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17:22)

1. 성경 (행17:22~34)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2)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3)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4)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5)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6)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7)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8)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29)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0)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1)○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32)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3)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3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2. 아덴 사람들아." ; 사람들은 바울이 했던 이 설교를 다섯 부분으로 나 누는 것이다. 누가는 바울이 길게 말했던 것들을 단지 간략하계 언급하고 있지만 나는 그가 중요한 것들 중에 아무것도 생략하지 않고 그 요지를 모두 말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첫번째로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미신을섭기고있 다고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선을 섭기는 행위는 되는대로 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는 어떻게 생기신 분인가, 그분을 바르게 섬기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자연을 근거로 한 논증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번째로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조성자요, 창조자를 알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음에도 소경들처럼 어두움 가운데서 방황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계 비난하고 있다. 네번째로 사람의 마 음은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 는 것보다 더욱 불합리한 행위도 없다고 경고한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그는 그리스도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복음에 대한 믿음 에 관하여 말하기 전에 처음 네 가지 요점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논하고 있었 는데 이는 가치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성이 많도다."  ; (데이시다이모니아 ; 신들을 경외함, 혹은· 미신)는 헬라어에 있어서 좋은 의미로 쓰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 말 이 때로는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공연히 두려움으로 망설일 때 근심 중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심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본 절에서의 의미는 아덴 사람 들이 ‘지나치게 하나님을 섬기다' 혹은, 마치 바울은 그들이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을 따라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지쳤기 때문에 무엇을 할 것인지 에 관하여 자기들의 머리를 쓰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그들이 ‘중용이만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알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말도 그만큼 많았다. 그의 설교 내용에 관하여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온 아덴 사 람들의 모든 종교는 부패되었음을 한 가지 근거로써 증명하고 있다. 그 근거란 그들이 어떤 신들을 섬겨야 할 것인지 분명하계 알지 못하여 잡다한 의식을 닥치는대로 분별없이 그리고 실로 무한정하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들(ignotis diis)을 위한 단을 세웠다는 사실온 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들이 어떠한 확신온 갖고 그들은 많은 신화들을 가전 극히 많은 신들을 받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이 이 많은 신에다 알지 못하는 신을 부가했을 때 이 사실로써 그들은 참 하 나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떤 확실성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이 만든 신을 섬기는 것이 된다. 아무렇계나 믿음을 가지는 자들은 자신들은 아무리 즐거워하고 있더라도 그 신앙에 지식과 진리가 충분하지 못하다면,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며 거룩하고 합당하다고 인정될 수 도 없다. 그들이 밖으로는 아무리 자랑해도 양심 속에서는 계속 혼동을 느 끼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도 죄의식을 갖지 않을 수 가 없다. 왜냐하면 미신이만 언제나 마음에 동요를 주며 계속적으로 어떤 새 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확실한 빛을 갖지 아니한 자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스스로 불안하며 하나님이 보실 때 헛되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 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불신양자들이 자기들의 고집으로 완 고하여 소경이 되어 있고 극히 많은 불확실한 것(駐12)들 속으로 휩쓸려 듈 어가는 한 그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그들은 자주 자신들을 속 이고 있을(注13) 뿐만 아니타 그들의 불합리함을 감히 귀속말로 알려주민 그들온 그 알려 주는 사람을 향하여 사납계 흥분한다. 이 러 한 방법 으로 마귀 는 그들을 홀리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거리낌이 방해하거나 어떤 속이는 자가 일어나거나 어떤 새롭고 열광적인 일이 나타나면 그들은 의심 중에 불안해 할 뿐만 아니라 이쪽 처쪽으로 휩쓸려 가도록 자신들을 방임한다. 이 사실온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평범한 관습에 있어서 판단이나 마음의 안정된 상 태로써 묵묵히 따르는 것이 아니타 술취한 사람처럼 우둔함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불신앙자들을 평안하계 해주지 않는 근심은 차라리 그와 같 온 우매보다는 참을 수 있을 만하다.

 끝으로, 미신에는 항상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신은 여러가지 잘못으로 뒤얽혀 있기 때문에 마음 울 교란시키고 불확실에 의한 불안으로 마음을 고통스럽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들을, 자기들 생각에 자기들이 알 고 있다는, 그들 나타 안의 신들에게 부가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 상에 따라 그들 나타 안의 신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후원자(indigdas)와 민족의 신이라고 불렀던 그들의 조 상들로부터 전하여 받은 그 민중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오고 있을 때 그들 온 그 신들에게 자기들이 할 일을 다하지 못했음을 인정한 사실온 그들의 무모함을 분명 히 보여 준다. 그러 므로 그들의 마음에 뿌리 박힌 모든 그릇된 컨해들을 없애기 위하여 바울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들 o]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이 어떤 명확한 신을 모시고 있지 않다는 사실 움 자명한 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어떤 신을 알았더라면 그누 들은 그 신으로 만족하고 ‘알지 못하는 신’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쇄냐하면 참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 자체가 모든 우상 울 멸망케 하기 때문이다.

 

"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  나는 이 신의 제단이 모든 이방 나라의 신들을 위하여 세워졌음을 주저없이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제롬(Jerome)이 한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바울이 신성한 속임수를 써서 많은 신들에 관하여 쓴 것을 유일하신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글은 어느 곳에나 공통적이었기 때문에 속일만한 이유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수로 되어 있는 말을 단수로 바 꾸어 말한(社14)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분명히 아덴 사람둘을 속이려는 목적이 아니었고 당시의 상황에 따라, 바울은 자기가 특별하신, 알려져 계 시지 않은,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어 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십히 많은 신들 가운데 어떤 정해전 신 겨울 갖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머릿말로서 말한 다음에 바울은 지금 자신을 소개하여 자기가 가르친 것에 대한 호의를 얻고 있다. 왜냐하며 이미 그들이 섭기고 있었던 이 새로운 하나님에 관하여 공공연하계 제시된 것을 무시하고 배격한다는 것은 바르지 못하며 

 그 하나님을 맹목적으로(temere) 섬기는 것보다는 그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은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기 전에는 그를 바르고 경건하계 섬길 수 없다는 원리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자기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든 종파를 배척하시고 자기의 말씀을 떠나서 사람이 고안한 것은 무엇이나 우상숭배임을 알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아덴에서 섬김을 받으셨다고 바울이 말하게된 경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에 일치되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예배라도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아니하신다면 바울은 이렇게 어리석음이 끝이 없는 이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다는 칭찬을 하고 있는가 ?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심에 있어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요 4 : 22)는 사실을 만족할 만한 근거로 삼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을 말살하고 그 기억 조차도 묻어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 대신에 쓰스(Jove)와 허메(Mercury), 그리고 팔라스(Pallas)와 그와 같은 불결한 귀신 무리를 섬기고 있는 아덴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바울이 아덴 사람들의 행위를 칭찬하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태도가 부패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태도를 소재로 하여 가르치고 있다고 대답한다.

