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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8:4)

1. 성경 (행8:1 ~ 8)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1)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2)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3)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4)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5)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6)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7)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우선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신자들의 상태가 어떠한가 하는 일이다. 즉 시편 44펀 22절에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도살할 양과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그것온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에게 자기들의 마음에 품은 잔인한 행위를 감행할 수 있도록 지배하는 자유를 주셨을 때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는 그 박해의. 결과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보게 된다. 즉 박해는 복음의 진보를 크계 저해하지 못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그 전진을 위하여 보탬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누가가 언급한 것과 같이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그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일치 안으로 집합시켰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나의 기적이었던 것이다. 이제 차례대로 그러한 점들을 하나 하나 고찰해 보자.

 

"1 그 날에" ; 스데반에게서 일은 시작되었다. 그 후에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그들의 맹위가 떨쳐졌다. 왜냐하면 마치 사나운 들짐승처럼 그 불신앙의 사람들이 일단 피를 맛보게 되자, 그들은 피에 대한 욕구가 어느 때 보다도 더욱 강렬해져서 가일충 학살행위로 자신들을 달려가게 하였기 때문이다. 일체의 잔인성의 아비인 사단은 일단 그들에게 무고한 피로서 더럽혀지게 하여 먼저 인도적인 행동의 감각을 빼앗고 그리고 나서 만족할 줄 모르는 목마름을 그들에게 일으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잔인한 살육행위에 대한 이러한 맹렬한 충동의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결과로 일단 시작되면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멈추지 못하게계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아무 구애 받음이 없이 손 안에 쥐어져 있을 때에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이 자기들의 손에 쥐어져 있을 때에 그둘의 뻔뻔스러움은 자기들의 하는 일이 성공적일 때에 머욱 중대된다. 그렇게 되서 가일충 그들은 억재할 수 없이 되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는 역시 큰 핍박이 났다고 말함으로써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확실히 교회는 이제까지 조금도 평안하지 못했고 또 악한 자들로 인한 시달림에서 면제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잠시동안 휴식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아껴주셨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욱 심하게 괴로움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우리 자신의 시절로 적용되지 않을 수 없다. 만일에 우리의 적들의 광포가 이를테면 그 불꽃이 멀리에 뛰어 붙지않을 만큼 잠 속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는 그것은 주께서 우리의 약함을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에 대한 적개심이 영원히 끝나버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저들이 갑자기 또는 가끔 우리를 향하여 무섭게 달려드는 더 큰 공격에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음의 일도 또한 기억하여야한다. 즉 만일에 한사람의 지조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 하여금 잔학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죄과에 대한 비난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스데반 시절에 교회가 평상시보다 더욱 심한 괴로움을 받고 있었다고 누가가 기록했을 때에 그는 그 사실로 인하여 스데반에게 오욕의 낙인을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연대기수(聯隊旗手)처럼 용감하게 싸운 자기의 시범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누가는 그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라고 호칭하였을 때에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 밖의 교회들이 다른 곳에도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후에 생겨난 사건들에 대하여 하나의 전기(轉機)를 스스로 만듣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신도들의 집단이었으므로 도피로 말마암아 그것이 산산 조각으로 부서졌던 것인데, 그러나 끊겨지고 흩어진 회원들로부터 즉시 많은 교회들이 발생하계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은 종래에는 예루살렘의 담장 안에 폐쇄되어 있었는데 이제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나가계 된 것이다.

 

