장이었다. 일개 보병대는 1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며 사령관(tribune)의 지휘를 받는다. 그리고 각 100인 중대에 또 각 지휘관이 있었다. 일개 군단(legion)에는 많아야 다섯개의 보병대가 있을 뿐이었다. 이 보병대를 ‘이달리야대’라고 하는 것은· 로마인들은 각 도와 동맹국들로부터 병사를 모집했는데 이 부대는 이태리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넬료의 국적은 이태리였다. 그러나 그는 가이사랴의 수비대인 자기 100인 부대와 함께 그곳에 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로마에서는 각 유명한 도시에 부대를 주둔시켜 두어 갑작스런 반란을 전압하고 있었다. 그가 사실 아주 회귀한 사람인 것온 군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아주 두드러졌으며 인간들과의 태도가 아주 정직하고 신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복무에 창여한 이테리 인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굶주린 늑대들 마냥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기에 바빴으며 야수나 다를 바 없이 전반적으로 종교심이 없었으며 그들의 신의가 있었다면 산적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고넬로의 덕이 더욱 더 칭송을 받아 마땅한 것은 당시 타락할 대로 타락한 군대 생활 속에서도 그는 아직 성실하계 하나님을 섬겼으며 사람들 에게 해나 악을 끼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미신 속에서 대 어나고 자랐지만 이것을 배척하고 참 하나님의 순수한 경배를 받아 들였다는 정에서 그는 더 큰 칭찬을 받을 만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대리인들은 지 독하게 남들을 깔보고 뻐기는 편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에게 천박하고 증오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바로 그들 때문에 순수한 종교가 불신을, 아니 거의 지긋 지긋하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그의 우상을 포기하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예배를 택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는 희귀하고 뛰어난 성설성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가 유대인들에게서 자신의 신앙심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율법에 대한 짧막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천에 하나도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속에서였지만 고넬료는 거짓 교의에 더럽혀져 있지 않은 올바론 하나님 예배자를 만났으며 그가 그에게 아무런 누룩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율법을 성실하계 가르쳐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누가는 그에 대해서 여러가지 장점을 말하고 있는 만큼 차례 처례 검토해 보기로 하자.
"2절" ; 누가는 그가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었다는 점을, 그리고 훌륭한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가르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누가는 고넬료가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베푼 사랑의 봉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계속적인 기도를 들어 그를 칭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들의 정직성울 보여 주는 덕에 있어서 탁월했으며 그 결과 그의 모든 생활 양식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규정하고 있는 원칙에 따라 정돈되어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울법온 두 둘판에 담겨있는 만큼 누가는 먼저 고넬로의 신앙심을 칭찬하고 다음에 인간에 대한 사랑의 임무수행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울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 여기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온 특별한 관심율 요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우리 는 생활을 제대로 정돈하는 데 있어서 신앙과 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 이것을 무시한다면 나머지 모든 덕이란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누가는 ‘하나님 경외와 기도'를 신앙심과 하나님 예배의 열매와 증거로 취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하나님 경외와 때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와 여호와로 알고 그에게 굴복하기 전에는 경건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칭송되고 있는 것은 즉각적인 경외, 곧 머리 속으로 하나님의 몫을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굴복하는 자들의 경외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더우기 세상의 대부분은 하나님 예배를 쓸데없는 허구로 더럽히고 곡해하는 만큼 누가가 여기에 고넬료의 계속적인 기도를 덧붙인 것온 잘한 일이다. 이 말은 그가 외형적인 의식을 통해서 신앙심을 발휘할 뿐 아니라 날마다 기도에 전념함으로써 하나님을 통한 영적으로 예배했다는 뜻이다. 그가 끈질기게 기도했다는 말은 흔히 하기 쉬운대로 그저 형식적인 기도의 절차만 밟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축복이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도독 격려하고 신앙의 능력이 그 속에서 드러나야 마땅하듯이-그가 진지하계 기도에 힘썼다는 이야기이다.