 

"24 우주~~~~~ 룰~~~~ 지으신 신께서는~~~~" ;.. 바울의 의도는하나님의 본성이 무엇 인가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불경스러운사람둘을상대로토론하 고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증거를 취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그들과 논쟁하면서 성경으로부터 중거되는 말씀들을 인용했었다면 시간만 낭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거룩한 사도의 의도가 아덴사람들을 참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떤 신격이 있음과 자기들의 그릇된 신앙은 시정되어야 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세계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바른 길을 떠나 방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본성에 관 한 혼동된 견해가 지배적인 한, 오히려 세상온 미궁에 빠져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 왜냐하면 경건에 대한 참된 규범은,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예배하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전체적으로 논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로부터 예배를 받기에 합당한 어떤 신격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가 말해야 하는 첫째되는 요점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는 토론이 없었으므로 바울은 참 하나님께서는 모든 거짓 된 신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두번째의 요점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이 정의로 부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정의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誌15)자기들 스스로의 견해를 따라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만든 사실 외에 그처럼 잘못된 종파를 일으키고 조급하게 그 종파에다 계속적으로 다른 종파들을 부가하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향과 이해에 따라서 하나님을 해아릴 때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예배를 더욱 쉽게 변질시키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부패된 종교의식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요한복음 4장 24철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신비한 본질을 미묘한 방법으로 말하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로써 그에 대한 적합한 지식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의 근원이시며 창조자시요 주님이시라는 사실로부터 바울올 어떤 결론에 이르고 있는가? 그 분은 "손으로 지온 전에 계시지 아니 하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 지혜의 선과 능력은 천지에 무한하계 퍼져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정해진 곳 안에 한정되어 계실 수가 없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필수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기 위하여 상과 모습들을 성전 안에 세우며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충만하심을 알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주장하기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상숭배란 자기 모순이라고 잠시 전에 암시한 말은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불신앙자들은 자기들이 형상들을 향하여 자기들의 신으로 부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 (Dei)의 뜻 (numen)과 능력을 형상에다 한정하지 않았더라면 그 형상들로부터 도움을 기대하며 그것들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를 드렸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신전이 다른 곳들보다 더욱 신성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들은 아폴로 (Apollo)에게 신탁을 구하기 위하여 델피(Delphi)로 달려간다. 미네르바 (Minerva) 여신은 아덴에 자리와 거처를 잡고 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말이 그 거짓된 견해를 비난하고 있음을 본다. 그 거짓된 견해에 의하여 사 람들은 거의 항상 미혹당한다. 바울이 그 견해를 비난하는 이유는 그 견해 들이 육적인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최초의 방법은 이렇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시하고 우리의 정신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해아리지 아니하며, 더우기, 우리의 육적 이해에 따라서 우리의 정신 속에 그를 그려보지 아니하고 그를 세상 위에 높이 세우며 피조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온세상온 언제나 그와같은· 건전한 사고방식에서 멀리 떠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 속에는 항상 자기들 이 고안한 것들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망치려는 이 그릇된 본상이 있기 때문 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육저이고 세상적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본성과 일 치하는 존재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온 그들의 뻔뻔스러움에 따라서 하나닙율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분이 되시게 한다. 이와같온 날 책1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건하고 선명한 지 식을 망친다• 그렇다. 이 뿐만 아니타 바울은 "하나님의 전리문..-거짓 것으로 바꾸어"(롬 1 : 25)라고 말 하고 있다. 세상의 견해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텅 빈 그림 자가 겉 모습만을 붙잡는다. 우리 가 믿음의 날개로써 하늘에 오르지 않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생각들 가운데서 죽고 만다. '그리고 이 방인들이 저 어리석은 망상들에 의하여 속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율 하늘의 보좌로부터 모셔 내려서 이 세상의 요소 중에 한 부분과 그 요소와 동일한 것이 되시계 한다. 이와 동일한 일이 하 나님께서 그의 영적인 영광을 나타내어 주셨던 유대인들 중에 있었기 때문 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성전의 벽 안에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사야가 그 들을 책망하고 있는데(사 66: 1) 그가 그렇게 하는데에는목적이 있었던 것 이다. 그리고 누가가 제 7장(49, 51절)에서 전해주고 있는 스데반의 말로 부터 우리는 그 과오가 모든 세대에 많았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일 성령 께서 그 어리석음을 나무라셨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전 안에 갇혀 계시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잘못에 사로잡 혀 있음을 완강히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눈으로 성 전을 본 것 이상은 더 높이 울라가지 아니하고 그들은 성전을 신뢰하기 때 문에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자기들에게 매여 계신다고 자랑스럽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육을 가전 사람처럼, 성전에다 묶어두고 있기 때 문에 성령께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은 옳다. 미신은 그 자체가 모순을 일 으키고 있으며 상상에 의한 갖가지 허구적인 것이 되고 만나고 내가 앞에서 한 말은 참되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오태 전에 자기들의 과오를 이럭처 럭 위장 혹은 숨기려고 했던 그 변명보다 오늘날 고황과 그를 섭기는 자들 의 그것은 더욱 소용이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온 전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이는 미신을 섬기는 자 둘이 마치 교도소 안에다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붙들어 두려는 의 도가 아니라 그들은 육적으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 력(numen)을 우상에다 결부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외적 형상들에다 옮겨 주고 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손으로지온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면 하나님께 서 성경말씀을통하여 자신을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성전은 자기의 영원한 쉴 곳(왕하 19 : 15. 시 80 : 1. 132 : 14)이라고 증거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께서 어떤 한 곳에 매여 계시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 성을 땅의 상징물에 묶어 두려고는 의도하지 아니 하셨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자신에게까지 높이 들어 울리시기 위하여 그들에 케 내려오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과 법궤는 사람들에 의하여 극히 비참하게 남용되었다. 이 사람들은 성전과 법궤를 심히 숭배한 나머지 땅에 고착된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영적 예배로부터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없이 궁리해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과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사람들 은 육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항상 아래로 향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자기 말씀을 안내자로 세워 사람들을 위로 이끌어 울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한 걸음씩 하늘에 오르기까지 천천히 진행하도록 하시기 우]하여 잘 아는 방법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는 매개물로써 상징물들을 사용하 실 뿐이다.