"다~~~~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 모든 사람이 다흩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은 멀리 그리고 널리’ 혹은 ‘모든 곳' 하는 우리의 표현에 대해서 보편적인 어법을 사용한다. 요점은 이렇다. 즉 위험은 특정한 몇몇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원수들의 잔학성이 전체 교회를 통하여 발광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혼히 아주 사소한 소문에도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 그들은 심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의 그 사람들의 도주는 전혀 다론 이유에서였다. 왜냐하떤 그들온 조금도 허둥지둥하거나 대경실색하여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악한 자들의 광포가 어떤 다론 방법으로는 끝장을 가져오게 할 수 없었음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그들이 유대의 여러 곳으로 흩어졌을 뿐 아니요 ‘사마리아'까지도 갔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았던 그 ‘중간에 막힌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엡 2:14). 왜냐하면 사마리아의 개종은 이방인들의 소명의 첫 열매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과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할 때는 받았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 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사마리아에는 가짜 예배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고 (요 4 : 22-역자 주) 그것은 오직 생명없는 모방행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때에 복음을 위한 문을 활짝 여셨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왕권이 예루살렘에서 내쫓김을 받았을 때에 그것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사도들을 그 수효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도들이 일반적인 위험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요, 선한 목자의 의무가 양무리의 안전을 위해서 습격해오는 이리 떼를 막아내는데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 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것인데 폭력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추방되게 되었을 때까지도 그들은 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가?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램으로부터 시작하도록 그들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안내자가 되셔서 그의 손으로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시게 되는 사실을 그들이 확실히 알게 되기까지 그들은 거기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조심하는 심정으로 복음의 선포를 위하여 전진하였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들에게 걸머지위진 채무로 인하여 위축되었기 때문이 아니요, 다만 그들이 그 일의 새로움과 익숙치 못함으로 인하여 당황하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온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그처럼 강력하게 저항을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최초의 처참한 장애를 돌파하기까지는 다른 어느 곳으로 과감히 옮겨가지 않은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거기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기들 자신의 편안과 안전이나 편의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고생스러운 짐을 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계속 많은 위험 속에 놓여 있었으며 그들은 최대의 원통함으르써 속을 썩혔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고 었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그밖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망했을 때에 그들이 남 아있었다는 사실은 겁내지 않는 확고부동한 명백한 증거이기도 한 것이나. 그들이 모두 한 곳에서 일하지 않아도 좋도록 그들 자신이 지역을 할당하여 나뉘어 갈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 한다. 즉 예루살렘만이 그들 모두에게 충분한 일을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그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자진하여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은 찬양할 만한 일이었다고 누가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동일한 책임 (quorum Jiherio11 fuifl conditio)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의 도망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자기들의 사명이 특별한 것이었음을 곰곰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명이란 즉 이리 떼들이 양무리를 습격해 왔을 때에 그들의 수비를 충실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터툴리안이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박해의 두려움을 피하여 도망하는 일의 타당성을 예외없이 부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엄격한 일이다. 교회가 그들의 목사가 도망했기 때문에 적에게 굴복하지만 않게 된다면 그런 정도의 도망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어거스턴의 견해가 보다 낫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매우 좋은 중용책이다. 즉 그는 육체의 소심성에 너무 치우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의 생명을 구할만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무모하게 죽음으로 돌진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 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호노라터스(Honoratus) 에게 보낸 제180 서간문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사도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만일  그들이 바로 그 초창기 시절에 박해롤 두려워하여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그들을 고용군들이었다고 당연히 말하지 않을 것인가?  그 당시에 그 자리를 그들이 떠났다면 얼마나 유해하며 파렴치한 일이었겠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의기를 꺽어버리는 일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겠는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손상을 끼쳐 주눈 악례가 되었겠는가?  사실 때로는 목사도 역시 도망하도록 허용되는 일이 생기게도 될 것이다.  즉 목사 한 사람만이 공격을 받게 된다면 또는 그가 부재 중이기 때문에 교회가 흩어지게 될 염려가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만일에 그 싸움이 자기와 양 무리들이 공동으로 개입된다면 그가 끝까지 참고 견디어내지 않을 때에만 그는 자기 직책에서 배신하는 이탈자가 되는 것이다. 공직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보다 큰 자유가 있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 박해의 열기 속에서 신도들의 마음은 굴복하지 아니하였으며 과중한 열기에 태워지지 않은 듯이 참된 종교의 의무에 자신들율 헌신하였다는 것을 누가는 보여준다. 장례하는 일온 그리 대수롭지·않은 일처럼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한다는 이야기 이상으로 그들은 눈을 바로 뜨고 자기들의 생명의 위협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상황은 그들이 대담하계 죽음을 무시한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처럼 한편 우리도 역시 그 사실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그 사건에 대해서 그처럼 마음을 쓰게 된 데에는 매우 강하고 필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순교자란 그리스도께서 그듈 안에서 그의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 훌륭한 승리를 거두신 사람들인데 그러한 거룩한 순교자의 몸이 야수듣에게 던져진 채로 버려져서는 안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 훈련을 위해서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닌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스데반과 함께 죽는 일에 동참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해서 참으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순교자를 장사지내는 그들의 열심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데서 오는 무적의 견고성을 나타내는 실천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분별한 열심으로써 상대방을 약올리기 위하여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바빴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또는 어디서나 신자돌 가운데서 유효할 수밖에 없는 그 일반적 이유도 역시 그들에게 중요하였다는 것도 의십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장례식은 부활의 소망에 유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창시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 목적을 위해서 마련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체를 고의적으로 매장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일은 언제나 비인도적인 야만행위로 여겨졌다. 미개한 사람들은 왜 그들이 그처럼 장례하는 권한을 신성시하여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목적이 확실하계 알려져 있다. 즉 생존해 있는 자들은 시체들이 죽음에서 나시 부활하계 되기까지 하나의 감금소와 같은 땅 속에 위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일이다. 이로 인하여 분명한 것은 이 의식이 죽은 자에게 보다는 차라리 산 자에게 가치있는 일이라는 사설이다. 그러면서도 한 우리가 축복된 불멸성이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 시체에 대해서 거기 해당한 영예를 부여하는 일이 우리의 인간성의 일면이기도 한 것이다.