"온 집으로 더불어~~~~" ; 우리는 고낼료가 자기권속 가운데 교회를 두고 있었다는 이 칭찬을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된다. 물론 하나님의 전실한 예배자라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서 자기 집에서 추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자식, 남너 종들에제서는 당연한 권리로서 그들의 순종율 요구하면서 하나님을 무시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망칙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건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말을 듣지않는 아내가 있을 수 있지만 남들 위에 세워진 자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차지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사 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경건한 사람에게 자기와 다론 자식, 그릇된 행동을 하는 아내, 또는 무익하고 부정직한 종들이 있다 해도 거기에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가운데 태만하계 자기 집이 더럽혀지게 내버려 두는 일이 없어야겠다. 고넬로의 경우 칭송되고 있는 것은 그의 진지함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니, 이 후자의 결과로 그는 자기 권속들을 경건함으로 자신에게 굴복하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기 가정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아예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당시로 말하자면 유대 종교는 굉장히 미움을 사고 있었으며 로마 시민이 소위 말하는 이방 종교를 택할 경우 벌을 받지 않고 지나칠 수 없었다. 따라서 복음의 진지한 고백이 오늘날 세상에서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이 부당한 적대감 때문에 자기 가정을 마치 경건한 원칙에 따라 드리는 자신의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굉장히 몹쓸 비겁이 아닐 수 없다.
"구제하고" ; 이것도 대유법적인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하나님 예배 가 기도를 통해서 입증된다고 지적했지만 여기서 누가는 자선(charity)을 언급함으로써 고넬료가 후덕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예를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점을 친절하고 정직한 생활을 동 해서 중거하는 뜻에서 우리의 신앙심이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는 것이 마땅 하다. 구제라는 말은 엄격히 말해서 자바, 곧 속 마음의 정이므로 그것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외적인 봉사를 통해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 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형제들의 역경을 보고 동정을 느끼거나, 우리 사이 에 있는 연합을 생각하고서 그들이 우리의 혈족인 것처럼 우리가 그들을 둘 아 보고 보살피거나, 그들이 우리의 지체인 것처럼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싶은 걱정을 할 경우 순수하고 잘 정돈된 친절의 근원온 바로 이 속 마음의 정 이 다. 물론 위 선자들도 경 우에 따라서 는 후하계 내 놓는, 아니 최 소한 많이 내놓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을 다 물쓰듯이 바친다 해도 그들 이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도움은 전혀 ‘구제’라는 이름으로 통용될 수 없 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 : 3)고 하는 바울의 말을 우 리가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가난한 자들 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돕고, 하나님의 후덕이 풍성하게 제공해 주시는 것을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바칠 경우에 한해서만 우리의 친절이 최종적 인 하나님의 인정율 받는다는 사실을 배워야겠다.
고넬료가 ‘모든 사람에게, (証2) 구제했다는 말은 주위에 있는 모든 가난한 자듈을 두고 그랬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친절하 계 대함으로써 그가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갖는 한 마음울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모든 유대인의 칭찬을 받았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이 다(22절). 그러나 그처럼 희미하고 초보적인 신앙을 받은 사람이 그처럼 숱한 장애 물을 헤치고 그만큼 정직하고 성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 교의 교사로 자처하면서 신앙의 행위에 있어서 그처럼 냉담한 우리는 이것은 큰 수치로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아주 희미한 신앙의 불꽃이 그에게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완전한 지식의 광채는 우리 속 어] 무엇을 가져와야 하겠는가? 그러나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떠들어 대는 우리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이 거룩한 사람의 본과 동떨어져 있는 실정이 아닌가? 그래서 그에게 풍성했던 덕이 우리에게서는 희미한 그립자마처 찾 아 볼수 없게 되고 말지 않았는가? 얼마나 기도에 있어서 굼뜬우리인가? 자비로운 봉사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벌벌 떨며 주저하고만 있는 우 리인가? 그것 뿐인가? 각자의 소유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후하게 나뉘 줘야 할 사람들이 인색항과 탐욕에 사로 잡혀 뒷걸음질하는가 하면. 그들은 광적인 소유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서슴없이 가난한 자들의 소유를 빼앗고 그들의 살을 집어 삼킬 정도로 횡포륜 부리며 미쳐 날 뛰고 있다 ..