 

"25 사람의 손으로~~~~~. 아니니."  ;  성전에 관하여 잠시 전에 설명된 것과 갇은 문제가 이제는 각종 의식에 관하여 생겨나고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종교의식에 관하여 바울이 정죄하고 있는 것이 모세의 율법에 의한 각종 의식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다. 즉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엄격하계 의식에다 그 근거를 두지 않고 이 의식은 자기들이 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연단시키는· 보조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침승들을 제물로드리고떡과포도주를 드리고 등잔에 불을 컬 때 그들은 경건이 이런 의식에 의존되지 않음을 알 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초저인 것들의 도움을 받는 동안에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 예배만이 가치가 있 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많은 성구 가운데서 자신이 외적 이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위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아니하시며 의식들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자신이 받으시는 예배의 방법은 오직 믿음과 순전한 양심, 기도와 갑사의 마음에 의한 것임을 분명 하게 선언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어떤가? 물론 그들이 상을 세 우고 향을 사르며 제례(祭禮)를 행하고 우상을 섭길 때 그둘은 경건의 의무 를 잘 이행했다고 생각했다. 전실로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시인들까지도 때 로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불합리함을 조롱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허식과 창려한 의식 가운데 하나님께 그릇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증거를 그만두고라도 이 페루시우스(Persius)의 증거는 유명 하다 (Sat. 1l. 69 이 하). '“대제사장이여, 말해주오. 신전에 있는 금은 어떤 가치가 있나요? 분명 히 소녀 가 비 너 스(Venus)에 게 바치 는 인형 만큼의 그건 소용이 있다. 우리 는 그 큰 데 살라(Messalla)의 반눈 감간 자들이 그들의 큰 왜 터 줄 수 없었던 질서정연한 정의와 공평, 영혼의 집시로부 신성한 비밀들, 그리고 관대한 미덕으로 가득찬 마음을 신께 드리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을 나는 신전으로 가져가리타. 그리고 내가 바치는 이 ; 駐16)져온 분량을 받아 주시리라" 하나님은 무식한 사람들의 핑계를 없애기 위하여 이 말이 들의 입을 통하여 나오게 하셨음에 의심이 없다. 믿지 않는 사람 온 즉시 다론 사람들이 가전 우매에 llll 그러나 이 말을 한 사람들 올 위한 이 말의 의미는 그들의 마음에 미치久 }져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 씬 분별력을 가전 사람들은 의 l 못했 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이 사실으 식들만으로는 가처가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지 않으면서도 의식이 코 확신함에 있어서 마음의 동요를 느끼 신성한 예배의 한 부분이라고 리하여 그와 같은 겉치레에 그들이 더 ° 스스로 믿고 있다. 그 은 경건의 의무를 바르게 실천하는 거 국 부지런히 헌신하면 할수록 그들 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가장 人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 까지 하나님께서 의식들과 다른 외적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 이르기 된다고 상상하여 인 것들에 의하여 그 자기들 스스로의 고° 노를 전정하시게 실행하고자 하고 있다. 바울은 이 묘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기들의 의무를 지 이유가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사실을 논박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한 가 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아't:J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T 것도 없으며 굽 주시 므로 사람으로부터 아 't:I }나님은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좋은 것을 아무것도갖고있지 O} T 것도 받으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모든 무 것 도 가질 수가 없 다며 스 포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을 떠나서는 아 느 ―스로 무엇을 가질 님의 순전한 은혜에 의하지 수 있겠는가? 그렇다, 하냐 않고는 사람은 아't:J 의지하고 살아가는 T 것도 아닌 존재다. 사담이 성 령을 하나님께서 거 t:: 상태로 돌아가지 丁신다면 사람은 곧 아무 것도 아닌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0 자기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께 l 사실을 볼 때 만일 사람이 뿐만 아니타 어떤 것을 가지고 예배하러 온다떤 무분별할 지나치게 교만하게 될 것이다. 만한 향기로운 제사(빌 구제 와 사랑의 봉사가 받으실 황과도 구별되어0 4 : 18 참고)라는 바울의 말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상 --一1= 한다. 지 구 0 o T리 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불신양자들이 하냐닙꺼l 드리는 영적 예배에 대한 구실로서 내세우는 의식들에 관한 문제일 뿐 이다. '생명과 호흡'이만 말로는 사람둔이 호흡 혹은 공기 (莊17)라고 부르논 것 데 의존되고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 이 문장의 마지막 귀결에 관하여, 오늘의 어떤 헬라어 사본이 ‘만물을 롱 하여'라는 의미를 가전 Kara 'lr:<X).)'r'a(카타 판타)를 쓰고 있다. 그러나 나는 벌게이트 성경이 번역한 &ac ra n:a).)ra(카이 타 판타), ‘그리고 만물을'이 더 저항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말이 더욱 분명한 의미를 가지며 풍부한 교훈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나 이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 아 무것도 갖지 않았음을 추측하기란 쉽다. 그리고 몇 헬라어 사본들도 이 번 역에 일치하고 있다. 

