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13:42 ~ 5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2)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3)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4)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5)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6)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7)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8)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49)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0)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1)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5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42 저희가 나갈새~~~~~" ; 이것을, ‘유대인들의 회당으로부터' 로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이 더 어울린다. 말하자면 그들은 회중이 해산되기 전에 먼저 떠났던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보는 것은 '폐회한 후에' 유대인 가운데 바울과 바나바를 따른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 의미는, 유대인들이 아직 그들의 집회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을 떠났으며 , 그 때 이방인들로부터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았다는 말이다 후에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이 어느정도 모여든 것은 더 배우고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벌게이트역과 에라스므스역은 ‘다음 안식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가의 의미가 아니 다. 왜냐하면 여기서 취급되고 있는 사람은 이방인문인 만큼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듣기 위해 특별히 안식일을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날은 유대인들을 위해 정해전 날이지만 이방인들은 다른 날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의 욕망과 청탁을 여드레나 연기할 이유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에 그의 말을 듣고자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다음 안식일까지 빈둥거리게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 속에서 쉬지 않고 일할 거리를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라" ; (그들이 말씀을 말할 것을). 물론 다론 귀절에서는 ‘타' (ra; 그)를 ‘타 아우타' (ra a&ra; 바로 그)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누가의 맡을 그대로 옮겼다. 이렇게 되면 그 의미는, 그들이 그 주간에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이방인들에게 말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은 최초의 가능한 기회를 열심히 붙잡아 이용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어울리는 극소수를 제외 하고는, 경멸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제시된 것을 소홀히 여겼다. 누가가 일부러 ‘개종자들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들였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긴 족보를 자랑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교만으로 부풀어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43 더불어 말하고~~~~" ; 이것은 좀 애매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대인돌과 개종자들에게 적용해서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집착할 것을 권면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그들을 싸우게 만드는 준비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으며 그러기에 반대파의 공격을 이겨내려면 불굴의 용기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들이 전진을 보는 가운데 (駐II)바울과 바나바에게 계속 전진할 것올 격려하려 했다는 것은 적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바울과 바나바에게 적용한다면 참석했던 자들이 이 두사람에게 친절하고 정중한 안내를 받고 그들이 받아들인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물라는 경건한 권면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은혜'라는 말 속에는 복음에 대한 모든 신앙과 거기서 우리에게 오는 축복이 한 마디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의 부름이 포한되어 있다.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 ; 백성들이 모였다는 사실온 바울과 바나바가 이 안식일 전 주간에 빈둥거리지 않았으며 그들의 이방인들 속에서의 일이 허사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입중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배우려 했던지 그들 모두가 전반적인 문제를 보다 더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어 했으며 유대인들이 있는데서 그것이 논의되기를 바랄 정도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들이 비록 몇가지 유쾌한 맛을 보고 이끌렸지만 그들은 아직 복음의 가르침을 의심없이 .받아들일 정도로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회당에 찾아 온 것은 기대하는 마음과 더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 이끌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45 유대인들이 ~~~~~ 시기가 가득하여~~~~" ; 복음의 빛이 너무 가까이 비추게 될 경우 불경건한 자들의 분노가 발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특별히 건전한 교의가 발전하는것을 볼 때 그들은 펄쩍뛰머_더욱 더 광적인 공격을 퍼붓기 마련이다. 그러나 누가가 여기서 사용하는 시기 ' (열 성 ; zeal) 라는 말은 혼히 야망이 모든 분쟁과 지투의 어머니이듯, 그들이 그릇된 경쟁심에 사로 잡혀 바울과 바나바를 적대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과 이방인들이 동등하게 되는 것을 통탄하게 여겼다는점 에서 그들의 분노를 열성으로 본 것인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은 자손들의 마땅한 상속이 거룩한 가르침의 보화가 말하자면 모든 사람의 발 밑에 놓이게 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 (참람한 말을 하거늘). 저항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은 마침내 참람한 말을 내뱉기에 이른다. 이것은 사단이 불경건한 자들에게 사용하는 상투적 수단이다. 곧 그들은 이론에 궁하계 되고 패배할 경우 더욱 더 완고한 고집을 피우며 고의적으로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 참람한 말을 내벨을 정도로 미치게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도 반박하려는 열정에 사로 잡힌 나머지 저 벼랑을 향해 줄달음질하지 않으려면 더욱 더 초조하게 경계를 퍼지 않으면 안된다.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 누가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완고성에 박살이 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신랄하게 저들에게 공격을 퍼붓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저들을 이미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여유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저들이 오만하게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을 보고서 반대로 저들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쫓아 그것을 상속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잃어진 자들이 아니고서는 너무 과격하게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마지막으로, 버림받온 자들이 더욱 더 담대하게 진리를 대적해서 날 뛸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들은 성령의 불굴의 인내로 무장되어 마귀나 그의 일군들에게 굴복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아에게 강철의 얼굴을 한 버림받은 자들을 다스털 것을 명령하신 그대로이다.
