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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17:2)

1. 성경 (행17:1 ~ 9)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1)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2)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3)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4)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5)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6)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7)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8)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9)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1 저희가·~~~~데살로니가에 이르니.”  ;  우리는 바움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서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를 분명히 알 수가 없다. 바울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르고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실제적 상황에 임하여 언제 말하고 잠잠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한 사실을 제외하고, 플리니 (Pliny) 가 말하는대로, 이 성읍들은 이름없는 작은 곳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바울은· 이 성읍들에서도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들에서는 성공적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는 그 성읍들에서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넘겨버리는 것 같다.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큰 위험으로부터 간신히 피하여 나온 이후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실을 보면 그가 부르심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려는 그 결과에 있어서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으며 계속적으로 새로운 위험을 만나고 있는것을 보면 그의 의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처럼 정복되지 않는 정신적인 용기와, 십자가를 지는데 있어서 지칠 줄 모르는 인내력은 바울이 인간적인 방식에 따라 수고하지 아니 하고 하늘로부터 임한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제어할 수 없는 유대인들의 그 완고함들을 자주 경험하면서도 기어코 그들 중에 들어갔으며 그들의 구원에 관하여 계속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참을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유대인들에게 주신 바 되었음과 자신은 구원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음과 첫째로 유대인들에게, 두번째로 이빙인들에게 회개와 믿음운 전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의 수고에 대한 성과는 주님께 맡기고 성공에 대한 큰 희망을 갖지 않았음에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駐1)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往2)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13: 46)고 말했을 때 그는 유대인들을향하여 마지막 작별인사를하는 것처럼 보 였다. 그러나 그 엄격한 선언은 자기들에게 주신 복음을 불경건스럽게 배척 하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그 무리에게 국한되어야 했다. 유대 만족을 항하여 바울은 자기가 말은 사신(使臣)으로서의 사명을 중단없이 이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실 예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이 우리에게는 극히 중대하여 어떤 사람 들이 아무리 은혜를 배반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그런 사람 들을 위한 일꾼으로 세우시는 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계속적인 관심을 갖지 못하계 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첫번 안식일에 이미 건전한 교리를 거절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바울이 다른 안식인에 다시 되돌아 오 는 것을 그만 두지는 않았다.

 

"2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 첫째로, 누가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써 제물이 되셔서 세상의 죄를 속하셨으며, 부활하심으로써 의와 생 명을 우리에게 주신 과거에 율법과 선지자들이 약속한 그리스도이시라는 바울이 말한 논증의 본질을 기록하고 있다. 둘째로, 누가는 바울이 가르치고 있었던 것을 그가 증명하는 그 방법을 전해 주고 있다. 누가가 두번째로 쉬급하고 있는 것을 먼저 말하기로 하자.

 누가는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논증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 관한 증거는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온 말씀에서 구해야 한다. 인간적인 사건에 관한 논쟁이라면 인간적인 이성 (理性)이 소용되겠지만 믿음에 관한 교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권세만이 최고의 것이 되어야 하고 우리는 그 권세에만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께만은 동의해야한다는사실온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하나님께서 성경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원칙이 우리를 감동시킨다면 가르침이나 배움에 관한 규칙은 다른 어떤 것에 그 근거를 둘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는 어떤 확실한 것을 얻을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견해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경우에 그들의 악마적인 광란에 끌려가고 있음의 분명하다. 나는 바울이 철처하게 사용했던 논증의 방법이 합법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묻는다. 오늘날 그들보다 믿지 않는 나라 중에서 주님의 말씀을 더 욱 높이 받들고 있는 사실로써 그들을 최소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할 때 그를 인정하고 그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었다. 교황과 그의 사람들 모두는 성경이 공공연하게 인용될 때, 마치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분명하지 않은것들을 말씀하시고 의미가 없는 분명치 않은 것들을 흉내내고 계시는 것처럼, 성경말씀을 단순히 웃음거리로 간주한다. 이 사실 뿐만 아니 라 오늘날 성경에는 더 많은 빛이 보이고 있으며 하나님의 전리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보여진 것보다 더욱 분명하계 빛나고 있다.  복음 안에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는 충만한 광채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신다.