 

"위하여 크게 울더라" ;  누가는 또한 그들의 슬퍼하는 일에서 그들의 경건과 신앙울 고백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왜냐하면 슬프고 불행한 사건은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전에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여러가지 원인들을 단념하게 만들어 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 반하여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술품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나타내 준다. 즉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것 때문에 원인에도 후퇴하려는 생각을 고집하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큰 손실을 입었는가를 반영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인간들이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인간들에게 전적으로 둔감할 것을 (stuPz"dos) 요구하는 저 어리석은 철학이 거부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배척한 예전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상식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에도 그와 똑같은 어리석은 생각을 즐겨 교회안에 끌어 들이려는 어떤 환상가들이 많이 있다. 또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는 무쇠의 심장을 요구하면서 그들 자신은 더할 나위 없이 연하고 나약한 것이다. 그들온 다른 사람듈에게는 한 방울의 눈물도 허용하지 못하지만 만일 자기들이 원하고 있는 일과는 달리 무슨 일이 생겨난다면 그들은 끝없고 비탄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장난기 섞인 투로 말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그돌의 자만심을 재미있게 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이들까지도 웃을 웃음거리로 만드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격 속에 부여하신 감수성온 그 자체로서는 그것을 주신 창조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패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먼처 그 경우와의 관련에서 평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둘째는 그것이 절제있게 작용한다는 제한성을 보유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의 온사를 기뻐하여야 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이기보다는 나무나 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은사들이 없어질 때에는 역시 슬품이 허용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본 귀절에 돌아가 말한다면 바울도 신자들이 자기들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어서 떠나갔을 때에 그들에게 전적으로 슬퍼하는 일을 금지하지 않고 있다(살전 4 : 13). 그렇지만 그들과 불신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온 소망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야 하며 견디기 힘든 조바심을 치료하는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설제적인 죽음의 근원온 우리에게 매우 당연히 슬품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술품을 가라앉히는 적절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훌륭하고 특출한 사람들을 잃게 된 사실을 우리가 비통해 할 때에 거기에는 술품의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과잉울 교정시켜 주는 그러한 위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 ;여기에는 유의하여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다. 그들의 원수들의 잔학성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잔인한 이리와 같은 바울을 하나의 목자로 만드심으로써 그를 명예롭게 하신 하나님의 자애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일이다.  왜냐하떤 그가 떠들어대고 있었던 파괴의 열의는 모든 희망을 다 끊어버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나중의 회심은 일충 더 눈부신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잔인한 섬멸전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가 다른 악한 자들과 함께 스데반을 죽일 음모를 꾸며온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과하신 형벌이있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끔 버림 받은 자에게서 보다 택함 받은 자에게서 더 엄격하게 죄를 벌하시기 때문이다.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 누가는 또한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즉 신도들의 흩어져 간 일이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일치로 인도하게 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경륜에 의하여 생겨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어두움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시는 정상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오직 한 장소에서만 들려졌던 복음의 소리가 이제는 어느 곳에서나 들려지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사례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즉 우리는 박해에 굴복하지 말고 차라리 용감하게 되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피했을 때에 그들은 추방으로 인해서나 또는 그 순간의 괴로움으로 인해서나 혹은 장래에 대한 무슨 불안감으로 인해서 낙심함으로써 비겁 훅온 무기력에도 퇴화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마치 자기들은· 조금도 어떤 괴로움을 받아온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에 여전히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리고 누가는 그들이 자주 거주지를 옮김으로써 방탕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사람들의 형제로 간주되기를 원한다면 어떠한 십자가의 괴로움이나 두려움이라도 우리가 계속적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일에서 실망감을 갖게 되지 않도록 열심으로 우리 자신을 격려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진 시키는 일에 결코 피곤을 느끼지 않도록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순교를 경험하는 일의 첫 사항인 이 추방과 도피가 우리로 하여금 벙어리가 되게 하고 활기를 잃게 해주는 일은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다.