 

"26  한 혈통으로 만드사."  ;  바울은 지 금 아멘 사람들에 게 인류가 창조된 목적 에 관하여 말하면서 경 고하고 있 다. 이 렇 게 함으로써 그는 그들이 가전 생명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권하고 격려하려는 것이다. 모든 사 람이 같은 인생을 즐기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를 생 각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가전 부끄러운 배은의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럼 에 도 불구하고 이 짐 승과 같은 우둔함온 대 다수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 어 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땅에 살게 된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 주신 좋은 것들로 배부름을 얻고 있으면서 도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본성을 설명한 다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데 조심스럽계 관섭을 기울여야 한다는 적 절한 권고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피조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사 람이 출생한 목적도 이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은 사람이 사 는 이유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에는 한 가 지 종교만이 번창하고 있지 않고 나라들은 여러가지 종파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러한 잡다함이 부패로부터 연유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내 견해로는 "모든 족속을 한 혈동으로 만드사"란 말씀이 그의 설명중에 중 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혈연관계와 충생의 동일 근원은 사람들의 상호 일치 에 서 와 같은 역 할을 한다. 그러 나 종교야말로 사람들을 연합, 혹은 분리시키는 데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자실을 볼 때 신앙과 하나님 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변동이 심한 사람들은 본성으로부터 이탈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곳에서 대어나든지 세계의 어떤 지역에 서 살든지 모든사람이 일치하게 구해야 할 창조자요, 모든 사람의 아버 지 이 신 한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 그리고 장소와 장소 자이의 거리나 땅의 한계 나 관습의 차이, 그리고 사람들이 분리되는 어떤 이유타도 하나님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한 마디 로 말해 서 , 바울은 그들 중에 종교가 잡다하게 될 때 자연의 질서는 침해되고 그들 중에 보여저고 있는 그 신앙적 분산은 그 둘이 경건을 뒤엎고 있다는 중거가 된다는 사설을 교훈하고자 했다. 왜냐하 떤 그들은 모든 혈통의 근원이 되 시고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이다.

 

"거하게 하시고."  ; 누가는 그의 관습에 따라서 바울이 전한 말씀의 내 용을 요 약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 에 대한 구경꾼들로서, 마치 극장 안에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거하계 되 었음과 하나님께서 세상을 전적으로 다스리시는 중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섭 리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에 의심0 l 없다. 하나님께서 "저희의 연대를 정하 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 그는 이 세상이 하나 님의 손과 목적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으며, 한편으로 인간의 사건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상상하는 것처럼,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가 전해주는 몇 마디 말로부터 바 울이 극히 중대한 요점들을 논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 미리부터 연대를 정하였다고 그가 말했을 때 그는 인간이 생겨나기 이전에 하나님은 그들의 장래 형편이 어떻게 될 것을 정해 놓으셨음울 증거하 71 때문이다. 우리가 세장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가지 변화, 즉 나라들의 쇠 망, 국토 경계선의 변경, 도시들의 멸망, 민족들의 전복 등을 볼 때 우리는 어리서게도 행운이나 불운이 이 모든 사건들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냐 이 귀결 가운데서 하나님은, 바울의 입을 통하여, 한 국민이 얼마나 오래 촌속되기를 친히 소원하시며 각 국민이 땅의 어떤 경계 안에 있도록 의도하시는가를 자기의 목적에 따라 미리 정해 놓으셨음울증거하고계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두으 o 르 코 귀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땅의 경계를 정하신다면 사람들의 전반적인 인생의 과정도 정하실 것이타는 사실에 의심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무지 중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 나님께서 무턱대고 미리부터 아시고 의식없이 억측을 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지 않고 사건의 진전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 음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연대를 미리 보셨다고 말하고 있지 않고 7rp07:E1:arµEva(프로데 타그메 나 ; 미 리 정 하셨 다 ; 駐20),죽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자기 마음에 좋으실 대로 질서를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것들에다 처음부터 경계를 정 하신다고 덧붙여 말했을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손의 능력으로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_: 3)타는 말씀에 따라 그의 목져에 의하여 명하신 일들을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는, 전 중에 각 조(組)와 반(班)을 따라 구분선이 있는 것처럽, 각 민족이 정해전 경계로써 만족하고 각자는 자기 국민 사이에서 자기 거처에 살기 위 하여 사람들이 이 땅 위에 거하게 된 것을 알게 된다. 끝으로, 야심은 언제 어디에나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욕심에 이끌려 자기들의 경계를 넘고 있지만 사람들온 그 고집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을 그의 은밀한 뜻 안에 서 지시하지 아니하시게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 룰 뒤엎고자 땅 위에 소란을 일으켜서 하늘을 공격하는 것처럽 보이지만 오 히려 사람들온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간에 그 섭리를 확고히 세우게 되 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침내 친히 정하신 목저에 다라서 모든 것을 회복하시도록 세계는 갖가지 겨번의 순환을 동하여 바뀌고 있음 을 깨닫기로 하자.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찾아."  ;  이 문장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것부분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사람의 의무라는 것이며 두번째는 하나님 께서 친히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오시고 극히 명백한 표적으로 자신을 현저 하계 보여 주시므로 우리가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힘쓰지 않는 자들은, 마치 별거시켜 놓은 잔인한 침승이 본성에 의하여 반항하는 것처럼, 자기의 생활을 악용하고 있 으며 이 땅 위에 살 만한 가치 가 없다. 그리고 그같은 행위는 이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옳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창조자를 아는 데 가장 잘 활용 될 수 있는 지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분명히 불합리하다. 하나님께서 극히 친근한 방법으로 자신을 알게 해주셔서 소경 조차도 그를 감지할 수 있게 하신 그의 선하심을 우리는 특별히 눈여겨 보 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처럼 선명하고 분명히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지 못하여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우매 는 더 욱 수치 스럽 고 차마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눈을 위로 아태로, 어디로 둘리든지 살아있는 그리고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생각나 계 해주는 것들(imagines)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자신이 만 드신 것들 속에 자기 영광에 대한 분명한 암시를 넣어 두셨으며 어디에나 분명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에 이 표적들은 소경이 만져도 알 수가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사람들이 그처럼 분명한 중거에 의한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 중거둘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이 우맹일 뿐만 아니라 우둔함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본성적으로.하나님을 순전히 그리고 분명하게 알 수가 있 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 는 것은 단지 그들의 태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인즉 사람들이 눈을 감을지타도 하나님은, 말하자면, 매우 분명하계 보이시는 분이시기 때 문이다. 이 의문에 대하여 나는 그러한 못된 성미가 그들의 무지와 우둔과 섞여서 바론 판단과 참된 이해가 없이 그들은 하늘과 땅에 분명하계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모든 표져올 무시하고 있다고 답변한다. 그렇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며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는 믿음은 성령의 빛에 의해서만 나오게 되므로 본성만으로 는 우리 마음의 안내 자로서 하나님 에 게 까지 (illuc) 이 르지 못한다. 여 기 서 바울은 물론 사람의 능력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고, 그가 로마서 제 1장 20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토목 밝은 빛 가운데서 그들이 소경이 된다면 핑계할 수가 없음을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각이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실패하고 있지만 그 실패에 대하여 핑계할 수가 없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를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감각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 사 실에 관해서는 14장 17절에서 더 많이 논했다.