  그리하여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확실성을제거하는것은 차마 볼 수 없는 불경의 행위가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믿음이 주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 근거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논쟁 중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지닌 확실성 위에 서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3 . 증명하고~~~~~~"  ; 여기서 누가는, 이른바, 토론의 요점 혹은 주재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관한 두가지 사실, 즉 그가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것이 필요하다는사실과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마리아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단정저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토론이 있을 때에는 세 가지 질문 이 생긴다. 그는 살아 계시는가? 그는 누구이시며 그의 본질은 무엇인가?  만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말하고 있었다면  그는 더욱 근본적인 것부터 말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무것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온 자기들에게 어떤 중보자가 필요합 울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보자에 대한 약속을 가전 유대 인들에게는 이 점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 모두가 일 치하계 인정하는 것들은 어야기 할 ;신요가없는 것으로 여겨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옷박히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보 나 더욱 어려운 일도 없었으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부터 시작하여 말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했던 것은 당시에 십자가에 관 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허탄한 이야기를 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원칙을 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인류가 파멸의 자리에 있음과 최악과 형벌,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영원한 저주 동에 관하여 공공연하계 말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고할 경우에 이 모든 사실들을 우리에게 생각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솔 예를 들면, 이사야는 단순히 그리 스도께 서 죽으실 것 이 타고만 말하저 아니 하고 우리 모두는 잘못 을 범하고 각기 제 길로 갔음을 분명하계 말하면서·,. 그가 죽으신 이유는 하 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고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그가 칭계를 당하시계 하셨으며 우리 몸이 나음을 얻도록 그가 채 찍 (Uvore)을 맞게 하셨고 우리의 죄를 속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의를 얻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사 53:5,6). 다니엘 역시 9장 24절에서 영원한의 가 제 자리를 잡도록 최가 끝나계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리스도의 죽 음이 갖는 의미와 효과를 말해주고 있다. 사람이 자기의 불행을 알고 겸손 해지며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희생에 의하여 하나님과 화목하지 아니하면 전혀 소망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기능을 증명하는 더욱 져 절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은 교만을 버리고 전에 는 싫어했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던 그러스도의 십자가를 겸손하계 받아 들이게 된다 ..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거를 이끌어낸 동일한 근원에 이르는 것은 옳은 일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온 두번째 사실을 밝히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한다. 만일 유대인들이 전부터 어떠한 구원자가 오실 것으로 기대되는가에 관하여 알지 않았더라면 마리아의 아들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바울이 중명하고 확실하계 단언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성경이 중보자에 관하여 말한 것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키는 일만이 실제로 남아 있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끝으로, 마리아의 아들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약속해 주신 중보자이심을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이다. 그리고 우리는우리의 고안대로 어떤 땅의 왕을 세우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의와 우리 구원의 모든 것을 구하기 위하여 그가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유를 아는 것도 우리 신앙의 본질이다. 바울이 이 두가지 사실율 성겅으로 증명랬으므로 우리 는 유대 인들이 아칙 은 우둔하게 되 지 않았으며 오늘날처 럼 그들이 :;J..처럼 큰 거만한 마음을 갖기 않았었음을 알아야 하겠다. 율법에 의한 제 사와 온갖 의 식 들을 말함으로써 바울은 오늘날 유대 인둘이 개 둘처 럼 달려 들 어 흠잡기를 좋아하는 논증을 했다. 그들이 수치스럽계도 성강귀절들을 갈 칼이 찢고 조각이 되게 하고 있는 사실온 잘 알려쳐 있다. 당시에는 그들에 케 약간의 명예로움이 남아 있었고 성경을 귀하계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르침 을 잘 받지 않는 자들은 아니 었 다. 오늘날 그들의 마음에 는 수 건이 가려 있어서 (고후 3 :.15) 대 낮에 두더지처럼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

 

