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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 11)

1. 성경 (행 17:10 ~ 15)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0)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1)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2)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3)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4)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1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0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나~~~~" ;. 이 말씀을 볼 때 바울의 사역이 짧은 지간 안에 열매가 맺혔음이 분명하다. 그 형제들이 설라와 바울을 즉시 보내기는 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도들에게 자진하여  동료가 되어 사도들이 당할 위험과 고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바울의 참을성온 믿기 조차도 어려울 정도이다. 왜 냐하면 그는 자기 민족의 완고함과 악의를 그처럼 자주 경험했으면서도 그들중 얼마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봐 노력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자기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떤 공평하지 않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가 그의 소명에서 떠나도록 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 은 세상의 악의에 대항하여 그처럼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손상이 자기들을 성나게 하더라도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게하기 위해서이다.  

 

"11 베뢰아 사람은 ~~~~. 더 신사적이어서(注5)." ;  누가는 다시 한번 데살로니카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은 바울의 출발과 함께 사라져 버린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희미하게라도 빛을 발하기가 힘든 그 작은 불빛이 꺼져버리지 않았던 것과 자라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물을 주어야 했던 그 건전한 교훈의 씨앗이 말라 버리지 않았던 것 분명히 놀라웠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에 그의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 있고 성과가 있었던가 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경건에 대한 첫번째의 원칙만을 맛보았던 자들이 그가 없는 동안에 그 믿음이 전전되었고 성경을 계속 읽음으로써 스스로를 연단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는 첫째로 그들이 최고의 종족(Families)에 속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누가가 말하고 있는 ‘신사적'이란 말은 정신에 관한 말이 아니고 혈통(gentem)에 관한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가 '유게 네 스데 로이' ( ‘더 욱 신 사적 인’ )이 란 말을 쓰고 최 상급어  '유게 네 스타토이' ( ‘가장 신사적 인’)이란 말을 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과 비교되고 있다는 의견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라틴 사람들의 귀에는 좀 거슬리계 들려지는그 관용어가 헬라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이고 익숙했다고 생각한다. 이뿐만 아니라 누가는 잠시 전에 데살로니가의 귀부인들이 믿었다고 말했으며 이 성의 사람들이 베뢰아의 사람들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누가가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혈통상익 우월함을 말한 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높은 지위로부터 내려 온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내키지 않는 일이며 세상에서 유명하고 위대한 자들이 교만을 버리고 십자가의 수치를당하여, 야고보가 명하고 있는 것같이(약1:10), 낮아진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가 육신의 위엄이 그들 신사적인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아니하고 복음을 영접하여 십자가를 질 준비롤 하며, 세상의 영광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하는 부끄러움을 택했다고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현저한 능력을 칭찬하고 있다.

 둘째로 누가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열려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 : 4)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내용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첫째로 자격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셨던 가난하고 혈통이 비천한 자들이, 부자들이 들어갈 문을 닫아 버리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귀한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과 존귀한 지위로 말미암아 유명한 사람들과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한 몸 안에서 함께 자라고 있음(in unum Ecclesiae corpus coalescere)을 본다. 이는 모든 사람이 예외가 없이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찬양하려는 것이다.

 세째로 누가는 데살로니가에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된 이유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그처럼 짧은 시간 안에 커나가고 있는 이유를 지적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그 이유란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혈통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것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대개 보통 사람들은 권위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는 신앙과 경건을 위한 알맞는 도움은 결코 아니타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아 져도 과오 중에 방황하고 있는 불신앙자들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에게로 이꿀어 오시는 것은 비상한 일은 결코 아니다.

 

"말씀을 받고"  누가가 데살로니가 사람을 특별하게 칭찬하고 있는 그 첫째는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그 의욕에 있어서 신속하고 열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번째는 그들이 성경에 대한 부지런한 상고(詳考)로 매일 그들의 믿음을 강건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건과 신앙은 시초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를 계속해 나가면서 지속성을 유지하고 전진 하려는 간절한 의욕을· 가졌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 우리가 복음에 기꺼이 따르고 우리의 육적인 지식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유순하며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 드리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믿음을 갖는 길이다.

 이와같은 설명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칭찬함에 있어서 바울은· 누가의 기록을 지지하고 있다(살전 2 : 13). 그들을 칭찬할 만한 두번째 사실에 관한여 그들의 진지함에 무시할 미덕은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이 진지함 때문에 믿는 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강조하게 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초에 열성을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즉시 게을러져서 전진할 수 있는 사건에 의하여 자극을 받지 않으면 그들이 가쳐야 할 믿음의 씨앗을 잃어 버리고 만다.

  여기서 두 가지 합당치 않은 주장이 생길 수 있다. 첫째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그들이 가르침을 듣고 옳고 그름을 점검한 것은· 오만의 기미를 보여주는 것 같으며 이는 누가가 잠시 전에 말한 거리낌없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점검한다는 것은· 의심을 가졌다는 표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점검에 앞서서 믿음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믿음에는 확신(김r;po<f>opca; 플레로포리아)과 확실성이 항상 결합되기 때문이란 것이다. 첫번째의 주장에 대하여 나는 마치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 판단자들이 되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토론하고 있는 것처럼 누가의 말을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대답한다. 그들온, 마치 불로써 금을 시험하는 것같이, 단순히 성경익 규범을 좇아 바울의 교훈을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교리를 시험하는 참된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러가지 의미에 적용하기 위하여 때로는 모호하고 의곡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식의 점검은 확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성령의 판단을 끌어 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령은 그럴 만한 훌륭한 이유가 없이는 분별의 영이라고 호칭되시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을 지도자와 인도자로 모시더라도 믿는 자듣은 성경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자료로 하여 어떤 교리에 관하여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 교황과 그를 섬기는 자들의 그 불경스러운 주장은 반박되 고 있다. 그들온 성경으로부터 아무런 확실한 것을 얻을 수 없으므로 믿음은 교회가 결정하는 것에 의존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칭찬하고 계시므로 그들을 모범으로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한 가지 규범을 정하고 계신다. 만일 그들이 우리를 가르칠 만한 충분한 지식의 빛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성경을 상고한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우리가 인식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교리도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이 확고한 원칙은 그대로 지속되게 하자.

