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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

1. 성경 (행 9:10 ~ 19상)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0)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1)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2)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3)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4)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5)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6)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7)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8)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19상)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0절" ;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다른 사도들에 비해 이 사람이 선택받은 것은 바울로 하여금 그의 대가연하는 오만을 박탈당한 뒤에 가장 하찮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고 절정에서 가장 밑창으로 내려오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이 환상이 아나니아에게 필요했덧 것은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부과되 바울을 가르치는 임무를 거절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곧 그는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래도 거기서 움츠러 들고. 아니 최소한 변명을 늘어 놓고 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사항울 진지하고 용감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울을 부르심에 대한 확증과 자신의 수고에 대한 성공적인 결과의 약속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아나니아에게 환상을 통해 나타나심으로써,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확증해 주심으로써 바울에 대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계시니 이것은 바울로 하여금 아나니아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말을 청종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주님께서는 곧장 바울을 아나니아에게 보내시면서 그의 집을 가리켜 보여 주실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방법이 그에게 확증을 주는 면에 있어서 더 적절했던 것은 그가 이것을 통해 주님께서 자신의 일에 관심을 쓰고 있다는 점을 더욱 더 잘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앞에서 바울을 만나신 방법 그대로 여기서도 그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당신의 종을 통해서 다시 그에게 당신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은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여기서 잃은 양을 찾는 일에 더욱 더 자발적이고 초조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환상 중에~~~~" : 여기서 말하는 환상(vision)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어떤 상징 (symbolitm)이 그의 눈에 제시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용도란 말씀의 위엄을 확증함으로써 그것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지니도록 하는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상대로 이러한 확증 방법을 사용하셨으며 당신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환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신다는 점을 친히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는 사단에게 거짓 환영 (spectris)을 통해서 불신자들을 속이도록 허용한 일도 있다. 그려나 사단의 속임수는 오직 흑암에서만 통용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마움을 친히 조명하심으로씨 그들에게 속임수를 무서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증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아나니아는 그 부르심이 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11 주께서 가라사대~~~~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누가는 이 사흘 기간에 바울이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 이것이 그가 금식한 이유 중에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앞에 지적했듯이 그가 그처럼 오래 배고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황홀경에 있는 사람에게 혼히 있는 감각의 마비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기도는 짤막한 기도가 아니라 바울이 자신에게 완전히 평정한 마음이 허용되기까지 기도를 계속했다는 뜻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다른 여러 가지 공포의 원인은 접어 두더라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온 여전히 그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완전한 계시를 초조하게 기다리는가운데 이상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요 주님께서 그를 사흘 동안이나 기다리게 한 이유는 그의 기도에 대한 열정에 불이 붙어 더 강력한 화염으로 발전하게 하려는 뜻에서 였을 것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하는 사람이~~~~" ; 여기서 누가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보고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말울 여기에 덧붙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확실치 않다. 이것을 누가의 얘기로 돌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사용하셨을리 없다는 점을 이유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너를 반기지 않을 것으로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그는 이미 네가 누구라는 것을 환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네 이름과 그밖에 네가 그 에게 할 일을 이미 다 설명해 놓았다" 하는 식으로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취사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독자에게 맡기겠다. 

 

"13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 아나니아는 주님에게 위험을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앙의 연약성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종들이 사망의 공포 때문에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주저하게 된다는 점을, 아니 불안한 동요에 빠지는 수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분명히 아나니아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에게 순종을 거절할 정도로 못된 공포에 휘말려 들지 않았다는 것은 훌륭한 사람의 표적이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사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의 시작이 느려지기는 하지만 그가 곧장 자신을 망각하고 재빨리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달려간 것은 뛰어난 경건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 말로 아나니아는 자기에게 명령된 바를 완전히 거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절 사형 집행자에게 보내신다니 무슨 뜻입니까?" 하는 간접적인 변명을 조용히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순종하고자 하는 욕망과 공포가뒤섞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4  결박할 권세를 ~~~~~받았나이다" ;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준비하고 있던 박해 소식이 상당히 넓게 퍼져 있었으며 그 결과 그의 회심은 더욱 더 특이하계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와 동시에 주님께서 그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심한 고통을 허용하시는 것은 후에 있을 그러한 갑작스런 구원의 축복이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표현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표현을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고백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에게 영광을 둘렀다는 뜻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그들이 항상 그의 보호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든 확신이 없이는 기도 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둘 중에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스도의 신성은 명백하게 입증되고 있을 뿐 아니라 만약에 둘째 의미를 택한다면(이것이 더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신실한 자들의 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파된 다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 셈이다. 

 

"15 가라 이 사람은~~~~~택한 나의 그릇이라" ; 명령의 반복과 성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은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많은 채찍을 받고도 무감각이 깨우쳐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아주 많이 보게 된다. 곧 제 아무리 주님께서 집요하게 부르셔도 그들은 그들의 생을 허송할 뿐 아니라 온갖 쾌락으로 자신들의 태만을 키위 나갈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두번째 명령을 받고 당장 모든 지연을 뒤로 물리치는 아나니아의 본을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는 오늘날은 더 이상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일이 없지 않느냐고 반박하겠지만 나는 성경의 권위가 충분히 우리에게 확립된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기서부터 듣지 않으면 안된다고 대답 하겠다.