"4 그 중에 어떤 사람~~~~~ 쫓으나"  ;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했던 강론 의 결과룬 보게 된다. 그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자신의 죽으심으로 아버지를 우리에게 화해시켜 주셨으며, 그의 부활은제상의 생명이 되었음을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공개 적 으로 확실하게 중거 했 다.· 그러 나 유대 인들 중에 서는져온수의 사람들이 믿었다. 그 나머지 유대인들온 밝은 낮에 소경들아 되었으며 귀먹은 자들이 되어 확실하고 명백한 전리를 거절했다. 져온 수의 유대인들이 믿는 반면에 그들보다는 복음으로부터 훨씬 거리가 먼 위치에 있 었던 헬라 사람들의 큰 무리가믿음에 찬성하계 되었던 사실 또한 눈여겨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유대인들이 어려서부터 율법의 교훈안에서 훈련을받았던 이유가 무엇이타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더욱 원수가 되기 위해서였 는가?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 있었던 우매함을견본으로드 러내기 시작하신다. 선지자들온이 우매함을 유대인들에게 자주 경고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제우신 언약이 무효가 아님을 선언하고 계신다. 택 함받은 자들의 희미한 불빛이 은혜로 구원을 받은 그 남은.자들 안에서 빛 나도록 하나님은 그 백성 중에서 최소한 몇 사람을 자기에게로 모으시기 때 문이다. 누가 역시 그들이 마지 못하여 동의하는 정도로 바울의 말에 믿음 올 가전 것이 아니고 바울과 실라에게 연합하여 동료가 되어중으로써 신중 한 뜻을 갖고 있었음에 대한 중거를 보여 주었다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솔직한 고백을 함으로써 자기 민족의 미움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가 가르치고 있었던 교훈을 찬성하며 그의 편 에 선다는 사실 외에 그들이 사도들에게 연합했던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무 엇이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도 우리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중간에 서 있 다면 (suspensi et medU) 이 보다 신 앙에 더 욱 손상을 주는 행위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집에서도 더욱 절친하계 배울 수 있기 위하여 배우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바울과 실라에게 가까이 하게 되 었다는 설명을 옳은 것으로 택하는 사람이 있다떤 그들의 그 행위 자체가 그들이 가 전 믿음의 열렬한 불꽃을 증명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자신을 그리스도 께 굴복시키고 그의 표준 아래서 거리낌 없이 자기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한 그 누구도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온 언제나 확고한 원 칙이다.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  이들은 경건의 기초원리를 받아들였으므로 미신의 부정 (不淨)속에 항상 머물러 있는 그 나머지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더욱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헬라인둘이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건하지 않은 잘못들과 허황된 생각들로 매혹되어 있었고,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2철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전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쫓겨나간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경건의 어떤 씨앗이 뿌려졌으며 순전한 교훈의 향기가 흩어쳐 나갔었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훌륭한 계획에 의하여 유대인들의 비참한 분산은 정반대의 목적으로 바뀌어 잘못하는 중에 방황하고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이 바른 믿음으로돌아오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바른 신앙이 그들의 수 많은 악한 조작으로 망쳐지기는 했으나 이 방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은 행위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은 오칙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욱 안전함이란 없다는 요약된 유대교 신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건한 헬라인'이 란 말은 참되고 합당한 하나님 섬기기를 맛보고 다시는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몸을 바치지 않았던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맛보았던 것은 단지 어렵풋하고 희미하여 참된 교훈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가가 그들에게 그처럼 존 귀한 칭호를 준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때로 신앙에 있어서 처음 시작하는 미숙한 사람이나 단순히 준비하는사람을 ‘신앙'올가 전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것같이, 여기서 ‘경건'이란 말을 우상과는 결별하 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져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혼동되고 희미한 믿음이 그것만으로는 건전한 신앙으로 인정될 만한 가치는 없지만 그 믿음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계단이므로 그 믿음 온,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결과져으로 그 칭호를 얻게 해준 다. 뿐만 아니타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이고 미신같은 두려움이 때로는 ‘신 앙'으로 불리운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종류의 예배와 천하고 쾌락주의적인 모욕행위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해 주어서가 아니라 잘못 적용(Ka raXP1JfJ-r:&1'w~, 카타크레 스티 코―스)되 었 기 때 문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해를 위한 참된 빛이 없이는 어떠한 신앙도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 의 말씀의 전리와 건전한 교훈은 경건의 규범임을 알도록 하자.