"3 하루는~~~~. 환상 중에 밝히 보매" ; 누가는 이 ‘환상’ 을 일종의 말씀으로 제시함으로써 고낼료가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된것은하늘의 도움이 있었 기 때문이타는 점을 우리에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끔 여러가지 환각(illusions)에 속는 수가 많으므로 누가는 이런 의심을 제거하는 뜻에서 ‘제 구시 ’ 라는 지 간을 꼬집 어 이 야기 하고 있 다. 물론 그 당시 에 는 낮 시 간을 해돋이부터 해질 때까치 열 두 등분 했었다. 여기서 볼 때 천사들이 나타난 때 는 대 낮이 었 으며 구그 환상 (vision) 이 아주 똑똑하계 보였 다는 결 론이 나 온다. 하지 만 환상에 항상 표적 (signs) 이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 의 종들에 게 서 환각의 두려움이 제거되었는데 이것은 그가-꿈을 통해서 나타나실 경우 그들의 마음에 의십의 여지를 허용할 수 없는 확실한 표적들이 깊게 뿌리박 기 때문이다.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 누가는 고낼료의 또럿또렷한 정 신상태를 일부러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본 것이 사람이 줄거나 흐리 멍텅한 가운데 있을때 갑작스럽게 덮치는 백일몽의 도깨비가 아니었다는 뜻 이다. 그를 사로잡온 공포는 그의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지각에서 온 것이 었다. 인간온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순간 크계 접을 며기, 아니 대경실색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듣고도 우리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눈치채지 도 못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우리에계 전혀 감각이 없다는뜻이다. 반대로 경전한 자들은,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데, 이사야의 말대로그말씀을 들을 때 떨기 마련이다(사 66:2, 5).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이 인간들에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그들로 하 여금 항상 대경실색한 채 드러누워 있게 하며 공포에 압도되게 하려는 뜻 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겸손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그롤 경외하계 하려는 뜻에서일 뿐이다.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 이 대답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마음이 종교심으 、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장 그가 상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을알수있다. 따라서 "주여, 뉘시오니까?"(託 3) 하는 일반 적인 번역은 잘못이다. 헬라어 어구에 있어서는 번역자로 하여금 실수하계 할 만한 모호성이 전혀 없으며 모든 사본이 -r-c EO"rt.C티 에스티 ; 무슨일이니이 까)로 일치하는 만큼 거기에 나오는 것은 잘못된 보충인 것 같다. 그리고 고넬로는 말씀하는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종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거기에 따르는 응답으로는 명령 이의의 다몬 무엇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 기도와 구제가~~~~" ; 만약 하나닙께서 당장 우리의 기도를 듈어 주시지 않 울 경우 그가-말하자면一듣지 못하는 것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하기 마 련인데 바로 이접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그에게 상달되며 그가 우리의 기 도에 대해서 마음을 쓰신다는 식의 표현이 여기에 사용되고 었다. 더우기 천사는 주님께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충분히 깨달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 각하시는 이유를 바로 이 사실, 곧 그가 그의 기도률 분명히 들으셨으며 그의 구제를 받아 들이셨다는 사실로 둘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덕과 선 행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 뿐 아니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울 고맙게 여기 셔서 우리에게 영광스럽계도 더 위대한 은사를 쌓아 주시고 풍요하게 해 주 신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것은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리라" (마 13 : 12) 고 하는 말씀 그대 로이 다. 이 와 비 슷한 것 으로는 "잘 하였 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말기리라" (마 25 : 21) 고 하는 말씀이 있 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저 꼭 대기까지 인도하기까지 그들에게 마치 튼튼한 계단을 놓아 주시는 것과 마 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온사를 베풀어 주지 n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전작시켜 주신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귀절을 C: T가지 면에서 남용하고 있다. 말하 자면 그들온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보시고 그에계 복음의 신앙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인간편에서의 준비로 곡해한다. 다시 말해서 인 간이 자신의 근면과 먹으로 신앙을획득하고행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71대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이란 어찌나 가상(嘉尙) 스러운 것이던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받을 자격에 비례해서 개인들에게 아낌 없이 쏟아진다는 결론을 내린다.
먼처 그들은 고넬료가 신앙의 일깨움을 받기 전에 그의 행위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생각을하는데 이것은 유치한 오류이다. 신앙만이 우리에게 기 도의 문을 열어 준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에게 신앙이 선행하지 않고서는 그가 기도해야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무지를 반박 하는 중거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펠라기우스(Pelagius)는 전에 신앙 이 없던 사람이라도 기도로 신앙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어거스턴은· 예리한 판단으로 그를 비꼬면서,. "어느 누가, 먼저 어느 정도 차료를 받아 보지 않고서, 의사를 찾겠는가?"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 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드릴 것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건전한 신앙이다. 더 우기 고넬료의 하나님 경외와 신소앙심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점을 명 백하계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에스겔이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주물러서 그를 두려워하계 하신다고말하면서 이 칭찬을하나님에게만돌리는 그대로이다(36:26;証4). 그리고 이사야도(II:2)여호와에 대한경외의 영 은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점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는 .::::z..의 지체가 아닌 다론 곳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고넬료의 경우에서 본성을 자신의 안내자로 삼아 영생을 얻고자 애쓰는 사 람울 상상하는 것온 그야말로 어리석온 짓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상한 행위 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예상할 수 있다는 그들의 결론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각자의 자격에 비례해서 그만큼 더 큰 은혜를 받는다는 둘째 스 있다.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거처 주 오류를 간단히 반박할 T 시지 않은 선행이 하나라도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둘째 우리논 하나님의 은사에 대 한 올바론 사용법 역시 그에게서 나오며 우리가 그의 첫 은사를 그의 둘째 은해라는 점윤 명백히 주장한다. 세째 우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리는 언제나 걷접 두성이 인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무엇을 받을 자격이 우리 에게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물론 선행이 우리 편에 신앙의 중대를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행위 자체의 공로 때문이 아닌 것은 그들이 신앙의 도움으로 얻는 사죄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열납뭘 수 없기 때 문이냐 행위의 가치를 세워 주는 것은 신앙 뿐이타는 얘기는 바 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오는 소리다. 이런 방식으로 고넬료는 자기 기도와 구제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보다 더 밝은 지식을 얻었지만 그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의 호의와 친절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에게 신앙이 있었기 때문 이다.