 

"5절 " ; 누가는 그들이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특히 빌립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것은 그의 선교가 다른 사람들의 선교보다 더 효과적이거나 열매를 많이 맺었기 때문만이 아니요,  또한 다음에 누가가 첨가하계 될 잊을 수 없는 사건 (historiae) 이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마리아 성’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온 힐카누스(Hyrcanus) 에 의하여 파괴되고 그후에 헤롯에 의하여 재건된 세바스데 (Sebaste) 라고 불리어진 사마리아의 성 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요세푸스 (Josephus)의 고대사(Antiquities) 제13 권과 제15권을 참고할 것이다.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누가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전체 대의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조금 후에(12전) 그가 사용한 다론 표현이 실상 더 완전하다. 그렇지만 그것도 같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이름과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축복을 우리가 얻게 되는 일, 그리고 우리가 영적 의로 새로와지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음으로서 하늘 생명에 이르게 되는 일 둥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는 일들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교는 역시 그 자체 안에 이 기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로 인하여 파멸되어 있는 세상을 회복시킨다는 일이요. 또 그것은 그가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시키실 때 생겨난다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그가 우리를 그의 성령으로써 재생시키고 사단은 추방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더우기 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그가 앞서 보도해 주었으므로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빌립은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일 것이요 그의 딸이 역시 예언하였던 그 사람일 것이다 (행 21 : 9 참조).

 

"6 무리가 빌립의 말로 듣고 ~~~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쫓더라" ; 누가는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귀를 기울여 들었고 차라리 그들의 구미를 자극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 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자극제가 기적들로 인하여 가해졌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큰 관심을 일으켰다. 이것은 신앙에 이르는 적절한 도정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듣는데서부터 생겨 나는 것인데 (롬10:14참조) 아직 듣기도 전에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에 이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스스로 들으려는 의욕을 표시했다는 사실은 존경과 관심의 첫 계단이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세계에서 신앙이라는 것이 그처럼 희귀하고 실상은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다해도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과연 몇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황공한 심정으로 경청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기도 전에 또는 아주 미미하게 맛을 보기도 전에 그 진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듣는 일이 신앙의 시작이기에(fidei e~0rdium est auditus) 그와 동시에 만일 그 가르침의 위엄이 (doctrinae '111aiestas) 우리의 영혼에 감화를 주지 않는다면 듣는 일 자체 만으로는 넉 넉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누구나 자기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실을 곰곰히 생각해 보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에 겅멸하는 생각올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 자체는 권위를 얻게되며 따라서 듣는 일에서 자동적으로 관심이 솟아날 것이다 (sponte ex audz"tu) . 기적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면 그 기적들온 두 가지 용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가 안다.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들을 준비를 하게 하는 일, 그리고 복음을 믿는 일에서 우리의 결의를 확고하게 해주는 일 둥이다. ‘일심으로' (unanimlter)라는 부사는 들었다는 말에도 관련되고 관심을 일으켰다는 말에도 관련시켜질 수 있는 말이다. 나 자신은 후자를 더 좋게 생각하는데 그들이 일심으로 관심을 일으켰다는 견해롤 취하고 싶다. 이제 누가는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갑자기 꽁동일치하여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가르침의 힘과 효과를 칭찬한다. ·

 

"7 더러운 귀신들아~~~~" ; 사마리아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기적으로써 빌립에게 권위를 주도록 유발되었는가를 우리가 알기 위해서 누가는 간단하게 몇 가지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더러운 귀신이 내뱉은 큰 소리 지름은 반항의 표지였다. 그러므로 비록 악마가 완강하게 저항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권위로써 악마를 억압하신 사실온 그리스도의 능력을 과시하는 일에 있어서 크게 가치있는 일이었다.

 

"8절 : ; 그가 언급하고 있는 기쁨이만 신앙의 열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비길 데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결과 이외의 다른 결과가 생겨 날 수 없다 (빌 4 :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