 

"5  그러나 ~~~~~ 시기하여."  ; 우리는 바울이 어떤 곳에서나 투쟁이 없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지 않았음을 본다. 가르침에 의한 결과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 순간 핍박온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단과 세상의 패역울 상대로 싸움을 해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 완강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용기로써 전진해 나가기 위하여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기들의 수고가 온전히 성과없이 되지 않는 것을 본다면 바울이 보여준 이 모범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는 나타나는 이 성과로써 온갖 핍박을 보상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실은 별 문제로 하고, 본 절은 불신앙자들을 움직였던 그 불같은 열심은 사납게 날뛰는 격정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그 열심온 성령에 의한 신중한 견제를 받지 않았고 정직이나 공평에 의 해서도 조정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상식을 벗어난 열심에 대한 구실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고 있으나 이 사건을 살펴보면 위선이 그들의 마음 속을 요동시키고 있었으며 그들의 마음 구석에 는 독한 악의가 가득차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바울의 원수들을 자기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옹호하는 자들이며 오직 그 율법을 보호하기 위하여 바울을 향하여 미움을 갖거나 싸우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든 경건치 않은 자들을 규합하여 그들과 함께 소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세상의 상관들 앞에 나타나서 복음의 악평을 듣게하여 이 동일한 악평이 율법에로 돌아가게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인가? 그와 같은 파벌의 움칙임은 바울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열렬해전 것이 전혀 하나님을 위한 헌신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바울을 사람들 앞에 세워 돌에 맞아 죽게 하려는 것 외에 야손의 집 을 둘러싸고 그 집에서 바울을 잡아내려고 소란을 일으켰던 다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악한 열심(cacozeliam)은 언제나 위선과 악의에 물들어 있음을 알기로 하자. 이 열심은 그 결과에 있어서 끝없는 잔인성을 폭발시킨다.

 

"저자(circumforaneis)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  누가가 쓰고 있 는 헬라어 lxropacoc(아고타이오이)는 할 일이 없고 가정에 관심이 없으며 직장이 없이 시장을 돌아 다니는 게으름뱅이 혹은 가치없는 자들을 의미하거나 거짓된 맹세를 하고 소란을 선동하고 어떤 범최를 위해라도 고용되는 염치없는 굶주린 자들을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를 보아도 그 절망적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던 그들은 자기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음을 다시 분명하개 해준다.

 상관들이 그들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모든 일이 혼란스럽게 되는 외에 다론 어떤 성공도 바라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소동을 일으키게 했던가? 그리고 누가는 그 소요가 어떤 충동에 의하여 격렬하계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데를 지어 그 곳 사람들을 흥분시켜, 말하자면, 많 온 사람들이 난폭한 행 동을 하기 까지 그들이 가전 독이 퍼 져 나가계 (Pf-r circulos sparserint)했다는 것이다. 이 병페에 철려들기 쉬운 도시들에 사 는 사람들은 이와같은 일이 난동자들에 의하여 너무도 일반적으로 생겨나 는 장난임을 경험을 동하여 알고 있다.

 

"6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 사단이 복음을 향하여 공격하면서 일으켰던 소란이 복음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은복음 위에 씌워진 애매한 운명이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가전 추악성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자기들 이 선동했던 소란에 대한 책임을 거룩하고 겸손한 교사들에게 둘리고 있다. 분명히 복음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도록 충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해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께 화해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평화를 지키 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화평 중에 우리블 자신에게로 초청하고 계시기 때문에 사단과 불경건자들은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 므로 바울과 실라는 변명할 것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거짓된 치 욕을 당해야 했고 그 무리가귀를 기울여 주지 않는 한 말없이 참아야 했다. 주님은 그들이 보여준 모범으로 우리가 중상이나 해로운 소문을 들을 때 포 7]하지 아니하고 일을 잘했음에도 악평을 둘을 각오를 하면서 전리를 번호 하는 일에 있어서 용감하계 버티어 나갈 것을 경계하지려고 의도하셨다. 그_ 러므로 어떤 사람들의 그릇된 지해는 그만 두도록 할 것이다. 그들은 거짓 된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하여, 마치 자기들에 대한 평판이 바울과 그와 같은드 사람들에 대한 그것보다, 아니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보다 더욱 귀한 것처럽 자키들의 반역적인 온건함으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주처없이 배반하고 있다. 이 행위는 불경의 죄가 아닐 수 없다.