그리고 행위의 가치가 신앙에 의해서 규정될 경우 이 행위가 하나님의 인 준을 받는 것온 공로 때문이 아니라 너그러움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앙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 기쁨이 될 만한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므로 우리에 게 부족된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빌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에서는 악독하게도-.공로'라는 말을 줄곧 뇌까리고 순전한 사람들을 헛된 자만심으로 들뜨게 하면서 인간에게 선행을 격려하는 노력은 아예 무서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의 양심을 언제고 불안한 가운데 내버려 누는 가운데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이야 기해 주지 못하고 있다 .. 무감각하고 태만한 사람들이 그러한 혼란한 마음에 빠질 경우 그들이 맥이 빠질 것은 뻔한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로서는 비록 우리들이 행위에서 공로를 제거한다 해도, 그러한 행위에 보상이 마련 되어 있다는 점을 가르침으로써 인간들이 올바른 생활에 대한 관심을· 갖도 록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예리한 자극을 동해서 격려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 리들이 마침내 하나님을 섭기는 일에 있어서 자발적이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수고가 허사가 아니타는 점을 확신하는 경우에 한해서 만 가능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성령의 보다 더 풍성한 온사를 보지 못하고 대부분의 온사가 시들어 버리고 맡게 내버려 둔다면 그 책임은 우리 자신의 배은망덕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기도, 구제 및 성결성을 그의 복음의 귀한 씨앗이라는 축복으로 보답하셨듯 이 우리가 그의 복음의 보화를 불경하고 무책임하게 남용할 경우 우리가 기 아와 배고품에 허더인 나머지 마침내 아사하고 맡게 내버려 두지는 것은 당 연한 노릇이다.
하지만 여기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단순한 확신으로 충분한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낼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건건한 중거를 통해서 쉽게 확립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엄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의 선하심을 조금이라도 맛보기는 커녕 그의 영광으로 압도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호 의릅 베푸신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지 않 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를 가리켜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하는 것은(골 1 : 15) 오직 성부께서는 그의 얼굴에서만 자선율 보여 주시 71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유일한 길, 전리, 그리고 생명인 만큼(요 14 : 6). 그분 없이 가는 곳이 면 어 디 고 오류와 기 만의 울무 투성 이 요 가는 곳 마다 만나는 것은 사망뿐일 것이다. 고넬로의 경우에 있어서 이 문제는 쉽게 풍란다. 영적 은사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우리에게 제공되는 법이 없다. 특별히 중생 그 자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확고히 뿌리를 박계 될 때‘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진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무 엇인가(몸 6 : 5, 6) ? 그리 고 고넬료가 그리 스도의 영 에 동참하고, 있었다면 우리로서는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아 완전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 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들이 경외하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약 속된 중보자에 대해저 아무런、얘기도듣켜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지식이 희미하고 혼잡했지만 거기에는 중보자에 대한 지식이 어 느 정도 있었다. 그 당시에 유대 땅에 들어 온 사람치고 메시아에 대한 얘 기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더우기 그분에 대한 상당한 소문이 먼 지 역에까지 퍼져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고넬료를 아직 계시되지 않은 구속 자가 가져 울 구원을 소망한 옛 조상들의 범주에 집어 넣는 것이 마땅하다. 베드로가 그의 신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전에 그 신앙의 기 초가 확고했기 때문이라는 어거스탄의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다· 그러나 그. 는 그의 ‘성도들의 예정론’과 기타 저서에서 고낼료가 먼저 신자가-아니었 다면 기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 사건 자체 에 대해서는 우리와 견해볼 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5 욥바에 보내어~~~~" ; ·하나님께서는 크계 호의를 베푸시는 가운데 고넬료 에게 손수출발하지 말고 그의 심부름군들을 베드로에게 보내도록명령함으로 써 그는 조용히 집에 앉아서 기다리고 베드로에게는 그를 위해서 여행의 수 러를 갑수하게 하시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고넬료에게 이처럼 자상하게 나오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것은 그는 거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날마다 강요하시기 때문이다. 그 전과 그는 자기를 요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바 되는 것이다(이사야 65 :·1). 