"가로되~~~~~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 바울이 그들의 배은망덕을 비난하는 것온, 비록 그들이 모든 민족으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제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악의적으로 그 큰 축복을 내팽개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 올려 주신 명예롭고 탁월한 수준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자발적으로 이 큰 은총을 배척하고 있다는 비난이 따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제 복음이 이방인돌에게 양도될 시기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복음이 ‘먼저 그들에게 전파되는 것이'마땅했다는 그의 말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기에 대해서 말한 것으로 엄격히 제한할 팔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계시되기 전의 율법시대에는 유대인들이 맨 첫 번 사람들이었을뿐 아니라 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는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요 하나님의 특수한 민족으로 부르고 있다(출 19 : 5, 6).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의 입양이, 이방인들을 제쳐 놓고 그들만의 소유로 삼았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그들이 여전히 이방인들보다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아버지에게 화해 시키셨지만 이미 하나님께 가까이 있던 자들, 그의 가족에 속한 자들이 서열 상·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먼저 유대인들로부터 교회를 모으고 다음에 이방인둘로부터 교회를 모으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이것은 제1장 8절과 기타 다른 귀절에서 볼 수 있는그대로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의 연한 때문에 유대인들의 장자권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탁월한 지위를 누릴 예정이었다. 이러한 이론에 따라서 바울은(롬 1-: 16)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해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나타났고 다음에 헬라인들에게 나타났다는 말을 하고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처럼 광대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겨 주셨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이 자기들에게 거저 제공된 것을 배척한 사실은 그들의 죄악의 심각성을 돋보여 주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 스스로 영원한 생명에 부적격자라는 심판을 선언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요컨대 복음의 배척온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부정이므로 믿지 않는 자들율 정죄할 다론 심판관이 필요없다.
"너희가 버리고~~~~~~" ; 얼핏 보기에는바울은 올바른 변론을하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저 이방인들이 구원의 소망으로 들어 오기 위해서 꼭 유대인들이 거기서 배제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일단 복음을 받아 들일 경우 이방인들에게 둘째 자리를 허용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온 이 양자가 한 몸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복음이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기 전에는 이방인돌에게 울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사실 그는 이러한 완고함을 체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 받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왜 그는 이제 이방인들의 선택이 선민의 불성실에 의존하는 것인 양 말하고 있는가? 나는 그의 강조점이 _'우리가 향하노라’에 있는 것으로 대답한다.
다시 말해서 그가 유대인에게서 돌이켜 온전히 이방인들에게만 전념한다는 뜻이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이러한 방향 전환은 없었을 것이요, 교회의 품으로 들어온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묶어 양자를 똑같이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들의 ·동을 돌려 대고 그의 사역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있는만큼 그는 동시에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눈을 돌릴 수(誌12)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작별하고 이방인들에게 관심울 기울이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스스로 교회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더라면, 이방인들의 부름은,"그날에 일곱 외국인이 유대인의 옷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너희들과 함께 계시니 우리가 너회들과 함께 걷겠다'하고 말하리라”고말한 선지자의 말과 같았을 것이다 (슥 8 : 23).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배척과 더불어 공석을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의 부름은 새롭고 부수적 인 (accidental)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덧붙혀지는 것이 마땅했지만 후자가 떨어져 나가 제쳐지게 되었으므로 전자가 후자의 자리에 보충된 셈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사망은 이방인들의 생명이었으며(롬 11:12, 15, 24) 원 가지들이 떨어져 나가자 돌 감람나무가 거룩한 뿌리에 접붙혀진 셈이니 그들이 원 뿌리에 다시 접붙여질 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에게도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렇게 될때 온 사방에서 모여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될 것이다.