 

"7.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  ;그들이 했던 고소의 두 번째 요점은사도들이 로마제국의 권위를침해했다는것이다. 이최악은심 각하고 미움을 받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뻔뻔스러움으로 조작 해낸 것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그리스도의 나타를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 나타는 영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노력이 로마 제국에 어떠한 손상도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공중의 진서를 파괴한다거나 가이사의 권세를 때앗고자 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면서 도 약의를 일으키기 위하여 무고하게 이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다. 종교, 특히 유대 인의 종교는 마계 도냐 사람들이 그것 을 위 하여 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올 즉시 처벌하고자 달려들 정도로 그들에게 그렇게 중대한 문제는 아니었 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죄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기 위하여 반역을 그 구실로 내세우고 있다. 오늘날 사단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하여 그 와 같은 연막을 계속하여 터뜨리고 있다. 교황과 그를 넘기는 사람들은 자 기들이 우리에게 씌우고 있는 죄에 대한 근거는 전혀 없음을 스스로 잘 알 고 있다. 그들의 이 행위논 하나님이 보실 때 옳지 않은 것으로 거듭 반박 올 당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정치상의 질서를 뒤엎고 법과 재판을 위한 심문을 방해하며 제왕의 권제를 무너뜨린다고 비난한다. 온 세상이 우리를 원수로 여기계 만들려고 그들은 우리가 공공 진서의 적이타는 거짓말을 하 면서 도 부끄러 움을 모론다. 유대 인들은 사도들이 가이 사의 명 을 어 겼 다는 협의를 조작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는 바울과 실라가 종교상의 어떤 변화를 감히 일으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왕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둘이 조작한 그 협의는 건져으로 거짓된 것이었다. 꿀으로, 만 마땅히 드려야 할 존귀와 하나님께 당 일 신앙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히 드려야 할 예배를 금하는 폭군의 명령을 항거하계 된다면 우리는 왕둘 의 권세를 침해하고 있지 않다고 바르게 증거할 것이다. 왜냐하면 왕들은, 마치 거인듣처럼, 하나님을 그의 보좌로부터 끌어내릴 만큼 높은 위치에 올 라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불경스러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지만,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그의 말은 전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왕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해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손 상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단 6 : 22).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신앙 안에서, 왕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드리자. 그리고,시민으로서 해야 할 온갖 순종을 이행하자. 그러나 만일 제왕들이 자기들의 위치에 머물기를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을 금하려 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무시한다고 말할 만한 이유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세와 위업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8,9 . 무리와·~~~~~~ 소동하여"  ; . 우리는 그 거룩한 사람둘이 얼마나 불공 평하계 취급되었는지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죄가 없었음에도 짓눌림을 당한다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 었 다. 우리 는 그들의 사나움이 태 풍처 럽 그 상관들까지 흔들어 놓았단 사실은 새로운 일이 아님을 보게 된다. 특별히 그들이 아무런 보상도 기대 할 수 없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나그네들에게 손상을 줄 때에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위험 속에 뛰어 들고싶지 않았기 때문 이다.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는 이치를 살피거나 공평을 실행하기 위한 생 각을 가질 수가 없으며 사건에 대한 심문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 누子 의 반대도 없이 서로가 충동되어 마치 사람들이 큰 불이 났을 때 몰려 드는 것처럼 모든 일은 혼란 중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처럼 큰 열기 가 급히 처지된 것은 하나님의 목별한 은해에 의한 것이 었다. 상관들이 이 사건에 관하여 조사를 하겠다고 선언하자 즉시 군중은 조용해졌으며 피고들 의 보석(保釋)은 히라되었고 이 사건은 마침내 끝났다.