 교황은 자신의 망상을 좇아 자기가 한 말은 무엇 이든지 모든 사람들이 의문을 갖지 않고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교훈을 받는 자들은 그의 가르침이 옳은지 그론지를 상고하도록 허락을 받고 있었는 데 그는 바울보다 우월한 자로 인정되어야 할까?  이는 어떤 가장을 한(la rvato) 종교회의에 관한 것이 아니며 각 사람은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주는 한 적온 사람들게 관하여 말한 것임을 주시하기로 하자.

  이런 점에 있어서 교훈에 대한 ‘상고’는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믿음과 상충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교훈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 순간 그 교훈을 알고자 하는 그의 열심에 있어서 그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므로 그가 공공연하게 그리고 즉시 그 교훈에 동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이미 그 교훈에 호의를 보이고 있으며 잘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알지 못하는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참된 교훈을 전하고 있다고 공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기꺼이 귀를 기울일 것이며 내 마음을 진리에 순응하고 싶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그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것이며 나는 내가 확실한 진리라고 인식하는 것만을 받아들인 것이다. 가장 좋은 경우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사로잡혀서' 우리 앞에 제시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 기꺼이 그리고 말없이 귀 기울여 듣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과 동시에 우리는 사람들의 속임을 경계하여야 하며 우리의 마음은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맹목적인 성급함을 가지고 생각없이 아무것이라도 믿어버리고자 서둘러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누가가 말하고 있는 그  ‘상고'(詳考)우리가 믿는데 느리고 어려운 자들이라는 내용을 포함 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판단력이 함께한 기꺼이 믿으려는 마음은 경솔과 고집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 두번째 주장 역시 배격되지 않으면 안된다. 믿음은 의심에 반대가 되며 이것 저것을 따지는 사람은 의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상고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한 자들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확실성은 확증을 배제하지 않는다. 나는 학중'이란 말로써 전에 의심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진리가 언제 우리의 마음에 더욱 잘 새겨지는가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나는 복음을 통하여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께 화해되었고 내 죄는 그의 거룩한 피에 의하여 속함 받았음을 듣게 된다. 그리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생긴다.

 그런데 그 후에 내가 성경을 더욱 철처하게 살피면 다른 중거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지며 이 중거들은 내 믿음을 도울 뿐만 아니라 내가 더욱 더 큰 확실성을 갖게 되도록 내 믿음을자라게 하고 확고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이해에 관한 한 믿음은 성경을 읽음으로써 발전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바울의 교훈은 그것이 진리와 일치 하는지 (an ita reshabeat) 그렇지 않은지 열심히 정경을 상고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권위가 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확신을 가지고 심령 속에서 성령의 중거를 가진 어떤 것은 때로 성경을 상고함으로써 믿음에 효과를 얻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누가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모든면에 온건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고 그들은 경건의 온전한 건물이 그들 가운데 세워지기 까지 어떻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믿음에 있어서 어떤 진전율 가져 왔는지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주5) 칼빈의 주석의 원문에는 "이들은 데살로니카 사람들 중에서 신사적인 면에 있어서 뛰어났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12. 믿는 사람이 많고~~~" ;  이 말씀은 누가가 앞에서 말한 사람들 가운데 선각된 자들이 있어 그들이 믿기를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앞 문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말씀이 앞 문장과 관계가 있다면 이는 합당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성에 있는 믿는 자들의 모범을 따라 믿게 되었기 때문에 그 성에서 교회가 숫적(數的)으로 중가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까지 누가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의 시작에 관하여 기록했다. 이는 시급하고 무리한 바울의 출발 이후에 그의 수 고가 헛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는 한 바울이 베뢰아에서 추방을 당하기 전에 그가 다 본 성읍에서 설교하여 얻온 성과를 본문 중에 끼워 넣은 것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13 유대인들이 ~~~~~알고~~~~~"  ;우리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무자비하게 싫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증오심으로 인하여 복음을 방해하기 위하여 이곳 저곳으로 쫓아 다녔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나라에서 친히 대면하여 계셨을 때 그를 심히 배척했을뿐만 아니라 그가 떠나가신 후에도 어느 곳에서 주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소문을 들을 때면 그들은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으로 쫓아가는 사람들처럼 그곳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 민족의 격노 보다는 사단의 맹렬한 악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사단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리 스도의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사람들의 구원을 해치며 소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들을 선동자들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극히 많은 격렬한 원수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반대하고 나설 때 이 싸움을 일으키는 자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뒤엎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궁리하고 있음을 깨닫기로 하자.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싸움의 방법이 항상 같지는 않을지라도 그는 공공연한 싸움이나 교활한 수단, 그렇지 않으면 내부의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다고 그가 알고 있는 자들을 괴롭히는 일을 결코 중단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