"47. 주께서 ~~~~~ 명하시되" ;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이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이사야 49 장 6절의 인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 가운데 그의 일군들에제 적용되는것이 많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많다’ 고만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특유한 표현도 있는 만큼 그러한 표현으로 그의 일군들에게 영광을 둘리는 것은 몰염치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부르는 것은 그가 유일한 속최 제물 (victima expiatrix) 이었으며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우리에게 화해시키셨으며 후에 사망을 정복하고 다시 일어 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회득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전체적인 본질은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일 군들을 통해서 행동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의 기능을 양도하고 있는만큼 그는 또한 그에 대한 표현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쓰고 계신다. 복음 전파가 바로 이 부류에 속한다. 사실 그분 혼자서만 아버지로부터 우리의 교사로 임명 받았지만 그는 자기 자리에 마치 자기 입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목사들과 일군들을 세우셨다. 따라서 유일한 권위는 오직 그분에게만 속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의 일군들을 통해서 전파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 전파 문제에 있어서 이사야의 증언을 자신에게 재치있게 적용하고 있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 이방인의 부름이 여기서는 옛날 백성을 거절하지 않는 방향에서 선언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방인들을 전에 그의 권속에 속해있던 유대인들과 연합하고 있다. 그는"네가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나의 종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 빛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로부터 그의 교회를 시작하고 후에 가서 그의 손을 이 방인 들에게 내 뻗는 것처럼 보이며 결과적으로 양자가 완전 일치된 신앙으로 한 교회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이 예언을 추론하되 유대인들의 배척이 없이는 이것이 성취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문맥 상으로 볼 때, 반드시 바울은 그 빛이 유대인들에게서 제거되기 전에는 이방인들이 빛을 받을 수 없다고 확연하는 것 만으로 볼 수 없다고 대답하겠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의미를, 너희들은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박탈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제쳐지고 우리가 이방인돌에게 관심을 갖는다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럽혀지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너희들만을 위해서 허용된 것이 아니라 "내거 너를 이 방의 빛을 삼아"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임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식으로 풀어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선지자의 말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본다면 거기에는 옛날 백성의 배척이 포함되어 있다는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맡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라엘이 모여지지 않는다 해도" (사 49 : 5這13) 그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영광스럽고 장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후에 그는 설명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한 백성 에게 제한될 수 없는 것은 그의 빛이 이 세상 구석 구석까지 구원의 헷살을 보내기 때문이라는 정을 덧붙이고 있다. 이방인의 부름에 대한 이 계기가 특별히 바울의 주목을 끈 것은 분명히 그가 유대인들에게서 일할 근거를 찾 을 수 없자 완전히 이방인듄에게 전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선지자의 말에서 ‘구원’이 및'다음에 놓이고 있는 점 울 주목해야겠다. 이것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 당신을 …·아는 것이니이다'하는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이다(요 17 : 3). 하나님 지식이 우 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근거라면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망의 멸진로부터의 유 일한 부활은 무지의 혹암에서 우리가 재빨리 빠져 나와서 그리스도의 산양 안에서 조명 을 받는데 있다는 이 야기 아다.