 

"그는~~~~~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 인간의 패역을 더욱 면밀하게 접 검하기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긴 우회져 방법이나 지루한 여행을 하여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시타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각자는 유의하기만 하 턴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타락한 후로 부터 이 체험은· 중어 들었지만 이 체험을 생각할 때 우리의 우둔은 책망을 면할 수가 없다. 세계의 어느 구석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어떤 증거 가 없는 곳은 없지만 하나님을 붙들기 위하여 우리들 자신 밖으로 나갈 필 I 요는 없다. 하나님은 그의 내적 능력으로 우리 각자에게 크계 감화를 주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느끼게 되어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므로 우리가 가진 우둔함은 기괴하다. 어떤 철학자들은 사람을 작은 우주(µ,&p6&ooµo~;· 미 크로코스모스) 라고 부른다. 왜 냐하면 다른 모든 피 조물보다 사람은 헤 아 릴 수 없이 많은· 기저울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증거이기 때 문이다.

 

"28. 그를 힘입어." ;  나는 사도들이 히브리어의 록질에 따라 ‘옆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per' 대신에 'in'을간혹쓰고있음을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논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표현이 더욱 강조적이고 의미가 분명하므로 나논 그전치사를(그것이 사용되는빈도만을 중시하여 per;証21)바꾸는 것 이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바울온 우리가 어떤 점에 있어서 하나님 안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성령으로 우리를 살리시고지속시키시므로,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만이 질대자로 계시며 우리는 진실로 그분 안에서 존속하고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하시러고 하나님온 자신을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하고 계신다. 성령의 능력은 사합들이 그들의 거처에서 살게 하고 우리가 보고 있는 하늘과 땅에다 힘을 공급하며 살아 있는 피조물들에게 운동의 힘을 주기 위하여 세계의 도처에 훈어져 있다. 이 말은· 미친 사람들이 모든 것 속에 신이 충만하계 들어있고 ’ 풀뱅이들도 신이 된다고 하는 헛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 령에 의한 ,_ 시기한 활동과 충동으로 자신이 없는 데서 창조해 내신 모든 것을 보건하고 계 J 'i:!. ,,,_ 오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람에 관하여 특 왜냐하면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 들 속에 하나님 을 모시 별하게 말하고 있다. 고 있으므로 하나님 을 찾기 위하여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운동'보다는 훨씬 우월하며 ‘운동'은 ‘존재'보 다 우월하기 때 문에 바울은 가조 l-중요한 것을 최고의 위치에 놓고 있다. 그 리하여 ‘생명'으로부터 ‘존재'로 한 단계씩 내려오면서 논하려는 것이었다. (許22).

