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17:17)

1. 성경 (행17:16~31)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6)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7)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8)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19)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0)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6  마음에 분하여" ;.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에게 맡겨진 것으로 스스로 알고 있는 이 가르치는 직무를 열심히 이행했다. 그러나 누가는 그가 아덴에서 더욱 분노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른 어떤 곳에서 보다 이 성에서 더 우상숭배가 심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온 세상이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예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어디에나 헤아릴 수 없는 기괴한 미신들이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사단은 아덴을 다론 도시들보다 더욱 매혹시켰다. 그리하여 그곳 사람들은 더욱 제 정신들을 잃고 불경스럽고 패역한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혜의 거처요 중심지였으며 모든 예술의 근거지였고 인간애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이 도시가 우맹이요 정신을 잃는데 있어서 다론 도시들을 능가한 사실을 주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한 실예가 된다. 우리는 지성이 있고 학식있는 사람들이 일치하게 이 도시를 칭찬하고 영예롭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뿐 아니라 그 도시 자체도 자기가 세련되게 해주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미개인으로 부를 만큼 스스로 우쭐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온 세상이 무지하고 우둔한 것을 확실히 아시고 인문 과학의 모든 선생들이 심상치 않은 정신착란에 홀렀다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기민성을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소용이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덴 사람들이 극한 어리석음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셨음에 의심이 없다. 이는 가르침과 배움으로 도움을 받은 인간 마음의 그 대단한 영민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련을 가질 때 어리석음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아무리 도리를 어기고 부패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허위적인 종교를 변명하기 위하여 구실들을 갖고 있음에도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들은 상식을 잃고 전적으로 어리석고 이성이 없는 자들처럼, 유치하고 하찮은 사소한 것들을 취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모습으로 심히 불결한 망상에 의하여 속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인간의 지식으로 부터 어떠한 종류의 종교가 생겨나는 것과 인간의 지혜는 다른 것이 아닌 모든 과오가 생기는 곳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아덴 사람들은 자기들의 교만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수치스럽게 진리에서 떠나 방황하고 있었음을 깨달아 알기로 하자.

  그들은 그 도시의 오렌 역사와 쾌적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들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자랑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그 도시에 속한 분이 되시계 하려고 그를 하늘로부터 끌어 내렸을 때-역자주:  그들의 불경스러움을 생 각하면- 그들은 가장 깊은 곳으로 던져쳐야만 옳았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성령께서는 인간의 지혜가 무익함을 영원히 수치스럽게 낙인찍고 계신다. 왜냐하면 인간 지혜의 가장 중요한 처소가 그곳이었고 그곳은 다른 곳보다 어두움이 더했으며 우상숭배는 가장 성행되고 있었고 사단은 거침없이 날뛰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강제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에 관하여 알아보자. 그 성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극히 열심인 것을 그가 보았을 때 그는 격분하게 되었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함에 있어서 누가는 바울이 단순하게 분내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가 당황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대신에 누가는 바울의 열심을 자극했던 그 흔하지 않은 의롭고 거룩한 분노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자기의 사역을 위한 더욱 열렬한 각오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불경스럽게 모독되고 있는 것과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부패된 것을 보고 바울이 분노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 이외에 그 무엇도 자기에게는 더 귀한 것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얼 심은 우리에게도 더욱 강렬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컨대 시편 69편 9절에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자기들의 아버지께서 명예롭지 못한 취급을 당하고 계심을 볼 때 심한 동요를 느끼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이다. 이는 경건한 사람이었던 롯이 극히 가중스러운 죄악들을 시정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혼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고 베드로가 교훈하고 있는(벨후 2 : 8)사실과 같다.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열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교회가 순전한 정절을 지키도록 하는데 자기 는 열심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기(고후 11 :2) 때문이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욕을 당하심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고 하나님이 전혀 욕을 당하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그 욕하는 자들을 그저 무시해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될 만한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땅 에 있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만큼 하나님을 곤경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처럼 극히 분노하여 실망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있지는 않았음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모독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사람들은 전혀 분노하게 되지 아니하고 슬품과 근심을 갖는 척 하면서 그 악한 자들을 시정시키기는 커녕 그들과 함께 불경스러운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이 아무런 성과 없는 소란을 일으키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의 무능에 대하여 그럴 듯한 구실을 내세우고 있다. 자기들이 사람들의 난폭한 음모에 대항하에 싸운다 하더라도 그 노력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쳐서 낙심하거나 어려움에 굴복하여 가르쳐야 하는 일을 포기하게 되지 않았으며 믿음을 옹호하기 위하여 더욱 날카 로운 채찍에 의하여 자극을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17.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 유대인들이 회당을 세워두고 있는 곳에서는 그 회당에서 자기 민족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바울의 정해전 습관이었다. 그렇게 한 다음에 그는 율법의 교훈을 경험한 이방인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아직 참된 경건을· 바르게 익히고 있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으며 배우고자 하는 열심을 가졌기 때문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은 배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유순함은 믿음을 향한 문이 되며, 진실로, 믿음의 시작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첫째가 되는 원칙들에 대한 희미하고 온건하지 못한 지식만으로 참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끌려간 자들이 ‘경건' 하다는 칭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셨다. 그들은 ‘경건' (religiosi)하다 고 호칭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인정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이 표적에 의하여 다론 사람들과 구별되고 있음을 기억하기로 하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충성을 드리기로 한 자들은 특별히(許7)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호칭된다. 이들만이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미신을 섬기면서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을지라도, 무 신앙의 치욕 이외에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장려함을 자랑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내적 태도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서운 경멸감 외에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우상에게 아첨하고 있는 척하는 그 행위는 단순히 하나의 허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온 분명하다.