"48 이방인들이 듣고~~~~~~~" ; 이방인돌은 그들이 구원의 소망으로 부름받은 사건이 하나님의 과거 결정과 무관하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전 것이 아니라 수세기 전에 예언된 것의 최종 성취라는 점을 깨닫고서 기뻐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구원이 그들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둘의 신앙에 대한 특출한 확증이었으며 그들이 그처럼 열성껏 그리고 경건 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 라는 대목은 그들이 이사야의 예언의 전실성 올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이 자신들에게 제시된 이 가르침을 전십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그들온 일단 바울이 승리하는 것은 보고 더 이상 변론을 하거나 왈가왈부 하지 않 고 있는 점을 볼때 완전한 인준(subscriptio)의 뜻이 여기에 담겨 있다. 두 말 할것 없이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진심으로 순복할 때만 우리는 거기에 마땅한 영예를 둘리며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을 때 우리가 거기에 머 없는 수치를 둘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들이 유대인들에게서 본 오만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것을 맞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큰 마음을 간직하는 가운데 불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오만으 로 우리의 킬을 방해한다 해도 그들의 교만을 기피하고 무시하는 것이 마땅하다.
"믿더라" ; 누가는 앞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떠한 ‘영광'올 돌렸는 가 하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 문장은 그것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도 빠침 없이 모두 믿온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 로 작정된' 자들에 국한되었다는 점울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가 말하는 (i-ci-arµE'},)OC 데 타그메 노이 ; 작정 된)는 하나님 의 거 처 베 푸시 는 입 양 으로 선넥된 자들임에 틀림 없다. 이것을 신자들의 태도로 보는 것은, 다시 말해서 올바론 마음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 들인 것으로 보는 것은 터무니 없는 트집이다. 왜냐하면 이 목별한 예정은 오칙 하나님의 영 원한 계획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역시 그들 이 신앙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타 생명으로 예정된자들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온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영원한 생명을 상속하도록 예정하시 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이 귀절은 신앙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존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온 인류는 눈이 멀고 오만한 만큼 우리 본 성에 고정되어 있는 잘못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교정되기 전에는 그대 로 남아 있지만이 교정은 오로지 선댁이타는근원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다. 왜 냐하면 동일한 가르침을 함께 듣고 있는 두 사람 중에 한 사탑은 순응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악의를 고집하는 경우 이것은 그들이 본성에 차이가 있 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타 하나님께서 전자는 깨우쳐 주시지만 후자는 그 은해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갈3 : 26), 믿음은 우리의 경우에 관해서 생각할 때 어디까지나, 구원의 충입구자 시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겅우에 입각해 서 생각할 때는 더 깊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믿음다음에 우 리를 선택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싶앙의 온사를 몽 해서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그의 입양(入養)을 확증하시며 그 결과 이 입양 이 더욱 명백하고 착실하계 나타나도록 해주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의 제자가 되는 것이 그의 자손들만의 특권이 아니라면 그것이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무분별하계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그러므로 한 사람도 빠침 없이 모두가 복음을 받아 돌이지 않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비록 하늘 아버지께서 인간의 외적인 음성을 동해서 모든 사람을 신앙으로 부른다 해도 그는 그가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자들만을 그의 영을 통해 겨 효과적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는 그의 선택이 신앙과 구원의 원인이라면 그 결과는 인간의 가치나 공로 데는 의지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으로 그 티프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입양에 대한 보증과 담보불 받는 자들은 이미 전에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이라는 누가의 의미를 명 확히 파악하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는 또한 복음 전파 그 자체가 미치는 효과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가 선택하신 자들을 내면적으로 불러 주시며 이미 당신의 백성인 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이꿀어 주시기 전에는 복음 전파 가 사람들에게서 신앙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누가는 이 말을 동해서 선택받은 자들은 그 어느 누구도 멸망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선택자들 가운데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선대받은 사람 모두가 믿온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입양(入養)을 포착하기 전에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해 도그의 은밀한 섭리 속에서 생각해 볼 때는 거기에 전혀 미심쩍거나 주처 할 사항이 전혀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 모든 사람을 그는 마 지막 순간까지 신설한 수호자로 남아 있을 그의 아들의 보호와 관심 에 위 탁 하시기 때문이다. 두가지 면율 다 알 필요가 있다. 선택이 신앙에 선행한다는 사실이 확증되고 나면 인간이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서 뽐낸 근거가 자기에게는 전혀 없 다.