   그는 이러한 의미로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명’이한 있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운동'조차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생 명'과 ‘운동'보다 우월하지 못한 ‘존재' 역시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사람 속에 있는 생명은 침승 속에 있는 생명보다 우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생 명 을 가전 사람들은 야만져 인 침 승들과 공통으로 감각과 운동을 가질 뿐단 아니라 그것들이 갖지 않은 이성 (理性)과 지성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하계 구별시키신 근거가 되는 특유한 선물을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설명으로 귀하계 여기고 있는 것은 바 론 일이 다. 그리 하여 요한복음에 는 만물의 창조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 생 명은· 사람들의 빛이타"(요 I : 4)고 말씀했는데 이 렇게 한 것은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한 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존은 가능하며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그 생명을 유지하게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특별한 선물로 주신 그들의 마음 속에 계시고 그들의 존재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본 성구는 하나님께서 일단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후에는 자기가 만드신 것을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가 만드신 것은 그 의 능력으로 지속되며, 전에 창조자이신 그가 또한 영원한 지배자이심을 교훈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이 사실을 바르게 묵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순간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찾아 들어 오시 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희 시인 중에도~~~~~"  ;.. 바울은 아라투스(Aratus)의 시 중에서 반절을 인용 하고 있다. 그 시가 권위가 있어서가 아니타 아멘 사람들을 부끄럽거] 하려고 이름 인용하고 있다. 그러한 시인들의 그 싯귀는 자연과 우주적 이치 릅 소재로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칙 복음을 믿지 아니하고 참된 경건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바울이 한 시인의 증언을 사용한 것온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 중언 속에는 참 경건에 대한 고백이 있으며 자연은 이 증언을 인간의 마음 속에 넣어 주었고 그 마음에 새겨 주 었던 것이다. 그런데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방법은 대단히 다르다. 왜냐하떤 그들은 사람둘의 증언에 크계 의존하므로 이 증언들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귀 중히 여 기 며 제 몸(Jerome)이 냐 암브로스(Ambrose)와 다론 거 룩한 교부들을 신 앙의 교사들로 간주할 뿐만 아니 타, 마치 하나님 께 서 말씀 하신 것처럼, 그들의 교황이 말하는 부패된 견해들로우리를 묶어 두고자 한 다. 그렇다. 더욱 심한 것은 그들이 아리스토틀(Aristotle)의 권위를 극히 크계 인정하여 그들의 학교에서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의 말은 침묵을 지키계 하고 있다. 이 제 본문으로 되 돌아 가자. 아타투스는 쓰스(Jupiter)에 관하여 읊고 있 음이 분명 하다. 그럼 에 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라두스가 자기 의 신 쓰스에 관 하여 했던 그. 서투른 말을 참되신 하나님께 적용시킴에 있어서 그 의미를 다르게 바꾸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 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의 근원으로부터 참된 원칙들을 얻어내기 때 문이 나. 그러 나 하나님 에 관한 생 각이 사람들의 마음에 떠 오르자마자-그 생각은 곧 바르지 못한 거짓된 것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줄어 없어진다. 그. 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생각의 씨 앗은 부패된다. 그려나 처음에 가졌 던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지 식은 그들 속에 잠시동안 남아 있다. 그러므 로 건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타면 누구라도 ‘만물은 쓰스 신으로 충만되어 있다' (Eclog. Ill. bo)는 사람들이 만든 신, 쓰스에 관하여 버 질 (Virgil)이 말한 것을 참되신 하나님께 적용시키기를 주저할 사람온 없을 것이다. 오히 러 머질이 하나님의 능력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했을 때 그는 잘못하여 하나 님의 이름 대신에 다른 이봄을 불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의 미 에 관한 한, 아라투스는, 마니 교도들이 영 혼이 란 하나님 께 서 가지신 그. 어떤 것으로(ex Dei traduce) 조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어떤 부분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므로 버질이 세계에 관하여 ‘내 부의 영 혼과 마음은 사지 (四股)로 뻗쳐 온 몸을 움직 인다' (Aeneid 6. 726)라고 말했을 때 세 계 가 하나님 의 은밀한 영 감에 의 하여 지 챙된다고 단순하게 의미하느니보다는 플라토(Plato)의 이론을 다타 철학적으로 말하고 있 다. 그러 나 이 꾸면낸 이 야키 때 문에 바울이 사람은 ‘하나님 의 소생'이라는 참된원칙을, 비록 그 원치이 사람들이 만든 이론에 의하여 부패되기는 했지만, 주장하지 못하계 되어서는 안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 은 자기들이 가전 본성보다 우월한 어떤 신성한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 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창 I : 27)고 가르 치고 있다. 또 이 성경은 우리가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은 아들 삼으심에 의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고 성령으로 거 듭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시작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 나 성령께서 갖가지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갖가지 칭호를 얻게 되시는 것처 럼 ‘아들들'이란 말이 여러 가지로 인식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육 을 다진 모든 사람들이 구별없이 ‘아들들'로 불리운다. 마음과 지성에 있어 서 하나님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형상온 거의 지워져서 그 형상의 희미한 윤곽조차도 보여지고 있지 않기 때 문에 ‘아들들'이란 이 명칭은 아들 삼으심의 영을 받고 이성 (理性)과 의와 거룩함의 빛을 발하여 하늘의 아버지름 나타내 보이는 믿는 자들에게 국한 되고 있음은 옳은 일이다.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 을 우리 속에 나타내시려고 의도하였기 때문에 그가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 현되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바르게 새겨진 영혼은 그림으로 그려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그림으로 그리려고 하는 것은 더욱 불합리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물질 져인 모양으로 만드는 사람들에 의하여 얼마나 큰 손상을 당하고 계시는가 률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의 지극히 작은 부분조차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의 영혼이 그럼이나 조각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물질적인 형상을 세워두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기 때 문에 바울은 여기서 그들의 공통된 미신을 심히 책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잘못, 그리고 불경스럽게 경배를 받으셨으며 하나님의 진리는 바울이 로마서 1장 25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위엄이 어떤 보이는 형태로 표현될 때마다 자주 거짓으로 바뀌었다는 일반저인 교 리를 터득해야 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상 숭배자들은 핑계를 갖고 있었지만 생명이 없고 썩어질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질 때 하나님은 나무나 돌이나 금과 같이 취급되셨다고 바울이 지금하고 있는 말을 선 겨자들 역시 주장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은 무지 랬71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상상하기 위하여 형상 둘을 사용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생각의 능력을 넘어서 그 능력으로부 터 심히 먼 거리 밖에 계시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으로 그를 알아보려고 하 는 사람은 변태적이고 거짓된 상상으로 그의 영광을 손상시킨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해에 의하여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을 궁리하는 것은 죄가 된다. 둘째로, 이는 더욱 십한 경우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육적인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는 이유 때문에 상을 세우고 있는데 이 경우에 하나님께는 치욕이 된다. 그리고 이는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 역시 같은 핑계들을 갖고 있다. 그들 이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세운 형상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어떤 핑계들을 할지라도 그들은 옛 사람들이 범한 같은 잘못에 빠지고 있으므로 선지자들 의 증거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교도의 책을 보면 오래 전 에 그들은· 오늘날 교황과 그를 섭기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변호하려는 핑계 와 같은 것을 내세우고 있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마 치 그들이 저 사람들은 극히 어리석었다고 근거없이 죄를 씌우는 것처럼, 어 떤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것 이 다. 사람들은 마치 선지 자들이 그들에 게 거짓된 비난을· 한 것처럼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을 바르게 고려한다 면; 바론 판단을 내리는 자들은 그들 중에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이 내세우 는 핑계라도 형상 앞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져합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음에 붙잡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에라스므스와 함께 내가 ‘신성,(numen)이라고 번역한 데에다 누가는 중 성 명사. 'CO fJE&OI.J(토 데 이 온 ; ‘신,;神)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하 나님을 금이나 온이나 돌과 같지 아니하시다라고 말하고 ‘사람의 기술과 고 안’으로 되신 분이 아니라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물질과 형체를 배격하고 있 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본성에 손상을 끼치는 모든 인위저인 조작을 정죄하 고 있다.