 

"18. 쟁론할새."  ;  지금 누가는 바울이 철학자들과 논쟁을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논쟁과 궤변만을 위하여 태어난 자들임을 알고.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일부러 논쟁을·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기의 의향과 판단에 역행하여 그와 같은 싸움에 끌려들었다. 이는 바울 자신이 경건한 교사들에게 그들이 어떤 원수들의 반대에 부딪칠 경우에 용감하게 전리를 변호하기 위하여 영적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고 명하고(딛 1 : 9) 있는 사실과는 같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을 우리들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으며 주님은 때로 우리들이 괴로움을 당하게 하시려고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센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일어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의 반박을 통하여 진리가 더욱 분명하게 서 있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 그들의 상습적인 뻔뻔스러움을 좇아 이 거룩한 사람들을 괴롭게 했으며 스도이고 철학자들 역지 그들의 교활하고 거짓된 논쟁으로 완고하게 그를 모욕했을 것임에 의심은 없다.

 그러나 이 논쟁의 결과를 볼 때 바울은 궤변적으로 말다툼하지 않았으며 논쟁 OoroµaXcas-; 로고마키아스)을 위한 쓸데 없는 논쟁속으로 끌려 들지 않았고 그가 성경의 다른 귀절에서 스스로 명하고 있는 온전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적으로 온건하고 위엄이 있는 방법으로 무익하고 간교한 논쟁을 반박함으로써 진리를 들어내야 하고 우리의 재능을 나타내 보이려는 야심과 열심이 우리를 필요하지도 않고 세상적인 논쟁 속으로 말려들게 할 위험을 피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누가는 서로 반대가 되면서도 서로 상대적인 과오 아래서 애쓰고 있는 두 종류의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에비구레오 철학자들을 선과 학예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을 공공연하계 증오했다. 그들의 철학은 태양이 2피트(60. 96cm)의 넓이를 갖고 있으며 세계는 원자들로 구성되 어 있다고 논한다. 이렇게 우주를 대수롭지 않게 논함으로싸 세계의 구조 중에 보여지는 그 훌륭한 솜씨를  하찮은 것이 되게 하고 있다. 그들은 수백번 반박을 당한다 해도 개들처럼 부끄러움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신들의 존재를 대강이나마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신들이 하늘 에서 할 일 없이 지내고 있으며 그 신들은 장대한 범위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생각하는 복이란 게으름 뿐이다.