다시 말해서 신앙 속에 구원이 있고 이 구원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입양의 중거요, 이 입양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하나되게 하고 그 의 생명을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며 이 생명율 동해 우리가 그의 의와 함께 하나님을 소유하며 마지막으로이 의를 통해서 우리가 성화의 온사를 받는다 턴, 곧 믿음의 기초가 우리와 무관하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속에 있다면 우리는 기필코 우리의 모든 축복을 우리가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우리에게 오논 하나님의 은혜로 둘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숨은 계획속 에 자신돌의 구원이 들어 있나 들어 있지 않나하고 파고 들면서 쓸데 없이 혼잡하고 무성한 엉겅퀴의 상상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모두 하 나님의 선택이 신앙으로 확증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신앙의 담보 호서 그리 스도만을 바라보며 복음을 통해 서 우리 에 게 드러 나 이상의 고 있는 확실성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누구든처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요 3 : 36)는 말씀을 충분한 중거 (Sign) 로 삼도록 하자.
"49 주의 말씀이~~~~두루 퍼지니라" ; 여기서 누가는 복음의 전전을 보고 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은 누룩과 같다는(눅 13 : 21) 그리스도의 비유의 전 실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 여 들었으며 그 결과 참된 가르침의 씨앗이 온 도시에 퍼지계 되었다는 점 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그것이 좀더 넬리, 곧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i .
"50절" ; 그러나 여기에는 땀과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부름의 시작은 순조롭고 위업에 차 있었으며 사단은 하나님의 은혜의 과정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경기장에 선수로 데려 온 바울과 바나바는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을 박해하는데 있어서 ‘경건한 귀부인들과 성내 유력자들'이 선동을 받온 것으로 말하는 누가의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무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인, 사람들 보기에 그처럼 큰 평판을 받는 남녀들이 그리스도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여간한 시험이 아니었다. 수 많은 군중이 그리스도를 받아 들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찌꺼기인 군중에 불과 했다.'저쪽 반대편에는 천하고 볼품없는 군중을 자신들의 광채로 살며시 억눌러 버리는 그 도시의 우두머리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 모로 보나 경건하고 명예로운 귀부인네들께서 이 가르침에 대해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이 가르침을 미심쩍계, 아니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려나 아무짝에도 쓸데 없을 뿐 아니라 염치없이 방탕한 사람들이 그들의 유홍장이나 주막에서 털털 털고 일어나며 우굴거리는 창녀들이 매음굴에서 뛰쳐 나온다해도, 이것은 복음에 결코 수치거리가 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복음의 장대함을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내 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연약한 자 둘은 이처럼 원수가 많은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아직 유약한 초신자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확증을 받아 그들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게 될 뿐 아니라 바울과 뱌나바에게도 손길이 뻗치계 됨으로써 그들이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은 꼭 필 요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부류를 통해서 우리가 이러한 장애물을 전력을 다해 물리치며 쓸데 없는 덕의 가면이 우리의 눈을 멀게해서 우리가 복음에서 환하계 비추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들이 고안해 내는 모든 덕과 정직이란 그리스도와 비길 때 한낱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얼마 동안 정신없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반격을 가하는 사람이 후에 제 정신을 차리는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제 아무리 성결을 가장한다 해도 복음을 저항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경외산을 부여 받지 못한 자들이요. 그들이 내보여 주는 모든 디이란 기만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기정사실로 받아돌 이지 않으면 안된다.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자(눅 2 : 35)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에게 공연히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경건한 귀부인들~~~~~~" ;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는 것을 가리켜 무슨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전십으로 예배하는 자둘이 조금겨밖에一없듯이 · 하나님 께 공공연하계 무시 무시한 욕을 퍼붓는 사람도 조금 밖에 없다. 이 양자가 두 부류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완전히 신앙심이 없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공공예배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것도 아니지만 깊이 파고 들어 보면 산앙이 전혀 없는 것이 드러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돌은 형식적으로 차갑게 하나님과 여기(餘技)를 하고 있는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이런 저런 모양의 의식과· 어줍잖은· 하나님 예배의 고백밑에서 많은 사람들의 불겅건이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겉치레와 헛된 흉내에만 성결성이 들어 있을 분인 연극처럼 꾸며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play-acting worshippers_of God)은 어느 시대고 있어왔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바울의 시대에도 특별한 신앙심은 오직 극소수에게서만 드러났지만 비록 신앙이래야 불결할 뿐이요 마음이 거짓되고 이중적인 사람들 역시 그릇된 열성이지만 그들의 열성 때문에 종교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겉치레뿐인 신앙이 예배자들을 곤두박질하게 내 쫓으며 무분별한 열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반기를 돌며 그의 영광을 억누르는 여기서 그 걸치레 신앙은 그 진면목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저 귀부인네들이 완전히 유대교에 전향 한 것은 아니요 율법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은 반(半) 유대 부인 네들 (semi-Jewesses) 이나 다름 없었으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들이 그처럼 적극적으로 이 나라의 변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섰 던 것 으로 생 각할 수 있다· 바울의 증거에 따르면 여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침의 노예가 되어 이런 식으로 빙빙 불림받기 일쑤이다.