 

"30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 . 오랜 사용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모든 사 람들의 일치에 의하여 인정된 것은 일반적으로 옳은 것이타고 믿어지기 때 문에 바움을 향하여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시작된 직 후부터 심히 많은세대를 지나오는동안에 계속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들 을 지금 와서 뒤엎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온 세상이 그렇게 장구한 기 간동안 속아왔음을 누구에게 확신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교황과 그를 섬기는 자들이 방패와 같은 이 질문으로 잔 막아낼 수 없겠다고 믿을 만큼 가증스러운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바울은 이 질문을 예상하고 사람들 이 그처럼 오랫동안 전리에서 떠나 방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본 래의 킬로 돌이키시기 위하여 그의 손을퍼주시지 아니하셨음을 말하면서 그 들에게 경고했다. 사람들이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도 극히 중대한 일에 심 히 어리석고 수치스럽계 잘못을 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시기 전에는 사람들 이 묻없이 과오를 범하계 될 것을 의미한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해결의 방법을 즉시 이꿀어 둘이지 아니하신 이 유를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스스로 원하시는 선한 뜻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 들이 4천년동안 어두움 가운데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셨을 때 자기 교훈의 불빛을 급히 비쳐주지 아니하신 이유는 이해할 수 없으며 성경 역지 이 사 실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기 대문에 이에 관해서는 신중함이 어리석은 지혜보다 낫다. 왜냐하면 하나님온 혼자서 걷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도록 혹은 말씀하시도록 하나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 온 하나님을 질서로 여겨 그를 격하시키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는 극히 차마 볼 수 없으며 자연의 질서에도 어굿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하나님 의 지해와 온밀한 목적에 만족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무지 를 내버려두시는 한, 이 무지는세계의 어느 곳에나만연되어 있음을분명하 게 가르치는 바울을 향하여 큰 소리를 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 무지롤 형벌하고자 하지 아니하지고 눈감아 주시는 것처 럽 , 하나님 께 서 무지 를 용서 해 주신 다고 다르제 설 명 하고 있 다. 그러 나 그려 한 꾸며멘 설명은 바울의 생각이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바울의 의도는 사람들을 향한 칭찬을 줄이려는 것이 아니었고 기대 밖에 '분명해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설명은 다른 성 구를 보아도 그릇된 것을 알 수가있다. 왜냐하면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롬 2 : 12)라고 말씀했기 때문이 다. 간단히 말해서, 바움이 한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전에는 사람들은" 어두움에 붙잡혀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어두움을 더 속히 없애지 .아 니하신 이유를 탐지하는데 지나치계 용감하거나 호기심이 많아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좋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바르고 저절한 것으로 여 겨 어떠한 의문도 갖지 말아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무시 하십 으로써 (dissimulante) 사람들이 여 러 제 대 동안 불행 하게 속아왔다 는 말은 귀에 거슬리는 말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해야 하기 때 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이상으로 어떤 것을 알고자-하는 쑬 데없고 그릇된 욕망이 우리에게 찾아들면 바울이 여러 성구 가운데서 교훈 한 것을 생각하기로 하자. 바울은 복음의 빛이 이방인들에게 돌연히 바쳤다 고 말했다(몸 16 : 25, 엡 3 : 9). 그리하여 이 신비는 그 이전 수 세기동안 숨겨져 왔으며 사람들의 모든 지각을 삼켜 버리계 되는데1이는 하나님의 다 양한 지혜에 대한 중거가 됨울 교훈하고 있다. 두번째로, 우리는 사람들의 양심이 항상 자신의 죄책감을 가침으로씨 받아 마땅한 정죄를 떤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들의 잘못을 고쳐 주고자 하지 아니하셨기 때 문에 사람둘은 하나님을 적지 않게 원망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바울은· 하 나님께서 묵과하심으로씨 세상이 과오 중에 방황했다고 밀했다. 이는 그 책 망율 하나님 께 돌리 려 는 것 이 아니 라 호기 심 있 고 해 로운 질 문율 할 만한 기 나 부정하려는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얼마나 공 손하고 겸손하계 생각애야 하는가륜 배우게 된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인 간 본성의 교만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시라고 갑히 요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고는 당시 세대의 사람들에게 유익했던 것처럼 오늘에도 그 러하다. 복음이 다시 빛을 대계 되었을 때 복음의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사 합들이 교황의 그롯된 다스럽 아래 서 그처 럼 오랫 동안 과오 중에 방황하계 내버려 두셨던 것은 큰 잘못이라고 간주한다. 참으로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하머라도 하나님께서 오래 건에 그렇게 하셨던 것과 같이 지금도 사람들의 무지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아니하시는 것(dissimulare)이 정당하지 아니하 신 것처럼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 전에 있었던 그 무지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못하게 된 것은 아니타는 말씀 에 특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도 자기들과 같은 형편에 있었다는 생각이나 오랜 관습에 의한 변명율 갖거나, 더욱 심한 것 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위하여 거침없이 그리고 열렬하계 핑계 를 갖기만 하면 자기들이 잘못하고있음에 대한 그럴 듯한구실을 갖고 있다 고 생 각한다. 그러 나 바울은 하나님 께 서 우리 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 조상들 의 무지 로부터 구실을 찾으려 는 행 위 를 인정 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하나님 이 보실 때 그들이 무최하기는 했으나 우리가 밝은 낮에 소경이 되고 복음 의 나팔이 울리고 있는데 귀먹온 자 혹은 참자는 자가 된다면 우리의 대만 온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 명하사." ;  이 말씀으로 바울은, "너 희 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 롤 원하노라"고 기 목된 ("너 희 가 오늘날 그의 음성 을 듣거 든 너 희 마 음을 강약케 하지 말라"로 번역되어 있음一격주.) 말씀처럼(시 95:7), 하나 님 께 서 말씀하시 는 순간 우리 는 그에 게 귀 를 기 울여 들어 야 함을 경 고하고 있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절하계 초청하고 계실 때 그 기회를 놓치는 자들 의 고집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 귀절로부 터 하나님이 우리의 이전 생활 중에 있었던 과오로부터 우리를 자신에게로 모으시려는 것이 복음이 전파되는 목져임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복음의 소리가 우리들의 귀를 울릴 때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촉 구하고 계심을 깨닫기로 하자. 그리 고 우리 는 하나남께 서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 시 지 만 말씀하시 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누가가 말하고 있음울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 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본이 아니시라면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께서 예언의 직임을 주장하시고 자기의 말씀을 장악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복음이 하늘의 전리 가 마땅히 가져야 할 만큼의 충분한 권 위를 갖지 못하계 된다. y' .-\ i

 