위에서 내가 말한 것같이 그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들의 일은 우연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하늘의 뜻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지 않다고 상상한다. 그들에게는 최대의 선이 쾌락이며. 그 쾌락은 추잡하고 구속이 없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진 매력은 이미 육신의 방탕에 기울어진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어 갔다.

  영혼의 불멸이란 말이 그들에게는 한낱 꾸며낸 이야기로 둘리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육신의 방종을 거리낌없이 허락하고 있다.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합당치 못한 꾸며 낸 이론 또는 공상으로 그들이 가르쳐 왔던 이 원칙을 변질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과 정의, 그리고 권세로 세계를 다스리고 계신다고 알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각종 원인에 의한 복잡한 조직 (complexu)으로 알기에 힘든 미궁(迷宮)을-세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운명의 필연성에 의하여 구속되셨고 그 어떤 하늘의 기관에 실려서 난폭하게 이끌려 가셨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시인들이 쓰스 (Jupiter)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을 때 운명의 지배에 의하여 그가 금으로 된 쇠사슬에 묶이계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미덕이 최고의 선이라고 보고 있으면서도 참된 미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오만한 자신 감으로 사람들을 우쭐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가지고 자기들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는 데 쓰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가 능력있게 나타나는 것을 오만하게 방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 스도이고 철학자들처럼 오만하게 자만하고 있는 자들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용기는 인정 없는 잔인성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잡아 당기려고 하는 이러한 야만적인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때 성령의 놀라운 용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복음의 순전한 신실성 안에 확고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주견을 붙잡고 위에서 말한, 첫번째 철학자들의 그 짐승같은 건방진 언동과 두번째 철학자들의 교만하고 간교한 궤변에 대항했다. 끝으로,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육신의 총명이 성령의 지혜와는 얼마나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는가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 무리 전체가 복음을 적대하고 있기는 했지만 철학자들온 복음을 대항하여 싸우는 데 있어서 앞장서고 기수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육신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가 된다(고전 1 : 21)고 그 지혜에 관하여 바울 자신이 주장했던 것이 이 사람중에서 특별히 분명하계 보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먼저 이 지혜를 버리지 않으면 복음의 첫째되는 원리들을 아는 데 합당한 자가 되지 못한다.

 