 

"내 이름을……전하기 위하여" ;지금까지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파괴하려 하던 사람에게 이제 그 이름을 전파할 책임이 지위지고 있다. 만약에 '스큐―오스'를 ‘그릇' (vase)으로 본다면 이 온유는 여기에 잘 적용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일군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림으로써 그릇의 역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상 도구(証4) 라는 뜻이므로 나는 단순하게 ‘이름을 전하다’를 그에게 영광스럽계 그이름을 높이다’ 또는 ‘극찬하다’는 뜻으로 받아 들인다. 말하자면 세상이 복음 전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서 모두 함께 모이게 될 때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왕좌에 앉게 되는 것이다.

 

"택한 그릇" (vas electionis) 또는 에라스므스의 번역대로 ‘선택 받은 도구' (organum electum) 란 특별한 일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도구' 라는 말 자체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당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시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도구라면 엄격히 말해서 당신만이 유일한 행위자(auctor)요 행위의 능력과 솜씨가 당신의 손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바울을 두고 말씀하신 것은 구별없이 모두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제 아무리 우리가 힘든 수고를 하고 제 아무리 일을 잘해 내더라도 자화 자찬할 이유는 티끌만 큼도 없다. 

‘그릇' (vas)이라는 단어를 두고 박식한 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히브리어를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고 있다. 누가는 이 명칭에 속격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히브리 관례에 따른 표현이다. 더우기 누가는, “이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보통 일군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은사를 받을 것이다"라는 뜻에서 그의 탁월성을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누구에게 어떠한 장점이 있든 그것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은총에 의존한다는 점을 깨달아야겠다. 이것은 "누가 당신을 남달리 월등하게 만들었읍니까?"(고전 4 : 7;새 번역) 하는 바울의 말 그대로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 위대하고 탁월한 일을 위해 선택받았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16절"; 그러나 바울이 상대해야 할 쪽이 온순한 사단이나 고분 고분하게 굴복하는 세상이 아니었으므로 누가는 바울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을 동시에 배워야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나는 그에게 숱한 고생을 당하게 할 것이요, 숱한 수치를 견디게 할 것이요, 온갖 종류의 투쟁을 이겨 내게 함으로써 그 어느 것도 그의 임무를 방해하거나 제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라는 말씀이나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자신이 바울의 교사로 나섬으로써 우리 각자가 그의 도장에서 전진을 볼수록 십자가를 짊어지기에 더 적격자가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시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침착하고 유순한 마음을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그 십자가를 마다하고 발버둥치며 그것올 더 없는 재앙으로 여기고 피하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이 귀절은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마음에 고난을 받겠다는 각오가 서 있지 않고서는 이 적대적인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자격이 없다는 점올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군임을 입증하려면, 우리는 그에게 지식과 지혜의 영을 구할 뿐 아니라 인내와 용기의 영을 구하는 가운데 경건한 자들의 몫인 절망적인 고난 때문에 으스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17 그에게 안수하여`~~~~" ;·다른 곳에서도 지적했지만 유대인들 사회에서 누구를 하나님에게 추천할 때 손을 얹는 것 은 엄숙하고 말하자면 정규적인 의식이었다. 사도들은 성령의 눈에 보이는 은사를 베풀거나 어떤 사람을 교회의 일군으로 임명할 때 제사의식에서 따온 이 습관을 사용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자기 손을 얹은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를 하나님께 성별하려는 뜻에서요, 또 한편으로는 그를 위해 성령의 은사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르침에 대한 언급온 없지만 바울이 다음에 말하는 대목을 보면, 그를 가르치는 임무도 아나니아에게 허락되었다는 점이 명백하며 그 후에 이어지는 그의 세례를 볼 때 우리는 그가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성령을 아나니아의 손을 통해서 받았다 해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안수를 감독들만의 일로 돌리는데 이것온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8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 이미 지적한 대로 바울의 눈먼 상태는 비단 공포나 당황 때문에 생긴 것만은 아니요 이런 방법을 동해서 그는 자신의 과거 기고 만장해 하던 자만심을 완전히 벗어 버리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의 과거의 무지를 지적받은 셈이었다. 그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는 그의 자랑만 보더라도(행 22 : 3) 그는 자신의 명석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명석은 한낱 무지 (blindness)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마음으로 보기 시작하도록 하는 뜻에서 사흘동안 시력을 박탈당했다. 말하자면 스스로 현명한 체하는 사람은 모조리 진정한 지혜의 양식에 따라 개조되기 위해서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의의 태양인 만큼 우리가 당신없이 본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마음의 눈을 여는 분은 당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면이 바울에게 제시되었으며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데, 그의 시력이 비늘로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통찰력을 모두 무지로 돌리고 과거에 없었단 새로운 빛이 그에게 필요 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참된 빛온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그의 은총이 아닌 어떤 방법을 동해서도 허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더우기 그는 사흘간이나 굶어서 허약해져 있었는데도 자신이 세례를 받기 전에 서둘러 음식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배우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영혼이 생기를 얻기 전에 자신의 몸을 먼저 회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