"51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마 10 : 14; 눅 9 : 5; 10 : 11) 이것이 유대인들 사회에서 저주의 상칭이었다는 점융 앙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에 대한 엄청난 자발적인 멸시자들에게 공포 싱을 붕어 넣어 주는 것이 그의 의도였던만큼 그의 제자들에게 생소한 상창 을 사용하게 하셨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타 이런 방법을 통해 서 그는 불경건한 자돌이 하나님께 얼마나 가증스럽든지 그들의 불결이 우 리에게 전염되지 않게 하려면 그들과 전혀 상종하는 일이 없도록 크게 경계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사실 모든 악인들은 그듄이 걷는 탕 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그처럼 큰 처주로 배척하라 고 지시한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대한 배척자들 뿐이다. 그 어떤 간음죄나 간통죄를 범한 사람, 그 어떤 위증자, 그 어떤 술주정뱅이, 그 어떤 살인자 를 파문하지 았으면 안될 경우타、할지타도, 이와 같은 상징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에 대한 모욕이 하나님께 얼마나 용납할 수 없 는 것인가 하는 접을 우리는 여기서 명백히 알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발 의 먼지를 털어버릴 것을 명하시는 것온 그들이 사단의 쇠고랑찬 종들이요, 완전히 버려진 절망적인 사람들이요, 지상에서 근절되어 마땅한 사람들이라 는 접을 그가 선언하시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다타서 이와같은 냉 혹성에서 우리는 복음에의 존경을 배워야겠다. 말씀의 일군들은 또한 말씀 의 위엄이 얼마나 열성껏 확증되어야하며 무관심한 나머지 그것에 대한 겅 멸이 그냥 지나치는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여기서 배우고 있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 이 문장은 두가지 면으로 설명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성령 의 기쁨, , 또는 ‘영 적인 기쁨' 으로 충만한 것으로, 곧 환치법 (hypallage)으로 보는 것 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깨끗한 양심, 평화, 또는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 성령 안에서의 의, 평화, 및 기쁨으로 말 하고있다(롬14:17). 다른하나는 ‘성령’이라는 단어 자체에 다른 덕과 은사가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이 기쁨으로 충만했다" 는 편을 택하는 것온 성령의 은혜가 그들 속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 성령님의 지배만이 우리가 이 온 세상 위에 들어 울려질 정도로 순수하고철저한 기쁨울 가져 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누가의 의도를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신실한 자들은 이처럼 심각한 장애물, 그들의 가르침들의 더러움, 그 도시의 소란, 경종과 위협, 심지어는 눈앞에 보이는 위험에 대한 공포, 이 모든 것 때문에 당황하거나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자 신들의 깊은 신앙에 따라 그들의 어줍잖은 성결성과 세력을 뽐내는 것을 단호하게 무시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접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에게 제대로 기초하고 그의 말씀에 깊은 뿐리를 박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 것이 성령의 보호로 완전히 확고부동하게 된다면, 설령 온 세상이 들고 일어 나서 소동을 피운다해도 튤립없이 그것은 우리 마음에 평안과 영적인 기쁨 을갖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