"혹은 이르되."  ;  누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 사람들~ 모두 경건에서 멀리 떠난 자들인데 그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도 한 부류의 사람들은 다론 사람들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그들이 "새로운 어 떤 것"  이타고 불렀던 것을 다시 듣고자 했던 그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로 그 둘은 알고자 하는 바론 의욕보다는 공연한 호기심에 의하여 동요되었다. 둘 째 로 그둘은 하나님 의 말씀에 대 하여 충분히 꽁손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세속저인 어떤 색다른 것으로 취급하고 있었 기 때문아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내용을 더욱 알게 되기까지 마음을 열고 있었으므로 전혀 절망적인 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다론 부류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것을 교만하계 배척하고, 더욱 심한 것은, 그것을 무례하계 비난한으로써 스스로 구원의 문을 달고 있었다. "이 말장이 (誌9)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 "라는 모욕적 인 말은 그들이 가전 큰 교만의 마음으로부터 나왔다. 왜 냐하면 그들은, 마치 바울이 어 떤 통속 저인 말장이인 것처럼, 귀를 기울여 둘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를 무례하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별없는 열심으로 바울의 가 르침으로부터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칙 그들에게 이해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은 이 믿음에 관하여 그둘에게 전해준 것을 꽁공연 하계 배척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온 세상을 가르칠 자들임을 이건 부터 자랑해 왔으며 이름없는 자들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이라고 여긴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신들(daemoniorum)을 전하는 사람." ;  그들은, 성경이 늘 그렇게 하 듯이, 마귀들(daemonia)이란 말을 나쁜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보자(medlos)라고 그들이 생각한 작은 신들 혹은 수호신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플라토는그들에 관하여 수차만 복하여 말했다. 이 사건의 본질에 관하여 말해보자.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 도와 부황에 관하여 말한 사실들이 그들에게는 재로운 신들(daemonia)의 행위로 보여졌을 것이다. 이 사설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다음 여러 특징들에 의하여 이방인둘의 미신과 크계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의 믿음에는 그리스도를 한 분의 중보자로 나타낸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 게서 구해야 하고 이 믿음은 그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화해되는 구속을 구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은 전에 더러웠고 죄 가운데 붙잡 혀 있었던 사람들이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시작하도록 가르친다. 꿀으로 하 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것을 분명하계 알려주는 그 의룹고 거룩한 생활의 시 작으로부터 믿음은 마침내 우리의 마음을 장래에 있을 부활의 소망으로 이꿍어 올린다. 이들 철학자들은 앞에서 말한 사실들 외에 다른 것둔도 논하 고 있는데 바르게 논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들에 관하여 약간은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영생과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많이 말했다. 그러나 그리후도 안에서 얻는 은혜로운 화해를 보여주는 믿음과 성령께서 우리 안 o1l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는 중생,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최후의 부활 둥에 관해서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ad• Martium vicum) 가며~~~~~"  ;. 그곳은 재 판을 하기 위 한 공중의 장소였지 만 누가는 바울이 아레 오바고 재 판정 의 관원 둘앞에서 자기의 사건을 위하여 호소하도목 재판소로 끌려가고 있음을 의미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유명한 재판소에서 중요한 토론을 공개적으로 열기 위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자주 모이는 그 곳으로 인도되고 있 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재판의 자리로 이꿀려 갔음을 인정하지만 이 사건의 결과를 볼 때 그는 재판관들 앞에 선 것이 아니라, 마치 회의석상에서 처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이어 기록된 말씀은 아멘 사람들의 본성과 관습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둘이 보여 준 호기심은· 그들이 바움의 말에 그처럼 귀를 기울였고 그같이 유명한 장소 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그에계 공개되었으며,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서둘러 갔던 이유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을 모으고 시장에서나 어떤 공중의 장소에서 그들에게 연 섣윤 하는 행위는 큰 위법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지나친 의욕 때문에 그들은 사소한 것들을 돌아다니면서 소개하 는 자들이 그 곳에서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믿음의 신비에 관하여 말할 자유를 갖게 되었으며 요청도 받게 되었다. 2Z z j닙九기4기A中

 

"21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 누가가 말하고 있는 두 가지 과오는 거의 항상 함께 발생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들에 대하여 열성을 가진 자들이 수다스럽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묻기를 좋아하는사람을 멀리하라. 그는 또한 지껄여 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라는 호레이스 (Horace)의 말은 진실되다. 분명히 우리는 호기심을 가진사람들이 새는 구 멍을 가진 통과 같음을 본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 과오는 게으름에서 생겨났다. 철학자들이 그들의 모든 시간을 논쟁하면서 보냈을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 역시 새로운 것을 위하여 너무도 지나치리만큼 마음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시에는 그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싫어할 만큼 야비한 사람은 없었다. 분명히 거의 모든 헬라 및 라탄 저작자들은 이 사람들보다 열정적으로 열심이 있거나 변덕스럽거나 주제넘은 사람들은 없었다고 누가가 여기서 말하는 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곳이 모든 과학이 모체라는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도 시에는 안정된 정부가 확고하계 실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치적 권 력 의 정 상 (in summa potentia) 을 차지 했 었 음에 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랫 동 안 독립을 하지 못했고, 마침내 자신들과 전 헬라를 스스로 멸망시키기까 지 계속적으로 불화와 혼란 중에 휘말렀다. 국가가 붕괴되었을 때에도 그들 온 이 뻔뻔스러움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키케로(Cicero)는 그들의 어 리석음을 비웃었다. 왜냐하면 그의 당시에 그들은 자기들이 헬라 영토의 주 인이었을 때와 똑같이 오만스럽계 자기들의 법령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성공에 대한 가날폰 희망이 있기는 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큰 무리 중에서 몇 사람을 구원할지도 모르는 기회를 동한히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도시에 있는 가장 유명한 장소에 서, 이를데면, 대중 극장에서, 바로 그 날까지 그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온 갖 헛된 종파들을 반박하고 그것들이 그릇된 것들임을 공공연하게 증명하는 것은 복음이 지닌 실로 특이한 영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