"31. 이는~~~~~날을 작정하시고"  ;  바울은 그들의 무감각을 일깨우기 위하 여 최후의 심판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이 얻 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강요하키 위해서는 격렬한 행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키 위해서는 사람들 이 하나님의 심판대를 생각하게 하고 누구라도 무시하거나 피할 수 없는 두 려운 십판을 그들 앞에 제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회 캐어] 대한 교훈은 본래 자기를 속이려고 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각성시킬 때에만 그 효력이 잘 나타나며 복음을 위한 합당한 교 사둔은 자신둘을 변호하는 범죄자들을 이끌어내고, 마치 그 형벌이 자기 손 에 있는 것처럼, 위협적인 형벌을 선언하는 최고 판사의 포고자, 또는 법정 관리들임을 명심하기로 하자. 그리고 ‘공으로' 혹은 ‘공평하계’라는 말은 아무런 목적없이 쓰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은 공평 하신 재판관이심을 명목상으로는 인정하고 있으떤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지식과 이해를 초월하여 헤아리시도록 해드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스스 로를 속이 고 있 음을 (quas sibi delitias faciant ; 駐23)우리 가 알고 있 기 때 문이 다. 그러 므로 바울은 사람들이 허 단한 아침 을 함으로써 하나님 의 공 의를 비뚤어지게 할 수가 없으므로 그러한 아침을 하더라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육을 가전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정하신 방법을 따라 일하시므로 사람이 보기에 훌륭한 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가증스러운 것임을 이 사실이 설명해 준다고. 말하고 있다.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더욱 말하고 있음에 의심이 없다. 아덴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세상에 구원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 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여기서 읽는 말씀은 그들을 설득하는데 힘이 없었을 것이다. 누가는 바울이 했던 설교를 간략하계 요약함으로써 만족하계 여겼 다. 그러나 바울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말하고 그를 심판자 로 제시하기 전에 사람들의 구원자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구원자로 나타내셨을 때 멸시를 당하신 경우가 많았 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온 세상이 그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되어 있으므 로 언제인가 그가 그처럼 불경스러운 멸시에 대한 보응을 하실 것을 선언하 고 있다. 동사 OptCE&l.l(호리 제 인)은 외 적 표현 뿐만 아니 라 하나님 의 은밀한 목적 도 위미한다. 그러나 두번째 의미가 더욱 흔한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택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명령으로 자기의 아들을 세상의 심 판자로 세우셨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배척하는 배교자들로 하여금 법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는 것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 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심 판하시게 되리타는 사실보다 평범한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사실도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 믿기에 어려운 그리스도의 위얻있는 직임은 그의 부 활에 의하여 확증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 각자 가 지제없이 그의 명령에 동의할 만큼 우리들 중에서 높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는 핑계를 습관적으로 자주 내세우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제상의 심판자가 되심을 공공연하게 브 여주셨음과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에 관하여 친히 뜻하셨던 것이 사람들의 눈 앞에 나타나게 되었음을확실하게 말하면서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이 기 본적인 교리의 원리를 길게 논하고 있는데 누가는 이를 몇 마디 말로 간략 하게 언급하고 있다. 누가도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음을 간단 하계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권능을 논하고 있는데 이는 옳은 일 이었다. 왜냐하면 부활하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려는(고전 15 : 23) 목져 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유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죽음을 판결 받으려는 것 외에 우리가 부활하는 이유란 없 다. 이 사실로부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부활로써 세상의 심판자가 되심을 선언하셨고 증명하셨음을 알 수가 있다.

 

"32 혹은 기롱도 하고~~~" ; . 이 말씀을 볼 때 사람들이 얼마나조심성이 없고 중요한 일에 무관심한지를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대나 최고 재판자의 그 위엄도 그들에게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들 앞에 제시되면 이 심판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가장 예리한 자극이 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는 심한 캉략함이 있어서, 마치 그 말씀이 믿을 수 없는 것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일생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는 그날에 관한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복음의 일꾼들이 전파하도록 명령을 받은 그 심판을 전하지 않고 포기할 이유란 전혀 없다.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비웃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회파하려는 이 교훈은 그들을 단단히 묶어서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이 그 속박과 헛되이 몸부 립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이 말씀이 아덴에서 조롱을 당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마음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신비 때문이며 이 신비는 가장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에 관한 지극히 작은 지식조차도 얻은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비는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들어 바라보게 될 때만 터득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설교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아 니다. 왜냐하면 그 듣는 사람들 중에는 이 전리에 관하여 더 상세히 알고자 하는 자들이 있 었 기 때 문이 다. 그들이 그의 말을 다시 듣고싶어 한다고 공공연하계 그의 말을 다시 듣고싶어 한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아칙 충분히 그의 말을 확신하계 되지는 못했으나 어느 정도의 홍미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했 으며 이 홍미가 그들로 하여금 더 알고 싶도록 했다. 분명히 이 의욕은 복 음에 대한 경멸적인 모욕(fastidio)과는 전혀 다론 것이었다.

 

"34 그 중~~~디오누시오와~~~~" ; 누가가 단지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초에 믿는 자들의 수는 적었던 것 같다. 그가 말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 은, 말하자면,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medii) 자들이 었 다. 왜 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 을 즉시 배 격 하지 는 않았으나 그에게 제자들로서 그의 편에 실만큼 심각하게 감동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다. 누가는 다른 사람들에 앞서서 디오누시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왜 냐하면 그는 그 지민 중에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 마리 역시 훌륭한 신분을 가전 여자였던 것 같다• 이 런 사실들과는 다르게 교황과 그를 섬 기 는 사람들의 한 사람의 관원을 첨성가로 인정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 는 한편으로 그들의 무지와 다론 한편으로는 그들의 교만 때문이다. 왜냐하 턴 그들은 아레오바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오누시오를 ‘천국과 교회의 계급제도’ 그리고 ‘하나님 의 이 름들' 에 관한 책 들이 라고 생 각하는 사람들은 극히 우둔하고 어 리석다. 왜냐하면 ‘천국의 계급제도'타는 책에는 많은 어리석은 것들과 수 도사들에 관한 사소한 것들 뿐만 아니라 많은 불합리한 꾸며낸 것들, 그리 니전치 못한 망상들이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계급제도' 라는 책은 사도행전 당시보다 수 세기 이후의 기독교의 순수성이 수 많온 의식들에 의하여 변질된 때에 편찬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익 이름들'에 관한 책은 절대로 무지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들을 그 안에 기 훅하고 있으나 건전한 경건보다는 미묘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