그러나 왜 천사가 교사의 임무룬 다하지 않는 것일까? 곧 복음이 인간의 업숭운 통해서 전해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큰 권위를 가질 것이라는 점 울 생각하면 천사가자신의 임무를 유한한 인간에게 떠맡기는 것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환상 중 에 바울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를 가르치는 체임을 아나니아에게 위임함으로 써 이 본을 통해 그가 자기 교회에게 위임하신 복음 전파의 사역을 확증하 셨듯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위임하신 사명운 실천하는 문제 에 있어서는 천사가 그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 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하늘의 지혜의 빛으로 조명 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먼저 서슴치 말고 인간들의 외적인 음성에 귀를 기 울이고 순응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인간의 음성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과 관련되기를 바타시는 것이다. 하 나님께서는 전도를 무시하고 하늘의 계시를 추구하는 자들의 광적인 교만을 얼마나 무서운 방법으로 처벌하셨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듈을 통해서 돌려지는 것을 원하시는 만큼 그가 그의 말씀을 위탁하신 그의 일군듄울 무시한다는 것은 그에게 경멸과 모독을 퍼붓는 짓이나 다름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영둘을 시험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모두 구별없이 받아들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은 듣는데서 오는 만큼(롬 IO : 17), 말씀을 기피하고 배척하는 자들은 이것을 얻을 수 없다•
"7 마침~~~~~ 천사가 떠나매" ; 누가는 여기서 고넬료가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명령받은 사항을 .:z..대로실천하는것을보고 그의 신속한 순종을 잘 묘 사해 주고 있다· 그가 그처럼 자발적으로 신속하계 나울 수 있었던 것은 그 가 그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불신은 하나님율 따르는데 있어서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원인이다. 물론 오늘날은 천사가 하늘에서 우리에게 날라 와서 우리에게 특정한 사람들을 지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율 두드리타 그러면 너희에계 열릴 것이다"(마 7 : 7)라고 하 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사람의 귀에 쟁쟁하계 울려 퍼지고 있다. 백에 한누 명도 한 발자국도 옮겨 놓으려 하지 않는가 하면 그처럼 굼드계 행동 하며 발전율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약속을 진심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꾸물대는 일이 없이 하냐 님의 음성을 들을 때 부름받는 곳을 향해 달려가도록 하자.
"집안 하인둘과" ; 고넬료에게 자기 말을 잘 듣고 무엇이든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정직하고 신뢰성 있는 하인들이 있게 된 것은 그가 그의 권속을 열 심히 가르친 데 대한 보상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권속을 가르치는 일에 무간십한 상전듈에게 정당한 처벌을 부과하시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 하자면 그들에게 하나님 신앙과 경외를 가르치지 않을 경우 그들은 반대로 순종치 않을 뿐 아니타 믿을 수 없는 권속이 되고 말며 심지어는 이들이 배 신율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 이 군인은 고넬료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만큼 그는 그에게 자기 집안 종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경외를 심어 주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어떠한 직업이든 우리에게 하나님을 순 수하게 예배하는 것을 면제하는 직업은 없다. 군대 생활로 말하면 당시 타락 할 대로 타락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여기서 군인들에게 신앙심이 있음을 중거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면에 있어서 올바르게 살기를 원하지만 군대 생활을 핑계로 하나님 예배하는 일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탑들 의 이유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자기들은 군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최후의 심판날 저 두 군인들 올 그들의 확고한 중인과 심판관으로서 마주치게 될 것이요, 이들에 의해서 그들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무장하는 것은 부 탕하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처 미친 사람들 역시 여기서 정죄를 받 논 생이다.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은 그들의 군대 생활과 종교생활을 병행하 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해서 그둘의 과거 생활 방식을 포기하거나 그들의 무기를-마치 그것이 해로운 것인 양-내던지거나 자신들의 직 업의 자리를 단념하지 않고 있다.
"8절" ; 고넬료가 그군인과 종들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명령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그것을 적 극적으로'실천하계 하려는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그들을 가르치는 문제 에 있어서 솔직했던 그인만큼 그는 그들에게 더 큰 문제에 대한 지식도 함 께 나누어 알게하는 것을 주처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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